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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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북인도에서 살아오며 주기적으로 느끼는 뭔가가 있다. 3월 홀리(Holi)가 되면 물감 물벼락과 함께 다가오는 숨막히는 더위, 10월 디왈리(Diwali)가 되면 왁작지껄한 폭죽 다음으로 다가오는 살 떨리는 추위가 그것이다. 비록 영상 10도라 하더라도 온방 설비 전혀 되어 있지 않는 대리석 집안에 있어 본 사람은 정말 이 추위가 얼마나 심한지 실감이 날거다.
또 하나, 이건 주기가 5년 단위로 좀 길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리고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하는 헬리혜성과 같은 화끈한 주기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력, 강간, 살인, 학살, 그리고 테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 이거는 영락(零落)없는 선거가 가까왔다는 증거다. 꼭 임박한 산기를 느끼는 산모의 주기같기도 하고 예수가 재림할 그 때를 상상하게 하는 주기이기도 하다. 금주 목요일 새벽 2시에 전화를 받고 동네 택시 스탠드에 가서 택시안에 자고 있는 운전수를 깨워 덜덜 대면서 비상출근하게한 뭄바이 테러, 이 배경도 총선이 임박했다는 주기 현상의 일부라고 느껴지는 것은 너무 지나친 억측인가?
은둔, 은자의 나라, 요기의 나라 인도에서 이런 테러가 발생한다는 것은 류시화시인의 ‘하늘 호수’란 책을 읽고 인도를 방문하기를 동경하는 이들에게는 한참 동안의 혼돈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은자(隱者)와 테러?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개념의 합성인가. 개념상으로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실이요 현실로 존재하는 놀람을 안겨다 주는 나라가 바로 인도다. 그래서 인도 관광청은 인도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인도를 소개할 때 아예 자기나라를 경이의 나라(Incredible India)라고 소개한다. 아마 표면을 읽는 이들은 아하 인도는 가면 정말 놀랄만한 볼거리들이 많이 있을 거다 잔뜩 기대에 부푼다. 그렇게 기대에 부풀었다면 정확히 요즘 젊은이들 말로 낚인 거다. 요기(은자)와 테러리스트가 함께하며 ‘동숙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라가 인도란 것을 모르고 하늘 호수의 매력에 낚인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 류시인에게 치명타를 주는 것이니 조금 책임을 분배하자. 솔직히 말하면 인도를 그렇게 여기고 싶은 인도 방문객들 자신들의 마음에 낚인 거다. 자기원하는 표면만 보고 싶고 그래서 와서 표면만 보고 그렇다고 맞장구 치고 자기만족을 살짝 얻어가고 싶은 자기 마음에 낚인 거니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정작 그 이면을 알고 놀라더라도 그 책임을 애꿎은 인도관광청이나 인도에 대한 글을 쓴 이들을 원망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제 그만 너스레 떨고 제목에 맞는 이야기해보자. 은자의 이야기가 아닌 테러이야기 말이다. 과장법 쓰기 좋아하는 인도언론은 이 뭄바이 테러를 미국의 9.11테러와 맞먹는 것이라고 한다. 미국이 패권을 자랑하며 기독교를 앞세운 세계 제일의 강국으로서 약소국을 유린하며 무기 팔아 잘먹고 잘 살고 있을때 그 희생양이 되어 죽어간 억울한 생명들의 피가 스며든 땅이 분노하여 그 위에 세워진 그 탄탄한 쌍둥이 빌딩을 날려버린 것이 9.11이다. 이 글 미국 CIA가 읽으면 당장 입국규제자 명단에 올라 딸 졸업식에 못갈 위험이 있으나 할 말은 해야겠다. 내가 이런 말을 쓴다고 해서 결코 테러옹호자거나 미국을 비난하는 혐미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다. 생명을 파괴하는 자를 혐오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테러리스트들의 행한 방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분노한다. 분노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분노의 싹을 삭초제근해보고자 사실은 이 땅에 지겹도록 살고 있는 것이다. 길이 안 보이더라도 그런 길을 열어가고자 이렇게 하루 하루 먼지 가득한 도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9.11을 자업자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뭄바이 테러도 다름 아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힌두들을 몰아세우는 결론을 내는 것 같아서 조금 글이 사나와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내가 무슬림과 어울려 꽤 오랜 세월 지냈다고 무슬림 편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속내는 솔직히 그렇다. 비교적 먼 길 돌아서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 테러가 일어난 배경을 짚어 나가자면 결국은 인도 인구의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힌두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거칠게 쏟아 놓은 거다. 조금 자세하게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해보자. 테러가 나자마자 데칸 무자헤딘이라는 무슬림 과격단체가 자기들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고 밝혔다. 인도정부에서 이메일을 받았다고 했으니 믿거나 말거나다. 그러나 파키스탄인도 개입되었다고 했으니 이것도 인도 정부가 강도의 차이를 어떻게 조절해 나가느냐는 정치, 기술적인 문제가 있겠지만 결국은 무슬림이 이 일을 저질렀다는 자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이 인도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냐는 상황설명이 그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보통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자면 배경설명이 있어야 한다. 카이로스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가 과거를 기반으로 배태된 것이 일단 진실이라면 이런 끔찍한 테러가 인도인의 경제수도라고 할 수 있는 뭄바이에서 일어난 것에는 반드시 짚어야 할 과거의 어떤 부분이, 일의 원인이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뭘까? 사람이 극단적이 되는 것은 뭔가에 충격을 받아 돌아 버릴 때다. 비정상적이 될 때다. 뭐가 20대 팔팔한 젊은이들을 돌아버리게 했고 비정상적이 되게 했을까?
무엇보다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받는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인도 역사를 좀 아는 이들은 무슬림들이 300년이 넘도록 북인도에서 무굴제국으로 집권층에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힌두 다수에 대한 자구책으로 1947년 8월 15일 순수한 무슬림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파키스탄으로 분리해 나갔다는 것도 안다. 비록 영제국의 분리와 통치의 여파도 있었지만. 그 분리해 나간 대다수 사람들이 지식층, 지주층, 지도층들이라 남아 있게 된 무슬림은 비록 현재 인구 1억 4,5천, 14%를 이야기하지만 실제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계급들이다. 인도에 남아있는 인도 무슬림의 다수들의 조상은 다름 아닌 옛적부터 사회로부터 소외된 불가촉천민들이었다. 그러니 인도에서 힌두 아닌 무슬림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벅차고 힘든 것인가 짐작이 된다. 물론 그중 식자층, 지도층, 부자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슬림 중산층들이 다수 힌두 사회에서 밥그릇 챙기기가 만만치 않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천민계층의 자제들로 태어나 어떻게 대학문을 두드린 무슬림 젊은이가 취직하기 힘든 현실에 절망한다. 취직하더라도 출세는 아예 생각하기도 힘든 현실에 다시 한 번 절망한다. 주기적으로 터지는 힌두우익정당의 무슬림에 대한 계산된 횡포를 보며 절망은 분노로 변한다. 이런 젊은이들을 모아 각색된, 아니 편향된 시각으로 인도 사회를 보도록 세뇌를 한다. 거기다 알라의 뜻이라는 시대적 영웅의 사명감의 기름을 부어 무기를 안긴다. 기름이 떨어질만하면 비참한 현실과 알라의 뜻의 기름을 다시 주입시킨다. 아울러 고통 받는 동족을 구원하는 이 시대의 영웅이 되고 알라의 품에 안기라는 격려도 아끼지 않는다. 다소 거칠고 너무 도식화 시킨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것이 테러 배경의 대략 흐름도이다.
그렇다면 왜 같은 소외계층인 힌두체재하의 달릿뜨(불가촉천민)이나 크리스천들은 테러를 하지 않고 무슬림만 이렇게 잔혹한 테러를 할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 이야기도 설명이 좀 필요하다. 힌두체제하의 달릿뜨(불가촉천민)들은 선거를 통해 자기들을 대표할 지도자를 선출하지만 그 지도자들이 권력과 부의 맛을 알고 그 세계에 소속이 되어버렸다. 외적으로는 천민대표지만 실제적으로는 또 다른 헤게모니 그룹을 형성하여 정치권의 카르텔을 형성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차선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대중은 선거때마다 속을 줄 알면서도 잠시 던져주는 달콤한 사탕에 정신이 팔려 무더기로 밀어주는 선거행태가 내년 선거에도 또 반복될거다. 이 지도층이 힌두체계하 소외계층의 완충장치를 역할을 담당하여 이들로 인한 극한 행동상황이 연출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을 간파한지 영악한 힌두 지도계층은 천민 지도층 인사를 대통령으로 모시기도 하고 또 거대한 UP주의 주수상이 되어도 거기에 뭐라고 하지 않는다. 허울뿐인 세속주의,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의 너울을 장식하는 장식품으로, 또는 그들의 어눌한 말과 정치행태를 조소 띠고 쳐다보는 것이다.
기독교를 보자. 테러 운운하기에는 기독교는 일단 숫자가 너무 작다. 그리고 그 이념자체가 사랑이 아닌가. 그 이념 자체가 손에서 쥐고 있던 무기도 빼앗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힌두 세력에 지금 현 상황에서 항거를 했다가는 아예 생존의 근거마저 상실되기 때문에 그저 산으로 타향으로 살길을 찾아 도망갈 수밖에 없다. 독립 즈음해서 그렇게 많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은근슬쩍 자기 밥그릇 챙기느라고 일선뒤로 물러선 것이 이제는 기독교인 명함을 인도에서 내미는 자체가 멀쑥하게 되는 지경까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래 저래 어쩌면 인도에서 가장 소외받고 불쌍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닐까. 기독교인들은 테러리스트를 양산할 수도 없고 오히려 야비한 힌두테러리스트들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일설에 의하면 지난 8-9월 오릿사 지역에서 있었던 그 박해도 힌두과격주의자들이 공산당과 맞붙기가 애매하니까 그 화살을 기독교인들 부족으로 돌려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인도 꼴까타(구캘커타)에 가면 식물원이 있다. 거기에 수백그루의 번연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어미 나무는 벼락에 타서 죽었지만 자식 나무들이 이리 저리 사방으로 가지에서 뿌리를 내려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힌두나 무슬림이나 따지고 올라가면 한 나라에서 파생된 동족이다. 종교와 이념은 변수가 될 수 있지만 삶 자체는 인도라는 이 땅에서 살아갈때 상수다. 변수가 상수를 어떻게 해서는 안된다. 번연나무와 ‘더불어 숲’을 이루어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들의 존귀한 모임이 인도라는 나라다.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더 이상 한 몸이나 다름없는 다른 지체들을 파괴하는 것은 자멸의 길에 다름없다.
1년이 처음 시작되는 대림절주일이다. 종말의 생명이 이 인도에도 분명히 현재로 와 있건만 그래서 그러한 재림신앙으로 살아가야 하건만 사람 모이는 곳 가는 자체가 살 떨리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리고 상처입고 소외된 무슬림들을 어떻게 보듬고 섬기면서 우리안에 이미 임한 생명의 완성의 환희를 안겨줄까? 아무것도 할 게 없다. 그저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피곤함 모르게 하는 그 생명을 이 현실가운데 담고 묵묵히 내 앞에 주어진 길 걸어가야겠다.
또 하나, 이건 주기가 5년 단위로 좀 길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리고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하는 헬리혜성과 같은 화끈한 주기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력, 강간, 살인, 학살, 그리고 테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 이거는 영락(零落)없는 선거가 가까왔다는 증거다. 꼭 임박한 산기를 느끼는 산모의 주기같기도 하고 예수가 재림할 그 때를 상상하게 하는 주기이기도 하다. 금주 목요일 새벽 2시에 전화를 받고 동네 택시 스탠드에 가서 택시안에 자고 있는 운전수를 깨워 덜덜 대면서 비상출근하게한 뭄바이 테러, 이 배경도 총선이 임박했다는 주기 현상의 일부라고 느껴지는 것은 너무 지나친 억측인가?
은둔, 은자의 나라, 요기의 나라 인도에서 이런 테러가 발생한다는 것은 류시화시인의 ‘하늘 호수’란 책을 읽고 인도를 방문하기를 동경하는 이들에게는 한참 동안의 혼돈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은자(隱者)와 테러?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개념의 합성인가. 개념상으로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실이요 현실로 존재하는 놀람을 안겨다 주는 나라가 바로 인도다. 그래서 인도 관광청은 인도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인도를 소개할 때 아예 자기나라를 경이의 나라(Incredible India)라고 소개한다. 아마 표면을 읽는 이들은 아하 인도는 가면 정말 놀랄만한 볼거리들이 많이 있을 거다 잔뜩 기대에 부푼다. 그렇게 기대에 부풀었다면 정확히 요즘 젊은이들 말로 낚인 거다. 요기(은자)와 테러리스트가 함께하며 ‘동숙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라가 인도란 것을 모르고 하늘 호수의 매력에 낚인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 류시인에게 치명타를 주는 것이니 조금 책임을 분배하자. 솔직히 말하면 인도를 그렇게 여기고 싶은 인도 방문객들 자신들의 마음에 낚인 거다. 자기원하는 표면만 보고 싶고 그래서 와서 표면만 보고 그렇다고 맞장구 치고 자기만족을 살짝 얻어가고 싶은 자기 마음에 낚인 거니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정작 그 이면을 알고 놀라더라도 그 책임을 애꿎은 인도관광청이나 인도에 대한 글을 쓴 이들을 원망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제 그만 너스레 떨고 제목에 맞는 이야기해보자. 은자의 이야기가 아닌 테러이야기 말이다. 과장법 쓰기 좋아하는 인도언론은 이 뭄바이 테러를 미국의 9.11테러와 맞먹는 것이라고 한다. 미국이 패권을 자랑하며 기독교를 앞세운 세계 제일의 강국으로서 약소국을 유린하며 무기 팔아 잘먹고 잘 살고 있을때 그 희생양이 되어 죽어간 억울한 생명들의 피가 스며든 땅이 분노하여 그 위에 세워진 그 탄탄한 쌍둥이 빌딩을 날려버린 것이 9.11이다. 이 글 미국 CIA가 읽으면 당장 입국규제자 명단에 올라 딸 졸업식에 못갈 위험이 있으나 할 말은 해야겠다. 내가 이런 말을 쓴다고 해서 결코 테러옹호자거나 미국을 비난하는 혐미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다. 생명을 파괴하는 자를 혐오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테러리스트들의 행한 방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분노한다. 분노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분노의 싹을 삭초제근해보고자 사실은 이 땅에 지겹도록 살고 있는 것이다. 길이 안 보이더라도 그런 길을 열어가고자 이렇게 하루 하루 먼지 가득한 도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9.11을 자업자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뭄바이 테러도 다름 아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힌두들을 몰아세우는 결론을 내는 것 같아서 조금 글이 사나와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내가 무슬림과 어울려 꽤 오랜 세월 지냈다고 무슬림 편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속내는 솔직히 그렇다. 비교적 먼 길 돌아서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 테러가 일어난 배경을 짚어 나가자면 결국은 인도 인구의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힌두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거칠게 쏟아 놓은 거다. 조금 자세하게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해보자. 테러가 나자마자 데칸 무자헤딘이라는 무슬림 과격단체가 자기들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고 밝혔다. 인도정부에서 이메일을 받았다고 했으니 믿거나 말거나다. 그러나 파키스탄인도 개입되었다고 했으니 이것도 인도 정부가 강도의 차이를 어떻게 조절해 나가느냐는 정치, 기술적인 문제가 있겠지만 결국은 무슬림이 이 일을 저질렀다는 자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이 인도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냐는 상황설명이 그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보통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자면 배경설명이 있어야 한다. 카이로스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가 과거를 기반으로 배태된 것이 일단 진실이라면 이런 끔찍한 테러가 인도인의 경제수도라고 할 수 있는 뭄바이에서 일어난 것에는 반드시 짚어야 할 과거의 어떤 부분이, 일의 원인이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뭘까? 사람이 극단적이 되는 것은 뭔가에 충격을 받아 돌아 버릴 때다. 비정상적이 될 때다. 뭐가 20대 팔팔한 젊은이들을 돌아버리게 했고 비정상적이 되게 했을까?
무엇보다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받는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인도 역사를 좀 아는 이들은 무슬림들이 300년이 넘도록 북인도에서 무굴제국으로 집권층에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힌두 다수에 대한 자구책으로 1947년 8월 15일 순수한 무슬림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파키스탄으로 분리해 나갔다는 것도 안다. 비록 영제국의 분리와 통치의 여파도 있었지만. 그 분리해 나간 대다수 사람들이 지식층, 지주층, 지도층들이라 남아 있게 된 무슬림은 비록 현재 인구 1억 4,5천, 14%를 이야기하지만 실제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계급들이다. 인도에 남아있는 인도 무슬림의 다수들의 조상은 다름 아닌 옛적부터 사회로부터 소외된 불가촉천민들이었다. 그러니 인도에서 힌두 아닌 무슬림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벅차고 힘든 것인가 짐작이 된다. 물론 그중 식자층, 지도층, 부자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슬림 중산층들이 다수 힌두 사회에서 밥그릇 챙기기가 만만치 않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천민계층의 자제들로 태어나 어떻게 대학문을 두드린 무슬림 젊은이가 취직하기 힘든 현실에 절망한다. 취직하더라도 출세는 아예 생각하기도 힘든 현실에 다시 한 번 절망한다. 주기적으로 터지는 힌두우익정당의 무슬림에 대한 계산된 횡포를 보며 절망은 분노로 변한다. 이런 젊은이들을 모아 각색된, 아니 편향된 시각으로 인도 사회를 보도록 세뇌를 한다. 거기다 알라의 뜻이라는 시대적 영웅의 사명감의 기름을 부어 무기를 안긴다. 기름이 떨어질만하면 비참한 현실과 알라의 뜻의 기름을 다시 주입시킨다. 아울러 고통 받는 동족을 구원하는 이 시대의 영웅이 되고 알라의 품에 안기라는 격려도 아끼지 않는다. 다소 거칠고 너무 도식화 시킨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것이 테러 배경의 대략 흐름도이다.
그렇다면 왜 같은 소외계층인 힌두체재하의 달릿뜨(불가촉천민)이나 크리스천들은 테러를 하지 않고 무슬림만 이렇게 잔혹한 테러를 할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 이야기도 설명이 좀 필요하다. 힌두체제하의 달릿뜨(불가촉천민)들은 선거를 통해 자기들을 대표할 지도자를 선출하지만 그 지도자들이 권력과 부의 맛을 알고 그 세계에 소속이 되어버렸다. 외적으로는 천민대표지만 실제적으로는 또 다른 헤게모니 그룹을 형성하여 정치권의 카르텔을 형성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차선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대중은 선거때마다 속을 줄 알면서도 잠시 던져주는 달콤한 사탕에 정신이 팔려 무더기로 밀어주는 선거행태가 내년 선거에도 또 반복될거다. 이 지도층이 힌두체계하 소외계층의 완충장치를 역할을 담당하여 이들로 인한 극한 행동상황이 연출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을 간파한지 영악한 힌두 지도계층은 천민 지도층 인사를 대통령으로 모시기도 하고 또 거대한 UP주의 주수상이 되어도 거기에 뭐라고 하지 않는다. 허울뿐인 세속주의,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의 너울을 장식하는 장식품으로, 또는 그들의 어눌한 말과 정치행태를 조소 띠고 쳐다보는 것이다.
기독교를 보자. 테러 운운하기에는 기독교는 일단 숫자가 너무 작다. 그리고 그 이념자체가 사랑이 아닌가. 그 이념 자체가 손에서 쥐고 있던 무기도 빼앗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힌두 세력에 지금 현 상황에서 항거를 했다가는 아예 생존의 근거마저 상실되기 때문에 그저 산으로 타향으로 살길을 찾아 도망갈 수밖에 없다. 독립 즈음해서 그렇게 많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은근슬쩍 자기 밥그릇 챙기느라고 일선뒤로 물러선 것이 이제는 기독교인 명함을 인도에서 내미는 자체가 멀쑥하게 되는 지경까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래 저래 어쩌면 인도에서 가장 소외받고 불쌍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닐까. 기독교인들은 테러리스트를 양산할 수도 없고 오히려 야비한 힌두테러리스트들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일설에 의하면 지난 8-9월 오릿사 지역에서 있었던 그 박해도 힌두과격주의자들이 공산당과 맞붙기가 애매하니까 그 화살을 기독교인들 부족으로 돌려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인도 꼴까타(구캘커타)에 가면 식물원이 있다. 거기에 수백그루의 번연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어미 나무는 벼락에 타서 죽었지만 자식 나무들이 이리 저리 사방으로 가지에서 뿌리를 내려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힌두나 무슬림이나 따지고 올라가면 한 나라에서 파생된 동족이다. 종교와 이념은 변수가 될 수 있지만 삶 자체는 인도라는 이 땅에서 살아갈때 상수다. 변수가 상수를 어떻게 해서는 안된다. 번연나무와 ‘더불어 숲’을 이루어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들의 존귀한 모임이 인도라는 나라다.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더 이상 한 몸이나 다름없는 다른 지체들을 파괴하는 것은 자멸의 길에 다름없다.
1년이 처음 시작되는 대림절주일이다. 종말의 생명이 이 인도에도 분명히 현재로 와 있건만 그래서 그러한 재림신앙으로 살아가야 하건만 사람 모이는 곳 가는 자체가 살 떨리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리고 상처입고 소외된 무슬림들을 어떻게 보듬고 섬기면서 우리안에 이미 임한 생명의 완성의 환희를 안겨줄까? 아무것도 할 게 없다. 그저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피곤함 모르게 하는 그 생명을 이 현실가운데 담고 묵묵히 내 앞에 주어진 길 걸어가야겠다.
인도가 이렇게 된데는 영국의 책임이 적지 않죠.
자기들이 인도 통치를 위해 써먹던
Divide and Rule을 인도 정치가들에게 가르쳐 줘서
이제 인도 정치인들이 잘 써먹고 있습니다.
그나 저나 이 테러가 서민들을 불안으로 몰아가고
그나마 온건한 현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면
내년 5월 총선을 통하여 집권할 당은
2002년 구즈라트에서 비공식 통계로 양민 2천명을 학살하였던
주역 BJP가 틀림없을텐데 그러면 또 얼마나 무고한 양민이 죽어갈까요.
앞으로 5개월 남짓 정국이 흘러갈 방향이 뻔하게 보여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서민들이 그 악몽을 기억하고 현명한 선택을 하여야 하는데
과거를 잘 잊어 먹기는 인도서민들도 한국 서민 못지 않아서
종내 암울하기만 합니다.
자기들이 인도 통치를 위해 써먹던
Divide and Rule을 인도 정치가들에게 가르쳐 줘서
이제 인도 정치인들이 잘 써먹고 있습니다.
그나 저나 이 테러가 서민들을 불안으로 몰아가고
그나마 온건한 현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면
내년 5월 총선을 통하여 집권할 당은
2002년 구즈라트에서 비공식 통계로 양민 2천명을 학살하였던
주역 BJP가 틀림없을텐데 그러면 또 얼마나 무고한 양민이 죽어갈까요.
앞으로 5개월 남짓 정국이 흘러갈 방향이 뻔하게 보여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서민들이 그 악몽을 기억하고 현명한 선택을 하여야 하는데
과거를 잘 잊어 먹기는 인도서민들도 한국 서민 못지 않아서
종내 암울하기만 합니다.
인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주시는 군요...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밥그릇 챙기느라 슬그머니... 뒤로 빠진 모습이나...
변수로 상수를 흔드는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투영되는 모습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영국 사람들이 떠나면서 그냥 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에라~ 요넘들 골탕이나 먹어봐라' 하고 객기를 부려본 것 같습니다.
인도야 워낙 덩어리가 큰 나라이고
싫으면 찢어질 땅이라도 있으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덩어리 작은 우리나라는 바로 티가 나죠...
그런데도 아직 일제시대가 조선 근대화의 토대였다는 등의 뉴라이트 계열의
헛소리 지껄이는 안병익 같은 양반들이 식자층으로 서울대 명예교수 자리나 차지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그리고... 요즘... 교회들... 사람 많이 모으기 좋아하는데...
satya님 글 보니... 폭탄 테러하기 좋은 대상이네요...ㅡㅡ;
바벨탑에서 흩으셨고 시내산 아래 송아지 우상으로 모였던 자들을 흩으셨고...
초대교회 예루살렘에 모였던 교인들을 박해로 흩으셨던 모습이....
인도나 아랍권의 폭탄 테러같은 폭력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봅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밥그릇 챙기느라 슬그머니... 뒤로 빠진 모습이나...
변수로 상수를 흔드는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투영되는 모습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영국 사람들이 떠나면서 그냥 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에라~ 요넘들 골탕이나 먹어봐라' 하고 객기를 부려본 것 같습니다.
인도야 워낙 덩어리가 큰 나라이고
싫으면 찢어질 땅이라도 있으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덩어리 작은 우리나라는 바로 티가 나죠...
그런데도 아직 일제시대가 조선 근대화의 토대였다는 등의 뉴라이트 계열의
헛소리 지껄이는 안병익 같은 양반들이 식자층으로 서울대 명예교수 자리나 차지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그리고... 요즘... 교회들... 사람 많이 모으기 좋아하는데...
satya님 글 보니... 폭탄 테러하기 좋은 대상이네요...ㅡㅡ;
바벨탑에서 흩으셨고 시내산 아래 송아지 우상으로 모였던 자들을 흩으셨고...
초대교회 예루살렘에 모였던 교인들을 박해로 흩으셨던 모습이....
인도나 아랍권의 폭탄 테러같은 폭력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유니스님.
이런 글은 댓글 달기가 만만치 않죠.
첫째는 인도란 나라에 대해
인도에 사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누군가 알아야 하고
그래야 한 줄의 댓글이 달려지겠죠.
내가 당장 안고가는 문제만도 식겁할 노릇인데
먼나라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다가오기가
그렇게 만만치는 않습니다.
파키스탄과 인도..
서로가 가장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나라
분단시 2백만이 넘는 힌두와 무슬림들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을 넘나들며 죽이고 죽던 나라.
이번 테러리스트중에 유일하게 잡힌 사람이 파키스탄 국적을 가졌다고 합니다.
국경에서는 대치상황이 들어가고 있구요.
인도의 국방을 담당하던 육해공군, 장관까지 모두 경질이구요.
제가 City of Joy의 의사 맥스(패트릭웨인)만큼 잘 생기지는 못했지만
그들속에 함께하며 그들을 이해해 나가는 심정은 닮고 싶습니다.
유니스님의 기원대로 인도의 City of Joy 멤버의 일원이 되도록 애쓰겠스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이런 글은 댓글 달기가 만만치 않죠.
첫째는 인도란 나라에 대해
인도에 사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누군가 알아야 하고
그래야 한 줄의 댓글이 달려지겠죠.
내가 당장 안고가는 문제만도 식겁할 노릇인데
먼나라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다가오기가
그렇게 만만치는 않습니다.
파키스탄과 인도..
서로가 가장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나라
분단시 2백만이 넘는 힌두와 무슬림들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을 넘나들며 죽이고 죽던 나라.
이번 테러리스트중에 유일하게 잡힌 사람이 파키스탄 국적을 가졌다고 합니다.
국경에서는 대치상황이 들어가고 있구요.
인도의 국방을 담당하던 육해공군, 장관까지 모두 경질이구요.
제가 City of Joy의 의사 맥스(패트릭웨인)만큼 잘 생기지는 못했지만
그들속에 함께하며 그들을 이해해 나가는 심정은 닮고 싶습니다.
유니스님의 기원대로 인도의 City of Joy 멤버의 일원이 되도록 애쓰겠스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satya 선교사님 덕분에 선교사에 대한
제 고정관념이 빠뀌게된 점 참 다행입니다.
덕분에 인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앞으로 관련 뉴스 나오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satya 선교사님 같은 분들이 해외 선교사로 나가시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왔습니다.
여기서 뵙는 분들 가운데는 그렇지 않는 분들이 제법 계셔서...
인도 땅에 주의 자비와 사랑의 손길이 임하기기를
어제 교우들과 함께 잠시 기도했습니다.
새벽 알바 주인이 인도 부부시라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내내 평안하시고 승리하십시오.
샬롬~~~
제 고정관념이 빠뀌게된 점 참 다행입니다.
덕분에 인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앞으로 관련 뉴스 나오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satya 선교사님 같은 분들이 해외 선교사로 나가시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왔습니다.
여기서 뵙는 분들 가운데는 그렇지 않는 분들이 제법 계셔서...
인도 땅에 주의 자비와 사랑의 손길이 임하기기를
어제 교우들과 함께 잠시 기도했습니다.
새벽 알바 주인이 인도 부부시라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내내 평안하시고 승리하십시오.
샬롬~~~
칼로서 흥하는 자는 칼로서 망하는데
인도인들은 테러 후폭풍이 지나가면서
이제 보다 강력한 정부를 원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정권교체로 이어지겠죠.
아마 4년전 무고한 무슬림 2천을 학살하던 주체세력
힌두우익당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제발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단 테러리즘에 강한 정부를 원하는 대중이 저렇게 많은 것을 보니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복수하는
그런 정국이 눈 앞에 보입니다.
허기사 이번 테러 대처하는 모습이 한심하기는 했습니다.
비상대기해야할 헬기는 다른 도시에 가있고
가까스로 기동타격대를 실은 헬기가 뭄바이 공항에 도착하니
전세낸 버스가 오지 않아 공항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한참을 뭉기적 거리다가
마침내 테러리스트와 작전에 들어간 것은 사건 발생후 10시간이 지나서 였습니다.
경이의 나라 인도입니다.
목사님.
저도 그냥 별볼일없는 자비량선교사입니다.
이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정을 갖고 기도해주시는 분으로 인하여
주어진 길을 오늘도 묵묵히 걸어갑니다
인도인들은 테러 후폭풍이 지나가면서
이제 보다 강력한 정부를 원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정권교체로 이어지겠죠.
아마 4년전 무고한 무슬림 2천을 학살하던 주체세력
힌두우익당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제발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단 테러리즘에 강한 정부를 원하는 대중이 저렇게 많은 것을 보니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복수하는
그런 정국이 눈 앞에 보입니다.
허기사 이번 테러 대처하는 모습이 한심하기는 했습니다.
비상대기해야할 헬기는 다른 도시에 가있고
가까스로 기동타격대를 실은 헬기가 뭄바이 공항에 도착하니
전세낸 버스가 오지 않아 공항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한참을 뭉기적 거리다가
마침내 테러리스트와 작전에 들어간 것은 사건 발생후 10시간이 지나서 였습니다.
경이의 나라 인도입니다.
목사님.
저도 그냥 별볼일없는 자비량선교사입니다.
이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정을 갖고 기도해주시는 분으로 인하여
주어진 길을 오늘도 묵묵히 걸어갑니다
지난 10월에 열차폭탄테러로 80여명이 사망한 이래
그저께 또 열차 폭탄 테러가 일어난 인도 동북부 아쌈지역의 일로
북인도 전체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다음 차례는 델리도 될 수 있고
꼴까타도 될수 있다고 하는군요.
밥세끼 해결하려고 살아가는 일상 자체만으로도 버거운데
언제 내 차례일지 모르는 폭탄마저 문득 문득
사람많은 사이로 걸어갈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참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폭탄이 내 앞에서 터지더라도 이땅에서 제가 하고 있는 일과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의무를 마치고 나서 터졌으면 하는
그런 소박한 바램뿐이라면 저는 너무 소시민이겠지요.
소풍님이 인도를 향한 마음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그저께 또 열차 폭탄 테러가 일어난 인도 동북부 아쌈지역의 일로
북인도 전체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다음 차례는 델리도 될 수 있고
꼴까타도 될수 있다고 하는군요.
밥세끼 해결하려고 살아가는 일상 자체만으로도 버거운데
언제 내 차례일지 모르는 폭탄마저 문득 문득
사람많은 사이로 걸어갈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참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폭탄이 내 앞에서 터지더라도 이땅에서 제가 하고 있는 일과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의무를 마치고 나서 터졌으면 하는
그런 소박한 바램뿐이라면 저는 너무 소시민이겠지요.
소풍님이 인도를 향한 마음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이 뉴스를 거의 듣지 못해서 인도의 사정이나 국제 정세에 대해 둔한 편인데
이렇게 사티아님의 글을 읽고 나니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삶에 대한 현실성(절박함)이 크게 와 닿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현실의 아픔과 구조를 안고 가기엔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초라해 보일 뿐입니다.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닫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대림절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꿰뚫고 들어와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새롭게 임하시어
그분의 종말론적 통치를 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역사의 마지막 순간 이런 절망의 세상을 새롭게 구원하실 그날을 소망해봅니다.
사티아님!
그 곳에 주님의 평화가 우리를 위로해 주시길 기도할 따름입니다.
주님의 안식이 이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위로해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