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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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요즘 사도신경에 대한 불만이 많은가 봅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평신도 교회나 대안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해체하고 자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사상 12월호에 실린 한완상 선생님의 글을
읽어 보아도 사도신경이 많이 부족해 보이나 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요약해 본다면
역사적 예수의 실종입니다.
동정녀 탄생부터 본디오 빌라도의 고난 사이에 예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간극을 역사적 예수로 간주하셨는데
그렇다면 십자가 예수는
케리그마가 독점한 것입니까?
십자가에서는 역사적 예수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오히려 십자가는 역사적 예수를 완성시키지 않았을까요?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죽음 사이의 공백을 허전하다고 하시는데
저는 반대로 선생님의 첨언이 더 사족 같아 보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흑암의 세계에서 빛을 던지사 병마를 쫓아내시고
부당한 차별의 장벽을 허무시며 꼴찌와 지극히 작은 자들도 주인이 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시다가 유대와 로마권력에게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처형되셨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
선생님이 채운 공백은 위와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채운 공백은 십자가를 구체적으로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십자가 안에는 그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저는 사실교 신자가 아니라서 사도신경을 시처럼 음미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오며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대부분 함축성과 상징성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을 시처럼 고백하고 아름다운 해석을 한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고백을 공백에 삽입한다면 아름다운 시의 언어가
산문과 뒤섞여 좀 어색해질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나만의 기우일까요?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평신도 교회나 대안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해체하고 자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사상 12월호에 실린 한완상 선생님의 글을
읽어 보아도 사도신경이 많이 부족해 보이나 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요약해 본다면
역사적 예수의 실종입니다.
동정녀 탄생부터 본디오 빌라도의 고난 사이에 예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간극을 역사적 예수로 간주하셨는데
그렇다면 십자가 예수는
케리그마가 독점한 것입니까?
십자가에서는 역사적 예수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오히려 십자가는 역사적 예수를 완성시키지 않았을까요?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죽음 사이의 공백을 허전하다고 하시는데
저는 반대로 선생님의 첨언이 더 사족 같아 보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흑암의 세계에서 빛을 던지사 병마를 쫓아내시고
부당한 차별의 장벽을 허무시며 꼴찌와 지극히 작은 자들도 주인이 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시다가 유대와 로마권력에게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처형되셨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
선생님이 채운 공백은 위와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채운 공백은 십자가를 구체적으로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십자가 안에는 그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저는 사실교 신자가 아니라서 사도신경을 시처럼 음미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오며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대부분 함축성과 상징성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을 시처럼 고백하고 아름다운 해석을 한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고백을 공백에 삽입한다면 아름다운 시의 언어가
산문과 뒤섞여 좀 어색해질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나만의 기우일까요?
저는 아직도 사도신경을 진실된 고백으로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백을 할 때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생각없이 드려왔던 고백의 시간이 저에게 주는 형벌일까요?
그 고백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현실속에서 삶속에서
부대끼며 결국 도달할 수 밖에 없게 된 고백이라면,
웬지 저또한 그런 삶을 통과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한 말.
교리는 진리가 아니라 지도다라고 한 말이 생각나네요.
결국 사도신경의 고백을 진실되게 드릴 때가 언젠가는 오겠지만
저의 삶경험이 미천하여 아직은 때가 아닌가 봅니다.
어쩌면 사도신경을 유보하고 자체적인 신앙고백을
드리면서까지 역사적예수를 알려고 하고 그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분들이 더 빨리(?) 사도신경에 도달할지도 모르겠어요
고백을 할 때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생각없이 드려왔던 고백의 시간이 저에게 주는 형벌일까요?
그 고백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현실속에서 삶속에서
부대끼며 결국 도달할 수 밖에 없게 된 고백이라면,
웬지 저또한 그런 삶을 통과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한 말.
교리는 진리가 아니라 지도다라고 한 말이 생각나네요.
결국 사도신경의 고백을 진실되게 드릴 때가 언젠가는 오겠지만
저의 삶경험이 미천하여 아직은 때가 아닌가 봅니다.
어쩌면 사도신경을 유보하고 자체적인 신앙고백을
드리면서까지 역사적예수를 알려고 하고 그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분들이 더 빨리(?) 사도신경에 도달할지도 모르겠어요
어이쿠,
오늘 콰미 님에게서 계속적으로 충격을 받아
다시 대글을 쓰지 않을 수 없구료.
성형이 필요 없는 미인이라... ㅎㅎ
오늘 쉽게 칼을 대는 세태가
사도신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건
경솔하다는 뜻이 아니겠소.
역사적 예수라는 강조점은
이미 (동정녀) 마리아와 빌라도라는 이름에 다 들어 있는 거요.
여자의 몸을 통한 출생과
정치적 패권과의 투쟁이라면
이미 충분히 역사적 예수를 담고 있는 것 아니겠소.
행간의 여백을,
오히려 종말론적 의미를 담은 그 진술을
본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거기에다 자신들의 조잡한 해명을 구겨 넣으려 한다는 건
콰미 님 표현대로
성형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 맞도록 성형하겠다고 나서는 일 같구료.
이는 마치 바흐의 <파르티타>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사이에 사물놀이 음악을 넣겠다는 발상과 비슷한 거 같소.
오늘 다비아의 명언은
<사도신경은 미인이다>요.
우와,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소.
오늘 콰미 님에게서 계속적으로 충격을 받아
다시 대글을 쓰지 않을 수 없구료.
성형이 필요 없는 미인이라... ㅎㅎ
오늘 쉽게 칼을 대는 세태가
사도신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건
경솔하다는 뜻이 아니겠소.
역사적 예수라는 강조점은
이미 (동정녀) 마리아와 빌라도라는 이름에 다 들어 있는 거요.
여자의 몸을 통한 출생과
정치적 패권과의 투쟁이라면
이미 충분히 역사적 예수를 담고 있는 것 아니겠소.
행간의 여백을,
오히려 종말론적 의미를 담은 그 진술을
본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거기에다 자신들의 조잡한 해명을 구겨 넣으려 한다는 건
콰미 님 표현대로
성형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 맞도록 성형하겠다고 나서는 일 같구료.
이는 마치 바흐의 <파르티타>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사이에 사물놀이 음악을 넣겠다는 발상과 비슷한 거 같소.
오늘 다비아의 명언은
<사도신경은 미인이다>요.
우와,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소.
학문적으로 논 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종교적"인 어떤 입장이 정해 질 때는 언제나
그 본질보다는 정치적(?) 입깁이 강하게 적용되지요...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지요
잘 아시겟지만 우리가 절대로 믿는 성서 자체도 완성 혹은 채택 당시 본질 보다는
여러가지의 입장에 따른 어떤 정치적 힘이 작용한 것은 잘 아시지 잔어요.
십자가 교리도 사실상 정치적 투쟁의 산물 아닌가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바울집단과 베드로 집단의 신학적 치열한 논쟁보다
정치적 투쟁의 힘이 작용한 산물이겟지요(오해 없기 바랍니다)
복음서 자체도 여러 복음서 중 정경으로 체택 문제라든가
각 공동체의 여러 입장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는것도 사실이고
개신교가 외경을 무시하는 역사라든가 번역상의 문제라던가 - 대표적인것이
우리나라 성경번역에 "하나님" 을 "하느님" 으로 번역 하려 할 때
약간의 신학적 논쟁은 있었지만 결국은 쪽수 가 많은
교단의 정치적 입김(불매및 불사용)으로 인한것 이라던지
찬송가도 판매이익 문제에 따라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겼지요
오늘날도 기독교(어느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고위급 회의에 가 보면(총회, 노회, 심지어 개 교회 공동회의)
신앙의 본질 보다는 정치적 힘에 의해 글절되게 결정되는 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작금의 어느 교단 회장 문제가 다 그런거지요
말로는 다 정통이라하고 신앙의 본질을 들먹이지만
속셈은 전연 그렇지 않지요
아마 사도 신경도 그 제정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잘 연구 해 보면
인간의 정치적 입김이 얼마나 작용 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일반인은 미사려구 속에 넘어가지만 그 속 사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삼위일체 교리만 해도 학자들에 따라서는 정치적 결정이며
그 제정 과정에 "황제"를 하느님과 동일시 하려는
의도적인 정치적 힘이 작용 했다고 합니다.-연구가 과문해서 제가 구체적으로 말 할 수는 없지만-
만약 사도신경이 오늘날 정해진다면 다른 내용으로 정해지겟지요
믿는것이야 자유겟지만 어떤것에 절대성을 부여 하는것도
하나의 신앙 오류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 " 연구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정치적 입김이 들어간 것을
조금이라도 벗겨 내고 "신앙의 본질"에 다가 가려는 노력의 하나 라고 봅니다
신앙은 "미사려구'속에 존재 하는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앞에 솔직"해 지려는 노력 이겟지요- 역사적 예수에의 접근이-
그 본질보다는 정치적(?) 입깁이 강하게 적용되지요...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지요
잘 아시겟지만 우리가 절대로 믿는 성서 자체도 완성 혹은 채택 당시 본질 보다는
여러가지의 입장에 따른 어떤 정치적 힘이 작용한 것은 잘 아시지 잔어요.
십자가 교리도 사실상 정치적 투쟁의 산물 아닌가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바울집단과 베드로 집단의 신학적 치열한 논쟁보다
정치적 투쟁의 힘이 작용한 산물이겟지요(오해 없기 바랍니다)
복음서 자체도 여러 복음서 중 정경으로 체택 문제라든가
각 공동체의 여러 입장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는것도 사실이고
개신교가 외경을 무시하는 역사라든가 번역상의 문제라던가 - 대표적인것이
우리나라 성경번역에 "하나님" 을 "하느님" 으로 번역 하려 할 때
약간의 신학적 논쟁은 있었지만 결국은 쪽수 가 많은
교단의 정치적 입김(불매및 불사용)으로 인한것 이라던지
찬송가도 판매이익 문제에 따라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겼지요
오늘날도 기독교(어느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고위급 회의에 가 보면(총회, 노회, 심지어 개 교회 공동회의)
신앙의 본질 보다는 정치적 힘에 의해 글절되게 결정되는 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작금의 어느 교단 회장 문제가 다 그런거지요
말로는 다 정통이라하고 신앙의 본질을 들먹이지만
속셈은 전연 그렇지 않지요
아마 사도 신경도 그 제정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잘 연구 해 보면
인간의 정치적 입김이 얼마나 작용 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일반인은 미사려구 속에 넘어가지만 그 속 사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삼위일체 교리만 해도 학자들에 따라서는 정치적 결정이며
그 제정 과정에 "황제"를 하느님과 동일시 하려는
의도적인 정치적 힘이 작용 했다고 합니다.-연구가 과문해서 제가 구체적으로 말 할 수는 없지만-
만약 사도신경이 오늘날 정해진다면 다른 내용으로 정해지겟지요
믿는것이야 자유겟지만 어떤것에 절대성을 부여 하는것도
하나의 신앙 오류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 " 연구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정치적 입김이 들어간 것을
조금이라도 벗겨 내고 "신앙의 본질"에 다가 가려는 노력의 하나 라고 봅니다
신앙은 "미사려구'속에 존재 하는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앞에 솔직"해 지려는 노력 이겟지요- 역사적 예수에의 접근이-
평민님은 사도신경이 권력의 산물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라고 말씀하시는군요 . 삼위일체 교리도 정경의 정합성도 모두 권력과 정치의 결과물입니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미제국의 종교입니다.
그러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제국주의자이며 매국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놓인 절박한 상황에서 운명을 함께하는 기독교인이지요 그런 어긋난 과정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성경이 말하는 중심입니다. 사도신경은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대의적으로
요약하여 핵심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 마저 정치와 권력의 음모일까요?
그것마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거야 말로 right 컴플렉스(이런 표현이 있긴 한지 모르겠지만)가 되겠군요
그러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제국주의자이며 매국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놓인 절박한 상황에서 운명을 함께하는 기독교인이지요 그런 어긋난 과정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성경이 말하는 중심입니다. 사도신경은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대의적으로
요약하여 핵심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 마저 정치와 권력의 음모일까요?
그것마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거야 말로 right 컴플렉스(이런 표현이 있긴 한지 모르겠지만)가 되겠군요
기독인의 정체성.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예수가 누구냐? 즉슨, 우리가 누구냐?
신으로 높여진 예수,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굳이 예수가 아니어도, 숭배할만한 지고한 대상은 많습니다.
많고 많은 중에 가장 풍성하고 역동적인 신앙이 기독신앙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곧 현재의 기독교 집단이나 체제가, 또는 그 신앙과 신앙인이,
올바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냐? 예수는 누구냐?
모를 뿐, 오직 모를 뿐입니다.
다만,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담론을 나누고 삶을 나누며 기다린다는 점만 빼면,
아니 오히려 바로 그것 때문에, 바벨탑을 짓고 허무는, 인간 일반의 일원일 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도신경 역시 살아있는 담론이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대화 속에 있어야 합니다.
긍정과 부정의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 그것은 우상으로 전락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예수가 누구냐? 즉슨, 우리가 누구냐?
신으로 높여진 예수,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굳이 예수가 아니어도, 숭배할만한 지고한 대상은 많습니다.
많고 많은 중에 가장 풍성하고 역동적인 신앙이 기독신앙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곧 현재의 기독교 집단이나 체제가, 또는 그 신앙과 신앙인이,
올바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냐? 예수는 누구냐?
모를 뿐, 오직 모를 뿐입니다.
다만,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담론을 나누고 삶을 나누며 기다린다는 점만 빼면,
아니 오히려 바로 그것 때문에, 바벨탑을 짓고 허무는, 인간 일반의 일원일 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도신경 역시 살아있는 담론이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대화 속에 있어야 합니다.
긍정과 부정의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 그것은 우상으로 전락합니다.
사도신경에 관하여 좋은 내용이 있어 그대로 옮겨봅니다.
"이야기 교회사,이성덕지음 (39-65쪽)"
1. 사도신경은 왜 필요하였을까?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 확립과 공식적인 신앙고백의 필요성, 기독교 신앙교육이 문제가 됩니다.
외부적으로는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변증과 선교적인 목적을 들 수 있습니다.
2.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인가?
사도신경이 사도들에 의해 직접 작성되지 않고, 세례라는 삶의 자리에서 태동한 세례문답의 발전된 형태라고 해서 사도들의 고백이나 증언과 무관한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은 본질적으로 신약서신에 나타난 케리그마와 연속성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사도적’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인문주의 신학자 게오르크 칼리크스트는 일치의 공동기반으로 사도신경을 생각하였습니다. 사도신경은 사도적 가르침의 총체로서 고대교회에서 세례고백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교회를 묶는 신앙의 총체로 평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은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조항을 다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신경에 삼위일체론과 원죄론, 무엇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론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중략.......
근대 이후 신학자들은 사도신경이 성경의 핵심 주제들과 인각학적인 주제들을 충분히 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삼위일체적 구조 속에서 ‘위로부터의 신학’은 전개될 뿐 인간의 현실성에 기초한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 한 예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그의 의와 나라에 대한 고백이 빠져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라는 데에 모든 학자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예수님의 선포와 행위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고백이 빠져 있는것은 사도신경의 결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신약성경의 핵심인 케리그마를 담지하고 있으며, 사도적인 원초적 신앙고백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밝혔듯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요 21:25)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신경뿐만이 아니라 모든 신조도 기독교 신앙의 전부를 다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궁극적인 물음은 예수의 행위나 삶보다는 부활하신 분, 그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이것이 고대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기 위한 절박하고 현실 적합적인 과제였습니다. 사도신경은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사도신경은 현대인에게 신앙의 반석인가, 걸림돌인가?
중략.......
사도신경은 단순히 사변적인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자신의 실재적인 구원의 확신과 감격을 표현하는 고백과 찬양의 한 형식이었습니다. 사도신경의 탄생의 자리가 세례예식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모든 신학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사도적인 케리그마를 담지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기독교회가 사도적인 신앙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한 계속적으로 예배에서 사용되어지며,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우리 앞에 피와 살을 입히는 신앙고백으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 교회사,이성덕지음 (39-65쪽)"
1. 사도신경은 왜 필요하였을까?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 확립과 공식적인 신앙고백의 필요성, 기독교 신앙교육이 문제가 됩니다.
외부적으로는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변증과 선교적인 목적을 들 수 있습니다.
2.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인가?
사도신경이 사도들에 의해 직접 작성되지 않고, 세례라는 삶의 자리에서 태동한 세례문답의 발전된 형태라고 해서 사도들의 고백이나 증언과 무관한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은 본질적으로 신약서신에 나타난 케리그마와 연속성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사도적’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인문주의 신학자 게오르크 칼리크스트는 일치의 공동기반으로 사도신경을 생각하였습니다. 사도신경은 사도적 가르침의 총체로서 고대교회에서 세례고백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교회를 묶는 신앙의 총체로 평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은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조항을 다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신경에 삼위일체론과 원죄론, 무엇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론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중략.......
근대 이후 신학자들은 사도신경이 성경의 핵심 주제들과 인각학적인 주제들을 충분히 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삼위일체적 구조 속에서 ‘위로부터의 신학’은 전개될 뿐 인간의 현실성에 기초한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 한 예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그의 의와 나라에 대한 고백이 빠져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라는 데에 모든 학자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예수님의 선포와 행위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고백이 빠져 있는것은 사도신경의 결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신약성경의 핵심인 케리그마를 담지하고 있으며, 사도적인 원초적 신앙고백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밝혔듯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요 21:25)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신경뿐만이 아니라 모든 신조도 기독교 신앙의 전부를 다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궁극적인 물음은 예수의 행위나 삶보다는 부활하신 분, 그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이것이 고대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기 위한 절박하고 현실 적합적인 과제였습니다. 사도신경은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사도신경은 현대인에게 신앙의 반석인가, 걸림돌인가?
중략.......
사도신경은 단순히 사변적인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자신의 실재적인 구원의 확신과 감격을 표현하는 고백과 찬양의 한 형식이었습니다. 사도신경의 탄생의 자리가 세례예식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모든 신학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사도적인 케리그마를 담지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기독교회가 사도적인 신앙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한 계속적으로 예배에서 사용되어지며,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우리 앞에 피와 살을 입히는 신앙고백으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역시 오해가 있군요 그런 뜻이 아닌데 ...
권력의 산물이라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지요
정치적 입김이 들어간 부분을 볏겨내고 중심에 다 다르자는 뜻이지요
글빨이(?) 없으니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내요 ...
쉽게 말하자면 여기 다비아에 모인(셈터교회) 분들이
각 교회 내에서 정치적 희생자 내지 거부자 들이 아닐가요?
만약 개 교회들이 정치적인 것들 보다 신앙적인 본질에 치중햇더라면
아마도 셈터교회나 이 사이트는 생길 필요가 없었겟지요
다른것은 몰라도 우리가 지극히 미국 편향적인 것은 사실이지요
아무리 "좌빨' 이라도 미국적인것에 편향되어 있지요
새터민들이 보면 한국은 완존히 미국화 되었다고 합니다
비로 맹열한 "좌빨"로 여겨지는 사람들도요 ...
이것이 미국식 기독교를 받아드린 탓 아닐가요?
그리고 사도신경에대한 역사성을 검토해 보십시요
그것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일을 거쳐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첨삭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중심은 같지만 도달 하는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겟지요
권력의 산물이라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지요
정치적 입김이 들어간 부분을 볏겨내고 중심에 다 다르자는 뜻이지요
글빨이(?) 없으니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내요 ...
쉽게 말하자면 여기 다비아에 모인(셈터교회) 분들이
각 교회 내에서 정치적 희생자 내지 거부자 들이 아닐가요?
만약 개 교회들이 정치적인 것들 보다 신앙적인 본질에 치중햇더라면
아마도 셈터교회나 이 사이트는 생길 필요가 없었겟지요
다른것은 몰라도 우리가 지극히 미국 편향적인 것은 사실이지요
아무리 "좌빨' 이라도 미국적인것에 편향되어 있지요
새터민들이 보면 한국은 완존히 미국화 되었다고 합니다
비로 맹열한 "좌빨"로 여겨지는 사람들도요 ...
이것이 미국식 기독교를 받아드린 탓 아닐가요?
그리고 사도신경에대한 역사성을 검토해 보십시요
그것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일을 거쳐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첨삭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중심은 같지만 도달 하는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겟지요
콰미님,
한완상님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사도신경에 문제가 있다는 뜻도 아니고,
역사적 예수를 논하자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더욱 미인이라고까지 추켜세운 사도신경을 수술하자는 것도 아니겠지요.
이 글은 ‘한국교회여, 헛된 희망을 말하지 말자’ 특집 중
‘예수이름으로 예수를 괴롭히는 교회’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이 글은 사도신경을 주문처럼 암송하며 예수님의 삶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욕되게 하는 한국교회를 향한 노익장의 따가운 질책과
고언의 소리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역사적 예수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를 강조한 것은,
예수의 공생애를 통한 예수의 실천적인 삶을 본받아
올곧은 예수따르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콰미님이 바라본 관점은 한완상님의 핵심을 비켜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도신경을 시처럼 읽자는 의도와 신학적 통찰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18페이지나 되는 글 중에서 서론격인 사도신경에 대한 내용은
역사적 예수, 예수의 삶이 무엇이고 어떠했는가를 현대교회들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충분히 읽혀지는 대목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없고 교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표현이 길다고 한 것은,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와 빌라도의 그 허전한 빈 공간을 말한 것도
교리보다는 실물 예수를 따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말로는 제자도를 산다고 하면서 삶의 실재에 있어서는 프락시스가
전혀 없는 것을 눈여겨보신 한완상님의 지적이 오히려 돋보입니다.
사도신경이 미인이고 시처럼 음미할 수 도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신앙의 공동체가 초대교회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또한
신앙 안에서 신중하게 해석하고 고백하는 사람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침례교는 신앙고백 시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고 있지요.
사실, 아리우스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가 먼저 죽고 아리우스가 더 오래
살았다면 사도신경은 또 다른 각도로 써질 수도 있었겠지요.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편이라는 것도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지요.
지난 세월 제도 기독교가 예수를 교리로 박제화 하면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렀던 온갖 부끄러운 짓들도 따지고 보면 예수 없는 신조에 매달렸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지난날 역사적 예수를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키고
실물 예수를 박제해버린 온갖 종교적, 신학적, 교리적 악행을 중단하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위선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진실, 정직, 겸손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죠.
역사적 예수는 너희들처럼 살지 않았다. 그러니 역사적 예수, 사실적 예수를 올바로
바라보고, 올곧은 신앙을 가지고 올바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관념과 이론이 지나치면 삶은 온데간데 없고 종교적인 위선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다비아도 그것을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개신교의 상황에서는 예수 이름과 교회현실이 오랫동안 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이름으로 예수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이름과 실제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은 곧 새로운 현실과 실천을 만들어내는 힘이고
그 힘의 실제가 바로 이름입니다.
그에게는 이름과 힘이 항상 있습니다.
이름과 힘, 이름과 변혁이 분리될 때 기독교는 변질되고 맙니다.
개신교회도 예수이름으로 예수를 무수히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캄캄한 밤에 서울 도심지에 반짝이는 수많은 교회를 바라볼 때,
저는 때때로 바로 저 십자가에 오늘도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가 달려
신음하고 게신 것은 아닐까를 생각하며
몸과 마음이 떨려 올 때가 있습니다.“<기상, 본문 중에서>
한완상님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사도신경에 문제가 있다는 뜻도 아니고,
역사적 예수를 논하자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더욱 미인이라고까지 추켜세운 사도신경을 수술하자는 것도 아니겠지요.
이 글은 ‘한국교회여, 헛된 희망을 말하지 말자’ 특집 중
‘예수이름으로 예수를 괴롭히는 교회’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이 글은 사도신경을 주문처럼 암송하며 예수님의 삶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욕되게 하는 한국교회를 향한 노익장의 따가운 질책과
고언의 소리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역사적 예수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를 강조한 것은,
예수의 공생애를 통한 예수의 실천적인 삶을 본받아
올곧은 예수따르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콰미님이 바라본 관점은 한완상님의 핵심을 비켜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도신경을 시처럼 읽자는 의도와 신학적 통찰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18페이지나 되는 글 중에서 서론격인 사도신경에 대한 내용은
역사적 예수, 예수의 삶이 무엇이고 어떠했는가를 현대교회들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충분히 읽혀지는 대목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없고 교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표현이 길다고 한 것은,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와 빌라도의 그 허전한 빈 공간을 말한 것도
교리보다는 실물 예수를 따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말로는 제자도를 산다고 하면서 삶의 실재에 있어서는 프락시스가
전혀 없는 것을 눈여겨보신 한완상님의 지적이 오히려 돋보입니다.
사도신경이 미인이고 시처럼 음미할 수 도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신앙의 공동체가 초대교회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또한
신앙 안에서 신중하게 해석하고 고백하는 사람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침례교는 신앙고백 시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고 있지요.
사실, 아리우스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가 먼저 죽고 아리우스가 더 오래
살았다면 사도신경은 또 다른 각도로 써질 수도 있었겠지요.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편이라는 것도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지요.
지난 세월 제도 기독교가 예수를 교리로 박제화 하면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렀던 온갖 부끄러운 짓들도 따지고 보면 예수 없는 신조에 매달렸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지난날 역사적 예수를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키고
실물 예수를 박제해버린 온갖 종교적, 신학적, 교리적 악행을 중단하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위선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진실, 정직, 겸손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죠.
역사적 예수는 너희들처럼 살지 않았다. 그러니 역사적 예수, 사실적 예수를 올바로
바라보고, 올곧은 신앙을 가지고 올바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관념과 이론이 지나치면 삶은 온데간데 없고 종교적인 위선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다비아도 그것을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개신교의 상황에서는 예수 이름과 교회현실이 오랫동안 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이름으로 예수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이름과 실제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은 곧 새로운 현실과 실천을 만들어내는 힘이고
그 힘의 실제가 바로 이름입니다.
그에게는 이름과 힘이 항상 있습니다.
이름과 힘, 이름과 변혁이 분리될 때 기독교는 변질되고 맙니다.
개신교회도 예수이름으로 예수를 무수히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캄캄한 밤에 서울 도심지에 반짝이는 수많은 교회를 바라볼 때,
저는 때때로 바로 저 십자가에 오늘도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가 달려
신음하고 게신 것은 아닐까를 생각하며
몸과 마음이 떨려 올 때가 있습니다.“<기상, 본문 중에서>
콰미님, 당신의 중심잡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어딘가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 발굴이 될때 엄청나게 신중하게 회손을 막기 위해서 한땀씩 줄을
늘여놓고 조심스럽게 역사의 실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연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한손에 붓...한손에 조그마한 삽(칼)...제체기라도 하면 현장이 손실될까 조심...걸음걸이도 조심조심...
콰미님이 사도신경은 원래미인이라며, 미인은 굳이 성형수술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
개인적으로는 사도신경은 미인이 아니다. 그래도 성형수술을 싫다. 있는그대로 아름다운이며 생명이기에...
해체된 사도신경이 아니라 원래 있는 그대로를 나는 너무 사랑하고 있다. 콰미님과 별로 다른지 않은 견해랍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중에 둘째 솔방울이 있어요. 조금 이쁘지는 않아요(외모). 그런데 있는 그대로 너무 사랑스러워요.ㅎㅎ
나의 아들이니까요. 둘째솔방울이 얼마나 재롱을 떠는지 보시겠어요. 아빠의 마음을 기냥 녹입니다. 죽여줘요.
콰미님 같은 분들의 중심을 잡아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하고 좋습니다.
교회에 어린친구들에게 무언가 설명을 합니다.
길에 쥐가 한마리 죽어있는 것을 보며
"저게 뭐줄 아니?"그러면
"쥐요"...
모든 이이들은 정말로 그 주검이 쥐인줄로 알아요. 그건 주검인데...시체...
우리 다비아는 생명을 사랑한다.
역사적 실체를 다시 살려내어서 만나 확인할 수 없지만 그는 다시오시리라...기다리면...
어딘가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 발굴이 될때 엄청나게 신중하게 회손을 막기 위해서 한땀씩 줄을
늘여놓고 조심스럽게 역사의 실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연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한손에 붓...한손에 조그마한 삽(칼)...제체기라도 하면 현장이 손실될까 조심...걸음걸이도 조심조심...
콰미님이 사도신경은 원래미인이라며, 미인은 굳이 성형수술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
개인적으로는 사도신경은 미인이 아니다. 그래도 성형수술을 싫다. 있는그대로 아름다운이며 생명이기에...
해체된 사도신경이 아니라 원래 있는 그대로를 나는 너무 사랑하고 있다. 콰미님과 별로 다른지 않은 견해랍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중에 둘째 솔방울이 있어요. 조금 이쁘지는 않아요(외모). 그런데 있는 그대로 너무 사랑스러워요.ㅎㅎ
나의 아들이니까요. 둘째솔방울이 얼마나 재롱을 떠는지 보시겠어요. 아빠의 마음을 기냥 녹입니다. 죽여줘요.
콰미님 같은 분들의 중심을 잡아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하고 좋습니다.
교회에 어린친구들에게 무언가 설명을 합니다.
길에 쥐가 한마리 죽어있는 것을 보며
"저게 뭐줄 아니?"그러면
"쥐요"...
모든 이이들은 정말로 그 주검이 쥐인줄로 알아요. 그건 주검인데...시체...
우리 다비아는 생명을 사랑한다.
역사적 실체를 다시 살려내어서 만나 확인할 수 없지만 그는 다시오시리라...기다리면...
정치적 패권과의 투쟁이 표현되어있는 사도신경에
왜 종교적 패권과의 투쟁은 나타나 있지 않을까요?
사도신경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의문점은
빌라도에 의한 고난과 십자가를 이야기 하지만
바리새인등 당시 종교권력자들에 의한 고발과 고난, 죽임등이
더욱 직접적인 책임이 아닌가 싶은데....
오히려 거룩한 공회(교회)에대한 언급은
물론 신학적으로 예수님을 머리로한 교회를 이야기 하겠지만
모르는 다수의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교회라 함은
눈앞에 보이는 건물과 종교조직의 교회를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물론 꼭 틀린말은 아니겠지만)
종교조직으로서의 교회가 거룩하다고 오해할 여지가 있다면
로마카톨릭의 타락과 현대 기독교의 변질등을 생각할때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쩝 개똥신학일까요?
왜 종교적 패권과의 투쟁은 나타나 있지 않을까요?
사도신경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의문점은
빌라도에 의한 고난과 십자가를 이야기 하지만
바리새인등 당시 종교권력자들에 의한 고발과 고난, 죽임등이
더욱 직접적인 책임이 아닌가 싶은데....
오히려 거룩한 공회(교회)에대한 언급은
물론 신학적으로 예수님을 머리로한 교회를 이야기 하겠지만
모르는 다수의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교회라 함은
눈앞에 보이는 건물과 종교조직의 교회를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물론 꼭 틀린말은 아니겠지만)
종교조직으로서의 교회가 거룩하다고 오해할 여지가 있다면
로마카톨릭의 타락과 현대 기독교의 변질등을 생각할때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쩝 개똥신학일까요?
광야 님,
재미 있게 글을 주셨군요.
한완상 장로님의 한국교회를 향한 문제의식은
다비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동감한답니다.
문제는 그것을 교리적 그리스도로부터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는데서 해결할 수 있다는 지적에 있는 거지요.
기본적으로 한 장로님 같은 분들이 생각하는 역사적 예수는 가능하지도 않답니다.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한줌도 안 됩니다.
당신 자신이 말씀하셨듯이 복음서의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지도 않으시네요.
그런 마당에 어떻게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자는 걸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그분이 복음서의 몇몇 보도에 근거해서 제시한 역사 변혁의 주체로서의 예수라는 말은
제가 보기에 아주 관념적인 겁니다.
교리적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가 오히려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저에게는 말이지요.
이는 마치 교회에서 사랑을 실천하자고 주장하면서
아내의 생일에 꽃을 사 주라거나
한번 씩 안아 주어야 한다고 일종의 교양교육을 시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 장로님의 글에는
'프로젝트'라는 말이 자주 나오더군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실천하셨다는 겁니다.
그분에게는 예수님이 결국 칼 마르크스와 다를 게 없어 보이네요.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예수를 목회적인 도구로 이용하듯이
한 장로님 류의 분들도 역사변혁을 위해서 복음을 도구화하는 게 아닐까 염려스럽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기본적으로 저는 젊었을 때부터 한 장로님의 글을 많이 읽었고, 존경하고 있답니다.
그분 글의 앞 부분에 사도신경에 대한 질책이 분명하게 거론되더군요.
잠간 지나나는 말로가 아니라
그의 글 전체를 방향짓은 머릿말로 작용합니다.
오늘 요기까지만 쓸께요.
빨리 밥 먹고 다비아 대구오프에 가야 한다고 옆에서 성화군요.
대림절,
주님은 오십니다.
이건 말 장난이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세계를 뚫어본 중심 신앙이랍니다.
대림절의 평화가....
재미 있게 글을 주셨군요.
한완상 장로님의 한국교회를 향한 문제의식은
다비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동감한답니다.
문제는 그것을 교리적 그리스도로부터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는데서 해결할 수 있다는 지적에 있는 거지요.
기본적으로 한 장로님 같은 분들이 생각하는 역사적 예수는 가능하지도 않답니다.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한줌도 안 됩니다.
당신 자신이 말씀하셨듯이 복음서의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지도 않으시네요.
그런 마당에 어떻게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자는 걸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그분이 복음서의 몇몇 보도에 근거해서 제시한 역사 변혁의 주체로서의 예수라는 말은
제가 보기에 아주 관념적인 겁니다.
교리적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가 오히려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저에게는 말이지요.
이는 마치 교회에서 사랑을 실천하자고 주장하면서
아내의 생일에 꽃을 사 주라거나
한번 씩 안아 주어야 한다고 일종의 교양교육을 시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 장로님의 글에는
'프로젝트'라는 말이 자주 나오더군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실천하셨다는 겁니다.
그분에게는 예수님이 결국 칼 마르크스와 다를 게 없어 보이네요.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예수를 목회적인 도구로 이용하듯이
한 장로님 류의 분들도 역사변혁을 위해서 복음을 도구화하는 게 아닐까 염려스럽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기본적으로 저는 젊었을 때부터 한 장로님의 글을 많이 읽었고, 존경하고 있답니다.
그분 글의 앞 부분에 사도신경에 대한 질책이 분명하게 거론되더군요.
잠간 지나나는 말로가 아니라
그의 글 전체를 방향짓은 머릿말로 작용합니다.
오늘 요기까지만 쓸께요.
빨리 밥 먹고 다비아 대구오프에 가야 한다고 옆에서 성화군요.
대림절,
주님은 오십니다.
이건 말 장난이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세계를 뚫어본 중심 신앙이랍니다.
대림절의 평화가....
콰미 님께 대 실망입니다.
사도신경을 어찌 이렇게 다루실 수 있습니까~~~?
다음은 꽈미 전도사님께서 암송한 사도신경 가운데
빼잡수신 부분입니다.
( ) 안은 꽈미 님께서 예배 중 주여 삼창후 통성기도 끝나고 배가고파
얼른 빼잡수신 내용입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그렇지...
(내가) 믿사오며
저리로서-저리로써 가 아니고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이 부분은 통째로 바베큐 해 잡수셨나봐요.
(아멘)
암기하다보면 이런 일 생깁니다.
그러니 예배 중에 찬송가 펴 놓고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콰미님 지송...
시방 막 아침 먹고 심심해서 장난한 번 쳤어요~~~
사도신경을 어찌 이렇게 다루실 수 있습니까~~~?
다음은 꽈미 전도사님께서 암송한 사도신경 가운데
빼잡수신 부분입니다.
( ) 안은 꽈미 님께서 예배 중 주여 삼창후 통성기도 끝나고 배가고파
얼른 빼잡수신 내용입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그렇지...
(내가) 믿사오며
저리로서-저리로써 가 아니고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이 부분은 통째로 바베큐 해 잡수셨나봐요.
(아멘)
암기하다보면 이런 일 생깁니다.
그러니 예배 중에 찬송가 펴 놓고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콰미님 지송...
시방 막 아침 먹고 심심해서 장난한 번 쳤어요~~~
저는 막 저녁 마치고 씀니다. 시간이 그렇게 다르군요...그런데도 한 공간처럼
대 할 수 있으니요 신기합니다.
지나가는 야그지만 책장을 찾아보니 사도신경 해설에 관한 책이 3권이 있내요
책에 줄처진데가 있는 것을 보니 언젠가 이것을 읽고 나름대로 느꼈던 모양 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 예배중 예배 순서에서 사도 신경암송 할 때
이렇게 많은 뜻을 담긴 것을 의식하고 사도 신경을 암송하나요?
솔직히 저는 의심합니다. 그냥 예배순서에 하나이니 그냥 주문처럼(?) 후다닥 외우는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목회자나 교인이 사도신경을 정말 깊게 의식하면서 암송 할가요?
아마도 "아니올시다" 일겁니다
그래서 제 경우는 좀더 치열하게 외운다고 눈감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책을(찬송가) 펴고 보고 또박 또박 읽습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것이야 없겠지만요 ....
사도신경을 "시" 나 미인 처럼 대하는것도 좋겠지만
사도신경이 입술에 붙은 주문이나 노래 같은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치열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닐가요?
이론화 좋아하는 학자들은 사도신경을 여러가지 논쟁을 하지만 일반 교인들이야
그냥 어느 종교 주문 처럼 입술에 붙은 말에 불과 하지 않을가요"
먼 옛날(?) 저학년 주일학교 시절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외어 오면 "눈깔 사탕" 준다는 유혹(?)에
낑낑거리며 외우던 시절이 아련하군요...
정말 사도신경을 얼마나 치열하게 느끼면서 암송하나요 ? ....
"
대 할 수 있으니요 신기합니다.
지나가는 야그지만 책장을 찾아보니 사도신경 해설에 관한 책이 3권이 있내요
책에 줄처진데가 있는 것을 보니 언젠가 이것을 읽고 나름대로 느꼈던 모양 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 예배중 예배 순서에서 사도 신경암송 할 때
이렇게 많은 뜻을 담긴 것을 의식하고 사도 신경을 암송하나요?
솔직히 저는 의심합니다. 그냥 예배순서에 하나이니 그냥 주문처럼(?) 후다닥 외우는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목회자나 교인이 사도신경을 정말 깊게 의식하면서 암송 할가요?
아마도 "아니올시다" 일겁니다
그래서 제 경우는 좀더 치열하게 외운다고 눈감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책을(찬송가) 펴고 보고 또박 또박 읽습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것이야 없겠지만요 ....
사도신경을 "시" 나 미인 처럼 대하는것도 좋겠지만
사도신경이 입술에 붙은 주문이나 노래 같은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치열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닐가요?
이론화 좋아하는 학자들은 사도신경을 여러가지 논쟁을 하지만 일반 교인들이야
그냥 어느 종교 주문 처럼 입술에 붙은 말에 불과 하지 않을가요"
먼 옛날(?) 저학년 주일학교 시절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외어 오면 "눈깔 사탕" 준다는 유혹(?)에
낑낑거리며 외우던 시절이 아련하군요...
정말 사도신경을 얼마나 치열하게 느끼면서 암송하나요 ? ....
"
저는 매일 아내와 아이들을 대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볼 때마다 사랑스럽다거나 감격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성가시기도 합니다.(아내는 아니고요 ^_^)
그러다 어느 때는 애들이 막 그립기도 하고
아내를 사랑스레 안아주고 싶기도 합니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습관처럼 외는 경우가 솔직히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때에 갑자기 그 고백에 감격이 실리고
진실한 마음이 담기곤 합니다.
찬송도 그렇고요...
배우자랑 오래 떨어져 살면 자칫 사랑이 식어질 수 있대지요?
늘 습관적으로 만나고 사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어떤 감정이 남아 있는 것처럼
사도신경 고백도 그런 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번 주는 장로님 생각하면서
가슴 짠하게 사도신경 읽으렵니다.
저도 외우다가 가끔 헤맬 때가 있어 보고 읽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볼 때마다 사랑스럽다거나 감격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성가시기도 합니다.(아내는 아니고요 ^_^)
그러다 어느 때는 애들이 막 그립기도 하고
아내를 사랑스레 안아주고 싶기도 합니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습관처럼 외는 경우가 솔직히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때에 갑자기 그 고백에 감격이 실리고
진실한 마음이 담기곤 합니다.
찬송도 그렇고요...
배우자랑 오래 떨어져 살면 자칫 사랑이 식어질 수 있대지요?
늘 습관적으로 만나고 사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어떤 감정이 남아 있는 것처럼
사도신경 고백도 그런 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번 주는 장로님 생각하면서
가슴 짠하게 사도신경 읽으렵니다.
저도 외우다가 가끔 헤맬 때가 있어 보고 읽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완상 총재의 의도는 사도신조의 불완전성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이 예수를 교리적으로만 즉, 그리스도론적으로만 알 뿐, 그분처럼 생각하고 살지 못한다는 것 같았습니다.사실 저부터 예수처럼 살지 못하고 있으니, 한완상 총재처럼 자신있게 한국교회를 비판할 자격 없습니다만, 제가 읽기로는 그렇습니다.물론 저도 사도신조가 역사적 예수를 간과한다는 비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본티오 빌라도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도신조는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믿는 신앙고백이니 말입니다.
추신 : 곧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인 대림 4주일이 되는데, 예수께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믿음이 우리네 마음속에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추신 : 곧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인 대림 4주일이 되는데, 예수께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믿음이 우리네 마음속에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이렇게 한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평민장로님 말씀대로 책을 펴서 또박또박 읽는 것은
사도신경의 고백을 공동체적 고백이 되게 하는 데 더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야말로 기도문이 아니라 공동고백문이기 때문이지요.
더불어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적 일치의 고백으로
단순한 반복 암송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전통과 교리에 기대어 사는 것이 오늘날의 안티기독교가 가하는 기독교에 대한 날카로운 칼날들처럼
마냥 나쁘고 불건전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믿음의 결단이 아직 서지 않은 자들, 소위 어린이들에게
사도신경의 고백이 어떤 소용 혹은 문제가 있는가는 조금 다른 문제일 수 있겠고요.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교회에서 설교 등의 말씀행위를 통해
그 고백의 의미들이 해석되고 심화되어야 한다는 것이겠네요.
교리와 전통은 교회와 더불어 살아있는 역사이므로
언제나 그 형태, 혹은 고백이 달라질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할테고
아마도 저 위의 콰미님께서 달아주신 원글의 한 설교문 서론처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오늘날의 수없는 성과들을 고백에 반영할 여지도 분명히 있겠지요.
거기에 대해 우리가 문을 닫아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러나 이미 위의 댓글들에서 드러나듯이
큰 의미나 반향을 일으키기는 부족합니다. 이미 신앙고백록 속에 포함된 내용의 재해석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 것 같네요.
어쨌든,
주술이란 그야말로 그 어떤 해석이 불필요하지요.
열려라 참께, 만 알면 문이 열리는 거죠. 하지만 기독교의 반복적 암송은
그 어떤 결과나 사건을 일으키지는 않잖아요.
아마도 장로님의 지적은 실제 교회 일선에서
그 고백들에 대한 가르침의 우편향이나 좌편향이
사도신경의 고백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키고 /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마성화된 실제적 주문처럼 외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이렇게
사도신경의 의미를 들추면서 논의하고 대화하면
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또 더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정용섭박사님을 모셔다가 사도신경 강의를 부탁드리면 되겠죠. 하하
그리고 콰미님, 글 잘 읽었습니다.
평민장로님 말씀대로 책을 펴서 또박또박 읽는 것은
사도신경의 고백을 공동체적 고백이 되게 하는 데 더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야말로 기도문이 아니라 공동고백문이기 때문이지요.
더불어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적 일치의 고백으로
단순한 반복 암송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전통과 교리에 기대어 사는 것이 오늘날의 안티기독교가 가하는 기독교에 대한 날카로운 칼날들처럼
마냥 나쁘고 불건전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믿음의 결단이 아직 서지 않은 자들, 소위 어린이들에게
사도신경의 고백이 어떤 소용 혹은 문제가 있는가는 조금 다른 문제일 수 있겠고요.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교회에서 설교 등의 말씀행위를 통해
그 고백의 의미들이 해석되고 심화되어야 한다는 것이겠네요.
교리와 전통은 교회와 더불어 살아있는 역사이므로
언제나 그 형태, 혹은 고백이 달라질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할테고
아마도 저 위의 콰미님께서 달아주신 원글의 한 설교문 서론처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오늘날의 수없는 성과들을 고백에 반영할 여지도 분명히 있겠지요.
거기에 대해 우리가 문을 닫아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러나 이미 위의 댓글들에서 드러나듯이
큰 의미나 반향을 일으키기는 부족합니다. 이미 신앙고백록 속에 포함된 내용의 재해석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 것 같네요.
어쨌든,
주술이란 그야말로 그 어떤 해석이 불필요하지요.
열려라 참께, 만 알면 문이 열리는 거죠. 하지만 기독교의 반복적 암송은
그 어떤 결과나 사건을 일으키지는 않잖아요.
아마도 장로님의 지적은 실제 교회 일선에서
그 고백들에 대한 가르침의 우편향이나 좌편향이
사도신경의 고백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키고 /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마성화된 실제적 주문처럼 외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이렇게
사도신경의 의미를 들추면서 논의하고 대화하면
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또 더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정용섭박사님을 모셔다가 사도신경 강의를 부탁드리면 되겠죠. 하하
그리고 콰미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과 '아래로부터의'그리스도론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바우로님 말씀처럼 저희가 '예수처럼'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세계내적인 존재로서 현실성의 문제는 있을 것같습니다. 하지만 '예수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실존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교리로서 주어진 예수 혹은 십자가가 아닌 실존의 물음으로부터 의미가 얻어진 '예수그리스도'라면 더 좋겠지요. 아마도 한완상교수님의 지적은 무조건 십자가로 달려가는 그리스도론이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이 충분히 반영된 '신경'을 바라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능만이 필요하고 하나님과의 의지의 일치를 이루어낸 예수의 가르침은 '신경'에 반영이 안되어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많은 이단교설과의 싸움에서(예를들면 영지주의) 생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틀리지 않기 위한 '신경'은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겠지만 '풍성한' 혹은 '중심적인' 내용이 부족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래의 내용은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Das Glaubensbekenntnis)
1장 "나는 믿습니다"의 마지막 두 패러그래프의 인용입니다.
생존해 있는 세계 최고의 개신교 조신신학자의 고언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사도신경 양식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기초를 요약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기초는 신앙의 실제적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바의 그것이다. 그 양식들은 거의 모든 점에서 더 이상 오늘의 언어일 수 없는 그들 시대의 언어로 이 작업을 펼친다. 따라서 이 사도신경을 단순히 재인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묻고 생각하고 검증하는 심화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오늘날 고대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이 과정에서 항상 같은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진술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진술의 가능성은 신앙 고백적 진술이 한정적인 형식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바와 얼마나 책임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의도의 언어적, 그리고 사상적 표현은 오늘날 더 이상 동일한 사실을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인식하려는 표현일 수는 없다. 대개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사도신경의 몇몇 단어들을 원래 있는 그대로 명확히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개인적인 진실을 훼손시키지 않고 예배가 드려지는 동안 함께 신앙고백을 아뢸 수 있다. 우리가 진술 형식에 대한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러한 진술의 의도를 확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사도신경은 니케아 신조와 마찬가지로 수세기의 변화를 통해서 정착된, 그리고 신앙이해의 많은 차이점을 극복하는 기독교의 일치를 뜻하고 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드리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지, 우리의 개인적인 증언만을 외친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신앙 고백적 진술의 의도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지 어떤지 분명하게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따라서 니케아 신조나 사도신경의 해석, 연구, 그리고 검토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된다. 신앙고백을 구성하고 있는 기독교 전승의 진술에 대한 회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작업을 더욱 활발하게 펼쳐야한다. 사도신경의 내용에 대해 갖게 되는 이런저런 어두운 불쾌감을 값싸게 해소시켜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즉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유별난 양식들, 소위 시류에 편승한 양식들로 대체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양식들은 그것이 아무리 잘된 경우라 하더라도 개개 기독교인이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가담할 수 있는 고대 고백 형식들을 실질적으로 담아낼 수 없다. 신앙의 내용은 말을 바꾼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실질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필요하다. 이 실질은 고대 신앙고백의 형식에 표현되어 있다.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형식화를 거절하는 것은 야만스러운 태도다. 특별히 신앙전승을 해명하기 위해서 교육받고 부름 받은 성직자라면 이와 같은 논란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의무는 전승된 신앙의 공적 표현을 해명하는 것뿐이다. 우스꽝스럽다고 비난받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런 의무를 거절하는 것은 분명히 무책임할 뿐이다. 오늘날 널리 퍼져있는 신앙고백의 공식적 표현에 대한 몰이해는 그것의 폐지가 아니라 그 해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신앙 고백적 진술에 대한 해석과 논의는 특별한 주목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다시 한 번 의미심장한 공동체로 경험될 것이며, 또한 신앙고백이 주일 공동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거 하게 될 것이다. 즉 주일 공동체가 그 시간적 한계를 극복하여 그들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에서 전체 기독교와 연대해 있다는 점을 말이다.
1장 "나는 믿습니다"의 마지막 두 패러그래프의 인용입니다.
생존해 있는 세계 최고의 개신교 조신신학자의 고언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사도신경 양식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기초를 요약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기초는 신앙의 실제적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바의 그것이다. 그 양식들은 거의 모든 점에서 더 이상 오늘의 언어일 수 없는 그들 시대의 언어로 이 작업을 펼친다. 따라서 이 사도신경을 단순히 재인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묻고 생각하고 검증하는 심화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오늘날 고대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이 과정에서 항상 같은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진술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진술의 가능성은 신앙 고백적 진술이 한정적인 형식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바와 얼마나 책임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의도의 언어적, 그리고 사상적 표현은 오늘날 더 이상 동일한 사실을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인식하려는 표현일 수는 없다. 대개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사도신경의 몇몇 단어들을 원래 있는 그대로 명확히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개인적인 진실을 훼손시키지 않고 예배가 드려지는 동안 함께 신앙고백을 아뢸 수 있다. 우리가 진술 형식에 대한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러한 진술의 의도를 확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사도신경은 니케아 신조와 마찬가지로 수세기의 변화를 통해서 정착된, 그리고 신앙이해의 많은 차이점을 극복하는 기독교의 일치를 뜻하고 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드리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지, 우리의 개인적인 증언만을 외친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신앙 고백적 진술의 의도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지 어떤지 분명하게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따라서 니케아 신조나 사도신경의 해석, 연구, 그리고 검토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된다. 신앙고백을 구성하고 있는 기독교 전승의 진술에 대한 회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작업을 더욱 활발하게 펼쳐야한다. 사도신경의 내용에 대해 갖게 되는 이런저런 어두운 불쾌감을 값싸게 해소시켜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즉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유별난 양식들, 소위 시류에 편승한 양식들로 대체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양식들은 그것이 아무리 잘된 경우라 하더라도 개개 기독교인이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가담할 수 있는 고대 고백 형식들을 실질적으로 담아낼 수 없다. 신앙의 내용은 말을 바꾼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실질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필요하다. 이 실질은 고대 신앙고백의 형식에 표현되어 있다.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형식화를 거절하는 것은 야만스러운 태도다. 특별히 신앙전승을 해명하기 위해서 교육받고 부름 받은 성직자라면 이와 같은 논란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의무는 전승된 신앙의 공적 표현을 해명하는 것뿐이다. 우스꽝스럽다고 비난받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런 의무를 거절하는 것은 분명히 무책임할 뿐이다. 오늘날 널리 퍼져있는 신앙고백의 공식적 표현에 대한 몰이해는 그것의 폐지가 아니라 그 해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신앙 고백적 진술에 대한 해석과 논의는 특별한 주목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다시 한 번 의미심장한 공동체로 경험될 것이며, 또한 신앙고백이 주일 공동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거 하게 될 것이다. 즉 주일 공동체가 그 시간적 한계를 극복하여 그들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에서 전체 기독교와 연대해 있다는 점을 말이다.
이제 고만들 하시죠... 본인(한완상)도 없는 논의는 뒷담화일 뿐입니다.
그리고요... 예전에 국민교육 헌장, 국기에 대한 맹세, 새마을 노래,
애국가 부르고 외우면서 눈물 흘리던 어르신들이나 어린이들 많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죽었을 때 광화문 길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곡소리 내던 나이드신 분들 많았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보면서 인간에게 가한 반복 왜곡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봐라...
하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요.... 마치 우리가 북한 사람 보며 안됐다 싶은 측은지심이 생기듯...
그런데요... 그 순간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것의 진정성은 인정해야지요...
물론 방향이 문제이고 인식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꼭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고 말하면 안되는게 종말론적 사고 방식 아닌가요?
강남에 살던 강북에 살던 불행하고 행복한 것은 그 때의 비교일 뿐...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아는 사람에겐 부질 없는 짓이겠지요.
사도 신경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겐 무슨 대안이 있을까요?
또 뭐가 문제냐고 하는 분들은 100% 옳은 것일까요?
유치부 어린이들에게 간식을 줄 때 가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봉투가 같아야 합니다. 색이 같아야 하고요... 만약 다르면... 싸웁니다.
유치원 어린이이기 때문에 그런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그러신다면...
그런데 그러고 있어요...
교회, 목사, 성도, 물질.... 자랑은 끝이 없지요...
결론은....
결국 맛은 경험은 개인의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개인의 고백들을 묶어서 공동의 고백으로 만드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2000동안 두고 두고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오히려 사람들이 의심하고 말이 많은게 더 역사적인거 같은데...
그리고요... 예전에 국민교육 헌장, 국기에 대한 맹세, 새마을 노래,
애국가 부르고 외우면서 눈물 흘리던 어르신들이나 어린이들 많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죽었을 때 광화문 길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곡소리 내던 나이드신 분들 많았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보면서 인간에게 가한 반복 왜곡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봐라...
하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요.... 마치 우리가 북한 사람 보며 안됐다 싶은 측은지심이 생기듯...
그런데요... 그 순간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것의 진정성은 인정해야지요...
물론 방향이 문제이고 인식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꼭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고 말하면 안되는게 종말론적 사고 방식 아닌가요?
강남에 살던 강북에 살던 불행하고 행복한 것은 그 때의 비교일 뿐...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아는 사람에겐 부질 없는 짓이겠지요.
사도 신경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겐 무슨 대안이 있을까요?
또 뭐가 문제냐고 하는 분들은 100% 옳은 것일까요?
유치부 어린이들에게 간식을 줄 때 가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봉투가 같아야 합니다. 색이 같아야 하고요... 만약 다르면... 싸웁니다.
유치원 어린이이기 때문에 그런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그러신다면...
그런데 그러고 있어요...
교회, 목사, 성도, 물질.... 자랑은 끝이 없지요...
결론은....
결국 맛은 경험은 개인의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개인의 고백들을 묶어서 공동의 고백으로 만드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2000동안 두고 두고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오히려 사람들이 의심하고 말이 많은게 더 역사적인거 같은데...
사도신경에 드러난 고백의 관심은 색, 맛이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봉투 안에 존재하는 간식에 대한 것이 아닐까요.
대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다양성은 충분히 존중될 수 있습니다.
개인 신앙 고백의 다양성을 여기 계신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공동의 경험의 총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총체개념Inbegriff으로써의 공동경험은 개인경험고백의 차원과는 그 위상이 다릅니다.
단순한 더하기나 평균값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지 미시세계의 분자들을 조합한다고 해서 생명체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조금 다른 얘기지만
상대적으로 영미권의 영향을 받기 쉬운 한국신학이
지나치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결과들에 매몰되는 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그 봉투 안에 존재하는 간식에 대한 것이 아닐까요.
대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다양성은 충분히 존중될 수 있습니다.
개인 신앙 고백의 다양성을 여기 계신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공동의 경험의 총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총체개념Inbegriff으로써의 공동경험은 개인경험고백의 차원과는 그 위상이 다릅니다.
단순한 더하기나 평균값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지 미시세계의 분자들을 조합한다고 해서 생명체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조금 다른 얘기지만
상대적으로 영미권의 영향을 받기 쉬운 한국신학이
지나치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결과들에 매몰되는 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댓글의 꼬리로 보아 뒷담화 나름의 가치가 있을 듯 싶습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고의 개방성은 진리의 담론이 이루어지는 보편적 해석학의
자리에서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임의적이고 잠정적인 인식의
한계로인해 진리가 개인의 내재성에 속박된다면 그것이 진리의 진정성을 과연 대변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콰미님과의 대화와 위 판넨베르크의 고언에서 들을 수 있었듯이, 그리스도교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됨의 가치,
애큐메니컬 정신이 바로 이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내요. 개인의 경험이 이천여년을 이어가며 다양한 소리를 냄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고백을 내려하는 것은
무엇때문일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신학적 사유를 나누며 나아가는 것은 건강한 모습이라 생각되네요.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고의 개방성은 진리의 담론이 이루어지는 보편적 해석학의
자리에서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임의적이고 잠정적인 인식의
한계로인해 진리가 개인의 내재성에 속박된다면 그것이 진리의 진정성을 과연 대변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콰미님과의 대화와 위 판넨베르크의 고언에서 들을 수 있었듯이, 그리스도교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됨의 가치,
애큐메니컬 정신이 바로 이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내요. 개인의 경험이 이천여년을 이어가며 다양한 소리를 냄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고백을 내려하는 것은
무엇때문일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신학적 사유를 나누며 나아가는 것은 건강한 모습이라 생각되네요.
아~ 이런... 한참 글을 썻는데... 로그인이 풀리면서... ㅠ.ㅠ
더 쓸 자신도 없고... 기억도 안나고.... 목사님까지 댓글 주시고... 이거 송구 합니다.
"이제 고만들 하시죠... 본인(한완상)도 없는 논의는 뒷담화일 뿐입니다." 이 부분이 오해를... 꾸벅!
논의 자체에 대한 중단 요구는 아닙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요... 아~! 다시 치려니까.. 막막합니다.
몇 일전에 80세로 시한부 삶을 사시는 권사님 한분을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35년 권사직분에 계셨고, 새벽기도는 물론... 모든 모임 철저히 참석하시고...
도, 말씀... 철저하시고... 문병 간 사람들 위해 일일이 다 기도해주시고... 농담도 하시는데... 쩝...
병원 갔는데 그분이 보시는 성경이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다시살았다는 부분과
하나님의 위로나 생명이 살아난 일에 대한 기적들은 몽땅 거의 외우다 시피 하시더군요...
찬송가도 528장 '병든 이몸 고치시고'인가요? 그것만 열심히 부르시고...
생명에 관한 철저하게 이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런거 겠지요?
전 그 할머니의 절박함 앞에 별로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믿음은 방향이 잘못 되었다거나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꺼내는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의 절박함 앞에 있는 할머니에게 그런게 다 뭡니까?
그 할머님의 간절함과 태도에 대해 과연 누가 교정이나 비난을 가할 수 있을까요?
너무 극단적 비유 인가요? 글쎄요?
제가 시한부 인생이라면 그저 편안하게 주님 저 갑니다. 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살아보려고 쌩쑈를 해 볼겁니다. 그게 더 인간적인거 같고요...
저는 할머니의 절박함 앞에 저의 입이 다물어 졌던 것 처럼...
사도신경에서도 일종의 절박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콰미님의 원래 미인이라는 말에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절박감에 하나 하나.... 여기 저기... 손을 보았던
그래서 겨우 목숨을 부지해 살아남은 숨을 헐떡이는 흉한 수술환자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그 앞에 모양이 이상하다고... 난 저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 수 없지요.
전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 눈뜨고 읽습니다. 상투적 암송을 피하는 나름의 방법이죠.
그런 면에서 한완상 님의 글에 대해 가당치도 않다는 듯한 표현에 부담을 느낀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 대상에서 벗어난 말, 건강치 못한 말로 이해 되는 것도 그렇고요...
기왕 나온 김에 콰미님 글 머리에 제시하신 평신도 교회, 대안 교회와
한완상 새길 교회, 샘터 교회... 전 큰 차이를 못 느낍니다.
나미님 말씀하신 같은 방향을 지향하는 손가락 같은데요.
제가 너무 낙천적이거나 무지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전자라면 이해해 주시고...
후자라면 용서해 주시지요...
좋은 아침 맞이 하시길...
조금 더 있다가... 전 새벽기도 가야 겠습니다.
더 쓸 자신도 없고... 기억도 안나고.... 목사님까지 댓글 주시고... 이거 송구 합니다.
"이제 고만들 하시죠... 본인(한완상)도 없는 논의는 뒷담화일 뿐입니다." 이 부분이 오해를... 꾸벅!
논의 자체에 대한 중단 요구는 아닙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요... 아~! 다시 치려니까.. 막막합니다.
몇 일전에 80세로 시한부 삶을 사시는 권사님 한분을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35년 권사직분에 계셨고, 새벽기도는 물론... 모든 모임 철저히 참석하시고...
도, 말씀... 철저하시고... 문병 간 사람들 위해 일일이 다 기도해주시고... 농담도 하시는데... 쩝...
병원 갔는데 그분이 보시는 성경이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다시살았다는 부분과
하나님의 위로나 생명이 살아난 일에 대한 기적들은 몽땅 거의 외우다 시피 하시더군요...
찬송가도 528장 '병든 이몸 고치시고'인가요? 그것만 열심히 부르시고...
생명에 관한 철저하게 이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런거 겠지요?
전 그 할머니의 절박함 앞에 별로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믿음은 방향이 잘못 되었다거나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꺼내는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의 절박함 앞에 있는 할머니에게 그런게 다 뭡니까?
그 할머님의 간절함과 태도에 대해 과연 누가 교정이나 비난을 가할 수 있을까요?
너무 극단적 비유 인가요? 글쎄요?
제가 시한부 인생이라면 그저 편안하게 주님 저 갑니다. 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살아보려고 쌩쑈를 해 볼겁니다. 그게 더 인간적인거 같고요...
저는 할머니의 절박함 앞에 저의 입이 다물어 졌던 것 처럼...
사도신경에서도 일종의 절박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콰미님의 원래 미인이라는 말에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절박감에 하나 하나.... 여기 저기... 손을 보았던
그래서 겨우 목숨을 부지해 살아남은 숨을 헐떡이는 흉한 수술환자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그 앞에 모양이 이상하다고... 난 저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 수 없지요.
전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 눈뜨고 읽습니다. 상투적 암송을 피하는 나름의 방법이죠.
그런 면에서 한완상 님의 글에 대해 가당치도 않다는 듯한 표현에 부담을 느낀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 대상에서 벗어난 말, 건강치 못한 말로 이해 되는 것도 그렇고요...
기왕 나온 김에 콰미님 글 머리에 제시하신 평신도 교회, 대안 교회와
한완상 새길 교회, 샘터 교회... 전 큰 차이를 못 느낍니다.
나미님 말씀하신 같은 방향을 지향하는 손가락 같은데요.
제가 너무 낙천적이거나 무지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전자라면 이해해 주시고...
후자라면 용서해 주시지요...
좋은 아침 맞이 하시길...
조금 더 있다가... 전 새벽기도 가야 겠습니다.
꼭지글 부터 댓글까지 모조리 읽어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말이 이렇게 어려운 줄 미처 몰랐습니다.
머리에 쥐가 나려고 하네요.
이과생이 철학과 강의에 동참했으니 당연한 결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토론을 열심히 읽다보니 많이 배웠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 읽고 느낀 제 생각을 전 이과생답게 중딩 수준으로 써볼랍니다.
사도신경에 대해서나 성경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지라도 얼마든지 악쓰며 싸울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일단 이것은 성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진정한 가치를 가지려면 결국 지향하는 바가 같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이 싸움에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려 하거나 남의 못남을 들추려 하면 안될 것이다.
죽어라고 치고 박고 싸운 후에 갯벌에 널부러져 하늘을 보고 누워 너털 웃음을 웃는 친구처럼
다비아라는 갯벌에서 푹푹 빠져가며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하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싸움도 너털 웃음을 하늘에 날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래서 난 다비아가 좋다.
이 갯벌에 가끔 불청객이 나타나 이상한 쪽으로 싸움을 이끌어 가려고 할 땐 과감히 바다에 던져버려야 한다.
좀 이상한 쪽으로 글이 흘렀네요.
전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낭송할 때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저의 간절한 기도와 고백으로 드립니다.
그 속에 담겨진 온갖 역사적 사실과 신앙적인 것들은 머리속에 떠올리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떠올리며 그냥 그렇게 합니다.
기도를 할 수 없을만큼 힘이 들땐 그냥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몇 번이고.... 그러면 아무 이유없이 그냥 맘이 편안해집니다.
활발히 토론은 하되
굳이 사도신경에 칼을 대어 고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해봅니다.
아무리 고친들 얼마나 더 예쁘게 고치겠습니까?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네요.
콰미님께서 말씀하신 미인이라는 말은 이 뜻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 저기 고쳐서 이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이쁘다는...
아무리 옥떨매(옥상에서 떨어진 매주) 같이 생겼어도
그냥 그저 이쁘고 사랑스럽다는...
우리나라 말이 이렇게 어려운 줄 미처 몰랐습니다.
머리에 쥐가 나려고 하네요.
이과생이 철학과 강의에 동참했으니 당연한 결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토론을 열심히 읽다보니 많이 배웠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 읽고 느낀 제 생각을 전 이과생답게 중딩 수준으로 써볼랍니다.
사도신경에 대해서나 성경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지라도 얼마든지 악쓰며 싸울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일단 이것은 성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진정한 가치를 가지려면 결국 지향하는 바가 같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이 싸움에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려 하거나 남의 못남을 들추려 하면 안될 것이다.
죽어라고 치고 박고 싸운 후에 갯벌에 널부러져 하늘을 보고 누워 너털 웃음을 웃는 친구처럼
다비아라는 갯벌에서 푹푹 빠져가며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하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싸움도 너털 웃음을 하늘에 날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래서 난 다비아가 좋다.
이 갯벌에 가끔 불청객이 나타나 이상한 쪽으로 싸움을 이끌어 가려고 할 땐 과감히 바다에 던져버려야 한다.
좀 이상한 쪽으로 글이 흘렀네요.
전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낭송할 때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저의 간절한 기도와 고백으로 드립니다.
그 속에 담겨진 온갖 역사적 사실과 신앙적인 것들은 머리속에 떠올리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떠올리며 그냥 그렇게 합니다.
기도를 할 수 없을만큼 힘이 들땐 그냥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몇 번이고.... 그러면 아무 이유없이 그냥 맘이 편안해집니다.
활발히 토론은 하되
굳이 사도신경에 칼을 대어 고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해봅니다.
아무리 고친들 얼마나 더 예쁘게 고치겠습니까?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네요.
콰미님께서 말씀하신 미인이라는 말은 이 뜻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 저기 고쳐서 이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이쁘다는...
아무리 옥떨매(옥상에서 떨어진 매주) 같이 생겼어도
그냥 그저 이쁘고 사랑스럽다는...
수 많은 논란과 여러가지 부족한 면(빠진 부분이 많은)이 있는 "사도신경"이지만
신앙의 조상들이 신앙을 지키고저 "투쟁'속에서 이루어낸 신앙고백을 폐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고정불변으로 모방 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사도신경 문구 자체가 발전해 왔듯이
시대의 상황과 연결되어 재 해석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고백"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고백"이 "삶" 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세상이 사기꾼(?)으로 볼 것입니다
신앙의 조상들이 신앙을 지키고저 "투쟁'속에서 이루어낸 신앙고백을 폐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고정불변으로 모방 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사도신경 문구 자체가 발전해 왔듯이
시대의 상황과 연결되어 재 해석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고백"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고백"이 "삶" 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세상이 사기꾼(?)으로 볼 것입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통: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Holy Catholic Church, 산 사람과 별세자, 부자와 빈자, 고학력자와 저학력자,여자와 남자, 어른과 어린이,외국사람과 한국사람 모두 생각과 환경은 다르나, 예수를 예배하고 그분의 성체와 보혈을 모시며 한 몸을 이루는 보편교회.)과 성도의 상통(Communion,사귐, 교제). 교회는 거룩하다는 말은 교회가 성령강림절에 시작되었기 때문 즉, 성령께서 임재하신 그리스도 공동체이지, 그 자체가 거룩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서 고대교회(초대교회)교부들은 거룩한 창녀, 일본 장로교회 목사 가가와 도요히코는 죄인들의 목욕탕이라고 했답니다.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저리로서-불필요한 문장.
몸이 다시 사는 것:몸의 부활을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 죄의 용서와
그외 사도신조는 본래 Credo(신앙고백)을 뜻하므로 나는 믿나이다나 나는 믿습니다라는 문장을 넣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이정도의 설명이라면, 개신교회 사도신조에 대한 주향한님의 의문점이 어느정도 풀리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저리로서-불필요한 문장.
몸이 다시 사는 것:몸의 부활을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 죄의 용서와
그외 사도신조는 본래 Credo(신앙고백)을 뜻하므로 나는 믿나이다나 나는 믿습니다라는 문장을 넣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이정도의 설명이라면, 개신교회 사도신조에 대한 주향한님의 의문점이 어느정도 풀리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찌 그리 그대로 쏙 빼다가
경쾌한 리듬으로 쏟아놓소이까.
콰미 님은 이제 신학자요, 설교자로 나서도 되겠소.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