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내비게이터와 하나님

Views 1303 Votes 3 2008.12.31 22: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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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한국에서도 차량용 내비게이터 많이 쓰시죠?

여기 호주에서는 1-2년전부터야 비로서 내비게이터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15년전에 처음와서 운전석의 위치도 바뀌고, 길도 몰라서 지도를 보며 고생하던 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또 어딘가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갈때에는 제가 운전을 하고 집사람이
옆에서 지도를 보며 항법사 역할을 하게 되는데, 길을 잃게되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다투기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저희만 그런게 아닌듯, 요즘 내비게이터의
광고 카피가 "Shorter trip, longer marrage !"(거리는 짧게, 결혼은 길게...)이더라구요.
많은 부부가 길 찾는것 때문에 싸우는 것 같습니다.

내비케이터를 쓰면서 느끼는게 있습니다. 그 작은 기계를 쓰고부터는 길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없어지고, 그냥 거기서 나오는 안내대로 아무 생각없이 운전을 하더라구요.
왼쪽으로 붙으라면 왼쪽으로 붙고, 왼쪽으로 돌라면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라면
오른쪽으로 돌고, 그러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더군요. 얼마나 신통한지요.

왜 그렇게 내비게이터 말을 잘 들을까요? 그말만 들으면 목적지에 어떻게해서든지 도착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이죠. 즉 내비게이터를 믿는거죠.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신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인도)대로 살지 않습니다.

저는 내비게이터 만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믿으면 순종합니다. 순종없는 믿음.... 그런건 없는 것 같습니다.



안희철

2009.01.01 00:42:23
*.1.112.25

시드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방금 한국은 새해를 맞았더군요. 물론 촛불의 함성에 타종소리는 꽹과리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리네요.

네비게이션과 하나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통한 세계통치(하나님의 나라)가 그 목적이라고 제한하여 표현한다면, 네비게이션의 목적은 공간이동, 하나님의 목적은 시간이동을 각자 더 많이 경험해야만 합니다(현대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만, 인간의 경험 차원에서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그런데 피조물은 공간보다는 시간을 더 낯설어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시간의 벽을 넘는 듯이 수억광년 떨어진 별들이 수억광년의 시간을 보내고 다가온 빛을 우리의 눈으로 감각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일련의 "시간의 공간화"가 되어버리는 듯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시간이동을 해야만 하는 피조물의 현실성은 그분의 뜻(의지)대로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신학자 판넨베르크의 글에서 보듯이 피조물이 제아무리 신의 창조의지에 대하여 거부한다 하여도 그는 그의 창조의 의지대로 그의 의도들에 부합되는 행위들로써 우리의 행위들을 삼으실 것입니다(판, 조직신학2, p. 76; "die Folgen geschoepflichen Versagens durch Abwendung des Geschoepfes von seinem Schoepfer letztlich den Absichten Gottes mit seiner Schoepfung dienen muessen"). 물론 그 완성은 종말적 미래에서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시드니님 말씀대로 "믿음" 뿐이겠지요. 물론 그렇다고 신이 알아서 다 할터이니 될대로 살아도 되는 건 아니겠고요.

시드니

2009.01.01 09:33:01
*.168.170.161

목사님, 제글에 이렇게 답을 달아주셔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목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고, 저는 "둥근해가 떳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수하고 이를 닦고...."를 노래하고
있는데, 목사님은 지구의 자전원리와 태양이 빛을 내는 핵융합 원리를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ㅋ 어쨋든 영광입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될듯 말듯 합니다.하나님의 창조의 대상인 우리가 창조계획의 이루어 지심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는 것이, 주제파악을 제대로 못하는게 아닌가 그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저도 완전히 동의합니다. 저 자신도 뭐 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을 드리고 싶다거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저 자신의 삶에, 영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 개개인의 삶을 어떤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보신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주시고, 우리와 어떤 interaction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생명으로 풍성하여 지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그렇지 못하고, 메마르고
껍데기인 것에 목숨을 거는 생명없는 우리의 삶을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것이 나의 삶을 가장 잘 사는 거이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신뢰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제가 안타까워서 쓴 글입니다.

윗글을 쓰면서, 야고보의 심정이 이해가 갔습니다. 믿으면 순종하게 되는게 아니고, 믿음과 순종은
같은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믿음이 부족함을 고백하고, 늘 그 믿음을 돌아보고 재확립하는게 필요한 것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목사님, 저에게는 무지 어려운 말씀이지만, 이렇게 답글을 주시면 거기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의 수준에 개의치 마시고, 언제든지 무슨 내용이던지 글을 주시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평민

2009.01.01 19:52:11
*.90.49.136

나는 네비를 보면서 "하느님의 감찰(?) 같은것을 느꼈지요
내가 어디 가는지, 가고 잇는지, 어디에 와 있는지
나보다 먼저 알고 있더라고요 ...
어느 골목길 가는데 네비 목소리로 " 속도 방지턱 있으니 조심하세요 "라고 ...
네비의 손에서 벗어 날 수가 없더라고요 ....
마치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듯이 ...
좋은 세상인지 감시를 받는 세상인지 헷갈리더군요 ...
profile

저별과 달

2009.01.01 20:11:27
*.206.88.145

저도 하나님을 신뢰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끝까지 순종해 보지도 않고 처음 받은 은혜를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이란 결코 쉬운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편리한 대로 믿고, 나의 목적이 먼저이고, 나의 판단과 지식으로
똑똑한채 살아 가면서 저는 하나님께 많은 연단을 받습니다.
순종없는 믿음.. 그건 아직 진정한 제자의 삶은 아니겠지요..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통해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는지 귀 기울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시드니 님이 이 글에서 말 하고저 하시는것이
네비게이션의 기계적인 원리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니겠지요
공간이동, 시간이동은 더욱 시드니 님의 본 글 의 주제가 아닐 테구요.
말씀에 순종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겠지요..
시드니님, 정말 새해 첫날에 명언을 담고 갑니다.

순종 없는 믿음 그런건 없는것 같습니다!
천국 갈때 까지 아멘 입니다!

안희철

2009.01.01 21:18:21
*.1.103.185

이곳에 글을 쓰다보면 행간이 넓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만나서 차근차근 이야기하면 별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죠.
차원이 다르다는 말씀은 겸손의 말씀이시고요,
전 그저 시드니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해본 것 뿐입니다.
본의 아니게 제 글이 "칼날"로 들릴까 좀 걱정도 했습니다만
100% 잘 이해하고 계신 것 같아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다만, 네비(혹은 그 무엇이든)에 대한 신뢰와 신에 대한 신앙을 혼돈하진 마셨으면 해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걸 말하고자 썼던 이야기였습니다. "근본적인 차이" 말이예요.
제게는 오히려, 시드니님께서 "신앙과 순종"에 대한 고민을 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오히려 신께 드리는 신앙의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별과 달"님께서 오해(?)하셨듯이 시드니님의 이야기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도 임하는 이 순간에
시드니님은 자신의 "현실" 안에서 충실하게 그분의 뜻(인도 혹은 말씀)대로 살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시드님이 감당해야 할 신앙의 몫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제 모든 이야기는 그러나 어쨌든 시드니님께서 던지신 "네비"라는 화두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저로서도 오히려 시드니님의 의견에 "거울반사"로
오히려 감사하고 저도 고민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수준과는 무관하게 - 수준이란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
저 또한 배우고 있다고 힘주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새해가 정말 밝았네요. 다시한번 새해 주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profile

저별과 달

2009.01.01 22:15:49
*.206.88.145

안희철 목사님 이신가요?
님의 홈페이에 가서 감사는 신앙인가?
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글의 내용이 땅과 하늘, 님의 아내와 농부 정도에게 감사 한다이고
밥이 하나님께부터 온 것이라는 고백은 도저히 찾을수가 없더군요.
감사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백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 일텐데요..

시드니

2009.01.01 22:23:10
*.168.170.161

온라인에서 서로의 생각을 짧은 글로 주고 받는 것은 얼굴을 마주보고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면에서 저의 네비 얘기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보통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어려운 일, 내가 손해 보는 일, 나의 희생, 나를 제물로 드리는 일등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네비의 말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순종)은 철저히 손익게산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을 저는 네비에대한 신뢰(믿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어떤 것인가요? 그분의 말씀에대한 신뢰는 어떤것 일까요? 물론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신앙)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분의 전지전능하심과 나를 인도하심의 선하심을 믿는다면(신뢰), 간단한 손익계산으로도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것이 훨씬 논리적인 결론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십자가를(어려움, 희생) 지지만 결국에는 구원을 얻으므로 그것이 결국에는 유익이라는 그런 계산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내어주고 낮아지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유익이고 복이 되는 것을 성경은 애타게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써 우리가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얻고 누릴 수 있으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의 본성을 불쌍히 보셔서 하나님이 그것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간단한 계산으로도 유익이되는 장사를 하지 않으려 하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그게 왜 그렇게 힘든지를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이 안되는 논리의 모순, 미련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원인규명하다가 보니, 결국 저의 믿음(신뢰)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밖에는 다른 답이 없더라는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일 저의 믿음을 돌아보고,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믿음을 더하시기를 구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시드니

2009.01.01 22:44:02
*.168.170.161

장로님, 네비는 라디오처럼 수신만 가능하답니다.
즉 정보가 인공위성에서 네비로만 흐르지, 네비에서 나가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장로님의 정보는 아무도 모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ㅋ

안희철

2009.01.02 06:40:33
*.1.101.227

저별과 달님,

조금만 더 천천히 가시면 어떻겠어요.

안희철

2009.01.02 07:36:43
*.1.101.227

오해는 하지 않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네비만큼 하나님을 신뢰하려고 하는 것은 피조물의 오만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네비는 기계이고 명료하고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네비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즉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에서 탄생한 기계일 뿐입니다.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목사님이 번역하신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 제1장 "나는 믿나이다"를 보시면(아래 괄호는 페이지)
우리의 신뢰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세가지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지요.(18-19)
다만 우리의 신앙의 터전은 견교하지 못하며
신앙의 근거들마저 불확실성 내지는 은폐성으로 명료하지 못합니다.
일단, 이런 인식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이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우리 인생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신앙의 마지막 단계일지도 모릅니다.
판교수는 "개방성과 모호성은 분명히 밝혀질 것이며
또한 결정될 것이다"고 하였지만(16),
그러나 그것이 만만치 않은 일임을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결국 신앙의 "대상"입니다.(참고,18)

시드니님의 고백에 대하여 모르는 바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혹은 믿음에 따라 결정하고 전진하는 모든 것)는
하나의 두가지 다른 측면일 뿐이겠죠.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만큼 신앙하고 있다면
이미 그것만으로 네비에 대한 신뢰와 행위를 넘어서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리플에도 달아드렸지만, 이미 시드니님은 "신앙"으로 살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해요.

믿음의 완성이라는 게 있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의 인생들은 믿음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고,
오히려
이 길에 서 있는 그 자체가 믿음행위라고 다시한번 말씀드리고 싶네요.
시드니님께서 생각하는 믿음의 흔들림은,
빛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의심일 뿐이며(18; "회의는 신앙과 신뢰를 늘상 쫓아다니는 그림자이다"),
그것은 시드니님의 현실이라는 불확실한 기반에서 오는 불가피한 경험이고
여전히 시드니님의 신앙이 하니님, 그의 아들, 그리고 성령을 향하여 "정향"되어 있다면(참조 20)
아직은 염려할 단계가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두려움"은 신앙의 진보이고 신앙 그 자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드니님께서 고백하고 계시듯이 "믿음을 더하기를 구하는" 그러한 신앙은
더 없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이죠.
저는 시드니님의 이와 같은 진지한, 한편으로는 부러운 신앙의 고백 행위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정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요. 다만 네비와 비교되는 것은 자신의 불확실한 현실(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에서 기인한 것이고 저도 시드니님과 함께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싶어
한 글자씩 적기 시작한 게 여기까지 흘러왔네요.

여기까지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였고요,
순종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했으면 합니다.
글을 길게 쓰고 싶지 않았는데 죄송하고요.
편안한 둘째날 맞으시길 바랍니다.

시드니

2009.01.02 08:56:11
*.101.112.210

목사님, 학업에도 바쁘실텐데, 이렇게 답글을 달아주시는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번글은 앞에 주신 글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신학교수들과 신학도들과의 소통에
익숙하실 목사님께는 저같은 일반인 평신도와의 소통이 훨씬 힘드실텐데도 불구하고
애써주시는 모습에 따뜻한 마음을 느낍니다.

네, 제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너무 간단하게 무우 자르듯이 하기를 조급하게 욕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너무나 붙잡으려고 하는 제 모습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돌아오지 않자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던 이스라엘의 불안감을 발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는, 신뢰를 넘어선 신뢰, 믿음의 싸움"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소유'하려 했다는 반성이 옵니다.

바울의 고백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가 이런 심정으로 고백되어
진 것일까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십시요.

안희철

2009.01.02 10:09:10
*.1.101.227

인용해주신 성서구절 모두에 진실로 아멘입니다!

첫날처럼

2009.01.02 16:13:32
*.54.79.126

신앙인들은 모두 다소간에 "신앙적 성취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사는듯 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항상 고민입니다...

첫날처럼

2009.01.02 16:29:09
*.54.79.126

전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때론 역설적으로 삶과 신앙에 해를 끼치는 면도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요...

시드니

2009.01.02 18:03:16
*.101.112.210

맞습니다. 때론 삶에대해 생각하느라 정작 삶을 놓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반면에 졸지말고 깨어있으라는 말씀도 있고,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라는 말씀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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