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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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잔느 귀용의 “하나님과의 연합” 이라는 책을 지겹도록 오래 끌다가 드디어 몇 페이지 남기고 다 읽었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것은 외람된 것이겠지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잔느 귀용은 서로 다른 표현들을 통해서 똑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살짝 맛만 봤지만, 그 궁극적 영성을 철학적으로 설명해주는 것 같구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경험을 통해서 無의 無化를 이끌어 내어 “無” 스스로가 존재를 덮고 있는 껍질을 다 벗기고 난 바로 그 자리에 결국은 참된 존재자가 빛나고 있음을, 그래서 “나” 라는 개별 존재는 그 존재자를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존재가 되는 과정을 하이데거가 이야기 했는데요...
이건 뭐... 에크하르트 영감이나 귀용 댁도 똑같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구요... 에크 영감은 좀 먹물이 많이 묻어서 아카데믹한 잔재주들이 글에 많이 보이고 그게 때로는 의미를 해치기도 하지만, 귀용 댁은 신앙적 언어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소박하고 명확한 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새 귀용 댁 팬이 되었습니다...
요즘에 친구들이랑 “능력과 확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일반적인 이야기는 속된 말로 “하나님께 불 받고 나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과 능력을 받아서 그 것을 드러내면서 살아야 한다” 는 식입니다. 그래서 선교, 비전 이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잔느 귀용은 이런 말을 합니다... 확실성에 대한 집착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다고,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하는 방식이 어쩌면 그렇게도 비그리스도인들과 닮아 있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일갈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리 선한 것을 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더라도 이 것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아닐 때가 많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존재임을 알 때에, 완전히 죽어 있어서 내가 무언가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사라지고 없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그래서 확신빵, 능력지상주의는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잔느 귀용은 또한 자신의 영적인 신비 체험을 통해 “내”가 죽으면서 내 속에서 일어나는 “혼의 부활” 을 말합니다... 영혼육 삼분설 등등의 구도로 접근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혼”은 간단하게 우리 개개인들의 개체적 자아, 즉 “프쉬케” 나 “소마” 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재밌는 게 잔느 귀용은 “부활”이란 것이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시작된 것으로 경험을 합니다. 저에게도 부활이란 것은 씨가 이미 심기어 죽고 난 후 싹이 트고 점점 자라가는 것처럼 그래서 마지막 날, 종말의 완성의 때에 활짝 만개하며 완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표면적인 삶과 죽음이란 것이 부활이 아닌 상태와 부활인 상태를 나누는 기점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소마 프뉴마티콘... “신령한 몸” 은 바로 우리들의 궁극적인 부활체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우리의 자신들의 상태를 말하는 것습니다... 우리의 지금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 속에 있는 것이겠구요...
귀용 댁은 우리가 부활하는 현상을 이렇게 멋지게도 설명합니다... 음식이 우리의 입을 통해서 몸으로 들어가면 그 음식이 그대로 있지 않고 우리 몸에 맞게 변형이 되듯 부활도 그런 것이라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면서 신적 변형을 일으키게 되는 그런 것이겠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삶 속에서 그 과정 속으로 진입한 사람들이죠...
하여튼 밑도 끝도 없는 글이었지만, 잔느 귀용을 통해서 신앙이 리얼리티를 획득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죽음에 대한 선구적 경험을 통해서 無의 無化를 이끌어 내어 “無” 스스로가 존재를 덮고 있는 껍질을 다 벗기고 난 바로 그 자리에 결국은 참된 존재자가 빛나고 있음을, 그래서 “나” 라는 개별 존재는 그 존재자를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존재가 되는 과정을 하이데거가 이야기 했는데요...
이건 뭐... 에크하르트 영감이나 귀용 댁도 똑같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구요... 에크 영감은 좀 먹물이 많이 묻어서 아카데믹한 잔재주들이 글에 많이 보이고 그게 때로는 의미를 해치기도 하지만, 귀용 댁은 신앙적 언어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소박하고 명확한 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새 귀용 댁 팬이 되었습니다...
요즘에 친구들이랑 “능력과 확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일반적인 이야기는 속된 말로 “하나님께 불 받고 나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과 능력을 받아서 그 것을 드러내면서 살아야 한다” 는 식입니다. 그래서 선교, 비전 이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잔느 귀용은 이런 말을 합니다... 확실성에 대한 집착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다고,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하는 방식이 어쩌면 그렇게도 비그리스도인들과 닮아 있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일갈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리 선한 것을 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더라도 이 것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아닐 때가 많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존재임을 알 때에, 완전히 죽어 있어서 내가 무언가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사라지고 없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그래서 확신빵, 능력지상주의는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잔느 귀용은 또한 자신의 영적인 신비 체험을 통해 “내”가 죽으면서 내 속에서 일어나는 “혼의 부활” 을 말합니다... 영혼육 삼분설 등등의 구도로 접근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혼”은 간단하게 우리 개개인들의 개체적 자아, 즉 “프쉬케” 나 “소마” 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재밌는 게 잔느 귀용은 “부활”이란 것이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시작된 것으로 경험을 합니다. 저에게도 부활이란 것은 씨가 이미 심기어 죽고 난 후 싹이 트고 점점 자라가는 것처럼 그래서 마지막 날, 종말의 완성의 때에 활짝 만개하며 완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표면적인 삶과 죽음이란 것이 부활이 아닌 상태와 부활인 상태를 나누는 기점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소마 프뉴마티콘... “신령한 몸” 은 바로 우리들의 궁극적인 부활체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우리의 자신들의 상태를 말하는 것습니다... 우리의 지금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 속에 있는 것이겠구요...
귀용 댁은 우리가 부활하는 현상을 이렇게 멋지게도 설명합니다... 음식이 우리의 입을 통해서 몸으로 들어가면 그 음식이 그대로 있지 않고 우리 몸에 맞게 변형이 되듯 부활도 그런 것이라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면서 신적 변형을 일으키게 되는 그런 것이겠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삶 속에서 그 과정 속으로 진입한 사람들이죠...
하여튼 밑도 끝도 없는 글이었지만, 잔느 귀용을 통해서 신앙이 리얼리티를 획득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게시판에서 제목을 보는 순간, 눈에 확 꽂쳤어요.
저는 에크도 귀용도 하이덱도 전혀 모르지만, 자꾸 묵상을 할수록 이런 생각이 들어 왔었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최종 목적이 무었일까? 성경에 확실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묵상과 저의 신앙경험으로는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연합체를 창조하시는 사역을
이끌어 나아가시는 것 같아요. 나를 버리고 온전히 그에게 의존하고 신뢰할 때에야,
비로서 나는 죽고, 진정한 '나'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인 어떤 존재가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욥이 나중에 다다르는 신앙의 경지가 바로 그런 단계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것을 위한 가정 중요한 훈련이 되는 것 같구요.
아~ 말씀하신 책, 당장 주문해서 읽어 봐야 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