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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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피고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광장에서 목이 잘릴 것이다"
"그들이 오는 것은 새벽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갑자기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싫어한다.
무슨 일이 생기든간에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마침내 낮 동안에 좀 자두었다가 밤에는 끝끝내 새벽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오는
때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던 그 분간키 어려운 시간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
리면서 지켜본다. 내 귀가 그처럼 많은 소리,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나는 절망한 것이 아니라고 그에게 설명했다. 다만 나는 두려울 뿐이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가 그렇게 나에게 말하는 것은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
고 그것은 사정이 다르고 또 어쨌든 그것이 위안이 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야
그렇지요." 그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오늘 죽지 않는다고 해도, 장차는
죽을 것입니다. 그 때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것이오. 그 무서운 시련을 당신은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그 시련을 받을 것이라고 대답
했다."
"그는 내 말을 가로막고 내세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의 이 생
애를 회상할 수 있는 그러한 생애"라고 외치고, 곧 이어서 이제 그런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느님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나는 그에게로 다가서며
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조금밖에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명하려 했다"
====================================================================================
며칠동안 붙잡고 있던, 카뮈의 '이방인'을 어젯밤 다 읽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주인공이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장면, 주인공을
섣불리 위로하려는 신부의 모습, 그 누구의 위로 없이 당당히 죽음을 맞
이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몇부분 발췌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보다 주인공을 편들고 싶습니다. (물론 카뮈도 그런 방향으로 썼겠지만요)
죽음은 모두에게 임하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죽음은 결코 개인의 실존적 죽음을
위로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김훈이 말한 그대로이지요.
제가 주인공이라면 평상심을 잃지 않은채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 주인공. 그를 위로한답시고 나선 신부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한다는 건지. 다 같이 사형선고를 받은 우리들이지 않는가.
무엇이 이 주인공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사형이 연기되는 것일까요? 순간 단두대에서 내려올 수는 있어도 그는 여전히 똑같은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사형이 취소되는 것일까요? 글쎄요.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이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는 여전히 죽음을 기다리는(본인이 의식을 하든 못하든)상황에 놓여져 있는 것이지요.
신부가 의도한 내세에 대한 믿음?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
그렇겠지요. 아마 이것이 정답이겠지만...
저또한 사형선고를 받은 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새벽의 단두대를 기다리는 주인공처럼 긴박함이 나의 삶에 있나 생각해 봅니다.
종말은 저렇게 뚜벅뚜벅 걸어와 문앞에 서 있는데...
"그들이 오는 것은 새벽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갑자기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싫어한다.
무슨 일이 생기든간에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마침내 낮 동안에 좀 자두었다가 밤에는 끝끝내 새벽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오는
때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던 그 분간키 어려운 시간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
리면서 지켜본다. 내 귀가 그처럼 많은 소리,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나는 절망한 것이 아니라고 그에게 설명했다. 다만 나는 두려울 뿐이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가 그렇게 나에게 말하는 것은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
고 그것은 사정이 다르고 또 어쨌든 그것이 위안이 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야
그렇지요." 그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오늘 죽지 않는다고 해도, 장차는
죽을 것입니다. 그 때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것이오. 그 무서운 시련을 당신은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그 시련을 받을 것이라고 대답
했다."
"그는 내 말을 가로막고 내세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의 이 생
애를 회상할 수 있는 그러한 생애"라고 외치고, 곧 이어서 이제 그런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느님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나는 그에게로 다가서며
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조금밖에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명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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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동안 붙잡고 있던, 카뮈의 '이방인'을 어젯밤 다 읽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주인공이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장면, 주인공을
섣불리 위로하려는 신부의 모습, 그 누구의 위로 없이 당당히 죽음을 맞
이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몇부분 발췌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보다 주인공을 편들고 싶습니다. (물론 카뮈도 그런 방향으로 썼겠지만요)
죽음은 모두에게 임하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죽음은 결코 개인의 실존적 죽음을
위로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김훈이 말한 그대로이지요.
제가 주인공이라면 평상심을 잃지 않은채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 주인공. 그를 위로한답시고 나선 신부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한다는 건지. 다 같이 사형선고를 받은 우리들이지 않는가.
무엇이 이 주인공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사형이 연기되는 것일까요? 순간 단두대에서 내려올 수는 있어도 그는 여전히 똑같은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사형이 취소되는 것일까요? 글쎄요.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이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는 여전히 죽음을 기다리는(본인이 의식을 하든 못하든)상황에 놓여져 있는 것이지요.
신부가 의도한 내세에 대한 믿음?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
그렇겠지요. 아마 이것이 정답이겠지만...
저또한 사형선고를 받은 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새벽의 단두대를 기다리는 주인공처럼 긴박함이 나의 삶에 있나 생각해 봅니다.
종말은 저렇게 뚜벅뚜벅 걸어와 문앞에 서 있는데...
찬선님~ 본인 이미지와 다른(?) 심각한 소설을 읽으셨군요~^^
까뮈의 '이방인'을 읽어 본지가 나미님 나이 정도 됐나봐요 ㅋㅋ
기억이 거의 안나는데 위 꼭지글을 읽으니
싸르트르의 '벽'과 비슷한 느낌이네요,
까뮈나 싸르트르나 프랑스 실존주의 대표작가라서 그런가요~
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의 존재 체험은 냉혹합니다
합리성이나 구원을 포기한, 부조리한 삶의 필연적 '죽음의식'에서 존재를 규명하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기독인에게도 그 '죽음의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허무로 이를 앙다무는 죽음의식이 아니라
한계를 인정하므로 삶을 느슨히 놓아 줄 수있는,
그리고 절대자의 온전한 주관을 희망하는 죽음의식 말입니다
그러니 단두대 앞에 서있는 찬선님의 긴박한 새벽은
젊음의 시간을, 촉각으로 느껴가며, 후각으로 맡아가며
사는 거 답게 살아가게 하는 배수진이 될겁니다
까뮈의 '이방인'을 읽어 본지가 나미님 나이 정도 됐나봐요 ㅋㅋ
기억이 거의 안나는데 위 꼭지글을 읽으니
싸르트르의 '벽'과 비슷한 느낌이네요,
까뮈나 싸르트르나 프랑스 실존주의 대표작가라서 그런가요~
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의 존재 체험은 냉혹합니다
합리성이나 구원을 포기한, 부조리한 삶의 필연적 '죽음의식'에서 존재를 규명하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기독인에게도 그 '죽음의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허무로 이를 앙다무는 죽음의식이 아니라
한계를 인정하므로 삶을 느슨히 놓아 줄 수있는,
그리고 절대자의 온전한 주관을 희망하는 죽음의식 말입니다
그러니 단두대 앞에 서있는 찬선님의 긴박한 새벽은
젊음의 시간을, 촉각으로 느껴가며, 후각으로 맡아가며
사는 거 답게 살아가게 하는 배수진이 될겁니다
그래.
자기 실존의 소리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의 희망은
참 공허한 것이겠지.
목사님 또한 실존적인 신앙이 아닌 역사적인 신앙을 말씀하시지만,
그건 실존의 칼날 위에 서 있는자가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는 외침이 아닐까 싶어.
구원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넘어 다가오지만 그 소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 처럼
실존의 심연을 통과하되 그것을 넘어 오는 희망이지
결코 실존을 건너 뛰어 확보되는 희망은 아닌 것 같애.
그런 점에서 어쩌면 교리로 무장된 신부보다
실존에 당당히 맞서고자 노력했던 주인공이 좀 더 구원에 가깝지 않을까.
마지막 말은 내가 어디서 들은 말인 것 같은데 내 말이 되어 내 손에서 나오네.
자기 실존의 소리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의 희망은
참 공허한 것이겠지.
목사님 또한 실존적인 신앙이 아닌 역사적인 신앙을 말씀하시지만,
그건 실존의 칼날 위에 서 있는자가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는 외침이 아닐까 싶어.
구원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넘어 다가오지만 그 소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 처럼
실존의 심연을 통과하되 그것을 넘어 오는 희망이지
결코 실존을 건너 뛰어 확보되는 희망은 아닌 것 같애.
그런 점에서 어쩌면 교리로 무장된 신부보다
실존에 당당히 맞서고자 노력했던 주인공이 좀 더 구원에 가깝지 않을까.
마지막 말은 내가 어디서 들은 말인 것 같은데 내 말이 되어 내 손에서 나오네.
아~위의 나미의 답글도 그렇지만
시와 그림님의 답글도 소화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저의 마음은 기실 상당부분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사실 재미로 살아온 시간들도 아니었고, 무엇인가
락(樂)을 기대하는 마음도 없고요.
그런데 헤셀이 '인간 실존이 문제'라고 한 것처럼,
김춘수가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라고 한 것처럼,
저자신 자체가 참 불안하게 느껴질때가 많지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게 느껴지는 상황.
그래서 절대자가 온전히 거두어 주관(또는 처분)해 주신다면
참 감사할 것 같은데,
긴박해야 할 새벽에 졸음만 쏟아지고,
'주님 어서오시옵소서'만 무슨 경 외듯 읊조리고 있습니다.
시와 그림님의 답글도 소화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저의 마음은 기실 상당부분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사실 재미로 살아온 시간들도 아니었고, 무엇인가
락(樂)을 기대하는 마음도 없고요.
그런데 헤셀이 '인간 실존이 문제'라고 한 것처럼,
김춘수가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라고 한 것처럼,
저자신 자체가 참 불안하게 느껴질때가 많지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게 느껴지는 상황.
그래서 절대자가 온전히 거두어 주관(또는 처분)해 주신다면
참 감사할 것 같은데,
긴박해야 할 새벽에 졸음만 쏟아지고,
'주님 어서오시옵소서'만 무슨 경 외듯 읊조리고 있습니다.
아이구 !! 지금 젊은이들 에게도 이 책이 읽히는군요....
1950-60 년대를 주름 잡던 책이었는데
경제와 시대적인 상황이 맞물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무신론 실존주의"...
이 사상(?) 책의 영향으로 살인도 하고, 자살 하는 사람도 생기고 하였지요
한국의 그 당시의 "실존" 과 지금의 "실존'이 다르니 이해의 강도가 다르겟지요
그러나 인간 "실존" 문제는 언제나 열려 있는 것 이겟지요
기독교인으로 한번 쯤 거쳐가는 순례의 길 중 하나겟지요
이것과 대비(?)되는 실존 사상가( 유신론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키에르케콜" 의 '죽음에 이르는병"
"이것이냐 ? 저것이냐?" 등은 기독교인들이 꼭 넘어야 할 사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허무"(?) 가 멋 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젊은시절 인데요...아직은
1950-60 년대를 주름 잡던 책이었는데
경제와 시대적인 상황이 맞물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무신론 실존주의"...
이 사상(?) 책의 영향으로 살인도 하고, 자살 하는 사람도 생기고 하였지요
한국의 그 당시의 "실존" 과 지금의 "실존'이 다르니 이해의 강도가 다르겟지요
그러나 인간 "실존" 문제는 언제나 열려 있는 것 이겟지요
기독교인으로 한번 쯤 거쳐가는 순례의 길 중 하나겟지요
이것과 대비(?)되는 실존 사상가( 유신론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키에르케콜" 의 '죽음에 이르는병"
"이것이냐 ? 저것이냐?" 등은 기독교인들이 꼭 넘어야 할 사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허무"(?) 가 멋 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젊은시절 인데요...아직은
'언제나 칼날 위에 서 있다...'
인식과 소통의 한계, 존재의 준거를 상실한 위기감.
흩어지지 않는 당혹감은 절망 혹은 왜곡하는 자로 이끌어 가진 않는지...
파편적인 해석의 틀로써 얻은 이해는 이러한 실존의 붕괴를 얼마나 메꾸어줄수 있을지...
때론 거칠게, 때론 쉽사리 바람에 실려오는 혹자의 '희망'은 그 골을 되려 깊게만 해놓는것같습니다.
'희망'이란 옷을 입은 허무와 불안 넘어 다가오는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