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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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들어가며
인간에게 육체가 있음과 동시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왔다. 이렇게 믿어온 이유는 육체는 우리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하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관하여 이를 주재하는 우리의 내적 실체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특정한 행동을 할 때 우리의 정신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따라서 행동을 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육체의 욕구에 따라서 행동을 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주재에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들에 관하여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경우는 전자에 해당할 것이고, 우리는 배가 고파서(육체의 욕구) 식사를 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아직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아서 기다리는 경우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의 영역에 있으면서 육체를 주재하는 실체를 우리는 그동안 영혼이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이 육체와 동등하게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육체가 사멸하게 될 때 육체와는 분리되어 사후 세계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육체가 있음은 쉽사리 파악되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육체의 경우는 우리의 감각에 따라서 보고, 만져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데 반하여 영혼은 우리의 감각에 따라서 감각하려 해도 감각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물질적 실체, 영혼은 비물질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물질에 비물질이 내재하여 있다는 말인데 비물질이 어떻게 물질에 내재하여 물질을 주재하고 비물질은 비물질대로 물질은 물질대로 각각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이 질문과 함께 본인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인간이 구성됨을 말하고 있다. 영혼, 마음, 육체 세 부분으로 구성되며 영혼은 마음을 통해서 드러나고 마음은 육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육체의 감각은 마음에서 인식하고 최종적으로는 영혼에 인식된다. 어떠한 부분에서는 기독교들은 영, 혼, 육체로 구성된다고 한다. 영, 혼 각각의 개념에 관하여 명확하지 않으므로 일단 여기에서는 영혼, 마음, 육체라고 해 보자.
2. 기독교인들의 영혼, 마음, 육체 개념과 상관 관계에 대한 문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영혼과 육체는 실체이고, 마음은 영혼과 육체를 연결해 주는 통로이다. 이와 같은 것에 관하여 생각해 보면 영혼은 비물질, 마음 역시 비물질이다. 그러나 육체는 물질이다. 따라서 영혼과 마음은 비물질이면서 물질로 구성된 육체에게 영향을 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하다면 기독교인들은 비물질이 어떻게 물질에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물질이 어떻게 비물질에 영향을 주는 지에 관하여 밝혀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 무조건 영혼, 마음, 육체는 서로 영향을 준다고 하면 그것은 순전히 억견에 불과하다. 또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마음에 연결이 되며 아울러 육체에 영향을 주는지에 관하여 밝히려면 실제로 영혼이라고 하는 개념에 관하여 확실하게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으며 영혼이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관하여 밝혀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인간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역시 밝히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가서 보도록 하자. 영혼은 비물질이라는 것을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영혼이 비물질이라면 공간 점유를 하지 않는다. 육체는 그의 반대이고 말이다. 영혼이 이러한 실체라면 육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실로 개념상 오류가 된다. 왜냐하면 육체 어딘가에 존재하게 될 때 영혼은 공간적 위치를 점하게 되고 육체 속에 귀속됨으로서 하나의 독립적 실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길버트 라일은 기계 속의 유령이라고 비판했다. 라일은 실제로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의 물질로 구성된 육체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유물론을 주장했다.
기독교인들은 영혼의 문제에 관하여 비물질적 실체라고 주장하면서 육체를 주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주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혼이 정신적 능력에서 육체에 이러저러한 명령을 내리고 육체는 그에 따라서 그것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아울러 육체에 어떠한 욕구가 발생하더라도 영혼은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실제로 가지고 있으며 일상 생활에서도 그것을 적절하게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난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육체의 훼손 여부에 따라서 영혼 역시 주재할 능력을 잃는 경우이다. 실제로 뇌가 훼손된 환자의 경우 영혼이 온전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아무런 수행 능력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뇌는 분명히 육체 중 하나이며 물질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일부는 이렇게 주장할런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실험 가운데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장면이 찍혔고, 영혼이 빠져나간 다음에 그 사람의 몸무게가 줄어있더라. 여기도 역시 설득력이 없다. 또한 개념 간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비물질은 질량 혹은 어떠한 물리적 개념으로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며 만약 영혼이 그러한 것이라면은 영혼은 비물질이 아니며 육체에 귀속되어 있는 하나의 그 무엇으로 보아야 함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3. 유물론자의 난제
앞 장에서 논의한 데로 기독교인들의 난점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유물론자들이 승리한 것으로 보이며 아울러 영혼과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유물론자들은 주로 정신적 사건은 물질적 사건이며 보통 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현재 내가 커피에 대한 어떠하다고 하는 생각은 뇌의 특정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특정 유형의 물질적 상태는 동시에 특정 유형의 정신적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생각하는 일련의 활동은 바로 두뇌에서 작용한 것이며 아울러 두뇌의 상태만 파악하면 모두 알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는 쉽게 알 수 있지만 뇌의 상태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모든 정신적 활동에서 기인하는 육체의 일련의 것들이 뇌의 특정한 상태일 수는 있지만 우리가 자신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 뇌가 어떠한 특정한 상태에 이르기까지를 탐구할 필요도 없으며 아울러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고 여길 필요도 없다. 또한 어떠한 정신적 상태가 뇌의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뇌가 특정한 상태에 놓여져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이 어떠한 특정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논변은 다소 이상하게 들린다.
본인이 커피에 대한 생각은 다소 긍정적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의 경우는 커피에 대한 생각은 다소 부정적일 수도 있다. 동일한 커피를 놓고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긍정적 평가의 내용은 전혀 다르며 아울러 긍정적 평가를 하더라도 같은 뇌의 상태에 놓여진다고 하는 것 역시 이상하다. 만약 이러한 것을 정확하게 밝히지 못한다면 이러한 물질론은 타당성을 잃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물질론자들이 영혼 혹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뇌라고 할 때 다른 한 가지를 더 제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심리학에서 주로 활용하는 주의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행동주의이다. 인간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모든 정신적 활동에 관하여 알 수 있으며 우리가 고통을 느끼거나 할 때에 그것은 정신적 경험이 아니라 어떠한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도 난점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파하지 않으면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거짓으로 아픈 척 할 수도 있다. 인간의 행동을 보면 정신과 성향을 알 수 있다고 하는 행동주의에 근거한 물질론자들은 이와 같은 것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행동주의 역시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문제에서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볼 수 없다.
물질론자들의 가장 큰 난점은 다름 아닌 어떻게 육체 즉, 순수한 물질이 순수한 정신적 활동을 낳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무(없음)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무는 어떠한 것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적 활동이다. 이러한 순수한 정신적 활동이 어떻게 그들이 말하는 순수한 물질이라고 하는 육체에서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변은 실로 타당하지 못하며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4. 나가면서
영혼, 마음, 육체에 관하여 간단하게 말해 보았다. 그런데 완전치 못해서 좀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은 순전히 본인의 능력 부족에서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생각해 볼 여지는 주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의 전통적인 관점인 영혼, 마음, 육체의 문제는 어떻게 비물질이 물질에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고 아울러 영혼, 마음, 육체에 관하여 각각의 개념 설정을 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다.
물질론자들은 각각의 개념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 하지만 가장 큰 난점인 어떻게 물질인 육체에서 순수한 정신적 활동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과 타당성이 있어야만 한다. 어느 것도 여전히 풀지 못한 우리의 숙제이다.
본인은 정신과 육체로 나눈다. 그러나 이 둘을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정신은 육체라고 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고 육체는 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 근거할 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은 정신과 육체가 서로 상호 작용하며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주고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주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서로 상호 작용을 한다. 정신은 육체에 영향을 주고 육체는 정신에 영향을 주는 형태로 생각한다. 만약 어느 것 중 하나가 온전치 못하다면 더 이상 상호 작용을 할 수 없으며 더 이상 특정한 형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육체의 훼손이든 그것이 정신의 훼손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본인의 이론에도 난점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난점 즉, 비물질인 정신이 어떠한 형태로 물질에 영향을 주며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난점이다. 이것은 좀 더 생각해 봐야할 숙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인간에게 육체가 있음과 동시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왔다. 이렇게 믿어온 이유는 육체는 우리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하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관하여 이를 주재하는 우리의 내적 실체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특정한 행동을 할 때 우리의 정신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따라서 행동을 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육체의 욕구에 따라서 행동을 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주재에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들에 관하여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경우는 전자에 해당할 것이고, 우리는 배가 고파서(육체의 욕구) 식사를 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아직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아서 기다리는 경우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의 영역에 있으면서 육체를 주재하는 실체를 우리는 그동안 영혼이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이 육체와 동등하게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육체가 사멸하게 될 때 육체와는 분리되어 사후 세계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육체가 있음은 쉽사리 파악되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육체의 경우는 우리의 감각에 따라서 보고, 만져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데 반하여 영혼은 우리의 감각에 따라서 감각하려 해도 감각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물질적 실체, 영혼은 비물질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물질에 비물질이 내재하여 있다는 말인데 비물질이 어떻게 물질에 내재하여 물질을 주재하고 비물질은 비물질대로 물질은 물질대로 각각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이 질문과 함께 본인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인간이 구성됨을 말하고 있다. 영혼, 마음, 육체 세 부분으로 구성되며 영혼은 마음을 통해서 드러나고 마음은 육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육체의 감각은 마음에서 인식하고 최종적으로는 영혼에 인식된다. 어떠한 부분에서는 기독교들은 영, 혼, 육체로 구성된다고 한다. 영, 혼 각각의 개념에 관하여 명확하지 않으므로 일단 여기에서는 영혼, 마음, 육체라고 해 보자.
2. 기독교인들의 영혼, 마음, 육체 개념과 상관 관계에 대한 문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영혼과 육체는 실체이고, 마음은 영혼과 육체를 연결해 주는 통로이다. 이와 같은 것에 관하여 생각해 보면 영혼은 비물질, 마음 역시 비물질이다. 그러나 육체는 물질이다. 따라서 영혼과 마음은 비물질이면서 물질로 구성된 육체에게 영향을 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하다면 기독교인들은 비물질이 어떻게 물질에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물질이 어떻게 비물질에 영향을 주는 지에 관하여 밝혀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 무조건 영혼, 마음, 육체는 서로 영향을 준다고 하면 그것은 순전히 억견에 불과하다. 또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마음에 연결이 되며 아울러 육체에 영향을 주는지에 관하여 밝히려면 실제로 영혼이라고 하는 개념에 관하여 확실하게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으며 영혼이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관하여 밝혀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인간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역시 밝히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가서 보도록 하자. 영혼은 비물질이라는 것을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영혼이 비물질이라면 공간 점유를 하지 않는다. 육체는 그의 반대이고 말이다. 영혼이 이러한 실체라면 육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실로 개념상 오류가 된다. 왜냐하면 육체 어딘가에 존재하게 될 때 영혼은 공간적 위치를 점하게 되고 육체 속에 귀속됨으로서 하나의 독립적 실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길버트 라일은 기계 속의 유령이라고 비판했다. 라일은 실제로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의 물질로 구성된 육체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유물론을 주장했다.
기독교인들은 영혼의 문제에 관하여 비물질적 실체라고 주장하면서 육체를 주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주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혼이 정신적 능력에서 육체에 이러저러한 명령을 내리고 육체는 그에 따라서 그것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아울러 육체에 어떠한 욕구가 발생하더라도 영혼은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실제로 가지고 있으며 일상 생활에서도 그것을 적절하게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난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육체의 훼손 여부에 따라서 영혼 역시 주재할 능력을 잃는 경우이다. 실제로 뇌가 훼손된 환자의 경우 영혼이 온전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아무런 수행 능력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뇌는 분명히 육체 중 하나이며 물질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일부는 이렇게 주장할런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실험 가운데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장면이 찍혔고, 영혼이 빠져나간 다음에 그 사람의 몸무게가 줄어있더라. 여기도 역시 설득력이 없다. 또한 개념 간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비물질은 질량 혹은 어떠한 물리적 개념으로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며 만약 영혼이 그러한 것이라면은 영혼은 비물질이 아니며 육체에 귀속되어 있는 하나의 그 무엇으로 보아야 함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3. 유물론자의 난제
앞 장에서 논의한 데로 기독교인들의 난점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유물론자들이 승리한 것으로 보이며 아울러 영혼과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유물론자들은 주로 정신적 사건은 물질적 사건이며 보통 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현재 내가 커피에 대한 어떠하다고 하는 생각은 뇌의 특정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특정 유형의 물질적 상태는 동시에 특정 유형의 정신적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생각하는 일련의 활동은 바로 두뇌에서 작용한 것이며 아울러 두뇌의 상태만 파악하면 모두 알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는 쉽게 알 수 있지만 뇌의 상태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모든 정신적 활동에서 기인하는 육체의 일련의 것들이 뇌의 특정한 상태일 수는 있지만 우리가 자신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 뇌가 어떠한 특정한 상태에 이르기까지를 탐구할 필요도 없으며 아울러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고 여길 필요도 없다. 또한 어떠한 정신적 상태가 뇌의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뇌가 특정한 상태에 놓여져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이 어떠한 특정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논변은 다소 이상하게 들린다.
본인이 커피에 대한 생각은 다소 긍정적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의 경우는 커피에 대한 생각은 다소 부정적일 수도 있다. 동일한 커피를 놓고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긍정적 평가의 내용은 전혀 다르며 아울러 긍정적 평가를 하더라도 같은 뇌의 상태에 놓여진다고 하는 것 역시 이상하다. 만약 이러한 것을 정확하게 밝히지 못한다면 이러한 물질론은 타당성을 잃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물질론자들이 영혼 혹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뇌라고 할 때 다른 한 가지를 더 제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심리학에서 주로 활용하는 주의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행동주의이다. 인간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모든 정신적 활동에 관하여 알 수 있으며 우리가 고통을 느끼거나 할 때에 그것은 정신적 경험이 아니라 어떠한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도 난점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파하지 않으면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거짓으로 아픈 척 할 수도 있다. 인간의 행동을 보면 정신과 성향을 알 수 있다고 하는 행동주의에 근거한 물질론자들은 이와 같은 것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행동주의 역시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문제에서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볼 수 없다.
물질론자들의 가장 큰 난점은 다름 아닌 어떻게 육체 즉, 순수한 물질이 순수한 정신적 활동을 낳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무(없음)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무는 어떠한 것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적 활동이다. 이러한 순수한 정신적 활동이 어떻게 그들이 말하는 순수한 물질이라고 하는 육체에서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변은 실로 타당하지 못하며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4. 나가면서
영혼, 마음, 육체에 관하여 간단하게 말해 보았다. 그런데 완전치 못해서 좀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은 순전히 본인의 능력 부족에서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생각해 볼 여지는 주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의 전통적인 관점인 영혼, 마음, 육체의 문제는 어떻게 비물질이 물질에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고 아울러 영혼, 마음, 육체에 관하여 각각의 개념 설정을 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다.
물질론자들은 각각의 개념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 하지만 가장 큰 난점인 어떻게 물질인 육체에서 순수한 정신적 활동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과 타당성이 있어야만 한다. 어느 것도 여전히 풀지 못한 우리의 숙제이다.
본인은 정신과 육체로 나눈다. 그러나 이 둘을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정신은 육체라고 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고 육체는 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 근거할 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은 정신과 육체가 서로 상호 작용하며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주고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주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서로 상호 작용을 한다. 정신은 육체에 영향을 주고 육체는 정신에 영향을 주는 형태로 생각한다. 만약 어느 것 중 하나가 온전치 못하다면 더 이상 상호 작용을 할 수 없으며 더 이상 특정한 형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육체의 훼손이든 그것이 정신의 훼손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본인의 이론에도 난점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난점 즉, 비물질인 정신이 어떠한 형태로 물질에 영향을 주며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난점이다. 이것은 좀 더 생각해 봐야할 숙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영,혼,육" 으로 구분하는 삼분설이 기독교의 유일한 인간론이라고 말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삼분설 못지않게 이분설(영과 육)을 지지하는 그룹도 매우 많으며, 일부에서는 일원론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또는 영혼)이 육체보다 우월하다거나 육체를 지배한다는 영혼우월론은 기독교적 사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헬라철학에 더 가깝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는 영과 육이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로 보지 않습니다. 부활할때 새로운 육신을 덧입는다는 사상에서 그러한 관점을 잘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육체는 열등하고 영혼이 영속적 가치를 가진다는 헬라사상이나 영지주의와 판이하게 다른 점입니다.
좋은 글 아주 인상 깊게 읽었어요... 저도 영, 혼, 육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최근에는 잔느 귀용의 "하나님과의 연함" 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근데 귀용 댁이 쓰는 개념에 영, 혼, 육의 3가지 구분이 나옵니다... 성서에도 보면 프뉴마는 "영" 인 것 같구요, 사르크스는 "육체"인 거 같고, 소마나 프쉬케는 무의식, 자의식, 자아, 목숨, 혼, 정신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면, 육체란 것, 정신이란 것, 영이란 것은 "몸"이라는 하나의 유기체에 드러나는 존재적 실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게 맞다... 아니다 영과 혼과 육이 있다... 아니다 몸은 일원론적인 단일체일 뿐이다... 이런 경우에 쓰는 용어에 함몰되어 버리면 영혼육 삼분설이니 어떠니 하는 삼천뽀로 빠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영혼불멸설" 이란 것이 우리의 정신이 영원히 불멸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것도 에라 중의 상 에라구요...
육체란 것, 정신이란 것은 한계적인 인간의 속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명망있고 존경받던 목사님께서 치매에 걸리셔서 이상한 소리 하고 그래서 존경하던 교인들이 상처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이란 그런 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이란 것도 알고보면 얼마나 약한 건가요... 하드 나가버리면 다 다운되버리니까요...
저는 그래서 영이라는 것... 이 것은 속성상 육의 영역은 당연히 넘어서 있겠지만, 정신이란 영역도 넘어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의 영역은 나의 육체가, 나의 정신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순간에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께 속한 그 무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것들도 내 것은 없지만, 다른 것 다 양보를 해도 "영"이란 것, 이게 원래가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거죠...
고린도 전서 15장을 봐도 "부활"이란 것이 살, 피, 성정 이런 것들의 측면이 아니란 것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부활체는 "소마 프뉴마티콘"... 즉, "영적이고 신령한 몸"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깐 꼭 영지주의자 같습니다만...
종말의 완성의 시점에서 다시 우리 현실로 돌아와서 보면... 우리의 "몸" 은 영적인 패턴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육체, 나의 정신조차도 너무도 유한한 그 무엇이라면, 우리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 그 근원에다가 줄을 대며 살아가는 그런 패턴이 절실하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무작정 썼더니... 잘 이해해 주시길...
그렇게 보면, 육체란 것, 정신이란 것, 영이란 것은 "몸"이라는 하나의 유기체에 드러나는 존재적 실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게 맞다... 아니다 영과 혼과 육이 있다... 아니다 몸은 일원론적인 단일체일 뿐이다... 이런 경우에 쓰는 용어에 함몰되어 버리면 영혼육 삼분설이니 어떠니 하는 삼천뽀로 빠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영혼불멸설" 이란 것이 우리의 정신이 영원히 불멸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것도 에라 중의 상 에라구요...
육체란 것, 정신이란 것은 한계적인 인간의 속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명망있고 존경받던 목사님께서 치매에 걸리셔서 이상한 소리 하고 그래서 존경하던 교인들이 상처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이란 그런 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이란 것도 알고보면 얼마나 약한 건가요... 하드 나가버리면 다 다운되버리니까요...
저는 그래서 영이라는 것... 이 것은 속성상 육의 영역은 당연히 넘어서 있겠지만, 정신이란 영역도 넘어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의 영역은 나의 육체가, 나의 정신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순간에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께 속한 그 무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것들도 내 것은 없지만, 다른 것 다 양보를 해도 "영"이란 것, 이게 원래가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거죠...
고린도 전서 15장을 봐도 "부활"이란 것이 살, 피, 성정 이런 것들의 측면이 아니란 것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부활체는 "소마 프뉴마티콘"... 즉, "영적이고 신령한 몸"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깐 꼭 영지주의자 같습니다만...
종말의 완성의 시점에서 다시 우리 현실로 돌아와서 보면... 우리의 "몸" 은 영적인 패턴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육체, 나의 정신조차도 너무도 유한한 그 무엇이라면, 우리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 그 근원에다가 줄을 대며 살아가는 그런 패턴이 절실하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무작정 썼더니... 잘 이해해 주시길...
" 영, 육, 혼" 이란 성서에서 인간 생명의 이해는 그 당시 에는 당연하고도 자명한 것이었겟지요
그러나 오늘 21세기에는 그렇게 이해 할 수는 없겟지요 전문가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영과 육을 대립해서 생각한다면 결국은 이원론에 근접하겟지요
요즘은 영과 육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으로 이해 하는 것 같습니다
"통전적" 이란 말들을 쓰는데 이해가 부족해서 깊이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빛의 성질이 "파동과 입자" 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 것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성서에서는 "영"과 "육"을 구별 하지만
"영"보다는 오히려 "육"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화육"(化肉 Incanation) 의 교리가 이것을 말 하는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오늘 21세기에는 그렇게 이해 할 수는 없겟지요 전문가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영과 육을 대립해서 생각한다면 결국은 이원론에 근접하겟지요
요즘은 영과 육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으로 이해 하는 것 같습니다
"통전적" 이란 말들을 쓰는데 이해가 부족해서 깊이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빛의 성질이 "파동과 입자" 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 것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성서에서는 "영"과 "육"을 구별 하지만
"영"보다는 오히려 "육"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화육"(化肉 Incanation) 의 교리가 이것을 말 하는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런 주제에 대하여는 너무 심각하게 접근하기보다 잠깐이라도 편안하게 앉아 동화같은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면 어떨까요? ^^
몇 년전인가 '나니아연대기'라는 판타지 영화를 관람하게 되어 "우리 딸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인가? 혹은 나쁜 사상(?)을 녹아있는 위험한 영화는 아닐까? "(마침 해리포터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은터라...) 하는 생각에 당시에는 꽤나 진지하게
검토했었지요.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그 엄청난 기독교적 상상력에 아이들 보다 제가 더 감동받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스스로에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동화같은 기독교라니......
그 후로 그 영화의 원작동화를 매일밤 아이들 잠자리에서 읽어 주면서 (아내의 칭찬과 함께) 착한 아빠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 동화작가의 인생 마지막 시기에 쓰여진 <개인기도, 홍성사>의 제일 마지막 장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가까운 친구를 대하듯 전해주는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 보시면 어떨까요?
" 몸의 부활에 대해 말해 보세. 영혼이 - 가루로 뿌려졌거나 자연 곳곳에 흩어진 지 오래된 - 시체를 다시 취한다는,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그림이 불합리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바도 아닐세. 그런면 그 그림을 무엇으로 대체하겠느냐고 자네가 묻는다면 역시 추측밖에 내놓을 게 없을 걸세.
이 추측 배후의 원리는 이런 걸세. 몸의 부활이라는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관심사는 물질 그 자체, 즉 파동이니 원자니 하는 것들이 아닐세. 영혼이 간절히 요구하는 것은 감각의 부활이네. 이생에서도 물질이 감각의 원천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걸세.
우리에게는 나약하고 간헐적이긴 하나 죽은 감각들을 무덤에서 일으키는 힘이 이미 있네. 물론 기억을 말하는 걸세. 자네는 내 생각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거야. 그러나 내가 말하는 몸의 부활이 단지 천국 성도들이 지상에서 겪은 감각 경험을 탁월하게 기억한다는 뜻 정도일
거라고 짐작하지 말게. 내 말은 정반대 의미니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가진 기억은 영혼이, 영혼 안에 계신 그리스도(그 분은 우리를 위한 "거처를 예비하러 가(요14:2)"셨네)가 내세에 행사할 힘에 대한 흐릿한 전조 또는 신기루라는 걸세.
그러나 천국에서는 더 이상 간헐적인 기억은 필요가 없을 걸세. 무엇보다 더 이상 개별 영혼만의 사적인 것일 필요가 없을 거야. 지금 나는 자네에게 어린 시절에 놀던 사라진 들판들 -에 대해 말로써 불완전하게 전해 줄 수 있을 따름이네. 그러나 먼 훗날 어쩌면 내가 자네를 데리고 그 들판을 누비며 산책할 수 있는 날이 올 걸세.
현재 우리는 영혼이 어떻게든 몸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네. 그러나 내가 상상하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 - 죽음에서 부활한 감각적 생명-은 영혼 안에 있을 걸세. 하나님이 공간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공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지.
나도 모르게 '영광스러운'을 집어 넣었군. 그러나 이 영광스러움은 약속된 사실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 그 전조를 볼 수 있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기억이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는 건 아네.
.....
언젠가 그 광경들이 더욱 눈부시게 아름다워질 날이 올 걸세. 그 날이 오면 구속받은 자들의 감각체 sense-body 에서 새로운 지구 전체가 생겨날 걸세. 이 지구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곳. 썩을 것으로 심은 지구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거네....
...
물질이 우리 경험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은 감각이 되거나(우리가 그것을 지각할 때) 개념이 되는 것(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때) 뿐일세. 즉, 영혼이 되는 방법뿐일세. 나는 영혼 안에서 변화된 이 물질, 즉 감각과 개념이 다시 살아나 영화롭게 될 거라고 보네.
....
그러면 우리가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난 것처럼, 이 하늘, 이 땅과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날 걸세. 그리고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르는 오랜 침묵과 어둠이 지난 후, 다시 한 번 새들이 노래하고 물이 흐르고 빛과 그림자가 언덕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풍경과 우리를 알아보고 웃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놀라게 될 걸세.
물론 다 추측일 뿐이네. 내 추측이 틀렸다면, 사실은 그 보다 더 좋을걸세.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 분처럼 되며, 그의 참모습 그대로를 볼 것을 알기 때문일세(요일3:2)."
몇 년전인가 '나니아연대기'라는 판타지 영화를 관람하게 되어 "우리 딸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인가? 혹은 나쁜 사상(?)을 녹아있는 위험한 영화는 아닐까? "(마침 해리포터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은터라...) 하는 생각에 당시에는 꽤나 진지하게
검토했었지요.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그 엄청난 기독교적 상상력에 아이들 보다 제가 더 감동받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스스로에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동화같은 기독교라니......
그 후로 그 영화의 원작동화를 매일밤 아이들 잠자리에서 읽어 주면서 (아내의 칭찬과 함께) 착한 아빠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 동화작가의 인생 마지막 시기에 쓰여진 <개인기도, 홍성사>의 제일 마지막 장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가까운 친구를 대하듯 전해주는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 보시면 어떨까요?
" 몸의 부활에 대해 말해 보세. 영혼이 - 가루로 뿌려졌거나 자연 곳곳에 흩어진 지 오래된 - 시체를 다시 취한다는,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그림이 불합리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바도 아닐세. 그런면 그 그림을 무엇으로 대체하겠느냐고 자네가 묻는다면 역시 추측밖에 내놓을 게 없을 걸세.
이 추측 배후의 원리는 이런 걸세. 몸의 부활이라는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관심사는 물질 그 자체, 즉 파동이니 원자니 하는 것들이 아닐세. 영혼이 간절히 요구하는 것은 감각의 부활이네. 이생에서도 물질이 감각의 원천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걸세.
우리에게는 나약하고 간헐적이긴 하나 죽은 감각들을 무덤에서 일으키는 힘이 이미 있네. 물론 기억을 말하는 걸세. 자네는 내 생각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거야. 그러나 내가 말하는 몸의 부활이 단지 천국 성도들이 지상에서 겪은 감각 경험을 탁월하게 기억한다는 뜻 정도일
거라고 짐작하지 말게. 내 말은 정반대 의미니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가진 기억은 영혼이, 영혼 안에 계신 그리스도(그 분은 우리를 위한 "거처를 예비하러 가(요14:2)"셨네)가 내세에 행사할 힘에 대한 흐릿한 전조 또는 신기루라는 걸세.
그러나 천국에서는 더 이상 간헐적인 기억은 필요가 없을 걸세. 무엇보다 더 이상 개별 영혼만의 사적인 것일 필요가 없을 거야. 지금 나는 자네에게 어린 시절에 놀던 사라진 들판들 -에 대해 말로써 불완전하게 전해 줄 수 있을 따름이네. 그러나 먼 훗날 어쩌면 내가 자네를 데리고 그 들판을 누비며 산책할 수 있는 날이 올 걸세.
현재 우리는 영혼이 어떻게든 몸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네. 그러나 내가 상상하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 - 죽음에서 부활한 감각적 생명-은 영혼 안에 있을 걸세. 하나님이 공간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공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지.
나도 모르게 '영광스러운'을 집어 넣었군. 그러나 이 영광스러움은 약속된 사실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 그 전조를 볼 수 있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기억이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는 건 아네.
.....
언젠가 그 광경들이 더욱 눈부시게 아름다워질 날이 올 걸세. 그 날이 오면 구속받은 자들의 감각체 sense-body 에서 새로운 지구 전체가 생겨날 걸세. 이 지구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곳. 썩을 것으로 심은 지구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거네....
...
물질이 우리 경험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은 감각이 되거나(우리가 그것을 지각할 때) 개념이 되는 것(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때) 뿐일세. 즉, 영혼이 되는 방법뿐일세. 나는 영혼 안에서 변화된 이 물질, 즉 감각과 개념이 다시 살아나 영화롭게 될 거라고 보네.
....
그러면 우리가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난 것처럼, 이 하늘, 이 땅과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날 걸세. 그리고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르는 오랜 침묵과 어둠이 지난 후, 다시 한 번 새들이 노래하고 물이 흐르고 빛과 그림자가 언덕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풍경과 우리를 알아보고 웃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놀라게 될 걸세.
물론 다 추측일 뿐이네. 내 추측이 틀렸다면, 사실은 그 보다 더 좋을걸세.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 분처럼 되며, 그의 참모습 그대로를 볼 것을 알기 때문일세(요일3:2)."
최성웅님께서 옮겨주신 루이스의 의견
"내가 상상하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 - 죽음에서 부활한 감각적 생명-은 영혼 안에 있을 걸세.
하나님이 공간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공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지."
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 분과 얼굴과 얼굴을 대할 때
흙이 재료인 육체가 개입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루이스의 말미처럼 우리의 어떤 추측보다 경이로운 영광일 것입니다.
영, 혼, 육의 삼분을 논리적 혹은 개념으로 이끌어온 글에
또 루이스의 말처럼 감각으로 글을 달자면
이런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기도할 때, 혹은 말씀과 설교를 대할 때
눈물이 흐를 때가 있어요. 어떤 눈물의 경우,
육체의 아픔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감정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이성적인 이해에서 나온 것도 아닌
전혀 의도적이거나 그 전조가 느껴지지않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릅니다.
제 감성과 이성은 그 눈물을 바라보죠.
이 눈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제 3의 눈물..바로 그 '영'으로 부터일까?
뭐, 이런 일련의 감각에서 3분의 개념을 따라봅니다.
"내가 상상하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 - 죽음에서 부활한 감각적 생명-은 영혼 안에 있을 걸세.
하나님이 공간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공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지."
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 분과 얼굴과 얼굴을 대할 때
흙이 재료인 육체가 개입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루이스의 말미처럼 우리의 어떤 추측보다 경이로운 영광일 것입니다.
영, 혼, 육의 삼분을 논리적 혹은 개념으로 이끌어온 글에
또 루이스의 말처럼 감각으로 글을 달자면
이런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기도할 때, 혹은 말씀과 설교를 대할 때
눈물이 흐를 때가 있어요. 어떤 눈물의 경우,
육체의 아픔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감정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이성적인 이해에서 나온 것도 아닌
전혀 의도적이거나 그 전조가 느껴지지않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릅니다.
제 감성과 이성은 그 눈물을 바라보죠.
이 눈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제 3의 눈물..바로 그 '영'으로 부터일까?
뭐, 이런 일련의 감각에서 3분의 개념을 따라봅니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 자리지만 늘 관심있는 주제라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곳은 꼭 시간과 공간이 멈추어진 곳 같습니다.
어딘가 하고 비슷한 것 같습니다. ^^;
이곳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끝나지 않고 저의 마음 속에서 맴돌고 맴돌아 다시 이 자리로 저를 불러 오는군요.
유니스님과 저의 그 알 수 없는 눈물과 잠시의 그 기쁨은(이후로는 대게 괴로움이지만)무엇일까요?
혹시 루이스가 '갈망' 혹은 '기쁨', '그리움' 이라고 말했던 어떤 것일까요? 사실은 그것의 결핍인지도...
" 여러분이 그 무언가를 붙잡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깊이 사로잡았던 것들은
모두 그것의 암시- 보일듯 말듯한 영상, 귀에 잡히자 마자 사라지는 반향-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모습을 드러낸다면 - 여러분은 그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의심없이 "나는 바로 이것을 위해 지음받았던 거야"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서로에게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영혼에 쓰여진 비밀스러운
서명이자 전달할 길 없고 달랠 길 없는 소원이며, 아내를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직업을 선택하기 전부터
갈망했던 것이자 아내나 친구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죽음의 자리에서조차 여전히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이것도 존재합니다. 이것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
제가 말하고 있는 '그것'은 어떤 경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것의 결핍입니다.
그것 자체가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나 감정 속에 실제로 구현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여러분을 여러분 밖으로 불러 냅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대게 등 뒤에서 열리며",
" 보이지 않는 장미향기를 떨쳐내지 못하는"자를 위한
"유일한 지혜는 일하는 것입니다." "
- cs루이스 <고통의 문제> 중에서, 마지막은 조지 맥도널드<알렉포브스> 인용-
이곳은 꼭 시간과 공간이 멈추어진 곳 같습니다.
어딘가 하고 비슷한 것 같습니다. ^^;
이곳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끝나지 않고 저의 마음 속에서 맴돌고 맴돌아 다시 이 자리로 저를 불러 오는군요.
유니스님과 저의 그 알 수 없는 눈물과 잠시의 그 기쁨은(이후로는 대게 괴로움이지만)무엇일까요?
혹시 루이스가 '갈망' 혹은 '기쁨', '그리움' 이라고 말했던 어떤 것일까요? 사실은 그것의 결핍인지도...
" 여러분이 그 무언가를 붙잡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깊이 사로잡았던 것들은
모두 그것의 암시- 보일듯 말듯한 영상, 귀에 잡히자 마자 사라지는 반향-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모습을 드러낸다면 - 여러분은 그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의심없이 "나는 바로 이것을 위해 지음받았던 거야"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서로에게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영혼에 쓰여진 비밀스러운
서명이자 전달할 길 없고 달랠 길 없는 소원이며, 아내를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직업을 선택하기 전부터
갈망했던 것이자 아내나 친구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죽음의 자리에서조차 여전히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이것도 존재합니다. 이것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
제가 말하고 있는 '그것'은 어떤 경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것의 결핍입니다.
그것 자체가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나 감정 속에 실제로 구현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여러분을 여러분 밖으로 불러 냅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대게 등 뒤에서 열리며",
" 보이지 않는 장미향기를 떨쳐내지 못하는"자를 위한
"유일한 지혜는 일하는 것입니다." "
- cs루이스 <고통의 문제> 중에서, 마지막은 조지 맥도널드<알렉포브스> 인용-
여러 의견들이 나와 저를 다시금 사색에 잠기게 하는군요. 좋은 답변들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디에 존재할까요? 우리의 육체? 아니면 육체와 동떨어진 어딘가? 후자의 경우는 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이드는군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영혼이라고 하는 존재가 우리의 육체와 동떨어진 곳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나 라고 하는 자아와 전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면 전자 쪽으로 기울여지는데 만약 그러하다면 육체와 영혼 사이에 어떠한 커넥션이 있을까요? 그 커넥션을 따르게 되면 영혼이라고 하는 존재는 육체라고 하는 공간 속에 깃들게 되는 것인데 공간 속에 깃드는 순간 그것은 육체의 일부분이 되고 육체의 일부분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라고 하는 비물질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개념 상의 모순이 일어나죠.
이렇게 생각이 되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신경써 주심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저에 대해 잠깐 소개 하는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오려는 탕자를 반갑게 맞아주시길.. ㅎㅎ
이렇게 생각이 되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신경써 주심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저에 대해 잠깐 소개 하는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오려는 탕자를 반갑게 맞아주시길..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