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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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를 둘러싼 해석
절대주의자 - 뛰는 놈 위에는 반드시 나는 놈이 있다.
상대주의자 - 뛰는 놈이 있기 때문에 나는 놈이 있다.
신비주의자 - 뛰는 놈이 나는 놈이다.
낙관주의자 - 뛰는 놈도 언젠가는 날 수 있는 때가 온다.
비관주의자 - 나는 놈도 언젠가는 뛸 수밖에 없는 때가 온다.
공자 - 뛰는 놈은 나는 놈에게 공손해야 한다.
생물학자 - 뛰는 놈은 다리가 있고 나는 놈은 날개가 있다.
아인슈타인 - 뛰는 놈보다 나는 놈의 시계가 느리게 간다.
칼 융 - 뛰는 놈은 주행콤플렉스에, 나는 놈은 비행콤플렉스에 사로잡혔다.
최불암 - 뛰는 것이 있으니 나는 놈도 있구려, 푸허허.....
애덤 스미스 - 뛰는 놈과 나는 놈이 서로 분업한 게 틀림없다.
칼 마르크스 - 뛰는 놈은 나는 놈에게 착취당하고 있다.
양반 - 뛰는 놈이나 나는 놈이나 모두 상놈이여.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얘기이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릅니다. 편견(偏見)이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말합니다. 물론 사람이 신(神)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공정하고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내 생각을 다른 이에게 관철(貫徹)시키려는 억지나, 배려(配慮)를 가장한 욕심이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처럼 그릇된 태도는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편견에서 시작됩니다. 한계가 있는 사람이니까 공정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나를 향해 있으니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도 상대의 다양한 의견과 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여기는 못된 습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고약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자, 생각해 봅시다. 위에 제시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를 둘러싼 해석을 보면 한 가지 명제를 놓고 정말 많은 해석이 나옵니다. 해석의 수준 차이는 있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전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해석을 서로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화합은커녕 우리의 인간관계는 갈등과 반목과 시기와 질투와 위선과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모두가 불행해지고 마는.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는 분명해집니다. 서로 다름을 기꺼이 인정해주는 것이고, 쉽지는 않겠지만 상대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 생각과 고집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고,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편견은 언제나 오만(傲慢)이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영국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보듯이 이 옷을 먼저 벗는 자에게 행복은 찾아올 것입니다.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상대를 속이지 않으려는 태도,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시급한 덕목이 아닐까요.
절대주의자 - 뛰는 놈 위에는 반드시 나는 놈이 있다.
상대주의자 - 뛰는 놈이 있기 때문에 나는 놈이 있다.
신비주의자 - 뛰는 놈이 나는 놈이다.
낙관주의자 - 뛰는 놈도 언젠가는 날 수 있는 때가 온다.
비관주의자 - 나는 놈도 언젠가는 뛸 수밖에 없는 때가 온다.
공자 - 뛰는 놈은 나는 놈에게 공손해야 한다.
생물학자 - 뛰는 놈은 다리가 있고 나는 놈은 날개가 있다.
아인슈타인 - 뛰는 놈보다 나는 놈의 시계가 느리게 간다.
칼 융 - 뛰는 놈은 주행콤플렉스에, 나는 놈은 비행콤플렉스에 사로잡혔다.
최불암 - 뛰는 것이 있으니 나는 놈도 있구려, 푸허허.....
애덤 스미스 - 뛰는 놈과 나는 놈이 서로 분업한 게 틀림없다.
칼 마르크스 - 뛰는 놈은 나는 놈에게 착취당하고 있다.
양반 - 뛰는 놈이나 나는 놈이나 모두 상놈이여.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얘기이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릅니다. 편견(偏見)이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말합니다. 물론 사람이 신(神)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공정하고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내 생각을 다른 이에게 관철(貫徹)시키려는 억지나, 배려(配慮)를 가장한 욕심이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처럼 그릇된 태도는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편견에서 시작됩니다. 한계가 있는 사람이니까 공정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나를 향해 있으니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도 상대의 다양한 의견과 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여기는 못된 습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고약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자, 생각해 봅시다. 위에 제시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를 둘러싼 해석을 보면 한 가지 명제를 놓고 정말 많은 해석이 나옵니다. 해석의 수준 차이는 있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전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해석을 서로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화합은커녕 우리의 인간관계는 갈등과 반목과 시기와 질투와 위선과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모두가 불행해지고 마는.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는 분명해집니다. 서로 다름을 기꺼이 인정해주는 것이고, 쉽지는 않겠지만 상대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 생각과 고집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고,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편견은 언제나 오만(傲慢)이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영국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보듯이 이 옷을 먼저 벗는 자에게 행복은 찾아올 것입니다.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상대를 속이지 않으려는 태도,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시급한 덕목이 아닐까요.
목사님의 글을 읽으니 김광규 시인의 '생각의 사이' 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좀 길지만, 찾아 옮겨봅니다.
......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하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
다비안들은 과연
무엇과 무엇의 사이를 생각하는 이들일까요?
좀 길지만, 찾아 옮겨봅니다.
......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하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
다비안들은 과연
무엇과 무엇의 사이를 생각하는 이들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