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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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하이데거... “無가 無化한다.(Das Nichts nichtet)” “無는 存在로 現成한다.(Dieses Nichts west als das Sein)”는 의미를 중심으로...

(*"현성"한다는 의미는 “조작된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 이루어 짐” 을 이야기 합니다.)

1. 인간의 의식과 외부 세계, 그 속에 드러나는 도구적 가치

인간은 “의식”이라는 섬에 고립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 의식이란 것은 자기 아닌 외부 세계 전체를 의식 자신이 연장된 것으로 파악하고 지배가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외부 세계를 지배하고, 소모하고,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식에 의해서 세계의 가치는 “도구적 가치”로 전락해버립니다. 부, 권력은 그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구요.

결국 의식은 도구적 가치로 가득한 세계에서 도구를 잔뜩 쌓아놓고, 그 도구들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고립되고 단절되어 “소통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리며, 결국은 세계를 지배하려던 의식은 그 세계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의식은 생각에만 함몰되고, 또한 그 생각한다는 것도 생명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일 뿐입니다.

2. 불안

일상적 권태로움, 지겨움, 지긋지긋함 속에서 갑자기 어느 순간에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냥 이러한 물음을 애써 외면하며 권태로움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떨쳐지지 않고 끊임없이 떠올라서 나를 괴롭힙니다. 이러한 덧없음의 느낌, 즉 무상감을 곧 “불안”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지금껏 나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으로 알아왔던 외부 세계가 실상은 아무 것도 주지 못함을 직시하게 됩니다. 예전까지 확고부동하게만 보였던, 세계에 대한 일반적 전통적 해석과 기준은 무의미해집니다. (그 속에는 “종교”도 포함 됩니다.)

그 와중에 “나의 삶”, “나” 역시도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친숙했던 세계가 낯설어지고, 일상에 안주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 또한 낯설어 집니다. 결국 모든 것이 텅 비어 버리는 충격적인 경험 속에서 뚜렷이 남는 것은 “나”입니다. 사실은 그 “나” 라고 하는 것도, 나 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도 남지 않은 철저히 “고독한 단독자”입니다.

의지할 어떤 것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 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모든 상황은 “불안” 이라는 것이 초래한 것입니다. 이 “불안”은 오히려 불안한 기분을 통하여 철저히 “나”를 외부적 세계로부터 개별화함으로써, “내”가 이런 개별화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존재” 임을 밝히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있으며, 스스로를 책임져야할 것 같은 압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被投”, 즉 내던져짐입니다.

여기에서 불안을 “두려움”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려움은 공포와도 비슷한데, 내가 부여잡고 있던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관념, 지식, 소유 등등이 손상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를 말하고, 또한 그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만들어 내면서 스스로를 강화시킵니다. 또한 그 두려움은 결국 권태나 우울의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두려움과 달리 “불안”, 구체적으로 말해서 “온전한 불안의 기분”은 “미래로부터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태어나고 생겨나는 모든 것이 첨부터 “끝”, 즉 “죽음”이라는, 미래에 일어날 피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두려움이나 공포, 권태, 우울의 상태라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사태 그 자체를 투명하게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불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불안의 원인은 규정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불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들, 기준들, 잣대들을 들이대어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  불안은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인위적인 근거나 규정들을 무장해제 시킨 상태에서 무엇보다도 ‘내가 있다’ 는 사실 그대로를 봄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진짜’ 세계와 대면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 해석과 근거들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실상”(reality)의 표면에 색깔을 덧칠한 수준에 지나지 않아서, 서로 일치하는듯 하다가도, 서로 맞서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불안을 경험함으로써 모든 색깔들이 지워진 뚜렷한 실상을 비로소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상”을 보면서 “낯설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있음(존재)의 기적”을 경험하는 순간이 됩니다.

3. 죽음: 불안의 원인

“있다”는 것이 기적인 까닭은 그것이 “없어진다”는 그러한 엄연한 사실 때문입니다. 이 “없어짐”을 가장 명확히 확인하는 순간이 바로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이 죽음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다양한 해석들과 규정들이 색깔을 덧칠해 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의 죽음”입니다. 나의 죽음 앞에서는 모든 해석들조차도  힘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나의 죽음이란 것은 지금껏 내가 주체가 되어 객체들을 바라보아왔던 주객구도마저도 허물어 버리는 엄중한 사태입니다. 이 사태 앞에서 사람들은 도망치려 하거나, 또는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하기도 하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의미 없는 전통적인 해석들로 포장하려고 시도합니다.

죽음이라는 엄중한 사태에 직면해서 인간이 취해야하는 태도는 “죽음을 직시하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죽음을 직시하고 자각하기 전후의 삶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자각한다는 것은 그냥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인간의 존재방식이 전적으로 뒤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직시하고 자각하기 위해서 그 현실성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 것을 기투(忌妬)라고 말합니다.

“죽는 자”가 아닌 “죽을 자”로 산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가능성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내가 죽는다” 라는 그런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죽을 자들”은 죽는다는 사실에 매몰되어 두려움과 공포, 우울에 빠지는 자들이 아니라 그 자신들의 죽음을 예감하고, 그로부터 근원적인 기분에 빠져드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자각하고 불안에 떨 수 있는 자, 그 죽음을 ‘나의 죽음’ 이라는 고유하고 독자적인 하나의 사태로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죽을 자들”입니다.

4. 죽음에 대한 불안, 그리고 근원적인 세계의 열림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금의 상태가 영원할 것인 양 착각하며 무의미한 축적과 소비에 매몰되어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없어진다” 는 엄중한 현실성은 그 누구도 부인하거나 은폐할 수 없으며, 그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너무도 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 “없어짐”의 구체화된 모습인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한 불안을 긍정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덧씌워진 모든 규정들을 벗겨낸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마주하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될 때에, 그 불안은 “있음(존재)의 기적”을 밝히 보여주고, 그로부터 그 불안은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연옥불”을 통과함으로써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숭상하는 가치에 연연해하거나 그 것을 기준으로 생각하던 종래의 인간에서 모든 존재자가 드러내는 유일무이의 충만한 존재에 감응하는 열린 인간, 즉 진정한 의미의 “현존재”가 됩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태 그 자체로” 라는 현상학의 모토는...

바로 종래의 기준을 근거로 일련의 판단을 하던 방식을 끝내고,종래의 잣대로는 판단할 수 없는 “‘있는 것’들의 원래 그러한 있음”에 맞닥드려지는 사태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태에 닿기 위해서는 불안을 직시하고,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기존의 세계상 전체가 폐기되는 것에도 초연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한데, 그 것을 ‘죽음을 향하여 자각적으로 앞서 달려감’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앞서 달려감”을 통해서 진리가 드러나고, 또한 그 진리로 가득 차게 되면, 소박하면서도 보기 드문 풍요로움을 내보이는 세계가 드러나는데, 바로 그 것이 “근원적인 세계”이고, 그러한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현존재”는 자신의 결단을 통해서 존재자 각각을 저마다 유일무이한 풍요로움으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근원적인 세계를 열어 보이게 되고, 따라서 “가장 보편적인 지평으로서의 세계”가 열리고, 다른 모든 존재자들을 향하여 자신을 열어 밝힙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와 다른 존재자들을 가로막는 장막, 벽이 폐기되고 삶, 곧 "생명"이 자신을 뚜렷이 드러내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5. 죽음과 無, 그리고 存在: 無는 無化한다. 무는 존재로서 현성한다.

우리는 이미 "죽음" 안에서 태어났고, 그 안에서 살며, 그 안으로 소멸해 들어가며, 죽음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존재 전체는 자신을 알려옵니다. 죽음(소멸)에 직면해서, 이로부터 ‘있음’ 전체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것은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현존재”만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순히 불안이 끝이 아니라, 그 불안의 결과로 근원적인 세계가 밝히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해보면, 죽음이란 것은 존재 전체의 죽음을 의미하고, 따라서 불안 역시도 존재 전체에 대한 불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불안이란 것은 죽음으로 인해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주위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보다는, 근본적으로는 나의 존재 전체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란 말이죠.

결국 불안은 無를 드러낸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래적 가능성인 “죽음”을 통해서 기존의 모든 해석과 규정들을 폐기하면서 그 “없음(無)”을 드러내는, 존재 전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無는 無化한다.(Das Nichts nichtet)”

(* 무의 무화는 스스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불안을 통해서 “어떤 강력한 힘”은 일상인이 집착했던 모든 가치들을 폐기해버립니다. 이 힘이 바로 “無(Nichts)"입니다.

이 힘, 즉 “무”를 통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는 상태 즉, “아무 것도 없다” 는 낯설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무”는 그냥 부정만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규정들에 가려져 있던 존재자들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즉, 무화하는 무의 본질은 그것이 현존재를 무엇보다도 존재자 자체와 직면하게 만든다는데에 있습니다.

무를 통과하기 전까지 일상인들이 존재자라고 믿었던 일체의 것들은 존재자들에게 덧씌워진 하나의 해석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그로부터 모든 것들을 무화함으로써 모든 존재자들을 “그 자체”로 드러나게 하는 경지에서, 무는 곧 존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無는 存在로서 現成한다.(Dieses Nichts west als das Sein)”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허상을 좇고, 착취하며, 소비하는 방식을 버리고, 불안과 적극적으로 마주하여, 그 불안 속으로 자신을 던져서 죽음 앞으로 먼저 달려감을 감행해야만 하며, 그렇게 해서 “무의 무화”를 이끌어 내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인간은 진정한 기쁨, 자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에 열려있는 상태”를 진정한 의미의 자유라고 말했습니다.

하이데거는 후기에 무 내지는 존재 자체를 “단순 소박한 자연(Natur)”이라고 좀 더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6. 양심의 소리

“익숙한 모든 것을 상실하는 고통”은 지독한 고통입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현존재는 그냥 이런 사태를 부정하거나 회피하여 스스로 기만 속에서 살든지, 아니면 긍정하고 집착했던 일체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삶의 기만성을 바로 보고 은폐된 본래적 자기 자신을 회복하도록 촉구하는 몰아세우는 내면의 소리를 하이데거는 “양심의 소리” 라고 했습니다. 이 양심의 소리는 사실상 본래적 자기 자신에게서 발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양심의 소리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우리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구현할 것을 호소하며, 그 부름에 대한 들음을 일깨웁니다.

이 소리에 응답하는 것은 비본래적인 나 자신의 피상적인 삶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고, 이 소리에 대한 거부는 본래적인 나 자신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인간 군상들은 후자, 즉 거부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짓는 하나의 죄악입니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양심”은 외부에서 제시된 도덕적 법칙과 기준에 기초한 기존의 양심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양심”을 말합니다.

이 양심의 소리는 우리가 세인의 삶에 빠져서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질책하는 소리이며, 나의 본래적인 존재를 내가 만든 것이 아님에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것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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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그림

2008.11.07 20:43:04
*.109.68.126

살짝 맛만 봤는데도 배가 부르네요~^^

어느 경지 이상의 학문이나 깨달음에는
서로 소통 가능한 세계가 있나 봅니다

의식이란 섬에 고립된 인간이 불안이란 동력을 받아
충만한 존재에 감응하는 열린 인간,
즉, 현존재가 되는 하이데거의 추론은,
개방된 하나님의 창조세계안에 오히려
'자기폐쇄'의 고치 속에 있던 인간이
부동의 존재감으로 믿었던
모든,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우상'의 형상을 깨고
하나님과 세계를 불안과 낯설음으로 깨달으며
다른 모든 피조물과 함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창조의 과정 속에
그 자신이 개방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꼭 집어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profile

정용섭

2008.11.07 23:34:47
*.181.51.93

첫날 님,
위 꼭지글은 누구 거에요?
요약글이에요,
아니면 첫날 님의 직접 쓴 거에요.
시그림 님의 대글이 정말 재미 있네요.
하인맇 오트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사유자를 사유하는 학자라고 하더군요.
탈레스는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했는데,
하이데거는 그런 형이상학이 아니라
텔레스의 사유를 가능하게 한 그 근원을 말한다는 거겠지요.
그게 곧 존재거든요.
그에게는 노장과 마찬가지로 '없음'이 사유의 중요한 매개라 할 수 있어요.
이아구, 골치 아파지니, 그만 둬야겠어요.
행복한 밤을.

첫날처럼

2008.11.08 00:10:44
*.237.224.155

이 번에 하이데거를 첨 알았는데, 제가 그냥 뚝딱 뚝딱 해냈을리 만무하구요...

인터넷에서 하이데거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서 한 번 계통 잡아보았어요... 역시나 철학자들의 글은 너무 번잡해요... 읽기가 아주 버겁더라구요...

하이데거를 이름만 알았지 이런 저런 자료 찾아서 보기는 첨인데도, 너무 친숙하게 느껴져서 너무 신기했어요...

대가들은 어떻게 된 게, 다들 자신들이 처한 다른 상황 속에서도 어딘가 동일하게 가리키는 곳이 있어요...

그걸 "보편적 진리의 지평" 이라고 하나요?

첫날처럼

2008.11.08 00:37:58
*.237.224.155

정말 멋져부러!!! 그 자체인 명품 댓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왜 이 구절이 자꾸 생각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첫날처럼

2008.11.10 11:11:27
*.234.121.4

무는 (스스로) 무화한다... 이건 기독교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 목사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는 정적이고 일회적인 개념이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는 칭의대로, 성화의 삶은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가 우리를 지속적으로 능동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그 동적인 신비... 그 것과도 아주 흡사하네요...

무는 스스로 무화하기 때문에 내가 그 "죽음"이라는 현실성 속으로 자신을 실제적으로 던짐으로 인해서, 무의 무화를 이끌어 내면, 무가 스스로 무화를 진행하여 우리를 참 진리의 세계 속으로 이끌고 간다는 그런...

그리고 하이데거가 발견한 그 신비도 사실은 아주 소박하고 일상적인 것이라는 것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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