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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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오늘은 말로만 듣던 경동교회에 다녀왔습니다.
동대입구역과 동대문 운동장 사이라는 제법 삭막한 곳에
지리적으로 위치하여 오히려 담넝쿨이 돋보이는
아름답고 운치있는 교회를
공짜 패키지(개혁개정성경과 저녁식사)로 더블 관광하게 되어
그 감사함을 기상 600호 출간을 축하함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새삼스레 진보의 스펙이 참 좁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회에 참석하신 진보 기독교의 상징적인 역할을 담당하시는
많은 목사님들이 오셨더라구요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까이서 뵙게 되니 반갑더라구요)
그리고 정진홍 교수님께서 혼란의 시대 :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주제로 발제가 있었는데 시월에 다원화 속에서 기독와 기독인의 자세에서
발제하신 것을 듣고 오늘 또 그때의 내용들을 재확인하면서 경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발표하신 내용을 여기서 언급하는게 좀 무례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스러운 점을 나눠 볼까합니다.
교수님께서 기독교 오만과 기만의 구조를 언급하면서
세가지의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중에서 첫째로 언급했던 신학은 친절해야 한다는
부분에 있어서의 궁금함이 있는데요
신학은 친절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그것은 물음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물음도 좋습니다.
어떤 구실로도 물음은 차단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에 모든 물음이 허용되는 것
그렇다면 그것이 신학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신학이 솔직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함에는 대의적으로
동의 하지만 모든 것을 노출시킬 수 없는
신학적 특수성이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신학의 출발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신앙적 전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를 증명하라
증명할 수 없다면 그전제를 내려 놓아라 !
증명할 수 없으니 불가지론이나 회의주가 옳다
그런데 불가지론자나 회의주의자를 신학자로 부를 수 있을까요?
신앙 (고백)없이 공부하는 것이 신학의로서의 의미가 있을까요?
신학이 추구하는 방향성과 목적은 접어두고 여타 학문(과학)과
기계적으로 동일한 방법론을 제시한다는 것은
신학에 대한 몰이해 혹은 배려 부족으로 비춰지네요
무식해서 용감하게 글을 남기게 되네요
암튼 오늘 즐겁고 의미있는 날이었슴다.
동대입구역과 동대문 운동장 사이라는 제법 삭막한 곳에
지리적으로 위치하여 오히려 담넝쿨이 돋보이는
아름답고 운치있는 교회를
공짜 패키지(개혁개정성경과 저녁식사)로 더블 관광하게 되어
그 감사함을 기상 600호 출간을 축하함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새삼스레 진보의 스펙이 참 좁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회에 참석하신 진보 기독교의 상징적인 역할을 담당하시는
많은 목사님들이 오셨더라구요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까이서 뵙게 되니 반갑더라구요)
그리고 정진홍 교수님께서 혼란의 시대 :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주제로 발제가 있었는데 시월에 다원화 속에서 기독와 기독인의 자세에서
발제하신 것을 듣고 오늘 또 그때의 내용들을 재확인하면서 경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발표하신 내용을 여기서 언급하는게 좀 무례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스러운 점을 나눠 볼까합니다.
교수님께서 기독교 오만과 기만의 구조를 언급하면서
세가지의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중에서 첫째로 언급했던 신학은 친절해야 한다는
부분에 있어서의 궁금함이 있는데요
신학은 친절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그것은 물음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물음도 좋습니다.
어떤 구실로도 물음은 차단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에 모든 물음이 허용되는 것
그렇다면 그것이 신학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신학이 솔직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함에는 대의적으로
동의 하지만 모든 것을 노출시킬 수 없는
신학적 특수성이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신학의 출발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신앙적 전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를 증명하라
증명할 수 없다면 그전제를 내려 놓아라 !
증명할 수 없으니 불가지론이나 회의주가 옳다
그런데 불가지론자나 회의주의자를 신학자로 부를 수 있을까요?
신앙 (고백)없이 공부하는 것이 신학의로서의 의미가 있을까요?
신학이 추구하는 방향성과 목적은 접어두고 여타 학문(과학)과
기계적으로 동일한 방법론을 제시한다는 것은
신학에 대한 몰이해 혹은 배려 부족으로 비춰지네요
무식해서 용감하게 글을 남기게 되네요
암튼 오늘 즐겁고 의미있는 날이었슴다.
가는 길, 오는 길 두루두루 좋은 말씀 속에서
어린 싹이 움튼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정진홍 교수님의 글을 접하면서
그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가 참 간결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글쓰기 어느세월에나 가능할런지요~ㅎㅎ
콰미님의 질문은 신학적 특수성에 대한 대변으로 생각됩니다.
신학적 특수성-신앙(고백)적 성격-이 없는 신학이 가능하는가?
신학은 신앙에 이르는 신뢰를 세워가는 것이라고 볼 때,
전 신앙을 전제로 내세우는 것보다 신뢰를 세워가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앞세우는 신앙이라는 것이 조금 돌이켜 생각하면 절대적인 토대위에 서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모든 인간들이 지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로서 삶 속에 뿌리박혀 있는 신뢰의 행위라고 합니다.(조직신학입문, 이신건)'
그러나 그 삶의 자리에 대해 발제자는 혼란이란 진단을 내렸습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도 그 혼란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발언이며 그 인식대상인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중립적일 수 없고
실존적인 지식 일 수밖에 없다는, 중립성 혹은 무전제성이 학문의 본질을 이룬다면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주장은 한편으로 '혼란' 혹은 세계-내-존재라는 인간의 상황 속에서 볼 때 그리 실존적으로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학문에 앞서 존재하셨지만
그 하나님을 향한 신앙, 즉 신뢰를 통해 세워지는 실존적 신앙의 영역은 고백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과 고백은 최후의 보루일까요?
오히려 당당히 모든 물음 앞에 서는 것이 빠르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옳은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신학적 특수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모든 물음 뒤에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역사라는 장에서 보편적 담론을 통한 진리론적 투쟁이
바로 신학의 자리이며 발제자가 제시한 자세로부터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때문에 전 오늘 발제문을 의미있게 읽었습니다
정작 물음은 '혼란'이란 진단에 대한 자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금일 애프터 승리에 도취된 '미미브라더스'인 것 같네요...ㅎㅎ
어린 싹이 움튼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정진홍 교수님의 글을 접하면서
그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가 참 간결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글쓰기 어느세월에나 가능할런지요~ㅎㅎ
콰미님의 질문은 신학적 특수성에 대한 대변으로 생각됩니다.
신학적 특수성-신앙(고백)적 성격-이 없는 신학이 가능하는가?
신학은 신앙에 이르는 신뢰를 세워가는 것이라고 볼 때,
전 신앙을 전제로 내세우는 것보다 신뢰를 세워가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앞세우는 신앙이라는 것이 조금 돌이켜 생각하면 절대적인 토대위에 서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모든 인간들이 지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로서 삶 속에 뿌리박혀 있는 신뢰의 행위라고 합니다.(조직신학입문, 이신건)'
그러나 그 삶의 자리에 대해 발제자는 혼란이란 진단을 내렸습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도 그 혼란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발언이며 그 인식대상인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중립적일 수 없고
실존적인 지식 일 수밖에 없다는, 중립성 혹은 무전제성이 학문의 본질을 이룬다면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주장은 한편으로 '혼란' 혹은 세계-내-존재라는 인간의 상황 속에서 볼 때 그리 실존적으로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학문에 앞서 존재하셨지만
그 하나님을 향한 신앙, 즉 신뢰를 통해 세워지는 실존적 신앙의 영역은 고백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과 고백은 최후의 보루일까요?
오히려 당당히 모든 물음 앞에 서는 것이 빠르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옳은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신학적 특수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모든 물음 뒤에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역사라는 장에서 보편적 담론을 통한 진리론적 투쟁이
바로 신학의 자리이며 발제자가 제시한 자세로부터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때문에 전 오늘 발제문을 의미있게 읽었습니다
정작 물음은 '혼란'이란 진단에 대한 자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금일 애프터 승리에 도취된 '미미브라더스'인 것 같네요...ㅎㅎ
우리 역시 다 용서를 받아야하는 대상이라는 말씀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우월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기의인지를 생각하는 좋은 시간...
같은 뿌리의 토대에서 우리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책임있는 연대성에...
부드러운 글과 나래이션...절제된 표현들이 기독교사상과 모인 청중들에게 들리는소리로...
글이좀 짧았더라면 워드작없을 해서라도 오리고픈 생각이...
아마도 다비안들이 없었더라면 분위기 엄청 썰렁했을 것 같았어요.
누구 누구 요셨더라?...20명쯤 된다고 했는데...
그리구...미미부라더스..."나빠요!"..
젊은 & 늙은, 사기라니까...나미가 나미로 7을치는 것은 주님이 심판이여두 사기야!...(우리은어 ㅋㅋ)
다음모임에 연장후에 결승이야...우린지고는 못살지...
나이스는 우리편인데...왠일로 상대편에서 자꾸 나이스를 하는건지?...어찌하든 미미형제 봅시다.ㅎㅎ
남보다 조금이라도 우월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기의인지를 생각하는 좋은 시간...
같은 뿌리의 토대에서 우리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책임있는 연대성에...
부드러운 글과 나래이션...절제된 표현들이 기독교사상과 모인 청중들에게 들리는소리로...
글이좀 짧았더라면 워드작없을 해서라도 오리고픈 생각이...
아마도 다비안들이 없었더라면 분위기 엄청 썰렁했을 것 같았어요.
누구 누구 요셨더라?...20명쯤 된다고 했는데...
그리구...미미부라더스..."나빠요!"..
젊은 & 늙은, 사기라니까...나미가 나미로 7을치는 것은 주님이 심판이여두 사기야!...(우리은어 ㅋㅋ)
다음모임에 연장후에 결승이야...우린지고는 못살지...
나이스는 우리편인데...왠일로 상대편에서 자꾸 나이스를 하는건지?...어찌하든 미미형제 봅시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