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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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예전에 김종두 목사님 글은 대구 성서 아카데미에서 한 번 읽어본 일이 있어서 이번에 "기상"에 실렸다 길래 바로 받자마자 읽었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죠... 지난 번 글은 너무 현란하신 기교에 (저의 무식한 표현으로는 “글에 히네루가 너무 심하게 들어가”) 머리가 어찔어찔하니 쥐가날 정도였는데, 이 글은 그래도 그나마 꽤 쉽게 쓰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철학적인 전문용어는 모르는 것이 있었지만, 분위기로 대충 긁으니 무슨 말인지는 알만 했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와 신학에 대한 여러 찌질한 비평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느낌이랄까요?
중요한 내용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과 설교의 특질에 관한 것, 또 하나는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과 설교의 한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읽기 쉽게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초록 만드는 것이 취미라...
1.특질
* 교회력을 형식적인 틀로서만이 아닌,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생각한다.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생각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좀 문제는 있어 보입니다만, 정 목사님께서는 교회력을 교회의 소중한 전통으로서 중요시 하시니까요. )
* 현대 지성인들을 초점으로 한 지성적 설교임에도 현학적, 수사학적 비틀기가 없이 완성도가 높다.(# 제가 무식한 것이겠지만, 김종두 목사님께서는 글을 쓰실 때 현학적 기름기를 좀 빼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가슴 속 깊이 사무칩니다.)
* "그날이 오면"의 52 편 설교가 모두 "본문 - 해석 - 의미" 라는 기본 틀을 시종일관 집중하고 있어서 모범적인 설교의 전형이므로 강력 추천할만하다.
* 말씀을 "절대적 규범" 으로만 받아들임으로써 청중들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황폐화하는 일반적 설교자들의 경향과는 달리, 정 목사는 하나님 존재의 신비와 말씀의 깊이를 구도자처럼 천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예언자들의 신탁과 동일한 경험이 설교자에게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신탁이란 것을 저도 성서 기자들의 원체험이라 생각합니다. 그 원체험이 우리에게도 주어져야만 성서의 심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일테구요.)
*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깊이”를 경험하는 것이고, "깊이" 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 구원행위이자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이며, 마침내 하나님 그 분으로 구체화 된다. (#성서신학적으로도 종말의 완성은 결국 만물이 하나님 일원적으로 수렴해버리는 느낌을 주니까요.)
* 또한 "영성", "영적" 이란 말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 그에게 있어서 말씀을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텍스트에 대해서 정확하게 질문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과 같다. 이건 흡사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 그는 말씀을 단순히 절대적인 규범으로만 받아들이는 해석자들과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존재와 신비와 깊이를 구도자처럼 천착하는 해석자들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
즉, "설교자의 신학적 영성"을 "신학함" 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규범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존 설교자들은 신학을 "신에 대한 완결된 지식체계" 로 표상한다는 의미이다.)
정목사의 "신학함"의 태도는 흡사 하이데거 및 그의 제자 오이겐 핑크가 말하는 것처럼,
"철학이 전통을 통하여 미리 주어져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철학이 수행을 통하여, 주어진 상황 속에서 고유한 현실성을 실현했을 때에만 우리는 과거의 철학 학설들에서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하는 "철학함" 의 개념과도 비견될 수 있다.
* 그의 해석학, 신학은 시종일관 “생명 혹은 구원”을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는 점, 언어와 신학의 손가락을 넘어 원래의 생생한 성서 신앙의 세계를 드러내기(열기)위해 집중한다는 점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기존 신학은 전통에 기대어 성서와 신학 사이의 긴장을 표상적 <#상징적 (?)> 으로 쉽게 처리하여 성서시대의 성서언어체계를 만들어 내었던 신앙인들의 생생한 삶 자체를 상실해버렸다.)
전자를 다시 이야기하면, 구원이 소유적인 측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그 무엇” 으로 이해될 때, 구원을 받았으니, 순종하여 복을 받아야 한다든지, “구원론과 기독교윤리학의 이분법” 이라든지, “중생과 성결의 단계구분” 같은, 그저 신학적 표상에 불과한 이데올로기를 지극히 자명한 것으로 이미 전제하는 설교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이 시대 우리 강단의 모든 오류의 뿌리에 구원론의 오류, 즉 구원을 소유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그의 진단은 그의 설교의 원류이다.
2. 한계
* 비신화화와 성서적 리얼리즘의 문제
그의 신학적 영성은 그의 신학적 입장이 너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려를 갖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인문학적 성서읽기” 는 현대판 토미즘(토마스 아퀴나스 주의)의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주의가 현대 카톨릭에서도 성서 다음의 확고 부동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을 빗대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토미즘도 자세히 공부를 해봐야겠군요...)
또한 그의 성서 읽기는 “신화적인 것의 재해석과 실존(본래)적 의미”를 중요시 하는 해석 구조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불트만의 “비신화화” 를 차용한 것이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기적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을 “주술적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 혹은 “탈역사적인 사람들”, 또한 “유치원 아이 같은 유치한 사람들”로 규정한다.
예를 들자면, “야웨의 불”에서 그는 갈멜산의 기적을 “자연적인 번개 현상” 으로 설명하고, 광야 생활 중에 이스라엘이 먹었던 만나와 메추라기도 역시 자연의 산물로 해석한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에서는 제자들의 변화산 경험을 실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메타포(은유)로 해석한다.
또한 요한복음의 “포도주 이적”을 요한 공동체가 그 목적을 위해서 사도적 전승이 아닌 희랍의 신화를 차용했다는 해석(?)에 이르면 아무래도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요지는, 본문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들 중에서 굳이 이러한 방식의 해석틀을 유일한 진리로 여기는 그의 해석구조가 문제라는 뜻이다.
이성의 빛으로 성서를 합리적인 소통의 틀로 읽어내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그 본문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기적 혹은 상징 없이 인생의 궁극적 관심이자 사태인 종교, 혹은 신앙의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진리 인식과 전달의 방법에는 “경험/이성/직관” 의 세 가지 길이 있다. 특히나 종교적 진리 문제에는 “언어를 통한 직관, 또는 언어화된 체험의 세계에 대한 직관”의 가능성, 곧 “논리적 직관”을 중요하게 인정하기도 한다. 더욱이 인생의 궁극적 관심사로서의 종교적 진리 문제에 있어 “이성”의 틀이란 매우 허약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이데거와 카르납의 논쟁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이데거의 강의에서 사용한 문장이 논리적 형식을 위반하는 사이비 문장이므로 무의미하다고 카르납이 비판했지만, 사실 하이데거가 서 있던 “무의 형이상학”의 선험적, 존재론적 지평이 실증주의 경험론의 형식논리법칙의 틀로서는 애초 해명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카르납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너무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아서 추려보았습니다... 그나마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깨달은 것은 언어의 형식 논리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정목사의 모더니즘적 성서 해석은 첫째, 성서적 리얼리즘의 심각한 훼손이라는 점과, 둘째, 하나님 경험의 지평을 “이성” 이라는 틀 안으로 축소해버렸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깊이의 영성과 넓이의 영성의 문제
설교에 있어서 포퓰리즘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 목사의 “성서 텍스트와 하나님께 집중하라” 는 그의 명제는 너무도 공명이 크며, 그 명제를 표현해 내는 언어적 광휘는 놀랍다.
그럼에도 이러한 명제의 진리성을 다시 검증하는 이유는 이러한 유형의 주장들이 대개 사실적인 진리이기보다는 선언적 진리에 가깝더라는 경험적 방어센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말도 어렵게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경험 상으로 보면 그런 유형의 주장은 실제는 사라진 말만의 진리가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이렇게 표현하면 될것을...)
주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라고 말씀하시지만, 역으로 “열매로 그들을 안다” 라고도 말씀하신다. 이 것은 순환논리이다. (# 순환논리는 두 가지의 논리가 한 가지만으로는 의미를 가지기가 힘들고, 두 가지가 다 말해져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되는 논리인 것 같습니다. 역자 주 ㅋㅋ)필자의 생각에는 후자, 즉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는 명제가 주님의 의도에 가까운 원의미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그런데 그는 순환 논리의 전자 하나만을 떼어 와서 쓰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위의 비유에 잇대어, 애초에 그의 사유 구조가 설교자와 청중을 두고 보았을 때, 청중을 종속적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성서 텍스트가 바르게 선포되기만 한다면...” 이란 가정 자체도 이미 “바른 선포” 라는 어떤 가치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 땅의 어떤 해석도 해석자의 주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이다.(#설교자도 완전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설교자는 청중들의 욕구에 영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통과 섬김을 위하여 청중에게 집중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내가 너희를 젖먹이로 여긴다.”, “내가 어릴 때는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고.” 라고 회고했다. 청중들을 살폈다는 이야기다.)
정 목사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가 일으키는 하나님의 생명운동입니다.” 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인간자유와 책임의 영역”을 현저히 훼손해 버렸다.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그가 말하는 깊이(신비) 자체가 무엇인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런 추상적인 신비이해가 과연 우리 영성의 궁핍함을 채워줄지도 불분명하다.
청중들은 죽음이 내 삶으로 돌입해 오는 실제적인 종말을 훨씬 생생하게 경험한다. 내 삶 자체가 역사이며 종말사건이란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기도하며 회개하라.”는 설교에 응답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청중이다.
그의 설교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가 전혀 없고, 회개라는 말 자체가 실종되고 없다. 그의 해석학에는 눈앞에 구체적이며 생생한 인간이 증발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역사 속에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구체적으로 나타난 “바로 그 하나님”을 신비라는 추상 속으로 유폐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와 형이상학의 향기의 문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는 말씀을 “존재가 행위를 규정한다” 로 해독하는 그의 신학적 영성은 “존재와 행위” 를 주객도식의 이분법으로 읽어내고 있다. 단지 존재를 행위의 상위 개념으로 여길 뿐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존재론적” 혹은 “존재” 개념은 여전히 주객도식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것은 표상 또는 표상체계에만 머무르는,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존재론적” 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주객의 구도가 허물어진, 구별이 사라진 세계를 지시하는 말이다. 하이데거의 무의 형이상학이나, 조주의 무자화두는 바로 존재론적 지평을 지시하고 있다. 이 때 “무(無)” 는 (사생결단 식으로)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뛰어 내리는 것과 같은 ‘단절’ (결심 (?)) 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현상학적 존재론” 혹은 “존재론적 현상학” 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기존의 존재론과 전혀 다른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자신의 표현대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하이데거는 현상이 존재에 종속된 그런 패턴으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단지 하이데거의 의도는 존재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의 차이만을 드러내기 위한 것(?) )
결국 필자는, 존재자 표상(#“하나님” 이라는 이름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을 넘어서서 존재 사유, 즉 진정한 형이상학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정 목사의 인문학적 성서 읽기” 를 소위 토마스 아퀴나스 주의의 현대판 아류로 생각한다. (# 토마스 아퀴나스가 스콜라 철학의 한계 속에서 신학을 풀어낸 것을 빗댄 것일까요?)
인문학의 궁극은 항상 “존재론적 인간론” 을 지시하고 있으므로, 정 목사의 신학의 틀과는 맞지 않다고 본다. 인문학은 인문학만의 길이 있다.
필자는 그의 신학함의 영성이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넘어 진정한 형이상학의 향기로 가득채워지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상당히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와 신학에 대한 여러 찌질한 비평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느낌이랄까요?
중요한 내용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과 설교의 특질에 관한 것, 또 하나는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과 설교의 한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읽기 쉽게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초록 만드는 것이 취미라...
1.특질
* 교회력을 형식적인 틀로서만이 아닌,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생각한다.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생각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좀 문제는 있어 보입니다만, 정 목사님께서는 교회력을 교회의 소중한 전통으로서 중요시 하시니까요. )
* 현대 지성인들을 초점으로 한 지성적 설교임에도 현학적, 수사학적 비틀기가 없이 완성도가 높다.(# 제가 무식한 것이겠지만, 김종두 목사님께서는 글을 쓰실 때 현학적 기름기를 좀 빼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가슴 속 깊이 사무칩니다.)
* "그날이 오면"의 52 편 설교가 모두 "본문 - 해석 - 의미" 라는 기본 틀을 시종일관 집중하고 있어서 모범적인 설교의 전형이므로 강력 추천할만하다.
* 말씀을 "절대적 규범" 으로만 받아들임으로써 청중들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황폐화하는 일반적 설교자들의 경향과는 달리, 정 목사는 하나님 존재의 신비와 말씀의 깊이를 구도자처럼 천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예언자들의 신탁과 동일한 경험이 설교자에게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신탁이란 것을 저도 성서 기자들의 원체험이라 생각합니다. 그 원체험이 우리에게도 주어져야만 성서의 심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일테구요.)
*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깊이”를 경험하는 것이고, "깊이" 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 구원행위이자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이며, 마침내 하나님 그 분으로 구체화 된다. (#성서신학적으로도 종말의 완성은 결국 만물이 하나님 일원적으로 수렴해버리는 느낌을 주니까요.)
* 또한 "영성", "영적" 이란 말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 그에게 있어서 말씀을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텍스트에 대해서 정확하게 질문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과 같다. 이건 흡사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 그는 말씀을 단순히 절대적인 규범으로만 받아들이는 해석자들과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존재와 신비와 깊이를 구도자처럼 천착하는 해석자들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
즉, "설교자의 신학적 영성"을 "신학함" 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규범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존 설교자들은 신학을 "신에 대한 완결된 지식체계" 로 표상한다는 의미이다.)
정목사의 "신학함"의 태도는 흡사 하이데거 및 그의 제자 오이겐 핑크가 말하는 것처럼,
"철학이 전통을 통하여 미리 주어져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철학이 수행을 통하여, 주어진 상황 속에서 고유한 현실성을 실현했을 때에만 우리는 과거의 철학 학설들에서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하는 "철학함" 의 개념과도 비견될 수 있다.
* 그의 해석학, 신학은 시종일관 “생명 혹은 구원”을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는 점, 언어와 신학의 손가락을 넘어 원래의 생생한 성서 신앙의 세계를 드러내기(열기)위해 집중한다는 점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기존 신학은 전통에 기대어 성서와 신학 사이의 긴장을 표상적 <#상징적 (?)> 으로 쉽게 처리하여 성서시대의 성서언어체계를 만들어 내었던 신앙인들의 생생한 삶 자체를 상실해버렸다.)
전자를 다시 이야기하면, 구원이 소유적인 측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그 무엇” 으로 이해될 때, 구원을 받았으니, 순종하여 복을 받아야 한다든지, “구원론과 기독교윤리학의 이분법” 이라든지, “중생과 성결의 단계구분” 같은, 그저 신학적 표상에 불과한 이데올로기를 지극히 자명한 것으로 이미 전제하는 설교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이 시대 우리 강단의 모든 오류의 뿌리에 구원론의 오류, 즉 구원을 소유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그의 진단은 그의 설교의 원류이다.
2. 한계
* 비신화화와 성서적 리얼리즘의 문제
그의 신학적 영성은 그의 신학적 입장이 너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려를 갖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인문학적 성서읽기” 는 현대판 토미즘(토마스 아퀴나스 주의)의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주의가 현대 카톨릭에서도 성서 다음의 확고 부동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을 빗대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토미즘도 자세히 공부를 해봐야겠군요...)
또한 그의 성서 읽기는 “신화적인 것의 재해석과 실존(본래)적 의미”를 중요시 하는 해석 구조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불트만의 “비신화화” 를 차용한 것이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기적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을 “주술적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 혹은 “탈역사적인 사람들”, 또한 “유치원 아이 같은 유치한 사람들”로 규정한다.
예를 들자면, “야웨의 불”에서 그는 갈멜산의 기적을 “자연적인 번개 현상” 으로 설명하고, 광야 생활 중에 이스라엘이 먹었던 만나와 메추라기도 역시 자연의 산물로 해석한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에서는 제자들의 변화산 경험을 실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메타포(은유)로 해석한다.
또한 요한복음의 “포도주 이적”을 요한 공동체가 그 목적을 위해서 사도적 전승이 아닌 희랍의 신화를 차용했다는 해석(?)에 이르면 아무래도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요지는, 본문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들 중에서 굳이 이러한 방식의 해석틀을 유일한 진리로 여기는 그의 해석구조가 문제라는 뜻이다.
이성의 빛으로 성서를 합리적인 소통의 틀로 읽어내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그 본문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기적 혹은 상징 없이 인생의 궁극적 관심이자 사태인 종교, 혹은 신앙의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진리 인식과 전달의 방법에는 “경험/이성/직관” 의 세 가지 길이 있다. 특히나 종교적 진리 문제에는 “언어를 통한 직관, 또는 언어화된 체험의 세계에 대한 직관”의 가능성, 곧 “논리적 직관”을 중요하게 인정하기도 한다. 더욱이 인생의 궁극적 관심사로서의 종교적 진리 문제에 있어 “이성”의 틀이란 매우 허약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이데거와 카르납의 논쟁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이데거의 강의에서 사용한 문장이 논리적 형식을 위반하는 사이비 문장이므로 무의미하다고 카르납이 비판했지만, 사실 하이데거가 서 있던 “무의 형이상학”의 선험적, 존재론적 지평이 실증주의 경험론의 형식논리법칙의 틀로서는 애초 해명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카르납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너무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아서 추려보았습니다... 그나마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깨달은 것은 언어의 형식 논리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정목사의 모더니즘적 성서 해석은 첫째, 성서적 리얼리즘의 심각한 훼손이라는 점과, 둘째, 하나님 경험의 지평을 “이성” 이라는 틀 안으로 축소해버렸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깊이의 영성과 넓이의 영성의 문제
설교에 있어서 포퓰리즘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 목사의 “성서 텍스트와 하나님께 집중하라” 는 그의 명제는 너무도 공명이 크며, 그 명제를 표현해 내는 언어적 광휘는 놀랍다.
그럼에도 이러한 명제의 진리성을 다시 검증하는 이유는 이러한 유형의 주장들이 대개 사실적인 진리이기보다는 선언적 진리에 가깝더라는 경험적 방어센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말도 어렵게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경험 상으로 보면 그런 유형의 주장은 실제는 사라진 말만의 진리가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이렇게 표현하면 될것을...)
주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라고 말씀하시지만, 역으로 “열매로 그들을 안다” 라고도 말씀하신다. 이 것은 순환논리이다. (# 순환논리는 두 가지의 논리가 한 가지만으로는 의미를 가지기가 힘들고, 두 가지가 다 말해져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되는 논리인 것 같습니다. 역자 주 ㅋㅋ)필자의 생각에는 후자, 즉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는 명제가 주님의 의도에 가까운 원의미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그런데 그는 순환 논리의 전자 하나만을 떼어 와서 쓰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위의 비유에 잇대어, 애초에 그의 사유 구조가 설교자와 청중을 두고 보았을 때, 청중을 종속적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성서 텍스트가 바르게 선포되기만 한다면...” 이란 가정 자체도 이미 “바른 선포” 라는 어떤 가치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 땅의 어떤 해석도 해석자의 주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이다.(#설교자도 완전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설교자는 청중들의 욕구에 영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통과 섬김을 위하여 청중에게 집중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내가 너희를 젖먹이로 여긴다.”, “내가 어릴 때는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고.” 라고 회고했다. 청중들을 살폈다는 이야기다.)
정 목사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가 일으키는 하나님의 생명운동입니다.” 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인간자유와 책임의 영역”을 현저히 훼손해 버렸다.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그가 말하는 깊이(신비) 자체가 무엇인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런 추상적인 신비이해가 과연 우리 영성의 궁핍함을 채워줄지도 불분명하다.
청중들은 죽음이 내 삶으로 돌입해 오는 실제적인 종말을 훨씬 생생하게 경험한다. 내 삶 자체가 역사이며 종말사건이란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기도하며 회개하라.”는 설교에 응답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청중이다.
그의 설교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가 전혀 없고, 회개라는 말 자체가 실종되고 없다. 그의 해석학에는 눈앞에 구체적이며 생생한 인간이 증발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역사 속에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구체적으로 나타난 “바로 그 하나님”을 신비라는 추상 속으로 유폐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와 형이상학의 향기의 문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는 말씀을 “존재가 행위를 규정한다” 로 해독하는 그의 신학적 영성은 “존재와 행위” 를 주객도식의 이분법으로 읽어내고 있다. 단지 존재를 행위의 상위 개념으로 여길 뿐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존재론적” 혹은 “존재” 개념은 여전히 주객도식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것은 표상 또는 표상체계에만 머무르는,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존재론적” 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주객의 구도가 허물어진, 구별이 사라진 세계를 지시하는 말이다. 하이데거의 무의 형이상학이나, 조주의 무자화두는 바로 존재론적 지평을 지시하고 있다. 이 때 “무(無)” 는 (사생결단 식으로)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뛰어 내리는 것과 같은 ‘단절’ (결심 (?)) 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현상학적 존재론” 혹은 “존재론적 현상학” 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기존의 존재론과 전혀 다른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자신의 표현대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하이데거는 현상이 존재에 종속된 그런 패턴으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단지 하이데거의 의도는 존재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의 차이만을 드러내기 위한 것(?) )
결국 필자는, 존재자 표상(#“하나님” 이라는 이름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을 넘어서서 존재 사유, 즉 진정한 형이상학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정 목사의 인문학적 성서 읽기” 를 소위 토마스 아퀴나스 주의의 현대판 아류로 생각한다. (# 토마스 아퀴나스가 스콜라 철학의 한계 속에서 신학을 풀어낸 것을 빗댄 것일까요?)
인문학의 궁극은 항상 “존재론적 인간론” 을 지시하고 있으므로, 정 목사의 신학의 틀과는 맞지 않다고 본다. 인문학은 인문학만의 길이 있다.
필자는 그의 신학함의 영성이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넘어 진정한 형이상학의 향기로 가득채워지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참고로, 김종두 목사님은 정용섭 목사님 만큼이나
조용한 목소리를 가지신 분으로서 상당히 신사적이십니다.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하셨기에 사용하시는 용어들이 때로 다소 전문적이기는 해도
그 분의 인격은 본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주관이 또렷한 분이시기도 하고요.
제 고등학교 및 신학교 선배시라 그러는 건 결코 아닙니다 *^*.
정목사님과 김목사님 두 분 다 제게는 소중한 분들이십니다.
사로 간에 좋은 대화와 토론이 오고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첫날처럼 님의 번역 실력이 보통이 아니군요.
영어도 국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를 가지신 분으로서 상당히 신사적이십니다.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하셨기에 사용하시는 용어들이 때로 다소 전문적이기는 해도
그 분의 인격은 본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주관이 또렷한 분이시기도 하고요.
제 고등학교 및 신학교 선배시라 그러는 건 결코 아닙니다 *^*.
정목사님과 김목사님 두 분 다 제게는 소중한 분들이십니다.
사로 간에 좋은 대화와 토론이 오고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첫날처럼 님의 번역 실력이 보통이 아니군요.
영어도 국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글을 올려 주신 첫날처럼님께 감사 합니다
제가 다비안이라서 그런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김목사님의 글은
정목사님 설교의 '특질'과 '한계' 두 단락으로 나누었을때
특질에 대해 깊게 이해했다면
한계는 어느 정도 설명 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목사님 특유의 어려운 철학적 논지들은
거론할 능력이 없고 두가지만 예를 들자면...
비신화화의 경우
'기적이나 상징없이 신앙의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반문은
정목사님의 특질로 썼던
'말씀의 규범화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와 말씀의 깊이로 천착하며
그 깊이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구원, 나라, 마침내
그분으로 구체화 된다'는 표현으로
반문을 덮고도 남음이 있네요
기적이나 상징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 가고자 하면
기적은 표피에 불과한 것이 겠지요
절대자는 우리가 논할 수 없어도
그분의 피조물인 세계와 생명을 보며
어찌 더한 기적을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계와 생명이라는 거대하고 근본적인 기적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해와 달이 순리대로 움직이는 것,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
바다가 바다의 자리에 있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운행하심이며 인간에게 그것은 기적입니다
즉 만나와 메추라기가 그분의 운행이며 기적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스스로 일으키는 하나님의 생명운동'에 대해
정목사님이 '인간의 자유와 책임 영역'을 훼손해 버렸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먼저 쓰셨던 '생명, 구원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라는
정목사님 설교의 특질로 이해하면 풀리지 않을까요
기실, 이런 표현들은 정목사님 말대로
사유의 패러다임 문제인 듯 합니다
방향은 '하나님'으로 같을지 모르나
질문과 사유의 위치가 조금씩 다를 뿐인 듯합니다
제가 다비안이라서 그런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김목사님의 글은
정목사님 설교의 '특질'과 '한계' 두 단락으로 나누었을때
특질에 대해 깊게 이해했다면
한계는 어느 정도 설명 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목사님 특유의 어려운 철학적 논지들은
거론할 능력이 없고 두가지만 예를 들자면...
비신화화의 경우
'기적이나 상징없이 신앙의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라는 반문은
정목사님의 특질로 썼던
'말씀의 규범화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와 말씀의 깊이로 천착하며
그 깊이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구원, 나라, 마침내
그분으로 구체화 된다'는 표현으로
반문을 덮고도 남음이 있네요
기적이나 상징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 가고자 하면
기적은 표피에 불과한 것이 겠지요
절대자는 우리가 논할 수 없어도
그분의 피조물인 세계와 생명을 보며
어찌 더한 기적을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계와 생명이라는 거대하고 근본적인 기적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해와 달이 순리대로 움직이는 것,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
바다가 바다의 자리에 있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운행하심이며 인간에게 그것은 기적입니다
즉 만나와 메추라기가 그분의 운행이며 기적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스스로 일으키는 하나님의 생명운동'에 대해
정목사님이 '인간의 자유와 책임 영역'을 훼손해 버렸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먼저 쓰셨던 '생명, 구원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라는
정목사님 설교의 특질로 이해하면 풀리지 않을까요
기실, 이런 표현들은 정목사님 말대로
사유의 패러다임 문제인 듯 합니다
방향은 '하나님'으로 같을지 모르나
질문과 사유의 위치가 조금씩 다를 뿐인 듯합니다
시와 그림 님 날카로운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이 글을 적고는 한 번 이 글에 대한 비평을 시도해보려고 했는데요, 시와 그림님이 다 짚어버리신 거 같아요... 쩝쩝쩝...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김종두 목사님의 지적이 아주 예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조금은 "자가당착"이 있음도 느꼈거든요... 기적 혹은 상징이 사실이라는 점에 대해서 강조를 하시는 것 같으면서도, 다시 읽어보면 자신도 정작 "신비를 표현하는 신앙적 어법" 의 문제로 귀결해버린다든가, 포퓰리즘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다가도 청중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는 이야기에서는 뭔가 청중과의 타협의 냄새가 나기도 하구요... (뒤에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 라는 문제도 마치 부흥회에서 눈물 콧물 다 빼면서 울고 불고 하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저 뿐일까요?) 그리고 성경 말씀이 그 원의미보다는 철학의 "순환논리" 를 설명하는 도구로 쓰인 점도 약간은 의아했습니다... 지금 퇴근해야 되어서 다시 쓰겠습니다...
첫날처럼님의 요약본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좀 짚었으면 하는 부분이
'*깊이의 영성과 넓이의 영성의 문제' 두번째 단락에서
그럼에도 이러한 명제의 진리성을 다시 검증하는 이유는 이러한 유형의 주장들이 대개 사실적인 진리이기보다는 선언적 진리에 가깝더라는 경험적 방어센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 (...해설부..)인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칭 '진리'가 사실이어서 진리라고 하기보다는
가칭 '진리'가 진리라고 확정해서 말을하기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칭'진리가 진리에 이르기위해서는
그 명제의 증명이 수반되어야하나
그런 과정이 없이 확정된 결정으로만 언급된다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좀 짚었으면 하는 부분이
'*깊이의 영성과 넓이의 영성의 문제' 두번째 단락에서
그럼에도 이러한 명제의 진리성을 다시 검증하는 이유는 이러한 유형의 주장들이 대개 사실적인 진리이기보다는 선언적 진리에 가깝더라는 경험적 방어센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 (...해설부..)인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칭 '진리'가 사실이어서 진리라고 하기보다는
가칭 '진리'가 진리라고 확정해서 말을하기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칭'진리가 진리에 이르기위해서는
그 명제의 증명이 수반되어야하나
그런 과정이 없이 확정된 결정으로만 언급된다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첫날처럼 님은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좋았겠군요.
요약의 귀신이네요.
김종두 목사의 글을 읽고,
지난번의 글도 포함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철학적 사유로 신학을 재단하려고 했다는 것이에요.
철학적 사유는 날카로운데
신학적 사유는 평범한 데서 오는 불균형이지요.
아마 본인은 터무니 없다고 하겠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군요.
이런 현상은 운동권에 속한 목사들에게도 나타난답니다.
사회정의는 날카롭게 부르짖는데,
목회 현장에서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신학이 없는 데서 일어나는 행동주의의 한계이지요.
제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아무개 목사님은 운동권의 대부인데,
그분이 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재직할 때
여직원들을 비정규직으로 바꿔서 수익이 많이 났다는 걸
무용담처럼 자랑하시더군요.
군사독재 물러가라고 외치는 이에게서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같은 운동권 목사(?)로서 가슴이 찢어지더군요.
김종두 박사나 정인교 박사나 모두 내 신학대학교 후배인데,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독선적인 건지,
그들의 내공이 부족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요약의 귀신이네요.
김종두 목사의 글을 읽고,
지난번의 글도 포함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철학적 사유로 신학을 재단하려고 했다는 것이에요.
철학적 사유는 날카로운데
신학적 사유는 평범한 데서 오는 불균형이지요.
아마 본인은 터무니 없다고 하겠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군요.
이런 현상은 운동권에 속한 목사들에게도 나타난답니다.
사회정의는 날카롭게 부르짖는데,
목회 현장에서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신학이 없는 데서 일어나는 행동주의의 한계이지요.
제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아무개 목사님은 운동권의 대부인데,
그분이 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재직할 때
여직원들을 비정규직으로 바꿔서 수익이 많이 났다는 걸
무용담처럼 자랑하시더군요.
군사독재 물러가라고 외치는 이에게서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같은 운동권 목사(?)로서 가슴이 찢어지더군요.
김종두 박사나 정인교 박사나 모두 내 신학대학교 후배인데,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독선적인 건지,
그들의 내공이 부족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한참 후배인 저 또한 이해되지 않는부분이 있네요.
솔직히 '특질'단락의 평 또한 지극히 평범하다고밖에 다가오지 않구요.
그 느낌마저 '한계'에 대한 평을 읽고 더 추락해버렸네요.
정용섭 목사님의 성서해석법이 모더니즘적 성서해석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핀에 의해 극단적 모더니스트 혹은 파괴적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절하되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과 비신화화작업이 과연 정용섭 목사님의
성서해석에 있어 어느정도의 자리를 차지하는지,
또한 그것이 신학적해석학의 역사적고찰에 있어 살펴보아야만할 그 이상의 것이었는지
의문이구요. 목사님의 설교문을 모두 접해보진 못했지만, 그 닫혀진 해석학적 구조에 대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본인과 필자가 어긋나게 된 것은 어떤 전이해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궁금하네요. 이러한 판단이 다시 포퓰리즘에 대한 호소로 돌아가는 것 또한 의아하기만 합니다.
성서적 리얼리즘의 훼손과 하나님 경험의 지평이 이성으로 제한되었다는 평 또한 이해가
되지않네요.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성서적 리얼리즘이 무엇이길래, 야훼의 불과 만나와 메추라기
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될른지요. '성서적'이라는 표현 뒤에 숨겨진 전제가 궁금하네요.
이러한 실재관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실 것 같기에 더욱더 의아하기만 합니다.
해석학의 기본으로 해석자의 주관을 지목하신 부분 역시 매 설교 끝자락에 등장하는
여백을 못 느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가 일으키는 하나님의 생명운동입니다.” 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인간자유와 책임의 영역”을 현저히 훼손해 버렸다.]
=> 이 부분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학적 사유의 평범함이 부단히 드러난 부분같습니다.
구원의 배타성에 대한 '신학함'의 부재. 떄문에 추상적 신비로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닌가싶습니다.
필자의 표현처럼 이러한 영성의 궁핍함을 채워줄 방법은 '인문학적 방법'이 아닌 형이상학적
방법으로 과연 가능할까?
결론적으로 위의 글이 요약문이라는 사실을 감안함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하이데거와 존재와 존재자의 고찰, 그의 순환론적 구조의 이해가
정용섭목사님의 설교비평의 적용에 있어 적절치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분명 제가 무식한 탓이겠지만요^^; 제가 목사님의 글에서 느끼는 존재와 언어에 대한
이해와 필자의 판단이 다르다고 생각해서요)
인문학과 이성에 대한 고찰 역시 판넨베르크의 영향을 받으신 목사님의 신학적 토대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고요.
'철학적 사유와 신학적사유의 불균형'
10월 오프모임 식사자리에서 도둑귀로 들을 수 있었던 목사님의 '교양인의 눈'과
행위로써의 신학함이 떠오릅니다. 내일이 즐거운 소풍날이라는 것도요~ 아자!^^
솔직히 '특질'단락의 평 또한 지극히 평범하다고밖에 다가오지 않구요.
그 느낌마저 '한계'에 대한 평을 읽고 더 추락해버렸네요.
정용섭 목사님의 성서해석법이 모더니즘적 성서해석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핀에 의해 극단적 모더니스트 혹은 파괴적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절하되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과 비신화화작업이 과연 정용섭 목사님의
성서해석에 있어 어느정도의 자리를 차지하는지,
또한 그것이 신학적해석학의 역사적고찰에 있어 살펴보아야만할 그 이상의 것이었는지
의문이구요. 목사님의 설교문을 모두 접해보진 못했지만, 그 닫혀진 해석학적 구조에 대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본인과 필자가 어긋나게 된 것은 어떤 전이해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궁금하네요. 이러한 판단이 다시 포퓰리즘에 대한 호소로 돌아가는 것 또한 의아하기만 합니다.
성서적 리얼리즘의 훼손과 하나님 경험의 지평이 이성으로 제한되었다는 평 또한 이해가
되지않네요.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성서적 리얼리즘이 무엇이길래, 야훼의 불과 만나와 메추라기
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될른지요. '성서적'이라는 표현 뒤에 숨겨진 전제가 궁금하네요.
이러한 실재관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실 것 같기에 더욱더 의아하기만 합니다.
해석학의 기본으로 해석자의 주관을 지목하신 부분 역시 매 설교 끝자락에 등장하는
여백을 못 느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가 일으키는 하나님의 생명운동입니다.” 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인간자유와 책임의 영역”을 현저히 훼손해 버렸다.]
=> 이 부분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학적 사유의 평범함이 부단히 드러난 부분같습니다.
구원의 배타성에 대한 '신학함'의 부재. 떄문에 추상적 신비로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닌가싶습니다.
필자의 표현처럼 이러한 영성의 궁핍함을 채워줄 방법은 '인문학적 방법'이 아닌 형이상학적
방법으로 과연 가능할까?
결론적으로 위의 글이 요약문이라는 사실을 감안함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하이데거와 존재와 존재자의 고찰, 그의 순환론적 구조의 이해가
정용섭목사님의 설교비평의 적용에 있어 적절치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분명 제가 무식한 탓이겠지만요^^; 제가 목사님의 글에서 느끼는 존재와 언어에 대한
이해와 필자의 판단이 다르다고 생각해서요)
인문학과 이성에 대한 고찰 역시 판넨베르크의 영향을 받으신 목사님의 신학적 토대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고요.
'철학적 사유와 신학적사유의 불균형'
10월 오프모임 식사자리에서 도둑귀로 들을 수 있었던 목사님의 '교양인의 눈'과
행위로써의 신학함이 떠오릅니다. 내일이 즐거운 소풍날이라는 것도요~ 아자!^^
말도 어렵게도 쓰시네요. 이분 목회 하시나요? 현장 목회 절대 못하실 거 같네요....
정목사님의 성서 해석 비판에 대해 첫째, 성서적 리얼리즘의 심각한 훼손이라는 점과,
둘째, 하나님 경험의 지평을 “이성” 이라는 틀 안으로 축소해버렸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데 전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전 오히려 목사님의 방식을 통해 성경의 사건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거든요. 이건 어떻게 설명 할 수 있는거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인간자유와 책임의 영역”을 현저히 훼손해 버렸다는 주장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전 인간 책임보단 더 하나님께 몰입하고 집중하는 자세로 변화된걸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그가 말하는 깊이(신비) 자체가 무엇인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런 추상적인 신비이해가 과연 우리 영성의 궁핍함을 채워줄지도 불분명하다."라는 말을 보면 그가 과연 포용력있는 무언가 수용해 보려는 이해라는 영역이 마음에 있는 분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냥 제가 보는 바로는 "난 경험 못해서 배 아프다는!!"라는 앙탈 같습니다.
하나님 실존이 신비라는 추상의 유폐라니요? 어불 성설입니다.
정목사님 설교를 얼마나 정확히 보셨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정목사님이 존재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태도 즉, 말뿐이라는 비판을 하는데 어이 상실 입니다. ㅡㅡ;
결국 정목사님의 성서읽기와 해석이 인문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인데...
이 비판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분의 글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포용성을 상실한 사람이 자기 아는 모든 어려운 단어를 동원해 유명해 진 사람을
한번 찔러 보자는 것으로 밖에 안보여집니다.(제가 너무 흥분했나요?)
밥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먹던 숟가락으로 먹던 손으로 먹던
삽으로 먹으려 하던 엄밀히 따지면 그건 개인의 문제 아닌가요?
전 아내가 주는 대로(?) 도구를 사용해 집어 먹습니다.
먹다 흘리면 손으로 집기도 하지요. 삽을 준다해도 그런가 보다 하겠지요.
대한민국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자세가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목사님은 음식을 보고 수저통에서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집어서 먹으라는 것인데...
(적어도 저에겐 정목사님을 보고 '열림'에 대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럼 형이 상학의 향기로 채워지길 바란다는 것은 결국 정목사님은 개념 없는 설교와 신학을 주장하고 있다는 욕설로 보여집니다. 또 다른 자기의 도구를 줄테니 그걸 쓰라는거 아닙니까?
그건 먹을게 많은 사람들에게나 필요한거지 당장 하루의 곤궁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그런 사유의 도구가 무슨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그런 철학적 사유가 더 냉랭하고 하나님 경험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정목사님의 성서 해석 비판에 대해 첫째, 성서적 리얼리즘의 심각한 훼손이라는 점과,
둘째, 하나님 경험의 지평을 “이성” 이라는 틀 안으로 축소해버렸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데 전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전 오히려 목사님의 방식을 통해 성경의 사건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거든요. 이건 어떻게 설명 할 수 있는거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인간자유와 책임의 영역”을 현저히 훼손해 버렸다는 주장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전 인간 책임보단 더 하나님께 몰입하고 집중하는 자세로 변화된걸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그가 말하는 깊이(신비) 자체가 무엇인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런 추상적인 신비이해가 과연 우리 영성의 궁핍함을 채워줄지도 불분명하다."라는 말을 보면 그가 과연 포용력있는 무언가 수용해 보려는 이해라는 영역이 마음에 있는 분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냥 제가 보는 바로는 "난 경험 못해서 배 아프다는!!"라는 앙탈 같습니다.
하나님 실존이 신비라는 추상의 유폐라니요? 어불 성설입니다.
정목사님 설교를 얼마나 정확히 보셨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정목사님이 존재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태도 즉, 말뿐이라는 비판을 하는데 어이 상실 입니다. ㅡㅡ;
결국 정목사님의 성서읽기와 해석이 인문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인데...
이 비판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분의 글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포용성을 상실한 사람이 자기 아는 모든 어려운 단어를 동원해 유명해 진 사람을
한번 찔러 보자는 것으로 밖에 안보여집니다.(제가 너무 흥분했나요?)
밥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먹던 숟가락으로 먹던 손으로 먹던
삽으로 먹으려 하던 엄밀히 따지면 그건 개인의 문제 아닌가요?
전 아내가 주는 대로(?) 도구를 사용해 집어 먹습니다.
먹다 흘리면 손으로 집기도 하지요. 삽을 준다해도 그런가 보다 하겠지요.
대한민국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자세가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목사님은 음식을 보고 수저통에서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집어서 먹으라는 것인데...
(적어도 저에겐 정목사님을 보고 '열림'에 대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럼 형이 상학의 향기로 채워지길 바란다는 것은 결국 정목사님은 개념 없는 설교와 신학을 주장하고 있다는 욕설로 보여집니다. 또 다른 자기의 도구를 줄테니 그걸 쓰라는거 아닙니까?
그건 먹을게 많은 사람들에게나 필요한거지 당장 하루의 곤궁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그런 사유의 도구가 무슨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그런 철학적 사유가 더 냉랭하고 하나님 경험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제대로 정리는 했는지, 원 글을 쓰신 목사님의 논지를 왜곡한 것은 아닌지 조심이 되기도 합니다만,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김 목사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읽히면서도 그 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너무 눈 부시고 장광설이라 좀 기름기를 빼본 겁니다...
지난 번 글에서는 제가 흥분을 좀 많이 했었는데요...
정목사님의 설교 비평이 진리 논쟁이라기 보다는 기독교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가 강하다...
그의 설교는 중산층에 속하는 먹고 살만한 교양있는 신앙인들의 삶의 모순을, 즉 프락시스는 없는 삶의 실제와 그들이 가진 고상한 "허위의식" 사이의 괴리감을 심리적으로 자위해주고 합리화 해주는 성격이 강하다...
그런 논지였던 것 같습니다... 더 자세히는 기억이 안나구요... 그 때 댓글 달아놓은 것을 한 번 봐야겠군요...
이 글에서 김 목사님의 철학함에 빗대어 말씀하신 "신학함" 의 개념은 정말 "멋져부러!!!"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신학을 완결된 신적 지식 체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적으로 천착하는 모습을 정 목사님의 "신학함"으로 묘사한 것은 압권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성서 원저자의 "신탁" 체험의 영역까지 넘봐야 한다는 이야기도 정말 깊이 와닿구요... 시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시를 쓴 사람의 "시심" 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구원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영역이란 것을 짚으신 것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찌릿 찌릿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 가 아니라 "내가 구원 속으로 들어왔다" 인 것을...
비신화화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공감이 갑니다. 신화적 언어 구조 속에서만 드러나는 의미의 영역이 탈신화화하면서 그 껍데기만 벗긴다는 것이, 속살까지 같이 벗겨져버리는 그런 오류가 드러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나일 강이 핏 빛으로 변했다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과학적으로는 적조현상과 비슷한 것이라는 이야기와 모세가 시내산에서 불타지 않는 떨기를 보았는데, 그 불타지 않는 떨기 현상이 "성 엘모의 불" 현상이라는 것은 둘 다가 같은 맥락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전자는 저주와 재앙이라는 면을 설명하는 의미에서 적조현상이라고 하면 아주 실제적인 표현이 되어버리지만, 하나님의 현존을 설명하는 불타지 않는 떨기에 대한 설명이 예를 들어서 "성 엘모의 불" 현상으로만 이야기되어 버리면, 어쩌면 하나님의 현존 자체가 우연적 현상으로 상대화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우려가 생기기도 합니다...
손님이 와서 조금 있다가 다시 써야 겠어요...
지난 번 글에서는 제가 흥분을 좀 많이 했었는데요...
정목사님의 설교 비평이 진리 논쟁이라기 보다는 기독교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가 강하다...
그의 설교는 중산층에 속하는 먹고 살만한 교양있는 신앙인들의 삶의 모순을, 즉 프락시스는 없는 삶의 실제와 그들이 가진 고상한 "허위의식" 사이의 괴리감을 심리적으로 자위해주고 합리화 해주는 성격이 강하다...
그런 논지였던 것 같습니다... 더 자세히는 기억이 안나구요... 그 때 댓글 달아놓은 것을 한 번 봐야겠군요...
이 글에서 김 목사님의 철학함에 빗대어 말씀하신 "신학함" 의 개념은 정말 "멋져부러!!!"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신학을 완결된 신적 지식 체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적으로 천착하는 모습을 정 목사님의 "신학함"으로 묘사한 것은 압권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성서 원저자의 "신탁" 체험의 영역까지 넘봐야 한다는 이야기도 정말 깊이 와닿구요... 시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시를 쓴 사람의 "시심" 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구원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영역이란 것을 짚으신 것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찌릿 찌릿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 가 아니라 "내가 구원 속으로 들어왔다" 인 것을...
비신화화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공감이 갑니다. 신화적 언어 구조 속에서만 드러나는 의미의 영역이 탈신화화하면서 그 껍데기만 벗긴다는 것이, 속살까지 같이 벗겨져버리는 그런 오류가 드러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나일 강이 핏 빛으로 변했다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과학적으로는 적조현상과 비슷한 것이라는 이야기와 모세가 시내산에서 불타지 않는 떨기를 보았는데, 그 불타지 않는 떨기 현상이 "성 엘모의 불" 현상이라는 것은 둘 다가 같은 맥락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전자는 저주와 재앙이라는 면을 설명하는 의미에서 적조현상이라고 하면 아주 실제적인 표현이 되어버리지만, 하나님의 현존을 설명하는 불타지 않는 떨기에 대한 설명이 예를 들어서 "성 엘모의 불" 현상으로만 이야기되어 버리면, 어쩌면 하나님의 현존 자체가 우연적 현상으로 상대화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우려가 생기기도 합니다...
손님이 와서 조금 있다가 다시 써야 겠어요...
말하자면, "불타지 않는 떨기" 는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언어 논리를 넘어서 있는 상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거든요...
또한 요한복음의 “포도주 이적”을 요한 공동체가 그 목적을 위해서 사도적 전승이 아닌 희랍의 신화를 차용했다는 정 목사님의 해석(?)에 대한 김 목사님의 비판도 새겨들을 부분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불타지 않는 떨기, 포도주 기적 사건의 핵심적 의미를 밝히신 설교 내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와 "열매를 보아 그 사람을 안다" 라는 말을 철학적 명제로 파악해서 순환논리의 예로 말씀 하시는 것은 좀 이해가 안됩니다. 이 말씀은 애초에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 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쩌면 철학자와 신학자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철학적으로는 순환 논리의 반 쪽 만으로는 "참" 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와 "열매를 보아서 그 사람(나무)를 안다" 라는 표현은 오히려 시적 표현에 가깝고, 그 둘은 어쩌면 순환논리적으로는 매칭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지평에서 들려오는 소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신앙 고백적인 언어란 말입니다...
환자 한 명 보고 다시 쓸께요 ㅋㅋㅋ...
또한 요한복음의 “포도주 이적”을 요한 공동체가 그 목적을 위해서 사도적 전승이 아닌 희랍의 신화를 차용했다는 정 목사님의 해석(?)에 대한 김 목사님의 비판도 새겨들을 부분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불타지 않는 떨기, 포도주 기적 사건의 핵심적 의미를 밝히신 설교 내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와 "열매를 보아 그 사람을 안다" 라는 말을 철학적 명제로 파악해서 순환논리의 예로 말씀 하시는 것은 좀 이해가 안됩니다. 이 말씀은 애초에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 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쩌면 철학자와 신학자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철학적으로는 순환 논리의 반 쪽 만으로는 "참" 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와 "열매를 보아서 그 사람(나무)를 안다" 라는 표현은 오히려 시적 표현에 가깝고, 그 둘은 어쩌면 순환논리적으로는 매칭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지평에서 들려오는 소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신앙 고백적인 언어란 말입니다...
환자 한 명 보고 다시 쓸께요 ㅋㅋㅋ...
또한 성서의 두 구절을 순환논리를 설명하는 재료로 사용하시더니, 뜬금없이 설교자와 청중의 문제로 비약하는 것도 좀 생뚱맞습니다... 결국 설교자가 있어야 청중이 있고, 청중이 있어야 설교자가 있을 수 있다는 그런 의도로 청중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표현하신 것인 줄은 알겠습니다만...
포퓰리즘이 아닌, 김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청중에 대한 집중" 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설교를 어렵게 하지 말고 예화를 많이 들어서 알아듣기 쉽게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설교자가 혼자 독백하듯 하지 말고 둘러앉아서 토론식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는 식으로 하라는 이야긴지,(실제로 그렇게 하는 곳도 있답니다.)아니면 청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런 실질적인 설교를 하라는 것인지...
그러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젖먹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라든가, 사랑장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하는 구절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는 증거라고 제시하신 것은 영 엉뚱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아직도 젖먹이 상태인 것을 한탄하면서 한 이야기였고, 어렸을 때 어린이의 말을 했다는 것은 지금의 성숙한 깨달음의 상태와 비교해서 옛날에 자신이 그랬다는 것을, 또한 멀지 않은 미래에 더 성숙한 상태에서는 지금이 그렇게 여겨질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뒤에 글을 읽어가면 김 목사님의 속내가 드러나는데, 요는 정 목사님의 설교는 뜬구름 잡는 느낌이란 것입니다. 청중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살라는 등등의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그런 류의 시어머니 잔소리 같은 처세훈을 배격하시는 편이죠...)
정 목사는 회개하라는 설교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인간이 증발하고 없다... 이 두 문장 사이에도 엄청난 비약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느끼기에 정 목사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구체적인 인간을 지향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육의 방향에서 영의 방향으로 유턴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정 목사님의 설교는 항상 회개(메타노이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앞의 댓글에서도 말했듯이 김 목사님은 회개라는 것을 그냥 울고불고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결국 포퓰리즘을 경계하는듯 하다가 결국은 포퓰리즘으로 함몰되어버리는듯 한 태도를 보이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 목사님의 설교와 신학은 역사 속에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구체적으로 나타난 “바로 그 하나님”을 신비라는 추상 속으로 유폐시켜 버렸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확정적으로 말하여지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강단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김 목사님의 생각대로라면 그런 설교자, 그런 강단은 칭찬을 받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명확히 말하여지고 단정 지어 지는 곳에 설교자의 교만이 나타나고, 우상적 관념이 횡행하고, 목회자의 전횡과 교회의 타락이 나타나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하실지...
저는 정 목사님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최소한으로만 말하려는 그 태도, 설교 후에 설교자는 뒤로 물러나면서 하나님 자신이 드러나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그런 태도는 "무책임" 이 아닌 "겸손"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어떤 분도 말씀하셨듯이, 정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깨달아가게 된 저자신은 김 목사님께서 보실 때는 의아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너도 추상적인 관념을 하나님을 아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어' 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지막으로는 존재와 현상의 차등을 인정하지 않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입장에서, 존재와 현상의 차등적 순서를 말하는 정 목사는 존재론이니, 인문학이니 말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끝을 맺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하이데거를 아는 척 하지 마라는 느낌으로도 들리구요...
마지막 단락은 생각을 좀 해보고 댓글을 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워서...
포퓰리즘이 아닌, 김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청중에 대한 집중" 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설교를 어렵게 하지 말고 예화를 많이 들어서 알아듣기 쉽게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설교자가 혼자 독백하듯 하지 말고 둘러앉아서 토론식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는 식으로 하라는 이야긴지,(실제로 그렇게 하는 곳도 있답니다.)아니면 청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런 실질적인 설교를 하라는 것인지...
그러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젖먹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라든가, 사랑장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하는 구절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는 증거라고 제시하신 것은 영 엉뚱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아직도 젖먹이 상태인 것을 한탄하면서 한 이야기였고, 어렸을 때 어린이의 말을 했다는 것은 지금의 성숙한 깨달음의 상태와 비교해서 옛날에 자신이 그랬다는 것을, 또한 멀지 않은 미래에 더 성숙한 상태에서는 지금이 그렇게 여겨질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뒤에 글을 읽어가면 김 목사님의 속내가 드러나는데, 요는 정 목사님의 설교는 뜬구름 잡는 느낌이란 것입니다. 청중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살라는 등등의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그런 류의 시어머니 잔소리 같은 처세훈을 배격하시는 편이죠...)
정 목사는 회개하라는 설교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인간이 증발하고 없다... 이 두 문장 사이에도 엄청난 비약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느끼기에 정 목사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구체적인 인간을 지향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육의 방향에서 영의 방향으로 유턴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정 목사님의 설교는 항상 회개(메타노이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앞의 댓글에서도 말했듯이 김 목사님은 회개라는 것을 그냥 울고불고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결국 포퓰리즘을 경계하는듯 하다가 결국은 포퓰리즘으로 함몰되어버리는듯 한 태도를 보이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 목사님의 설교와 신학은 역사 속에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구체적으로 나타난 “바로 그 하나님”을 신비라는 추상 속으로 유폐시켜 버렸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확정적으로 말하여지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강단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김 목사님의 생각대로라면 그런 설교자, 그런 강단은 칭찬을 받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명확히 말하여지고 단정 지어 지는 곳에 설교자의 교만이 나타나고, 우상적 관념이 횡행하고, 목회자의 전횡과 교회의 타락이 나타나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하실지...
저는 정 목사님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최소한으로만 말하려는 그 태도, 설교 후에 설교자는 뒤로 물러나면서 하나님 자신이 드러나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그런 태도는 "무책임" 이 아닌 "겸손"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어떤 분도 말씀하셨듯이, 정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깨달아가게 된 저자신은 김 목사님께서 보실 때는 의아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너도 추상적인 관념을 하나님을 아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어' 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지막으로는 존재와 현상의 차등을 인정하지 않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입장에서, 존재와 현상의 차등적 순서를 말하는 정 목사는 존재론이니, 인문학이니 말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끝을 맺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하이데거를 아는 척 하지 마라는 느낌으로도 들리구요...
마지막 단락은 생각을 좀 해보고 댓글을 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워서...
김 목사님은 정 목사님이 존재자 표상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제가 아는 형을 통해서도 들어본 적이 있거든요... 진보적인 교회에 다니시는 형인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정용섭 목사님 설교 참 좋은데, 목사님은 아직도 "하나님" 을 버리지는 못하셨더구나..."
저는 그 형의 의도는 알았습니다... 김종두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대상(object), 또는 작업 가설로 이야기 되어서는 그 역동적 리얼리티가 훼손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겠죠... 일반 교회에서 하나님 이야기하는 방식이 대부분 이런 방식이니까요... 이런 방식에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버리죠...
그렇지만 "존재와 존재자(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 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이야기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서도 정 목사님은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앞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순서가 달라져버리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말한 형의 경우... "존재와 존재자"의 관점에서 당연히 말해져야할 하나님마저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면 "기독교인" 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김종두 목사님의 스탠스가 굉장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말씀의 투로 보면, 예전에 사회운동을 쎄게 하신 분 같기도 하고... 철학을 신학 보다 우위에 두고 목회를 하시는 분 같기도 하고... 설교를 한 번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드네요... (실제로 우리 교회에 출석하셨던 철학 교수님이 기독교 지성이란 이름을 걸고 소책자를 쓰시는 것을 예전에 읽어본 일이 있는데, 좀 답답하더군요...)
철학과 신학의 관계... 이건 흡사 과학과 의학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이 바탕이 되어서 의학이 나오는 것이지만, 사람을 낫게 하는 것은 의학이죠...
"정용섭 목사님 설교 참 좋은데, 목사님은 아직도 "하나님" 을 버리지는 못하셨더구나..."
저는 그 형의 의도는 알았습니다... 김종두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대상(object), 또는 작업 가설로 이야기 되어서는 그 역동적 리얼리티가 훼손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겠죠... 일반 교회에서 하나님 이야기하는 방식이 대부분 이런 방식이니까요... 이런 방식에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버리죠...
그렇지만 "존재와 존재자(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 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이야기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서도 정 목사님은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앞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순서가 달라져버리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말한 형의 경우... "존재와 존재자"의 관점에서 당연히 말해져야할 하나님마저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면 "기독교인" 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김종두 목사님의 스탠스가 굉장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말씀의 투로 보면, 예전에 사회운동을 쎄게 하신 분 같기도 하고... 철학을 신학 보다 우위에 두고 목회를 하시는 분 같기도 하고... 설교를 한 번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드네요... (실제로 우리 교회에 출석하셨던 철학 교수님이 기독교 지성이란 이름을 걸고 소책자를 쓰시는 것을 예전에 읽어본 일이 있는데, 좀 답답하더군요...)
철학과 신학의 관계... 이건 흡사 과학과 의학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이 바탕이 되어서 의학이 나오는 것이지만, 사람을 낫게 하는 것은 의학이죠...
첫날처럼 님,
요즘 환자 손님들이 뜸한가봐요. ㅎㅎ
김종두 목사님과 나 사이에 놓인 틈은
그가 철학을 하는 것만큼 신학을 하지 못한다는 것과
내가 신학을 하는 것만큼 철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일지 모르오.
그 불균형의 문제가 어느쪽이 더 심각한가에 따라서
각각 주장하는 바의 정당성이 평가될 수 있을 거요.
이걸 누가 판단해줄 수 있는 건 아니고,
서로가 직접 대화를 해야 하는데,
서로 각자의 삶이 있고,
서로 고집이 있어서 대화도 잘 안 되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 밖에 없소이다.
철학자들은 신학을 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옛날에는 신학이 철학을 시녀로 다룬 적도 있지만 말이오.
내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은
탈신화화, 주객도식, 이성도구주의에 내가 빠져 있다는 지적이오.
그것 참.
나는 신학의 단초인 계시론에 근거해서
이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투쟁하고 있는데 말이오.
그 계시론을 철학자들은 잘 이해를 못하거든요.
밤에 불을 받았다는 정도로 보는데, 아니걸랑요.
오히려 하이덱거의 '존재'에 개념에 가까운 거라는 사실을
철학자들이 인정할란가 모르겠소이다.
다른 때 사용했던 상징적 언어로 설명할께요.
우리의 실존은 지금 무한한 크기의 퍼즐에서
한 한 조각만 붙들고 있는 형국이오.
어떤 사람은 두 장을 가질고 있고,
세 장도 가능할 거요.
열장도 되겠지.
각각의 퍼즐 조각이 서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전혀 이웃하지 않는 것들이라오.
그 조각이 우리 머리 위에서 한 장씩 떨어지고 있어요.
그걸 우리는 계속 줒어요.
가짜도 있겠지.
그런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는 웬만한 눈으로는 불가능해요.
사이비 교주들은 100장 정도의 가짜 퍼즐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민중들은 거기에 속기도 하고요.
이런 이야기, 재미 있소, 없소?
잘 따라오겠지요.
무슨 대답이 나올지 이미 잘 알고 있을 거요.
어떤 사람은 퍼줄 조각에 속다보니
모든 조각이 가짜라고 눈길도 주지 않아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이겠소?
상황은 똑같소.
우리가 갖고 있는 퍼줄로 완전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는 거요.
1만장을 모은들 그게 무슨 대수겠소.
다만 우리는 이미 퍼줄의 전체 그림을 선취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이라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그림은 아니오.
거울로 보는 그림이오.
지금도 퍼즐 조각은 계속 떨어지고 있소이다.
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진짜인지 아닌지 잘 살피면서
전체 그림을 맞춰가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 관심에 떨어질 거요.
전체 그림은 우리에게 아직 실증이 되지 않았으니 신비고,
계속 떨어지는 조각은 역사요.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체 그림의 분명한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절대 기쁨에 들어갈 거요.
그게 바로 기독교인이 아니겠소?
첫날처럼 님이 하두 열심으로 글을 이어가기에
나도 응원하는 기분으로 한 마디 거들었소이다.
수고.
요즘 환자 손님들이 뜸한가봐요. ㅎㅎ
김종두 목사님과 나 사이에 놓인 틈은
그가 철학을 하는 것만큼 신학을 하지 못한다는 것과
내가 신학을 하는 것만큼 철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일지 모르오.
그 불균형의 문제가 어느쪽이 더 심각한가에 따라서
각각 주장하는 바의 정당성이 평가될 수 있을 거요.
이걸 누가 판단해줄 수 있는 건 아니고,
서로가 직접 대화를 해야 하는데,
서로 각자의 삶이 있고,
서로 고집이 있어서 대화도 잘 안 되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 밖에 없소이다.
철학자들은 신학을 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옛날에는 신학이 철학을 시녀로 다룬 적도 있지만 말이오.
내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은
탈신화화, 주객도식, 이성도구주의에 내가 빠져 있다는 지적이오.
그것 참.
나는 신학의 단초인 계시론에 근거해서
이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투쟁하고 있는데 말이오.
그 계시론을 철학자들은 잘 이해를 못하거든요.
밤에 불을 받았다는 정도로 보는데, 아니걸랑요.
오히려 하이덱거의 '존재'에 개념에 가까운 거라는 사실을
철학자들이 인정할란가 모르겠소이다.
다른 때 사용했던 상징적 언어로 설명할께요.
우리의 실존은 지금 무한한 크기의 퍼즐에서
한 한 조각만 붙들고 있는 형국이오.
어떤 사람은 두 장을 가질고 있고,
세 장도 가능할 거요.
열장도 되겠지.
각각의 퍼즐 조각이 서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전혀 이웃하지 않는 것들이라오.
그 조각이 우리 머리 위에서 한 장씩 떨어지고 있어요.
그걸 우리는 계속 줒어요.
가짜도 있겠지.
그런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는 웬만한 눈으로는 불가능해요.
사이비 교주들은 100장 정도의 가짜 퍼즐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민중들은 거기에 속기도 하고요.
이런 이야기, 재미 있소, 없소?
잘 따라오겠지요.
무슨 대답이 나올지 이미 잘 알고 있을 거요.
어떤 사람은 퍼줄 조각에 속다보니
모든 조각이 가짜라고 눈길도 주지 않아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이겠소?
상황은 똑같소.
우리가 갖고 있는 퍼줄로 완전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는 거요.
1만장을 모은들 그게 무슨 대수겠소.
다만 우리는 이미 퍼줄의 전체 그림을 선취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이라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그림은 아니오.
거울로 보는 그림이오.
지금도 퍼즐 조각은 계속 떨어지고 있소이다.
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진짜인지 아닌지 잘 살피면서
전체 그림을 맞춰가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 관심에 떨어질 거요.
전체 그림은 우리에게 아직 실증이 되지 않았으니 신비고,
계속 떨어지는 조각은 역사요.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체 그림의 분명한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절대 기쁨에 들어갈 거요.
그게 바로 기독교인이 아니겠소?
첫날처럼 님이 하두 열심으로 글을 이어가기에
나도 응원하는 기분으로 한 마디 거들었소이다.
수고.
너무 과찬이시구요 ^^... 그냥 다비아 2년에 풍월을 읊는 정도지요 뭐... 눈동냥 귀동냥... 하기야 저는 부모님 성화에 이과에는 갔는데, 정말 애먹었습니다... 수학이 꽝이라... 학력고사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난이도 조절 실패(?)를 틈타 대학 들어간 케이스죠, ㅋㅋㅋ... 수학이 예년 수준으로 문제가 나왔다면... 지금도 자다가 식은 땀이 줄줄 흐릅니다... 진짜로요... 가장 큰 악몽은 수학 시험 치는 꿈이거든요... 사실 저는 언어계통으로 가고 싶었는데, 무작정 이과를 갔으니 이공계 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 쪽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한의대 들어가면 한문 공부 많이 할 수 있다길래 그래서 들어갔죠... 한문도 참 재밌답니다...
한의학은 이과에는 속해 있지만, 어쩌면 아주 문과적인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의학도 사실은 문과적인 면도 없지는 않다고 하더라구요... 공부 패턴이 신학과도 아주 비슷하구요...
한의학은 이과에는 속해 있지만, 어쩌면 아주 문과적인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의학도 사실은 문과적인 면도 없지는 않다고 하더라구요... 공부 패턴이 신학과도 아주 비슷하구요...
지난 번 김종두 목사님 글에 대한 저의 댓글을 한 번 옮겨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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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두 목사님의 글에 대해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해석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
성서의 바른 해석을 중요시하는 정용섭 목사님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현대주의적인 철학 사조를 따르고 있고 그 방법론을 사용하는 폼도 서툴면서 정작 자신은 그와는 다른 방법론을 사용하는 목사님들의 설교 패턴을 아마추어리즘으로 단정 짓는 것은 잘못이다? (제가 볼 때 정목사님은 성서 해석의 방법론에 집착한다기보다는 성서를 대하는 태도와 거기서 파생되는 성서 도구화, 잘못된 해석과 이해를 지적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설교비평의 형식을 빌어서 실제로는 누가 진리이고 누가 비진리인지 가리는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 기독교회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시도?)
진리의 내용은 밝고 확연하게 개념 규정이 되어야 하는데, 단순히 "신비"의 영역으로 떠넘겨버린다?
또한 "죄"를 너무 가볍게 처리한 나머지 죄가 실체 없는 허상이 되어버림으로 인해서 은총과 구원까지도 근원적인 무게감과 실체감을 잃는 결과를 낳았다?
설교비평은 그 원초적인 의도가 보수기독교와 부패성, 비도덕성을 매치시키고 부각시켜서 결국은 기독교계 내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데 있거나 아니면 또 하나의 인기있는 종교 상품을 만드는데 있다?
정목사님이 표방하는 "지성적 신앙"은 넉넉하고 여유있는 중산층의 지성인들의 구미에 맞는, 또한 그들 속에 있는 허위 의식과 가식을 자연스레 자위하고 가려주는 장치로서 역할을 한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불화를 적절히 타협시켜서 대중적 - 중산층 지성인 - 인기에 영합하려는 포퓰리즘적인 성격도 있다?
제대로 글을 요약한 건지, 전혀 헛다리 짚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인간적으로 글이 너무 어렵고 먹물이 너무 심하게 묻은 느낌...저를 비롯한 왠만한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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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힌 하나님(아들)" 이라는 복음의 패러독스를 "스캔들"로 치부해버린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던가요? 바울 당시 아테네의 주류 지성들은 "넌센스"로 받아들인 것으로 아는데... (뛰어난 체조 선수가 테크닉이 너무 지나쳐서 착지할 때 엎어진 느낌...)
또한 정목사님이 그 아테네의 (미식가적인) 주류 지성들과 맥을 같이 한다는듯한 뉘앙스가 이해가 안되고...
그리고 김종두 목사님의 이 글이 현재 복음의 진리에서 많이 멀어져있는 한국 기독교에 면죄부를 주려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으면 합니다만 그런 느낌도 없지 않이 드네요. (예전에 민주당에서 신세대 정치인들이 기성 정치인들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갑자기 참신한 신세대 정치인(?) 김민석이 탁 튀어나와서 기성 노땅 정치인들의 편을 들어주던 모습이 슬쩍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설교 비평에서 배제된 나머지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시는데... 역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요?
죄의 개념과 실체가 너무 약화 되었다고 이야기 하시는데... 신약 성서를 보면 하나님의 거대한 은총은 바닷물처럼 죄를 덮어버리는 느낌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의 장엄함 앞에서 죄는 굉장히 초라해지는 느낌입니다... (바울 조차도 "죄의 힘은 율법" 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죄가 율법에 의해서 실체화 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현상을 경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 소위 말하는 그 당시의 죄인들에게 '니는 죄인이다.' 라고 각인시키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시키면서 보잘 것 없는 한 명 한 명의 소자들도 은총의 빛 속에서 소중한 존재임을 깨우치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죄인들을 죄인되게 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을 더 심하게 꾸짖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죄" 라는 것이 인간의 한계적인 꼬락서니를 실감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자신을 내어 던질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만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주류(?) 기독교 신앙은 너무 반이성적입니다. 반이성은 외부와의 대화와 소통 자체도 불가능한 정신적 불구의 상태입니다. 저는 신앙은 초이성적이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성의 기독교는 정용섭 목사님의 이성주의적인 신앙이 많이 불편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제가 볼 때엔 정용섭 목사님은 이성주의의 터널을 지나서 신앙의 초이성적 성격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이성과 초이성은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 없는 뿌리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지성적 신앙은 중산층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배부르고 등따신 사람들이 삶은 자신들의 가치관대로 나름 멋대로 편하게 살고, 말과 생각만 고귀하게 신앙적으로 포장된 그런 정신분열증적인 상태로 사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 같기도 한데... 솔직히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습니까? 그나마라도 이런 신앙적 정각(正覺)이라도 없으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데요... 지금 한국 기독교계에서 이나마라도 제대로 이끌어주는 분들이 극소수라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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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두 목사님의 글에 대해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해석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
성서의 바른 해석을 중요시하는 정용섭 목사님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현대주의적인 철학 사조를 따르고 있고 그 방법론을 사용하는 폼도 서툴면서 정작 자신은 그와는 다른 방법론을 사용하는 목사님들의 설교 패턴을 아마추어리즘으로 단정 짓는 것은 잘못이다? (제가 볼 때 정목사님은 성서 해석의 방법론에 집착한다기보다는 성서를 대하는 태도와 거기서 파생되는 성서 도구화, 잘못된 해석과 이해를 지적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설교비평의 형식을 빌어서 실제로는 누가 진리이고 누가 비진리인지 가리는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 기독교회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시도?)
진리의 내용은 밝고 확연하게 개념 규정이 되어야 하는데, 단순히 "신비"의 영역으로 떠넘겨버린다?
또한 "죄"를 너무 가볍게 처리한 나머지 죄가 실체 없는 허상이 되어버림으로 인해서 은총과 구원까지도 근원적인 무게감과 실체감을 잃는 결과를 낳았다?
설교비평은 그 원초적인 의도가 보수기독교와 부패성, 비도덕성을 매치시키고 부각시켜서 결국은 기독교계 내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데 있거나 아니면 또 하나의 인기있는 종교 상품을 만드는데 있다?
정목사님이 표방하는 "지성적 신앙"은 넉넉하고 여유있는 중산층의 지성인들의 구미에 맞는, 또한 그들 속에 있는 허위 의식과 가식을 자연스레 자위하고 가려주는 장치로서 역할을 한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불화를 적절히 타협시켜서 대중적 - 중산층 지성인 - 인기에 영합하려는 포퓰리즘적인 성격도 있다?
제대로 글을 요약한 건지, 전혀 헛다리 짚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인간적으로 글이 너무 어렵고 먹물이 너무 심하게 묻은 느낌...저를 비롯한 왠만한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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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힌 하나님(아들)" 이라는 복음의 패러독스를 "스캔들"로 치부해버린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던가요? 바울 당시 아테네의 주류 지성들은 "넌센스"로 받아들인 것으로 아는데... (뛰어난 체조 선수가 테크닉이 너무 지나쳐서 착지할 때 엎어진 느낌...)
또한 정목사님이 그 아테네의 (미식가적인) 주류 지성들과 맥을 같이 한다는듯한 뉘앙스가 이해가 안되고...
그리고 김종두 목사님의 이 글이 현재 복음의 진리에서 많이 멀어져있는 한국 기독교에 면죄부를 주려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으면 합니다만 그런 느낌도 없지 않이 드네요. (예전에 민주당에서 신세대 정치인들이 기성 정치인들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갑자기 참신한 신세대 정치인(?) 김민석이 탁 튀어나와서 기성 노땅 정치인들의 편을 들어주던 모습이 슬쩍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설교 비평에서 배제된 나머지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시는데... 역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요?
죄의 개념과 실체가 너무 약화 되었다고 이야기 하시는데... 신약 성서를 보면 하나님의 거대한 은총은 바닷물처럼 죄를 덮어버리는 느낌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의 장엄함 앞에서 죄는 굉장히 초라해지는 느낌입니다... (바울 조차도 "죄의 힘은 율법" 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죄가 율법에 의해서 실체화 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현상을 경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 소위 말하는 그 당시의 죄인들에게 '니는 죄인이다.' 라고 각인시키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시키면서 보잘 것 없는 한 명 한 명의 소자들도 은총의 빛 속에서 소중한 존재임을 깨우치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죄인들을 죄인되게 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을 더 심하게 꾸짖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죄" 라는 것이 인간의 한계적인 꼬락서니를 실감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자신을 내어 던질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만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주류(?) 기독교 신앙은 너무 반이성적입니다. 반이성은 외부와의 대화와 소통 자체도 불가능한 정신적 불구의 상태입니다. 저는 신앙은 초이성적이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성의 기독교는 정용섭 목사님의 이성주의적인 신앙이 많이 불편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제가 볼 때엔 정용섭 목사님은 이성주의의 터널을 지나서 신앙의 초이성적 성격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이성과 초이성은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 없는 뿌리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지성적 신앙은 중산층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배부르고 등따신 사람들이 삶은 자신들의 가치관대로 나름 멋대로 편하게 살고, 말과 생각만 고귀하게 신앙적으로 포장된 그런 정신분열증적인 상태로 사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 같기도 한데... 솔직히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습니까? 그나마라도 이런 신앙적 정각(正覺)이라도 없으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데요... 지금 한국 기독교계에서 이나마라도 제대로 이끌어주는 분들이 극소수라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입니다...
작년 봄에 정목사님의 한국교회 설교비평을 보고,
다비아의 정 목사님의 여러 글들을 보고
많은 혼동이 왔었습니다.
정목사님의 글에서는 여태껏 제가 습득하고 있던 기존의 기독교 가르침을 무장해제를 시키고
진정한 신앙이 무었인지 많은 고민을 가져다 주더군요.
또한 정목사님이 비판하신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이 과연 그렇게 턱없이
미숙하고, 부족한 설교자 들인지 정말 큰 혼란이 저에게 일어 났습니다.
그러던 차에 작년에 김종두 목사님의 설교비평 반론의 글을 보고
제가 작년에 김종두 목사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 글 보다는 말을 잘 알아듣는 좀 하수인지라..
김종두 목사님은 정목사님을 잘 아시는것 같더군요.
자신이 담임하는 수성 성결교회에서 1년동안,
정 목사님이 한달에 한번 설교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제가 정목사님이 비평한 설교자들이 과연 그렇게 부족하고 신학적으로
모자란 설교자들인지 물었습니다.
김종두 목사님은 한국교회 설교자들 이야기 보다는 정목사님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군요.
먼저 정목사님의 글에서 사용되는 철학적인 용어와 개념들을 이야기 하면서
넌센스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정목사님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나, 하이데거의 철학을 잘알지 못하는데
존재론을 쓴다는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다른 철학 부분도 이야기 한것 같은데
잘 모르는 것들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구요
첫날처럼이 댓글로 지적한 말을 그대로 말하더군요..
즉 하이데거를 제대로 사유하지도 못하는 정목사님이 어떻게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야기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목사님께는 빛도 있고 어둠도 있다고 하시더군요.
양면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정목사님은 글쓰는 솜씨는 일품이다.
하지만 정 목사님의 신학이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을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비평했다고 인정할수 없다.
글쓰는 재주와 신학의 깊이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이걸 놓치는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마지막으로 정목사님은 이기적인 자유주의자 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정목사님은 교단 선배 목사님이시니 이쯤에서 접자고 하시면서
통화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또 올해는 류응렬 교수와 통화를 했습니다.
거두절미 하고, 류 교수님도 정목사님이 뛰어난 논객이다. 글을 잘쓴다.
이것 만은 분명하다. 허나 정목사님의 신학은 자신들과는 성경을 보는 관점 부터가 다르다
여기서 부터 달라질수 밖에 없다.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본론도, 결론도 신앙의 대부분이 다를수 밖에
없다. 고 하시더군요..
제가 한가지 궁금한것은 류을렬 교수도 정목사님을 뛰어난 논객이다.
김종두 목사님은 정 목사님을 글쓰는 솜씨가 뛰어나다.
특히 김 목사님은 글쓰는 재주와 신학은 구별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저는 이부분이 이해가 잘 되질 않습니다.
글쓰기도 결국 사고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김종두 목사님은 이걸 간과 하시는것 같아서요.
정목사님의 글은 정목사님의 깊이있는 생각이 있기에, 깊이있는
글들이 나오는것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예전에는 정목사님의 글을 대하고 기존의 신앙에서 버려야 할것들만
자꾸 눈에 들어 오기에 불만도 많았는데요..
요즈음은 정 목사님의 글에서 여태껏 알지 못하고 찾지 못했던 것들을
나름대로 찾아가며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아직도 때론는 기존의 저의 신앙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은
새로운 것을 배울려는 자세를 잡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첫날처럼 님 대단하십니다.
전 김종두 목사님과 통화를 하고도 뭐가뭔지 가물가물 한데..
첫날처럼 님은 글만 보고도 이렇게 김 목사님의 의중을 잘 짚어시고
요약을 잘해주시니 어려운 글이 이해도 잘되고 참 좋습니다.
다비아의 정 목사님의 여러 글들을 보고
많은 혼동이 왔었습니다.
정목사님의 글에서는 여태껏 제가 습득하고 있던 기존의 기독교 가르침을 무장해제를 시키고
진정한 신앙이 무었인지 많은 고민을 가져다 주더군요.
또한 정목사님이 비판하신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이 과연 그렇게 턱없이
미숙하고, 부족한 설교자 들인지 정말 큰 혼란이 저에게 일어 났습니다.
그러던 차에 작년에 김종두 목사님의 설교비평 반론의 글을 보고
제가 작년에 김종두 목사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 글 보다는 말을 잘 알아듣는 좀 하수인지라..
김종두 목사님은 정목사님을 잘 아시는것 같더군요.
자신이 담임하는 수성 성결교회에서 1년동안,
정 목사님이 한달에 한번 설교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제가 정목사님이 비평한 설교자들이 과연 그렇게 부족하고 신학적으로
모자란 설교자들인지 물었습니다.
김종두 목사님은 한국교회 설교자들 이야기 보다는 정목사님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군요.
먼저 정목사님의 글에서 사용되는 철학적인 용어와 개념들을 이야기 하면서
넌센스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정목사님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나, 하이데거의 철학을 잘알지 못하는데
존재론을 쓴다는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다른 철학 부분도 이야기 한것 같은데
잘 모르는 것들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구요
첫날처럼이 댓글로 지적한 말을 그대로 말하더군요..
즉 하이데거를 제대로 사유하지도 못하는 정목사님이 어떻게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야기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목사님께는 빛도 있고 어둠도 있다고 하시더군요.
양면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정목사님은 글쓰는 솜씨는 일품이다.
하지만 정 목사님의 신학이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을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비평했다고 인정할수 없다.
글쓰는 재주와 신학의 깊이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이걸 놓치는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마지막으로 정목사님은 이기적인 자유주의자 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정목사님은 교단 선배 목사님이시니 이쯤에서 접자고 하시면서
통화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또 올해는 류응렬 교수와 통화를 했습니다.
거두절미 하고, 류 교수님도 정목사님이 뛰어난 논객이다. 글을 잘쓴다.
이것 만은 분명하다. 허나 정목사님의 신학은 자신들과는 성경을 보는 관점 부터가 다르다
여기서 부터 달라질수 밖에 없다.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본론도, 결론도 신앙의 대부분이 다를수 밖에
없다. 고 하시더군요..
제가 한가지 궁금한것은 류을렬 교수도 정목사님을 뛰어난 논객이다.
김종두 목사님은 정 목사님을 글쓰는 솜씨가 뛰어나다.
특히 김 목사님은 글쓰는 재주와 신학은 구별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저는 이부분이 이해가 잘 되질 않습니다.
글쓰기도 결국 사고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김종두 목사님은 이걸 간과 하시는것 같아서요.
정목사님의 글은 정목사님의 깊이있는 생각이 있기에, 깊이있는
글들이 나오는것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예전에는 정목사님의 글을 대하고 기존의 신앙에서 버려야 할것들만
자꾸 눈에 들어 오기에 불만도 많았는데요..
요즈음은 정 목사님의 글에서 여태껏 알지 못하고 찾지 못했던 것들을
나름대로 찾아가며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아직도 때론는 기존의 저의 신앙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은
새로운 것을 배울려는 자세를 잡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첫날처럼 님 대단하십니다.
전 김종두 목사님과 통화를 하고도 뭐가뭔지 가물가물 한데..
첫날처럼 님은 글만 보고도 이렇게 김 목사님의 의중을 잘 짚어시고
요약을 잘해주시니 어려운 글이 이해도 잘되고 참 좋습니다.
우하하하,
별달 님은 정말 오지랖이 바다처럼 넓군요.
진리를 향한 열망이 그렇게 강하다는 증겁니다.
잘 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요?
나는 자신이 없어요.
<존재와 시간>을 좀 읽다가 접었고,
대신 하인리티 오트가 하이덱거의 존재론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존재와 사유>(?)는 꼼꼼하게 읽었어요.
영남신대 신대원에서 그 책으로 강의한 적도 있고,
신학과 학부에서는 <신학과 철학>에서 하이덱거를 부분적으로 강의했는데요.
그렇게 해 놓고 하이덱거를 안다고 하면 좀 그렇겠지요?
아마 여기 온라인 강의실에 들어가면 그 강의가 살아 있을 거에요.
그걸 참고하세요.
가장 중요한 건 하이덱거가 존재와 존재자를 확실하게 구별한다는 거에요.
기존의 형이상학은 존재라의 근원만 추구하다거 존재를 놓친 거지요.
그걸 "존재망각"이라고 하더군요.
문제는 그가 말하는 "존재" 개념을 따라가야 하는 건데,
그건 아무추어 기사가 프로 9단의 바둑 수를 따라가야 하듯이 어렵답니다.
그러나 열린 눈을 갖고 있으면 불가능한 거도 아니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존재는 무에 걸쳐 있다.
즉 있음만으로는 존재를 말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는 김종두 목사가 글에서 인용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왜 존재자는 존재하고, 무는 없는가?" 하는 질문을 했어요.
"Warum gibt es Seiende, sondern nicht viel mehr Nichts?"
독일어 문장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그런 뜻이에요.
저건 제가 간혹 인용하는 문장이래서 외우고 있답니다.
저 문장의 뜻을 알면 하이덱거 존재론의 기초를 아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의 존재론이 완성된 건 아니랍니다.
그는 말년에 신비로 들어가요.
물의 신비지요.
그만 할께요.
내 밑천이 다 떨어지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이덱거의 존재와 노장의 도는 비슷한 점에 많답니다.
도가도 비상도!
별달 님은 정말 오지랖이 바다처럼 넓군요.
진리를 향한 열망이 그렇게 강하다는 증겁니다.
잘 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요?
나는 자신이 없어요.
<존재와 시간>을 좀 읽다가 접었고,
대신 하인리티 오트가 하이덱거의 존재론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존재와 사유>(?)는 꼼꼼하게 읽었어요.
영남신대 신대원에서 그 책으로 강의한 적도 있고,
신학과 학부에서는 <신학과 철학>에서 하이덱거를 부분적으로 강의했는데요.
그렇게 해 놓고 하이덱거를 안다고 하면 좀 그렇겠지요?
아마 여기 온라인 강의실에 들어가면 그 강의가 살아 있을 거에요.
그걸 참고하세요.
가장 중요한 건 하이덱거가 존재와 존재자를 확실하게 구별한다는 거에요.
기존의 형이상학은 존재라의 근원만 추구하다거 존재를 놓친 거지요.
그걸 "존재망각"이라고 하더군요.
문제는 그가 말하는 "존재" 개념을 따라가야 하는 건데,
그건 아무추어 기사가 프로 9단의 바둑 수를 따라가야 하듯이 어렵답니다.
그러나 열린 눈을 갖고 있으면 불가능한 거도 아니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존재는 무에 걸쳐 있다.
즉 있음만으로는 존재를 말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는 김종두 목사가 글에서 인용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왜 존재자는 존재하고, 무는 없는가?" 하는 질문을 했어요.
"Warum gibt es Seiende, sondern nicht viel mehr Nichts?"
독일어 문장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그런 뜻이에요.
저건 제가 간혹 인용하는 문장이래서 외우고 있답니다.
저 문장의 뜻을 알면 하이덱거 존재론의 기초를 아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의 존재론이 완성된 건 아니랍니다.
그는 말년에 신비로 들어가요.
물의 신비지요.
그만 할께요.
내 밑천이 다 떨어지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이덱거의 존재와 노장의 도는 비슷한 점에 많답니다.
도가도 비상도!
목사님, 좀전에 온라인 강의실에 목사님이 올리신 하이데거 1편 정도 대략 읽었습니다.
하인리히 오트의 존재와 사유가 매우 흥미 로워 지는군요..
어렵기도 하지만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신학적으로
정리 했다고 하니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얼핏 보기에는 정목사님도 나름대로 하이데거를 연구하신것
같은데 왜 김종두 목사님이 딴지를 거는지 잘 모르겠군요..
아마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정목사님이 신학에 접목한 부분이
김종두 목사님이 공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뭔가 틀리기 때문인가요?
이참에 정목사님도 하이데거 논문을 한편 써보심도 좋을듯 싶은데요^^
바쁘셔서 힘드시겠죠..
하이데거.. 존재망각.. 존재..물로의 전향.. 또다른 화두로 다가 오는군요..
존재자의 근원보다는 존재를 사유하라..
어렵지만은 한번 넘어야 할 산인것 같네요.
하이데거가 간 길을 향하여 가다 보면 여러가지 궁금증이 풀릴것 같은
예감도 들구요.. 어렵기두 하구요..
아마가 프로를 따라 갈려하니 참 어렵습니다..
정목사님 감사합니다!
하인리히 오트의 존재와 사유가 매우 흥미 로워 지는군요..
어렵기도 하지만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신학적으로
정리 했다고 하니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얼핏 보기에는 정목사님도 나름대로 하이데거를 연구하신것
같은데 왜 김종두 목사님이 딴지를 거는지 잘 모르겠군요..
아마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정목사님이 신학에 접목한 부분이
김종두 목사님이 공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뭔가 틀리기 때문인가요?
이참에 정목사님도 하이데거 논문을 한편 써보심도 좋을듯 싶은데요^^
바쁘셔서 힘드시겠죠..
하이데거.. 존재망각.. 존재..물로의 전향.. 또다른 화두로 다가 오는군요..
존재자의 근원보다는 존재를 사유하라..
어렵지만은 한번 넘어야 할 산인것 같네요.
하이데거가 간 길을 향하여 가다 보면 여러가지 궁금증이 풀릴것 같은
예감도 들구요.. 어렵기두 하구요..
아마가 프로를 따라 갈려하니 참 어렵습니다..
정목사님 감사합니다!
Why there is Existence, but rather not much more Nothingness?
(독일어 문형 그대로 번역하면 Why It gives Existence, but not much more Nothingness? 사실 이런 문형이 영어로는 있을 수가 없겠죠... ㅋㅋㅋ 독일어 "에스 깁트" 문형 )
"존재자가 있는데, 더 많은 "無"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 이런 뜻 같은데요...
존재자가 있으면, "無" 는 필연적으로 더 많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뎅... 존재자의 본질이 "無"라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알듯 말듯한 화두 같네요... "공즉시색 색즉시공" 의 세계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성서에도 "눈에 보이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부터 생겨 났다" 는 이야기와도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독일어 문형 그대로 번역하면 Why It gives Existence, but not much more Nothingness? 사실 이런 문형이 영어로는 있을 수가 없겠죠... ㅋㅋㅋ 독일어 "에스 깁트" 문형 )
"존재자가 있는데, 더 많은 "無"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 이런 뜻 같은데요...
존재자가 있으면, "無" 는 필연적으로 더 많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뎅... 존재자의 본질이 "無"라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알듯 말듯한 화두 같네요... "공즉시색 색즉시공" 의 세계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성서에도 "눈에 보이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부터 생겨 났다" 는 이야기와도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철학에 가까운 영화평에 대한 댓글 공격이 대단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