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

Views 1332 Votes 3 2008.11.18 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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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친애하는 집사님께

어제 집사님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맘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걸으면서 그 불편함의 실체가 무얼까,
맘 한구석 온전하지 못한 그 이유가 무얼까 집까지 내내 걸어오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곤…… 미약하고 희미하나마 느낀 몇 가지 것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맘 한구석 아리게 다가왔던 까닭을……

그래서 혹 누가 되지 않는다면 집사님과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송구스럽게도
자판을 두드려 봅니다.

20살부터 신학을 공부해오면서 학교를 제외하곤 저를 비롯한 대개의 목회자들은
배움보다는 가르침에 더 익숙한 편입니다.
신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에서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초년병시절부터
전도사라고 호칭도 불려지고 그에 걸맞은 일을, 주로 가르침에 관련한 사역을 해주길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현실적 요구에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2개의 귀보다는 1개밖에 없는 입을
더 많이 쓰게 됩니다.
그리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구도와 배움의 자세와 태도보다는 무언가를
가르쳐야 된다는 강박적인 목회자적 습성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서운 것은 그런 태도와 자세가 습관이 되고 고착이 되다 보면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의 체질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설교자들이 겉으로는 기독교의 교리를 매우 진지하게 전하고, 때로는 매우 해박하게 보이는 성서지식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자세하게 들어보면 그런 내용들이 때론
공허하고 때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를 집사님께서도 어느 정도 느끼시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세련된 언어와 체계적인 이해는 아니더라도 단순하게 하나님을 직관하고 영적 세계의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고 세상의 현실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 목회자에게만 있겠습니까?

굳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되새기지 않아도
조금만 너른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목회자나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하나님과 영적 현실에 대한 보다 더 깊고 심오한 이해와 통찰을 가진 많은 분들이 있음을
뵙게 됩니다. 그런 분들 중에 한 분, 제가 집사님을 뵐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예수님을 보지 못
했지만 어쩌면 예루살렘의 사도들보다도 더 큰 지혜와 은사를 주셔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바울의 은혜를 떠올리곤 합니다.
        
아마도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면서 느꼈던 마음의 불편함이란 자신의 부족과 모자람을 망각한 체 구도와 배움의 마음자세를 상실하고 어느덧 속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체질화 되어왔던 그 ‘강박적인 목회자적 습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 3)

오늘따라 부쩍 빌립보서의 이 말씀이 아프게 다가오네요.
이 아픔을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의미 없이 스쳐 지냈던 말씀과의 만남, 조우……

집사님을 통해서 감추어져 왔던, 그리고 망각해왔던 제 자신의 일그러진 자아를 다시 발견하게 하시니 살아가는 다양한 일상의 만남과 경험들을 통해서 말씀을 드러내시고 체득하게 하시는 그분과 더불어
그분의 도구가 되어주신 집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서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 싸하게 다가왔던 그 아림의 실체가 무언지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때는 두 사람의 두근거리는 삶의 흥분으로 다가왔던 아이가 미처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한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이제는 희망이 아닌 엄마의 몸을 위협하는 썩은 독을 내뿜는, 그래서 빨리 제거되어야 할
그 죽은 무엇이 되었을 때 타인은 알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그리고 끝없는 절망 속에서 하실 힘이 없으시다면 아예 기대조차 품지 않겠지만 전능하시다는 분이, 그리고 당신이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죽음을 자초하실 만큼 사랑하시는 분에게 저희인들 이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를 묻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지인께서 아내가 수술을 받기 전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몸이 회복된 후에는 작정기도로 준비하라고……’

그분께서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럽게 다가온 당혹스러운 삶의 파고 앞에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시고 삶의 위기를 극복해나갈 신심 깊은 조언에 담긴 그 진정성을 아무리 경황이 없는 때라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사무엘을 잉태한 한나처럼 3개월 동안 교회에서 먹고 자며 지난날의 쓰린 아픔을 모두 잊게 할, 새로운 생명에의 소식 주시길 그분께 간절히 아뢴 아내에겐, 임신과 출산 그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과정이 전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닌 생명의 영의 신비스러운 움직임이라는 사실에 목하 그 신비를 경험하고 있던 제게,그 경건한 조언은 차라리 심장과 폐부를 찌르는 고통 외엔 다름이 아니었겠지요.  

가혹한 현실 앞에서 ‘도대체 왜?’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매던 때에 읽었던 글들 중에 마음을 위로해주던
하나의 글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 제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깜짝 놀랐고 지금도 여전히 공동체를 아프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남 선교회 회장으로 일하고 계시던 밝고 건강하고 공동체를 화목하게 하는데 앞장서셨던 한 선생님께서 갑자기 쓰러져 심장이 20분간 멈췄다 거의 기적에 가깝게 생명만은 구하셨던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거의 매주일 부인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시고 있지만 정신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모든 사회활동은 물론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인지 능력은 저조하시다고 합니다.
저희 구역에 계신 선생님 댁이어서 그 지루하고 긴 고통의 과정과 그분의 가족, 특히 부인께서 겪는 여러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꼭 회복 되실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족들은 의연하게 잘 견디고 계시지만 가끔은 흔들리기도 하셨습니다.
전임 목회자가 없는 공동체이다 보니 이처럼 고통을 겪는 가족들은 목사님이 계시지 않아 무척 힘들어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우연히 한 목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목사님은 위로 차 자주 그 댁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께서 몹시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아무래도 이 고통에는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하시며 하나님께 그 동안 죄지은 것이 있으면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며칠 후 전화하신 목사님께, 부인은 별로 죄를 지은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조상들께 아직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더니 그것이 이런 벌을 받을 죄가 되느냐고 물어 보았답니다.
목사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죄이니까 당장에 추석부터 제사는 추도식으로 바꾸라고 권하셨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내려준 그 처방은 이 댁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제사를 원하는 다른 형제들과의 불화에 대한 예감과 죄가 정화되어 남편을 회복시키고 싶은 마음이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켜 내면의 갈등이 생겨났기 때문이지요.
여기저기서 참 많이도 들어 본 것 같은 얘기 같지 않으십니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고통에 대하여 가장 훌륭하게 설명하려는 종교도 기독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Shadow Land'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시인이며 영문학자이면서 'Mere Christianity' 와 'The Problem of Pain' 나르니아 동화집 같은 책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C.S. Lewis의 만년의 이야기여서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영화입니다.

C.S. Lewis의 고통에 관한 설교는 그 당시 대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강연장에는 말 그대로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연설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 하나님은 왜 고통을 막지 않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사람들이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길 원하시지는 않아요.
우리는 조각가가 인간의 형상을 만들기 위한 돌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끌로 때리면 너무 아프지요. 그러나 그 아픔은 우리를 완벽하게 해 주기 위한 도구랍니다.
고통은 하나님이 귀머거리 세상에 대고 외치는 메가폰입니다.”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고, 그의 명 설교는 이곳 저곳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젊은 미국 여성이 대서양을 건너 그를 한 번 만나보러 왔습니다. 아름답고 젊은 여성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런던에 오게 되고, 두 사람은 말없이 사랑을 느끼지만 그 여성은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 아주 짤막한 삶만을 남겨 놓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꼈던 루이스는 그녀의 짤막한 삶을 앞에 둔 채 병원의 침대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어린 아들을 증인으로 삼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고통에 대하여 느끼는 그의 심정과 강연의 내용은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고 짤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는 용감한 한 여성이 고통으로 쓰러졌어요....이렇듯 누구를 사랑하면 그가 고통 받지 않길 원합니다. 참을 수가 없어요. 그 고통을 대신해 주고 싶어요. 제가 이런데 하나님은 더하실 겁니다.”

곧 부인을 떠나 보낸 후, 이전과는 또 다른 차원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장례 예식을 인도했던 옥스퍼드의 동료가 그에게 미소로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이럴 땐 하나님께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 드리게. 이럴 땐 믿음에 의지할 수 밖에 없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하나님만 아신다네.”
늘 태연하던 그가 그 말을 듣고 분노에 차서 외칩니다.
“그렇네, 경험은 무자비한 선생이긴 하지만 가르치긴 하는군. 뼈저리게 배웠네. 고통은 결국 고통일 뿐이었어. 명분도 목적도 본보기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네. 지독히도 끔찍한 일이었어.
단지 그것뿐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 후 그로부터 고통에 관한 훌륭한 연설을 들을 수는 없게 되었지요.  

예수님이야말로 고통에 대하여 평가하거나 분석하며 그것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듯한 행동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고통과 상처에 대하여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민감성을 소유하셨던 분 같습니다.
12년 동안 긴 병을 앓고 있던 여성이 예수님 뒤에서 그 분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예수님은 누가 자기의 옷을 만졌느냐고 묻지요.
그 장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은 자신의 의식보다도 더 빠른 사랑을 유출’시키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힘이 ‘예수가 의식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실행하기 전에 이미 빠져나갔다는 사실들에서’ 예수의 사랑이 지닌 민감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민감한 사랑의 소유자인 예수는 눈에 보이는 고통에는 더 더욱 무감각하지 않으셨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호소가 있기도 전에 먼저 다가가 치유해 주시곤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자신을 동일시 하셨던 예수는 모든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셨을 뿐, 그들의 고통을 분석하거나 평가하려 했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기 힘듭니다.” ( 최순님의 글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첫 아이의 유산소식을 접하고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 지옥 같은 마음으로 장을 보러 가던 날
우연히 만나게 된 분에게 그 비보를 전해드렸을 때,
대로변에서 말없이 흘려주시던 그 분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그 수많았던 위로와 조언들은 이제 아득한 망각의 저편으로 묻혀버렸지만
그 분이 흘려주시던 그 눈물에서 살아갈 희망을 느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강렬하게 아로새겨지는 것은 왜 일까요?
욥의 경우처럼 그리스도인들이라도 때때로 우리 삶에 다가와 모든 것을 헝클어 놓고 마는 다양한
고난과 고통을 피해갈수는 없겠지요.

그들 앞에서 그 사람의 삶 가운데 담긴 수많은 사연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또한 그들의 삶을 인도해 가시려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지극히 짧은 인식과 혜안만을 가진 연약한
우리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절망하는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몫이란 그들이 당한 고난과 고통을 설명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는 것 (롬12:16)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시 73:22)
다윗의 고백처럼 어리석은 제가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 것은 삶의 비의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지식도 중요하겠지만 어쩌면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거기에, 그들의 눈물에 동참하는 것이 더 크고 깊은 영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어느덧 싸늘한 지식은 있지만 그 기쁨과 슬픔에 함께 동참할 순결한 웃음과 애절한 눈물을 잃어버린
제 자신에게서 확인해 봅니다.

글이 많이 길어졌네요.
요즘 들어 전 말의 한계와 그로 인한 소통의 단절을 조금씩 미약하나마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소간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해 보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구관이 명관이 될까요?
  
부디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으시는 집사님 되시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 드려봅니다.
샬롬의 인사를 전하며….

2006년 5월 어느 날에
Park

  







profile

클라라

2008.11.19 08:12:09
*.216.132.150

박진 님,
가슴으로 전해 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절절히 공감가는 말씀이네요.
건승하세요.
감사합니다.


첫날처럼

2008.11.19 10:50:50
*.234.121.4

눈물이 맺힙니다... 첨에는 글이 길다 싶어서 패스하려고 하다가 읽었는데... 안 읽었으면 후회할 뻔 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해결책을 주려고 하다가 그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우를 우리는 똑같이 범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같이 아파하고, 함께하는 것... 그 것이 어쩌면 해결책일텐데요...

profile

유니스

2008.11.19 12:01:13
*.104.195.92

박진님. 잘 읽었습니다.
저도 눈물이 나서..
감사합니다.^^

닥터케이

2008.11.19 13:38:13
*.202.122.60

좋은 글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구질구질한 설명이나 죄를 뉘우치라는 따위의 말보다는 같이 아파하고 울어주는 것만큼 큰 위로가 없습니다.
profile

희망봉

2008.11.19 17:43:03
*.109.65.110

글을 두번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강박증을 떨쳐 버리고
대글 님들의 말씀대로
같이 아파하고 울어줄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내가 말입니다
profile

모래알

2008.11.19 21:12:12
*.116.154.86

박진 님!
위로한답시고 했던 말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조용하고 아름답고 평화롭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올려주신 글이 벌써 2 년 여 전이군요.
아마 그 사이에도 많은 기도와 눈물이 있었을 거 같지만
많은 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나눠주시는 깊은 뜻이 있겠죠?

흐르는 강물 같은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구해 봅니다.

profile

박 진

2008.11.20 17:42:38
*.35.184.177

클라라님!
함께 공감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클라라님께도 건승의 인사를...^ ^
profile

박 진

2008.11.20 17:47:56
*.35.184.177

긴 호흡이 필요한 글은 정말 읽기 쉽지 않죠...^ ^
같이 아파하고 공감하는 것....그리고 그 다음에 함께 해결을 모색해 보는 것.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은데 여전히 쉽지 않네요.
첫날님! 감사....

profile

박 진

2008.11.20 17:54:15
*.35.184.177

닥터케이님! 동감합니다.
아직도 그 분의 눈물이 기억납니다.
이심전심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영성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profile

박 진

2008.11.20 17:59:35
*.35.184.177

어쩌면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강박'이겠죠.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다 보면,그의 영에 깊이 심취하다보면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 ^ ^
profile

박 진

2008.11.20 18:00:15
*.35.184.177

울지마세요 ^ ^


 

profile

박 진

2008.11.20 18:09:12
*.35.184.177

갑자기 찾아와 온 삶을 헝클어 놓은 삶의 격랑은 깊은 생체기를 남기고 그렇게
지나갔네요. 이제는 그 시간들을 돌아보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눌수도 있게 되었지만.....
모래알님의 글에서 '혜안'이라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조만간 기쁜 이야기를 함께 나누도록 할께요. 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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