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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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지적 설계론의 한계에 관하여
(부제 : 철학에서 바라본 지적 설계론의 한계)
1. 들어가면서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논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적 설계논증(Design Argument), 하나는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ugument), 하나는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이다. 이 중에서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증은 바로 지적 설계논증이다.
자연계를 우리가 관찰하고 탐구할 때에 자연이 수행하는 기능과 그 움직임 그리고 순환과 같은 현상들을 볼 때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엄청난 지적인 존재가 설계를 했다는 것이 바로 지적 설계논증의 주 골자이다. 윌리엄 페일리 같은 지적 설계논증자들은 자연의 복잡하고 각 사물의 위치에서 각 사물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있는 것은 분명히 신이 설계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를 어떠한 컴퓨터 제작자가 만들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도 역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증은 결과로부터 그 원인을 소급해 들어가는 논증이다. 앞 단락에서 예를 들어 지적했던 것과 동일하게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라고 하는 하나의 사물을 통해 컴퓨터 제작자를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컴퓨터라고 하는 사물과 동등하게 자연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을 가지고 그러할 것이다라는 추론이며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유비 논증이라고 한다. 유비 논증은 어떠한 두 가지 사물이 몇 가지 측면에서 비슷하다면 이것들은 밝혀지지 않은 다른 측면에도 그러할 것이라는 추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 설계론을 반박하는 강력한 논증들이 있으며 가장 큰 반박을 한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다. 그의 유작인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와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제 11절에서 제기되었다.
2. 지적 설계에 대한 비판
(1) 약한 유비
컴퓨터의 복잡한 구조와 자연의 복잡한 구조와는 전혀 다르다. 복잡하다고 하는 것에서는 동일하지만 컴퓨터가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어떠한 작업을 수행하는 것과 자연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각 사물이 그 목적에 맞게 수행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말 유사성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받아들인다. 컴퓨터의 메커니즘과 자연의 메커니즘이 유사한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위의 서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비 논증은 추론에 의한 논증이다. 그러므로 앞 단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컴퓨터의 메커니즘과 자연의 메커니즘이 유사한지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다면 결과에서 원인을 소급해 들어가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결론을 얻어내는 것은 약한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2) 신답지 못한 신
지적 설계자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가정해 볼 때 지적 설계자가 생각하는 신은 신다운 신이 되지를 못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일신을 생각하는데 이러한 유일신은 전지전능하고, 완벽하고, 절대 선 등 모든 완전한 속성을 다 집어 넣는다. 그에 비해서 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은 신과는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다.
지적 설계자의 주장대로 이러한 완벽한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 역시 완벽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완벽한 것에서 완벽한 것이 나오지 못했다면 원인이 되는 완벽한 것은 완벽할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호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이 있다고 할 때 호주머니에서 100원짜리가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물은 불완전하지만 신이 완전하다는 것도 역시 동의해 본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해도 신에게는 절대선이라고 하는 속성이 사라진다. 그가 만든 사물은 자신보다 못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 되며 따라서 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절대선이라고 하는 것에 모순된다.
3. 나가면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지적 설계론은 유비가 약하며, 만약 지적 설계론자들의 주장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과는 멀어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신 존재가 갑자기 비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적 설계론은 논리적 입장에서 보면 살펴본 바와 같이 난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과학을 하시는 분들은 과학의 측면에서 지적 설계가 과학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본인은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철학에서 바라보는 지적 설계의 난점을 살펴보았다. 과학을 하시는 분들에 비해서 실제성은 좀 떨어진다. 왜냐하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언어와 개념 그리고 논리에 따라서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은 과학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좀 배워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떠한 측면에서 신을 조명하면 그의 존재도 조명되고, 신이 세계와 모든 사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으로 조명될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부제 : 철학에서 바라본 지적 설계론의 한계)
1. 들어가면서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논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적 설계논증(Design Argument), 하나는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ugument), 하나는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이다. 이 중에서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증은 바로 지적 설계논증이다.
자연계를 우리가 관찰하고 탐구할 때에 자연이 수행하는 기능과 그 움직임 그리고 순환과 같은 현상들을 볼 때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엄청난 지적인 존재가 설계를 했다는 것이 바로 지적 설계논증의 주 골자이다. 윌리엄 페일리 같은 지적 설계논증자들은 자연의 복잡하고 각 사물의 위치에서 각 사물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있는 것은 분명히 신이 설계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를 어떠한 컴퓨터 제작자가 만들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도 역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증은 결과로부터 그 원인을 소급해 들어가는 논증이다. 앞 단락에서 예를 들어 지적했던 것과 동일하게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라고 하는 하나의 사물을 통해 컴퓨터 제작자를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컴퓨터라고 하는 사물과 동등하게 자연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을 가지고 그러할 것이다라는 추론이며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유비 논증이라고 한다. 유비 논증은 어떠한 두 가지 사물이 몇 가지 측면에서 비슷하다면 이것들은 밝혀지지 않은 다른 측면에도 그러할 것이라는 추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 설계론을 반박하는 강력한 논증들이 있으며 가장 큰 반박을 한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다. 그의 유작인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와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제 11절에서 제기되었다.
2. 지적 설계에 대한 비판
(1) 약한 유비
컴퓨터의 복잡한 구조와 자연의 복잡한 구조와는 전혀 다르다. 복잡하다고 하는 것에서는 동일하지만 컴퓨터가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어떠한 작업을 수행하는 것과 자연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각 사물이 그 목적에 맞게 수행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말 유사성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받아들인다. 컴퓨터의 메커니즘과 자연의 메커니즘이 유사한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위의 서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비 논증은 추론에 의한 논증이다. 그러므로 앞 단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컴퓨터의 메커니즘과 자연의 메커니즘이 유사한지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다면 결과에서 원인을 소급해 들어가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결론을 얻어내는 것은 약한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2) 신답지 못한 신
지적 설계자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가정해 볼 때 지적 설계자가 생각하는 신은 신다운 신이 되지를 못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일신을 생각하는데 이러한 유일신은 전지전능하고, 완벽하고, 절대 선 등 모든 완전한 속성을 다 집어 넣는다. 그에 비해서 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은 신과는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다.
지적 설계자의 주장대로 이러한 완벽한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 역시 완벽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완벽한 것에서 완벽한 것이 나오지 못했다면 원인이 되는 완벽한 것은 완벽할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호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이 있다고 할 때 호주머니에서 100원짜리가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물은 불완전하지만 신이 완전하다는 것도 역시 동의해 본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해도 신에게는 절대선이라고 하는 속성이 사라진다. 그가 만든 사물은 자신보다 못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 되며 따라서 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절대선이라고 하는 것에 모순된다.
3. 나가면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지적 설계론은 유비가 약하며, 만약 지적 설계론자들의 주장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과는 멀어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신 존재가 갑자기 비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적 설계론은 논리적 입장에서 보면 살펴본 바와 같이 난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과학을 하시는 분들은 과학의 측면에서 지적 설계가 과학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본인은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철학에서 바라보는 지적 설계의 난점을 살펴보았다. 과학을 하시는 분들에 비해서 실제성은 좀 떨어진다. 왜냐하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언어와 개념 그리고 논리에 따라서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은 과학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좀 배워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떠한 측면에서 신을 조명하면 그의 존재도 조명되고, 신이 세계와 모든 사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으로 조명될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네 반박 감사합니다. ( __)
여기 철수가 있습니다. 철수는 시계 수리공 입니다. 그런데 시계를 수리할 때 그는 완벽하게 고칠 수 있는데 완벽하게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먼저 손님 입장에서는 철수가 실력 있는 수리공이라고 생각이 들까요?
두 번째는 신이 완벽하다면 그는 완벽하게 피조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완벽하게 피조물을 만들 수 없다면 그는 완벽한 존재가 아닐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비롯한 피조물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하기는 커녕 아주 불완전한 존재이지요.
그러면 그가 창조할 때 완벽하게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거나 신은 불완전한 존재일 것입니다. ^^
순전히 사유에 의한 것이므로 신앙 의심은 사절 합니다. ( __)
여기 철수가 있습니다. 철수는 시계 수리공 입니다. 그런데 시계를 수리할 때 그는 완벽하게 고칠 수 있는데 완벽하게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먼저 손님 입장에서는 철수가 실력 있는 수리공이라고 생각이 들까요?
두 번째는 신이 완벽하다면 그는 완벽하게 피조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완벽하게 피조물을 만들 수 없다면 그는 완벽한 존재가 아닐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비롯한 피조물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하기는 커녕 아주 불완전한 존재이지요.
그러면 그가 창조할 때 완벽하게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거나 신은 불완전한 존재일 것입니다. ^^
순전히 사유에 의한 것이므로 신앙 의심은 사절 합니다. ( __)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버클리에 계시나요? 언젠가 한번은 가보고 싶은 곳인데. 금의환향하시기를 바랍니다. 글 읽고 몇 가지만 글을 올릴까 합니다.
지적설계론자들은 자신들의 "학문"(?)을 신학이 아닌 과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신학의 역사가 변증의 역사라고 하지만 지적설계론은 과학을 너무 우습게 보고 시작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의 신학은 이 자연 사건들의 틈새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유혹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판넨베르크의 1970년 논문("Naturgesetz und Kontingenz" 박일준역, in: 자연신학, 한국신학연구소, 2000, 131) 내용입니다. 여기서 "틈새"라는 건 각 진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급진적 진보로 인해 생겨난 공백을 의미하며, 도킨스가 지적하였듯이 이런 것들이 단순히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으로서 진화론이 밝혀낼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충분히 설명 가능하고, 가능하게 될 것들입니다. 심지어 판넨베르크는 더욱 힘주어 말하기를 "기본적으로 물리학이 대답할 수 없는 물음들이란 -전혀- 존배하지 않는다"(132)고 합니다.
"(2)"번 글에는 신학의 난제중의 난제인 "신정론"(theodizee)가 얽혀 있습니다. 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말씀드리자면, 세상(피조물)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신)도 완벽하지 않다고 논증하는 것은, 세계가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계한 지적인 존재가 있다고 논증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호주머니에 500원을 넣었다고 해서 꼭 500원이 나오는 건 아니더라고요(양자물리학).
마지막으로 흄이 지적설계론을 "직접" 비판했나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적설계(ID)라는 단어 자체의 기원이 기껏해야 185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적설계론 "빠돌이"들이 생겨난 건 얼마 안된 얘기죠. 제 생각에는 흄의 글에서 비판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 듯 하네요.
너무 길게 써서 죄송해요.^^;
지적설계론자들은 자신들의 "학문"(?)을 신학이 아닌 과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신학의 역사가 변증의 역사라고 하지만 지적설계론은 과학을 너무 우습게 보고 시작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의 신학은 이 자연 사건들의 틈새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유혹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판넨베르크의 1970년 논문("Naturgesetz und Kontingenz" 박일준역, in: 자연신학, 한국신학연구소, 2000, 131) 내용입니다. 여기서 "틈새"라는 건 각 진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급진적 진보로 인해 생겨난 공백을 의미하며, 도킨스가 지적하였듯이 이런 것들이 단순히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으로서 진화론이 밝혀낼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충분히 설명 가능하고, 가능하게 될 것들입니다. 심지어 판넨베르크는 더욱 힘주어 말하기를 "기본적으로 물리학이 대답할 수 없는 물음들이란 -전혀- 존배하지 않는다"(132)고 합니다.
"(2)"번 글에는 신학의 난제중의 난제인 "신정론"(theodizee)가 얽혀 있습니다. 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말씀드리자면, 세상(피조물)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신)도 완벽하지 않다고 논증하는 것은, 세계가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계한 지적인 존재가 있다고 논증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호주머니에 500원을 넣었다고 해서 꼭 500원이 나오는 건 아니더라고요(양자물리학).
마지막으로 흄이 지적설계론을 "직접" 비판했나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적설계(ID)라는 단어 자체의 기원이 기껏해야 185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적설계론 "빠돌이"들이 생겨난 건 얼마 안된 얘기죠. 제 생각에는 흄의 글에서 비판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 듯 하네요.
너무 길게 써서 죄송해요.^^;
버클리님의 글을 읽다 생각난 창조 과학자들의 문제는 창조를 과거의 완결된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표현을 빌어쓰자면 창조는 종말까지 열려 있어서 완전함을 향해가는 과정이겠지요.. 그렇다면 완전한 신이 만든 불완전한 개체도 별 무리 없어보입니다.. 시계 수리공이 시계를 완전히 고칠 수 있지만 고치는 동안에는 불완전한 것이지요.. 말장난으로 받아드릴 수 도 있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군요..
그렇게 완전해져 가는 과정을 과학자들은 진화라하고 신앙인들은 창조라 하는 것이겠지요.. 창조과학회는 신앙인이면서 과학자인분들이 둘사이의 조화를 꿰해 볼까하다가 망친것 같습니다..또한 어떤 실험에서 어떤 시스템을 이해한 것처럼 하나님도 이해하려는 약간은 오만한 생각도 있었겠죠.. 처음엔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년이 아니라 훨씬 짧다라고 했다가 좀 밀리니 요즘은 지적 설계론이라는 걸 들고 나오셨지요.. 우리가 창조의 과정을 모두 이해했다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아닐런지요.. 과학에서 random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지적설계자라는 걸 우겨넣는건 조금 우스워보입니다..우리가 때에 따라 같은 말도 다르게 표현해야는 것처럼 과학자이면 신앙인인 사람들은 과학자집단안에서 과학의 언어로 이야기 해야할 때와 신앙인으로서의 고백의 언어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지적설계론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혹시 어느 대학에서 교수하시는 장로님이 나와서 열변을 토해도 낚이지 마시라는 거죠..
정용섭 목사님의 표현을 빌어쓰자면 창조는 종말까지 열려 있어서 완전함을 향해가는 과정이겠지요.. 그렇다면 완전한 신이 만든 불완전한 개체도 별 무리 없어보입니다.. 시계 수리공이 시계를 완전히 고칠 수 있지만 고치는 동안에는 불완전한 것이지요.. 말장난으로 받아드릴 수 도 있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군요..
그렇게 완전해져 가는 과정을 과학자들은 진화라하고 신앙인들은 창조라 하는 것이겠지요.. 창조과학회는 신앙인이면서 과학자인분들이 둘사이의 조화를 꿰해 볼까하다가 망친것 같습니다..또한 어떤 실험에서 어떤 시스템을 이해한 것처럼 하나님도 이해하려는 약간은 오만한 생각도 있었겠죠.. 처음엔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년이 아니라 훨씬 짧다라고 했다가 좀 밀리니 요즘은 지적 설계론이라는 걸 들고 나오셨지요.. 우리가 창조의 과정을 모두 이해했다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아닐런지요.. 과학에서 random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지적설계자라는 걸 우겨넣는건 조금 우스워보입니다..우리가 때에 따라 같은 말도 다르게 표현해야는 것처럼 과학자이면 신앙인인 사람들은 과학자집단안에서 과학의 언어로 이야기 해야할 때와 신앙인으로서의 고백의 언어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지적설계론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혹시 어느 대학에서 교수하시는 장로님이 나와서 열변을 토해도 낚이지 마시라는 거죠..
안희철 목사 님,
잘 지내지요?
판넨베르크의 논문 번역 건 때문에 신경 좀 쓰일 겁니다.
잡지에 처음으로 내는 거라면 더 그럴 거에요.
첫 인상이 중요하니 번역을 매끄럽게 해보세요.
가장 중요한 건 일단 '읽혀야한다.'는 거에요.
잘 할 줄로 믿어요.
위의 대글과 상관 없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미안합니다.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순서를 따질 게재가 아니네요.
내가 왜 이렇게 나섰냐 하면
오랜 만에 신학자의 콤멘트가 올라왔기 때문이에요.
지검 다비아에 가장 필요한 부분이걸라요.
신학적 논객이 필요해요.
다비아에 여러 글들이 올라오더라도
신학적인 방향을 잡을 필요는 있거든요.
시간이 나는대로 목사님이 그런 역할을 좀 했으면 어떨까 해서요.
판넨베르크 신학을 테마로 공부하고 논문을 쓰신다니 더 반가워서요.
나는 그저 한국에서 대충 공부해서 판넨베르크를 공부한 탓에
판넨베르크에 대해서도 말 할 게 많지 않아요.
짧은 밑천으로 지금까지 우려먹고 사네요.
지적설계론 논쟁에 대한 목사님의 글이
내가 하고 싶은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는 걸 보고 반가운 마움에
지금 두서 없이 적었답니다.
내 부탁에 너무 부담 갖지는 마세요.
중요한 건 그쪽의 공부니까요.
행복한 대림절이 되기를!
잘 지내지요?
판넨베르크의 논문 번역 건 때문에 신경 좀 쓰일 겁니다.
잡지에 처음으로 내는 거라면 더 그럴 거에요.
첫 인상이 중요하니 번역을 매끄럽게 해보세요.
가장 중요한 건 일단 '읽혀야한다.'는 거에요.
잘 할 줄로 믿어요.
위의 대글과 상관 없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미안합니다.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순서를 따질 게재가 아니네요.
내가 왜 이렇게 나섰냐 하면
오랜 만에 신학자의 콤멘트가 올라왔기 때문이에요.
지검 다비아에 가장 필요한 부분이걸라요.
신학적 논객이 필요해요.
다비아에 여러 글들이 올라오더라도
신학적인 방향을 잡을 필요는 있거든요.
시간이 나는대로 목사님이 그런 역할을 좀 했으면 어떨까 해서요.
판넨베르크 신학을 테마로 공부하고 논문을 쓰신다니 더 반가워서요.
나는 그저 한국에서 대충 공부해서 판넨베르크를 공부한 탓에
판넨베르크에 대해서도 말 할 게 많지 않아요.
짧은 밑천으로 지금까지 우려먹고 사네요.
지적설계론 논쟁에 대한 목사님의 글이
내가 하고 싶은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는 걸 보고 반가운 마움에
지금 두서 없이 적었답니다.
내 부탁에 너무 부담 갖지는 마세요.
중요한 건 그쪽의 공부니까요.
행복한 대림절이 되기를!
반가워요 정용섭목사님.
여기도 첫 번째 대강절이라고 해서 드디어 첫 번째 촛불을 밝혔답니다.
번역본은 이미 편집장님께 보냈습니다.
예전의 알쏭달쏭 저만 알아먹을 수 있는 어투는 모두 버리고
아마도 처음 판넨베르크를 접하는 사람도 어느정도 이해할 정도로
읽히게 번역해보았습니다.
원래 올렸던 글에 수정하여 올려 놓았어요.
정말 처음이라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네요.
대신 선물로 "설레임"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려요.
다비아의 한 회원으로서
많은 분들과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지적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저로서는 참으로 영광일 따름입니다.
배울 게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목사님의 요청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대화와 나눔을 미덕으로 삼아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전 다비아에 흐르는 정통적 진보의 맥이 참 좋습니다.
정목사님의 공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겠고
뿐만 아니라 이곳 회원 모든 분들의 은덕이 크다고 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참여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여기도 첫 번째 대강절이라고 해서 드디어 첫 번째 촛불을 밝혔답니다.
번역본은 이미 편집장님께 보냈습니다.
예전의 알쏭달쏭 저만 알아먹을 수 있는 어투는 모두 버리고
아마도 처음 판넨베르크를 접하는 사람도 어느정도 이해할 정도로
읽히게 번역해보았습니다.
원래 올렸던 글에 수정하여 올려 놓았어요.
정말 처음이라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네요.
대신 선물로 "설레임"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려요.
다비아의 한 회원으로서
많은 분들과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지적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저로서는 참으로 영광일 따름입니다.
배울 게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목사님의 요청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대화와 나눔을 미덕으로 삼아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전 다비아에 흐르는 정통적 진보의 맥이 참 좋습니다.
정목사님의 공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겠고
뿐만 아니라 이곳 회원 모든 분들의 은덕이 크다고 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참여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창조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새로운 견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저도 역시 창조란 완결된 사건으로 생각하였거든요. 한 수 배웁니다. ( __) 장기도 고수와 두어야 실력이 느는데 역시 논쟁도 고수와 겨루어야 실력이 늘고 한 수도 배우는 것 같습니다.
만약 창조라고 하는 것이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면 과학자들이 내놓는 견해 즉 진화라고 하는 것이 곧 창조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물론 거기에 신이 개입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를 다시금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요.
지적설계론을 어떤 교회에서 장로님이 말씀하셨는데 저는 반박을 위와 같이 하려고 했었는데 시간 관계상 질문은 안 받고 끝내더군요. ^^
음... 그리고 이건 댓글을 달면서 생각이 드는 것인데 만약 창조라고 하는 것이 현재 진행형이라면 주자학에서 말하는 리기론이 문득 떠오릅니다. 리는 기에 근거할 바가 되고 모든 것의 원리가 되며 이를 형이상자인 도로 표현합니다. 이에 반하여 기는 리가 깃들 바가 되고 모든 사물의 질료적 구성을 하며 이를 형이하자인 기(그릇)로 표현합니다.
리기의 묘합에 따라서 모든 사물은 만들어지고 모든 사물에 리는 본성으로 자리하고 기는 사물의 질료적 육체가 됩니다. 기는 생생불식(낳고 낳으며 쉬지 않는)의 작용을 하고 이 때 리는 그 위에 올라타 기가 움직이는데로 갑니다. 그러면서도 리의 본성은 그대로 드러나지요. 이러하다면 리기 묘합과 같이 신도 역시 여전히 쉬지 않고 낳고 낳는 생생불식의 작용을 하면서 그 속에 신의 본성을 넣는 형태가 되겠지요.
주자학과 관련된 논문을 쓰면서 인격적인 모습이 리에 있다면 기독교 세계관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님께서 다시금 알려주시는 군요.
한 수 배움에 감사합니다. ( __)
만약 창조라고 하는 것이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면 과학자들이 내놓는 견해 즉 진화라고 하는 것이 곧 창조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물론 거기에 신이 개입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를 다시금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요.
지적설계론을 어떤 교회에서 장로님이 말씀하셨는데 저는 반박을 위와 같이 하려고 했었는데 시간 관계상 질문은 안 받고 끝내더군요. ^^
음... 그리고 이건 댓글을 달면서 생각이 드는 것인데 만약 창조라고 하는 것이 현재 진행형이라면 주자학에서 말하는 리기론이 문득 떠오릅니다. 리는 기에 근거할 바가 되고 모든 것의 원리가 되며 이를 형이상자인 도로 표현합니다. 이에 반하여 기는 리가 깃들 바가 되고 모든 사물의 질료적 구성을 하며 이를 형이하자인 기(그릇)로 표현합니다.
리기의 묘합에 따라서 모든 사물은 만들어지고 모든 사물에 리는 본성으로 자리하고 기는 사물의 질료적 육체가 됩니다. 기는 생생불식(낳고 낳으며 쉬지 않는)의 작용을 하고 이 때 리는 그 위에 올라타 기가 움직이는데로 갑니다. 그러면서도 리의 본성은 그대로 드러나지요. 이러하다면 리기 묘합과 같이 신도 역시 여전히 쉬지 않고 낳고 낳는 생생불식의 작용을 하면서 그 속에 신의 본성을 넣는 형태가 되겠지요.
주자학과 관련된 논문을 쓰면서 인격적인 모습이 리에 있다면 기독교 세계관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님께서 다시금 알려주시는 군요.
한 수 배움에 감사합니다. ( __)
버클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구에 있답니다. 버클리는 영국의 철학자 이름을 딴 것인데 버클리의 명료한 글에 반해서 버클리를 좋아하게 되었고 별명도 버클리로 지었습니다.
과학을 통해서 또 배우는 군요. ( __) 감사합니다. 500원을 넣었다고 500원이 꼭 도출되지는 않는다. 재미 있네요.
여기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문제 철학에서 다루는 인과론이 생각이 나는군요. 인과론을 굳게 믿는 견해에서는 어떠한 원인은 어떠한 결과를 반드시 낳는다 라고 주장하거든요. 지금 갑자기 생각은 안 나는데... 어떠한 이론인지는...
양자물리학에서 그러한 결과들이 도출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과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하여야 하고 그것에 관하여 사색을 더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시 이래서 철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양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스승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군요.
감사합니다. ( __)
과학을 통해서 또 배우는 군요. ( __) 감사합니다. 500원을 넣었다고 500원이 꼭 도출되지는 않는다. 재미 있네요.
여기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문제 철학에서 다루는 인과론이 생각이 나는군요. 인과론을 굳게 믿는 견해에서는 어떠한 원인은 어떠한 결과를 반드시 낳는다 라고 주장하거든요. 지금 갑자기 생각은 안 나는데... 어떠한 이론인지는...
양자물리학에서 그러한 결과들이 도출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과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하여야 하고 그것에 관하여 사색을 더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시 이래서 철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양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스승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군요.
감사합니다. ( __)
버클리보다 더 좋다는 대구에 계시군요!!! 제 외가 친척 상당수가 대구에 계셔서 조금 알지요.
게다가 다비아의 모체가! ^_^
제2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제작년인가 사진축제 할 때 한번 다녀간게 마지막이 되었네요.
인과론은 허물어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당장 내 주머니에 있는 500원이 500억이 되서 나오지는 않지요. 미시 세계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이후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해석과 실재의 차원 모두에서요. 요즘 인문학도들이 읽기 좋은 과학도서들이 참 많이 나와 있습니다. 굳이 수학을 꿰차고 있을 필요는 없지요. 할 수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몫으로 놔둬야 겠고요. 이미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통합하는 이론(옛날에는 통일장이론이라고 불렀죠)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궁극의 이론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데요, 금성과 목성, 그리고 달이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하여 난리던데 다시 한번 회합하는 그 때(2052년) 이 전에는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합니다. 저 혼자요.^^
게다가 다비아의 모체가! ^_^
제2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제작년인가 사진축제 할 때 한번 다녀간게 마지막이 되었네요.
인과론은 허물어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당장 내 주머니에 있는 500원이 500억이 되서 나오지는 않지요. 미시 세계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이후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해석과 실재의 차원 모두에서요. 요즘 인문학도들이 읽기 좋은 과학도서들이 참 많이 나와 있습니다. 굳이 수학을 꿰차고 있을 필요는 없지요. 할 수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몫으로 놔둬야 겠고요. 이미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통합하는 이론(옛날에는 통일장이론이라고 불렀죠)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궁극의 이론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데요, 금성과 목성, 그리고 달이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하여 난리던데 다시 한번 회합하는 그 때(2052년) 이 전에는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합니다. 저 혼자요.^^
인과론이 폐지되었다고 하면, 과격한 표현으로는 맞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인과론적 해석이 마냥 틀린 건 아니예요. 물론 남녀지사에서 벌어지는 즉, 아니 땐 굴뚝에 연기도 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생활 주변에서는 인과 "범칙"이 넘쳐나고 있지요. 철학에서 논의하고 있다고 했을 때는, 이미 이런 것들을 모두 가정한 상태에서의 논의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과학의 출발은 그 근본부터 "의심"입니다. 따라서 의심할 것이 없을 때 과학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네요. 물론 과학이 그런 "확실한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하기도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전진이 있을 뿐이죠. 과학은 그저 오늘날 일어나는 사태들 속에서 규칙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그 작업의 끝이 진리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하기는 쉽지 않네요. 저는 그 끝에서 또 하나의 새로움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지구가 돌고 있어도 오늘 해가 떴다고 하지 지구가 반바퀴 돌았다고 하진 않겠지요. 그 어떤 과학자라도 일상의 언어(경험의 세계)에서는 근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여친 앞에서 했다가는 "니 잘났다"하고 차이기 쉽상이겠죠.^^; 한번 끝없이 의심해보시고 관련된 과학철학 도서들을 읽어보세요. 그리고 곧 대구에서 제2의 버클리가 탄생하길 바라겠습니다!
과학의 출발은 그 근본부터 "의심"입니다. 따라서 의심할 것이 없을 때 과학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네요. 물론 과학이 그런 "확실한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하기도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전진이 있을 뿐이죠. 과학은 그저 오늘날 일어나는 사태들 속에서 규칙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그 작업의 끝이 진리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하기는 쉽지 않네요. 저는 그 끝에서 또 하나의 새로움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지구가 돌고 있어도 오늘 해가 떴다고 하지 지구가 반바퀴 돌았다고 하진 않겠지요. 그 어떤 과학자라도 일상의 언어(경험의 세계)에서는 근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여친 앞에서 했다가는 "니 잘났다"하고 차이기 쉽상이겠죠.^^; 한번 끝없이 의심해보시고 관련된 과학철학 도서들을 읽어보세요. 그리고 곧 대구에서 제2의 버클리가 탄생하길 바라겠습니다!
안희철 목사님,
오늘 글로 처음 뵙습니다. 저번에 올리신 논문은 읽는다고 하고 아직 읽지 못하였는데,
오늘 댓글에서 왠지 안도감과 넉넉함 든든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저도 정목사님과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다비아에는 너무 다양한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누구나 어떤 글이든지 평등(?)하게 올릴수 있는지라,
이것이 많은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천둥벌거숭이들로 인하여, 소모적이고 시간낭비적인 토의/논쟁이
반복 생산되는걸 요즘 봅니다.
정목사님이 혼자서 고군분투 하시는걸 보면서 감사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안스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 같은 무게로 다비아의 흐름을 잡아줄 분이 꼭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가지로 바쁘시겠지만, 관심과 사랑을 염치없이 부탁드립니다.
오늘 글로 처음 뵙습니다. 저번에 올리신 논문은 읽는다고 하고 아직 읽지 못하였는데,
오늘 댓글에서 왠지 안도감과 넉넉함 든든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저도 정목사님과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다비아에는 너무 다양한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누구나 어떤 글이든지 평등(?)하게 올릴수 있는지라,
이것이 많은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천둥벌거숭이들로 인하여, 소모적이고 시간낭비적인 토의/논쟁이
반복 생산되는걸 요즘 봅니다.
정목사님이 혼자서 고군분투 하시는걸 보면서 감사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안스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 같은 무게로 다비아의 흐름을 잡아줄 분이 꼭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가지로 바쁘시겠지만, 관심과 사랑을 염치없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