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27일 호산나!(1)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11:9)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인데, 유대교에서 제사의식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초막절에 유대인들은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왕에게 자비를 구하는 외침으로도 등장합니다.(삼하 14:4, 왕하 6:26) 또한 기독교의 예배의식에도 도입되었습니다.
우리가 호산나, 하고 외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구원을 우리 스스로 생산해낼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 사형수가 한 사람 있다고 합시다. 그는 자기 스스로 그 운명을 바꿀 길이 없습니다. 왕이 특사를 내려야만 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왕에게 호산나 하고 외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인간을 너무 비굴한 존재로 만든다고 말입니다. 니체를 비롯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기독교의 이런 주장을 매도했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작용이라고 비난한 이들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심리학적으로 그렇게 변질될 염려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구원이 밖에서 주어진다는, 그래서 호산나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심리적 투사가 아닙니다. 이 세상과 인간의 삶을 직면한 데서 나온 대답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맛보지 못한 문명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형식의 생명이 무한하게 계속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구원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문명에만 의존하고 있는 인류의 딜레마입니다.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생명이 밖에서 주어져야만 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호산나!
"호산나!!"외침이'이 세상과 인간의 삶을 직면'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 행간에는 당연히 '절박함'이 숨겨 있지 않을까요?
위 말씀을 묵상하면서,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대면한 자들의 절박성을 오늘 세삼스레 눈여겨 보게 되어서요.
그들의 외침이 저의 외침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주님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