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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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아래 "새벽기도"님의 궁금증과 그 답변을 보고
평신도의 생활을 보내온 사람으로서
느낀바가 있어 적어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말빨"(?) 로는 조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빨은 전무해서
그냥 구술체로 적으니, 정연하지 못하고 논리비약이나 단어 사용의 부적절한 것 등등을 이해 바라고
전문가가 아니고 아마추어의 개인적인 생각이니 양해 바랍니다
왜 평신도가 신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 신앙의 정체성이 성서에 올바르게 기반하고 있는가 ? 하고
본인이 성서를 본래 성서가 뜻하는바 대로
이해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검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얼마나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가 생각 해보면
왜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데는 소홀히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의 세상직업(?)은 고작해야 몇 십년 유효 한것이고, 또 수시로 입장을 바꿀 수도 있지만
신앙은 변경도 어렵거니와 또한 살아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영원의 문제까지
다루어야 하는 무시간적인 영원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신앙의 문제는 내 직업보다도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직업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기는 어렵겠지만, 신앙은 내 목숨을 요구 할 수도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신학적인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분하고 신앙에관하여 이야기 중에 그분 말씀이
' "내 신앙은 우리 목사님 한테 맡겼다 나는 잘 몰라도 된다.
그저 교회만 잘 나가면된다" 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왜 자기 목숨을 남의 손에 맡깁니가?
아직 현실로 닥아오지 않아서인가요?
아는 만크큼 보고 아는만큼 듣고, 아는만큼 깨닫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묻는만큼 대답한다.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라 하더라도 자기가 아는만큼의 선에서 끊임없이
신학적으로 성서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하는것 입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기독교 평신도들은 아주 전문적 수준까지 신학적으로
성서를 연구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분들의 성격의 특징으로 무엇이든지 아마추어라도
전문가의 수준까지 연구 하는 기질탓이기도 합니다 만은 평신도들에게 전문적인 신학서적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일본에 초청받어 가서 설교를 하는데 앞에 앉으신 할머니들이
희랍어성경(신약)과 희브리어(구약) 성경을 펴 놓고 있는데 놀랄 정도가 아니라
설교를 못하겟드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은적 있습니다
신학은 결코 목회자가 되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내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아주 주요한 도구의 하나 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데 까지
신학적인 물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평신도가 신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어차피 기독교 신앙에 들어서면
그것은 교회와 목회자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것이 성서가 원하는데로 가느냐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하는일이고 직업적이다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지요
바로 그 판단을 신학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이트가 존재하게 된것도 한국의 유명한 설교자들이 얼마나 성서의 뜻을
벗어나서 설교를 하는가를
나름대로 정직하게 비평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속된말로 목회자의 구라(?)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도
평신도가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평신도가 앞서 예로 든 일본분들 처럼 전문적인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목회자가 감히 성서를 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혹은 소홀히 하거나 다른 목적을 위해서 설교 할 수 있겠습니가?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기독교가 이 지경이 된것은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 목회자의 책임도 크지만
평신도들이 성서연구를 신학적으로 하지 않고
방관한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요구하는 신앙의 정체성도 찾고,
또 교회를 성서의 뜻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도
한국의 평신도 들도 진지한 신학 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가(장로, 권사, 집사) 되려면
제대로 된 신학을 공부하도록 필수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의 생활을 보내온 사람으로서
느낀바가 있어 적어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말빨"(?) 로는 조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빨은 전무해서
그냥 구술체로 적으니, 정연하지 못하고 논리비약이나 단어 사용의 부적절한 것 등등을 이해 바라고
전문가가 아니고 아마추어의 개인적인 생각이니 양해 바랍니다
왜 평신도가 신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 신앙의 정체성이 성서에 올바르게 기반하고 있는가 ? 하고
본인이 성서를 본래 성서가 뜻하는바 대로
이해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검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얼마나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가 생각 해보면
왜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데는 소홀히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의 세상직업(?)은 고작해야 몇 십년 유효 한것이고, 또 수시로 입장을 바꿀 수도 있지만
신앙은 변경도 어렵거니와 또한 살아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영원의 문제까지
다루어야 하는 무시간적인 영원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신앙의 문제는 내 직업보다도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직업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기는 어렵겠지만, 신앙은 내 목숨을 요구 할 수도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신학적인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분하고 신앙에관하여 이야기 중에 그분 말씀이
' "내 신앙은 우리 목사님 한테 맡겼다 나는 잘 몰라도 된다.
그저 교회만 잘 나가면된다" 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왜 자기 목숨을 남의 손에 맡깁니가?
아직 현실로 닥아오지 않아서인가요?
아는 만크큼 보고 아는만큼 듣고, 아는만큼 깨닫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묻는만큼 대답한다.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라 하더라도 자기가 아는만큼의 선에서 끊임없이
신학적으로 성서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하는것 입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기독교 평신도들은 아주 전문적 수준까지 신학적으로
성서를 연구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분들의 성격의 특징으로 무엇이든지 아마추어라도
전문가의 수준까지 연구 하는 기질탓이기도 합니다 만은 평신도들에게 전문적인 신학서적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일본에 초청받어 가서 설교를 하는데 앞에 앉으신 할머니들이
희랍어성경(신약)과 희브리어(구약) 성경을 펴 놓고 있는데 놀랄 정도가 아니라
설교를 못하겟드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은적 있습니다
신학은 결코 목회자가 되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내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아주 주요한 도구의 하나 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데 까지
신학적인 물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평신도가 신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어차피 기독교 신앙에 들어서면
그것은 교회와 목회자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것이 성서가 원하는데로 가느냐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하는일이고 직업적이다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지요
바로 그 판단을 신학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이트가 존재하게 된것도 한국의 유명한 설교자들이 얼마나 성서의 뜻을
벗어나서 설교를 하는가를
나름대로 정직하게 비평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속된말로 목회자의 구라(?)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도
평신도가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평신도가 앞서 예로 든 일본분들 처럼 전문적인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목회자가 감히 성서를 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혹은 소홀히 하거나 다른 목적을 위해서 설교 할 수 있겠습니가?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기독교가 이 지경이 된것은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 목회자의 책임도 크지만
평신도들이 성서연구를 신학적으로 하지 않고
방관한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요구하는 신앙의 정체성도 찾고,
또 교회를 성서의 뜻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도
한국의 평신도 들도 진지한 신학 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가(장로, 권사, 집사) 되려면
제대로 된 신학을 공부하도록 필수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사놓고도 그냥 팽개쳐 두었던 책을 아침에 잠깐 들었었는데
제목이 "Who Needs Theology?/ An Invitation to the Study of God"..
마침 비슷한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네요.
여러 말씀들에 공감하지만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해야한다는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맞닿게 되는 것이 결국은 신.
즉 하나님에 대한 생각 아닌지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평신도들 보다 더 많이 배우고 혹 더 많이 깨우쳤을거라는 기대감은 있으나
늘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살면서 많이 봤지만
그들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배워야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다비아가 참 고맙습니다.
여러 다른 모습의 신앙들을 접할 수 있기에..
감사합니다.
제목이 "Who Needs Theology?/ An Invitation to the Study of God"..
마침 비슷한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네요.
여러 말씀들에 공감하지만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해야한다는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맞닿게 되는 것이 결국은 신.
즉 하나님에 대한 생각 아닌지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평신도들 보다 더 많이 배우고 혹 더 많이 깨우쳤을거라는 기대감은 있으나
늘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살면서 많이 봤지만
그들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배워야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다비아가 참 고맙습니다.
여러 다른 모습의 신앙들을 접할 수 있기에..
감사합니다.
영국 성공회 사제 존 스토트 신부(Rev. John Stott)는 복음주의 교회는 그리스도교 사상을 통해 사회문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신학공부를 통해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죠. 왜냐면 성서시대도 우리가 사는 시대와 같은 사회문제를 갖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좌로 아모스 예언자가 말한 바산의 암소들이 한국사회에도 '리만 브라더스','강부자'등으로 불리며 버젓이 존재하고 있고, 예수가 마가복음서 10장에서 말한 로마제국의 팍스 로마나가 현대사회에는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은 현대사회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고요.
따라서 신학을 통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한국의 그리스도 교인들은 한국사회와 교회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밝게 비추는 진정한 빛과 소금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을 거라고, 김교신 선생이 그분의 일기에서 말씀하신 사회주의자보다 훨씬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 교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신:일본의 그리스도교인들을 말씀하셨는데, 제가 알기로도 일본 그리스도교인들은 진지하게 신앙생활한다고 들었습니다. 예장통합 이재철 목사님이 쓰신 글(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이재철 지음/홍성사)을 보면, 일본 그리스도 교인들은 세례성사를 받기전에 여러 번 생각한다고 합니다. 성 바울의 말처럼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남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 교인들은 새로 난 사람답게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교회는 한국인 목사가 "음메. 기죽어"라고 한탄하게 한 할머니 교우들은 물론, 가가와 도요히코, 엔도 슈사쿠, 우치무라 간조, 미우라 아야코등의 훌륭한 그리스도 교인들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신학을 통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한국의 그리스도 교인들은 한국사회와 교회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밝게 비추는 진정한 빛과 소금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을 거라고, 김교신 선생이 그분의 일기에서 말씀하신 사회주의자보다 훨씬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 교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신:일본의 그리스도교인들을 말씀하셨는데, 제가 알기로도 일본 그리스도교인들은 진지하게 신앙생활한다고 들었습니다. 예장통합 이재철 목사님이 쓰신 글(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이재철 지음/홍성사)을 보면, 일본 그리스도 교인들은 세례성사를 받기전에 여러 번 생각한다고 합니다. 성 바울의 말처럼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남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 교인들은 새로 난 사람답게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교회는 한국인 목사가 "음메. 기죽어"라고 한탄하게 한 할머니 교우들은 물론, 가가와 도요히코, 엔도 슈사쿠, 우치무라 간조, 미우라 아야코등의 훌륭한 그리스도 교인들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고대교회 즉, 초대교회의 영성가들이요 신학자들이었던 교부들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쓴 책들을 읽는 것이........................바우로님이 소개해 주실 책은 어떤 책인가요? 기대가 됩니다.
저는 다비아를 통해서 신앙의 업그레이드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안직 멀었지만요.
다비아 가족에게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비아를 통해 소개 받는 책들은 다 욕심이 나서 계속 구입하여 읽고 있습니다.
책소개는 릴레이로 계속 이어지는군요.
소개 받은 책을 읽다 보면
책속에서 책을 보개받는 횡재도 누리고 있죠.
책꽃이에 있는 책만 봐도 든든해요.
저는 다비아를 통해서 신앙의 업그레이드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안직 멀었지만요.
다비아 가족에게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비아를 통해 소개 받는 책들은 다 욕심이 나서 계속 구입하여 읽고 있습니다.
책소개는 릴레이로 계속 이어지는군요.
소개 받은 책을 읽다 보면
책속에서 책을 보개받는 횡재도 누리고 있죠.
책꽃이에 있는 책만 봐도 든든해요.
비인가 신학교 문제는 기독교 일부 집단이 "종교의 자유"를 악용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파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기독교신학이란 간판으로 사회에서 여러가지 이득(돈, 명예...)을
얻으려는 방편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즉 자기들 이득을 위해 "예수 "를 이용하는 것이겟지요
또하나는 한국에 만연해 있는(?) 목회자가 " 생존직업'의 하나로 되어서
직업을(?) 얻으려는 수단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대다수란 것이겟지요
대게 비인가 신학을 하는 이들을 보면 "먹고 사는 직업'으로서 목회라는 것을 하려는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니 정상적인 "솔직한" 성서의 진정성을 찾는 신학은 어렵겟지요
비인가 신학과 안수 문제는 기독교 이름으로 사회와 하늘에 죄를 짖는 행위라고 봅니다
(제 주위에도 여러분이 그런경우를 거쳐서 안수 받고 목회(?)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한국교회안에서 현실은 "신학적 사고"를 금기시하는 풍토지요
그저 "예수,천당" 식으로 생활하라는 것이지요
결국은 " 목회자의 진정성" 과 평신도의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파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기독교신학이란 간판으로 사회에서 여러가지 이득(돈, 명예...)을
얻으려는 방편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즉 자기들 이득을 위해 "예수 "를 이용하는 것이겟지요
또하나는 한국에 만연해 있는(?) 목회자가 " 생존직업'의 하나로 되어서
직업을(?) 얻으려는 수단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대다수란 것이겟지요
대게 비인가 신학을 하는 이들을 보면 "먹고 사는 직업'으로서 목회라는 것을 하려는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니 정상적인 "솔직한" 성서의 진정성을 찾는 신학은 어렵겟지요
비인가 신학과 안수 문제는 기독교 이름으로 사회와 하늘에 죄를 짖는 행위라고 봅니다
(제 주위에도 여러분이 그런경우를 거쳐서 안수 받고 목회(?)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한국교회안에서 현실은 "신학적 사고"를 금기시하는 풍토지요
그저 "예수,천당" 식으로 생활하라는 것이지요
결국은 " 목회자의 진정성" 과 평신도의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이 무슨 특별한 "기술" 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를 좀더 "정직하게" 이해 하려는 노력이겟지요
신학이 성서를 뛰어 넘을 수는 없겟지요
신학이 성서의 어떤 특별한 "비밀"을 발견해 내는 기술은 아니지요
더군다나 어떤 자격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성서와 교회라는 틀 에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것을 진솔하게 깨닫고 살아가려는 노력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미국이나 외국은 잘 모릅니다)을 보면
교회내의 생활은 18세기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일반 사회는 21세기 첨단을 사는데 교회내에서 사용하는 언설들(설교, 성서언어 행정집행...등등) 보면 18세기에서
변화 하지않고 사용되는것 같습니다
교인들 개개인은 일반 사회에서는 21세기 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엘리트 들인데
왜 교회안에만 들어오면 사회와 소통이 안되는 '게토" 속에서 살어야하는 것인지요
목회자들이 자기 중심의 폐쇠성으로 신학적인 언설들을 금기시 하는 경향도 원인이겟지만
평신도들도 자기들이 가장 소중한 것(시간 돈 명예..)을 가장 많이 받치는(?) 신앙의 삶에 대한 자각적인
성찰을 하지 않으려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일반 생존의 직장 에서 내 직위나 전문성에 대해서 그렇게 소홀 할수는 없겟지요
신학이란 어떤 전문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올바른 신앙과 그 삶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어가는 치열한 "도상의 실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도 자기신앙을 위해서 신학적 사고를 해야겟지요
다비아의 성격이 그런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란것이 그런 노력이 아닐가요?
그냥 해보는 "지적 놀이"(머리 굴리기) 는 아니겟지요
성서를 좀더 "정직하게" 이해 하려는 노력이겟지요
신학이 성서를 뛰어 넘을 수는 없겟지요
신학이 성서의 어떤 특별한 "비밀"을 발견해 내는 기술은 아니지요
더군다나 어떤 자격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성서와 교회라는 틀 에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것을 진솔하게 깨닫고 살아가려는 노력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미국이나 외국은 잘 모릅니다)을 보면
교회내의 생활은 18세기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일반 사회는 21세기 첨단을 사는데 교회내에서 사용하는 언설들(설교, 성서언어 행정집행...등등) 보면 18세기에서
변화 하지않고 사용되는것 같습니다
교인들 개개인은 일반 사회에서는 21세기 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엘리트 들인데
왜 교회안에만 들어오면 사회와 소통이 안되는 '게토" 속에서 살어야하는 것인지요
목회자들이 자기 중심의 폐쇠성으로 신학적인 언설들을 금기시 하는 경향도 원인이겟지만
평신도들도 자기들이 가장 소중한 것(시간 돈 명예..)을 가장 많이 받치는(?) 신앙의 삶에 대한 자각적인
성찰을 하지 않으려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일반 생존의 직장 에서 내 직위나 전문성에 대해서 그렇게 소홀 할수는 없겟지요
신학이란 어떤 전문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올바른 신앙과 그 삶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어가는 치열한 "도상의 실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도 자기신앙을 위해서 신학적 사고를 해야겟지요
다비아의 성격이 그런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란것이 그런 노력이 아닐가요?
그냥 해보는 "지적 놀이"(머리 굴리기) 는 아니겟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