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Articles 7,958
관련링크 : |
---|
||0||02008년 1월 4일(성탄 2주일)설교
성탄 후 2주일 성서정과
예레미야 31:7-14
시편 147:12-20
에페 1:3-14
요한 1:(1-9)10-18
성서본문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 “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성서해설
복음서는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그리스도론을 기록한 신학문서이기 때문에, 각 복음서를 보면 1세기 교회의 예수에 대한 이해가 점점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in USA)신학자인 존 셸비 스퐁 주교(Bishop John Shelby Spong)에 의하면 마르코복음서, 마태오복음서, 루가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불린 분으로 (마르코 1:11, 마태오 3:17-18, 루가 1:31-32) 이해되었다면, 요한복음서에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선재(先在)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즉, 요한 복음서를 100년경에 쓴 익명의 저자들은 예수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 즉,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 목수의 아들로 즉, 노동자의 아들이 되어 오셨다는 점이다.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난 갈릴래아의 목수들은 대부분 자신의 작업실을 갖고 일하는 게 아니라, 나사렛이나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기 전부터 존재하신 하느님의 말씀이심에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고위관리나 대기업 경영자가 아니라, 형제와 성모 마리아를 부양하기 위해서 떠돌아다니면서 일해야 하는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성탄 후 2주일 성서정과
예레미야 31:7-14
시편 147:12-20
에페 1:3-14
요한 1:(1-9)10-18
성서본문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 “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성서해설
복음서는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그리스도론을 기록한 신학문서이기 때문에, 각 복음서를 보면 1세기 교회의 예수에 대한 이해가 점점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in USA)신학자인 존 셸비 스퐁 주교(Bishop John Shelby Spong)에 의하면 마르코복음서, 마태오복음서, 루가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불린 분으로 (마르코 1:11, 마태오 3:17-18, 루가 1:31-32) 이해되었다면, 요한복음서에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선재(先在)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즉, 요한 복음서를 100년경에 쓴 익명의 저자들은 예수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 즉,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 목수의 아들로 즉, 노동자의 아들이 되어 오셨다는 점이다.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난 갈릴래아의 목수들은 대부분 자신의 작업실을 갖고 일하는 게 아니라, 나사렛이나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기 전부터 존재하신 하느님의 말씀이심에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고위관리나 대기업 경영자가 아니라, 형제와 성모 마리아를 부양하기 위해서 떠돌아다니면서 일해야 하는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