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접시꽃 당신

-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들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오늘 겨울비가 촉촉이 내렸습니다.
몇 일 전부터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가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까 생각해 보니
이 시가 주는 하루 하루 삶과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어 주는 것을 느낄수가 있네요.

생명의 본질이 때론 큰 질병앞에, 죽음앞에 직면했을 때, 그때서야 우리가 생명 아닌 것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깨닫게 되겠지요? 일상에 파묻혀 우리의 시간과 생명을 소진해 버리는 것이 어쩌면 심판의 삶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듭니다.

일상의 타성에 젖어 무기력한 삶과 냉소적인 삶을 벗어나 이 시가 주는 열림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목숨까지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 주겠다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때 거룩한 두려움 마저 밀려옵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과 집착으로 사는 우리를 위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곧 오듯이 우리의 생명도 어느 듯 죽음앞에 직면하겠죠?
그러기에 지금 내 삶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되돌아 보게 됩니다. 매일의 삶에서 새로운 현실에 대한 인식과 생명의 깊이로 나아가지 않으면 바로 그 자체가 늙음과 죽음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늦은 밤이다. 오늘 따라 아내도 옆에서 책을 읽고 있다. 평소 같으면 일찍 자는데...
내 혼자 밤마다 궁상뜨는 것이 배가 아픈 모양이다.  12시에 배가 추출해서 라면 끓여 먹고
오늘 새벽까지 강행군 할 작전 모양이다.  이 시간이 행복하다.  나의 작은 바램이 있다면 나의 아이들이 크면 다 같이 한 자리에 앉아 공부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 하루가 시작되겠죠. 어쩌면 하루라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하나님안에서는 영원한 시간만이 있을 테니까요.  오늘도 하나님안에서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그 심층에 세계에 내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 두고싶습니다...

2008년 11월 25일 깊은 밤 아내와 궁상을 뜨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