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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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용기를 내서 지난 학기에 서울신대 학부 설교대회 때 했던 설교 원고 올려봅니다..
주제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본질' 뭐 이런 주제로 했더랬는데요..
민망하지만 그래도 용기내서 올려봅니다^^;;
2008년도 모두 주님의 은혜로 지내온 거 같네요..
올 한해도 마무리 잘하시구요..
감사한 주일 맞으소서~
ps 저를 아주 조금이라도 기억해주시는 분들을 위해 잘난체 하나 하면요..
올해 치룬 한신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말도 안되게 수석입학을 했네요..허허허;;;
등록금이 없어 심하게 고민하는 저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나봐요..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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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31-39
무력한 사랑
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17:1에 의하면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전능하신 분으로 나타내신 사건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전능하지 않으시다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우리도 하나님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신앙도 하나님이 초월적인 분이시며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앙하는 분들이라면 하나님이 초월적이며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크게 의심하지 않으실 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역사의 한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의 역사가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멸망을 경험해야했고 B.C587년에는 남유다도 멸망을 경험해야했습니다. 그리고 70년 가까운 시간을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왔습니다. 바벨론 포로기가 그들의 절망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의 지배를 돌아가면서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어려움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개개인의 삶을 볼 때도 그들은 그렇게 넉넉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약성서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난 20세기에 우리는 비참한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앙하던 유태인 600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어가던 사실을 잊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지만 우리는 늘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해왔습니다.
이런 잔혹한 역사를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는 말을 단지 비 신앙적인 언행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표현방식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부르짖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절박한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 말처럼 하나님이 죽었다고 해서 실제로 죽은 하나님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모두 헛된 것일 겁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는 외침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는 절박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의 관심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의 후반부의 이야기에서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벌어지는 절박한 사건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절박함은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고스란히 벌어지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8장 35절에서 바울은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라는 수많은 위험요소가 그들의 삶에 벌어지고 있던 사실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처지가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단지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의 처지가 그러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민감하지 못해서 그렇지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전쟁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 여전히 지구의 수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정확히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쉴 새 없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우리에게 벌어졌다는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그 사실은 무엇입니까?? 바울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절박함조차도 상대화시켜버릴 수밖에 없던 그 사건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인간의 절박함과 곤궁 속으로 내어 주신 그 사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사건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도 뛰어넘을 수 없는 사건이며 세상에서 찾아오는 모든 절박함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믿었습니다.
세상의 역사에서 뿐 아니라 기독교와 유대교의 역사에서 늘 하나님은 전능한 분으로 인식되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전능은 파괴적인 전능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힘으로 능력으로 뒤 엎는 그런 전능이 아닙니다. 그분의 전능은 자신의 전능하심까지라도 내던지시는 무력한 사랑의 전능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바로 무력한 사랑의 전능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력한 사랑 안에서 드러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공생애 사역에서 보여주신 기적과 능력자체에 있기보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에 모두 걸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매여 계신 분이셨고 예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속에서만 나타나신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그럴듯한 말로만 그분의 사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삶으로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곧 하나님의 극단적인 사랑의 표현방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절박함과 인생의 곤경이 찾아옵니다. 세상의 종말까지 끝없이 그렇게 찾아올 겁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의 한편에 숨어계시거나 죽으신 분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바울의 비장한 표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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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
주제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본질' 뭐 이런 주제로 했더랬는데요..
민망하지만 그래도 용기내서 올려봅니다^^;;
2008년도 모두 주님의 은혜로 지내온 거 같네요..
올 한해도 마무리 잘하시구요..
감사한 주일 맞으소서~
ps 저를 아주 조금이라도 기억해주시는 분들을 위해 잘난체 하나 하면요..
올해 치룬 한신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말도 안되게 수석입학을 했네요..허허허;;;
등록금이 없어 심하게 고민하는 저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나봐요..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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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31-39
무력한 사랑
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17:1에 의하면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전능하신 분으로 나타내신 사건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전능하지 않으시다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우리도 하나님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신앙도 하나님이 초월적인 분이시며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앙하는 분들이라면 하나님이 초월적이며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크게 의심하지 않으실 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역사의 한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의 역사가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멸망을 경험해야했고 B.C587년에는 남유다도 멸망을 경험해야했습니다. 그리고 70년 가까운 시간을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왔습니다. 바벨론 포로기가 그들의 절망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의 지배를 돌아가면서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어려움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개개인의 삶을 볼 때도 그들은 그렇게 넉넉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약성서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난 20세기에 우리는 비참한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앙하던 유태인 600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어가던 사실을 잊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지만 우리는 늘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해왔습니다.
이런 잔혹한 역사를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는 말을 단지 비 신앙적인 언행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표현방식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부르짖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절박한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 말처럼 하나님이 죽었다고 해서 실제로 죽은 하나님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모두 헛된 것일 겁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는 외침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는 절박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의 관심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의 후반부의 이야기에서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벌어지는 절박한 사건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절박함은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고스란히 벌어지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8장 35절에서 바울은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라는 수많은 위험요소가 그들의 삶에 벌어지고 있던 사실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처지가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단지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의 처지가 그러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민감하지 못해서 그렇지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전쟁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 여전히 지구의 수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정확히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쉴 새 없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우리에게 벌어졌다는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그 사실은 무엇입니까?? 바울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절박함조차도 상대화시켜버릴 수밖에 없던 그 사건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인간의 절박함과 곤궁 속으로 내어 주신 그 사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사건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도 뛰어넘을 수 없는 사건이며 세상에서 찾아오는 모든 절박함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믿었습니다.
세상의 역사에서 뿐 아니라 기독교와 유대교의 역사에서 늘 하나님은 전능한 분으로 인식되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전능은 파괴적인 전능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힘으로 능력으로 뒤 엎는 그런 전능이 아닙니다. 그분의 전능은 자신의 전능하심까지라도 내던지시는 무력한 사랑의 전능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바로 무력한 사랑의 전능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력한 사랑 안에서 드러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공생애 사역에서 보여주신 기적과 능력자체에 있기보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에 모두 걸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매여 계신 분이셨고 예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속에서만 나타나신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그럴듯한 말로만 그분의 사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삶으로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곧 하나님의 극단적인 사랑의 표현방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절박함과 인생의 곤경이 찾아옵니다. 세상의 종말까지 끝없이 그렇게 찾아올 겁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의 한편에 숨어계시거나 죽으신 분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바울의 비장한 표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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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
지난 서울 오프에서 뵌 분 맞지요?
나미님 옆에 앉으셨던,
와,축하 축하 드려요.
다비안 중에 수재가 많은 줄은 알았지만,
너무 반갑고 기쁘네요.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