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23일 나귀새끼(3)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11:4,5)
나귀새끼 이야기는 예수님이 제자 두 명에게 말씀하신 그 내용과 똑같이 진행됩니다. 제자들이 그 마을에 들어가서 보자 나귀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인 듯한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왜 나귀새끼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이런 글쓰기 방식으로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시행착오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세상을 끌어간다는 기독교 신앙과 연관됩니다. 성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분만이 창조자이며, 창조의 유지자이며, 창조의 완성자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욥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아 참상을 겪게 되는 사건도 역시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일으킨 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사실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주관자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들도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말한다면, 나귀새끼를 가져다가 무엇에 쓰려는가 하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까지 꼭 집어서 말씀하신 예수님이 무고하게, 그리고 무기력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다는 사실은 모순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인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의 악을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보이는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을 내버려두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처리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이 세상과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신앙은 옳습니다. 다만 그 궁극적 비밀을 우리가 아직 모를 뿐이지요.
그리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하신 것은
참 오랫동안 들어왔던 말씀이고 또 장면입니다.
헌데 오늘 아침 요한복음을 읽다가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12장 14절) 라는 표현에
--영어로는 "Jesus found a young donkey and sat upon it"(NIV)라고 써 있어서--
갑자기 어?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물론 같은 사건이지만 다르게 표현된 것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예루살렘으로 가시다 마침 길거리에 놓여 있는 나귀새끼를 타셨다는 뜻인가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잠시 어리둥절 하다가
제가 그 비밀스런 세계로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은 확실한가 생각 중입니다. ㅎㅎ
좋은 밤/좋은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은 그 영원한 시간 속의 아주 짧은 생을 살기때문에
때론 하나님의 섭리가 피부로 와 닿지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메시지가 당장 이루어지지 않고
몇 백년에 이루어진 것 처럼...
우리가 어떻게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일상의 삶에서 깊이 체험하고
느낄 수가 있는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실체보다 더 분명하게 계시되고
우리 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세계를....
오늘도 내 모든 감각을 통해
그런 하나님을 온 몸으로 느끼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