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28일 호산나!(2)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11:10)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를 중심으로 구원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선물이라는 어제의 묵상에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혀 없을까요? 이게 좀 어려운 질문입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마틴 루터의 ‘솔라 그라티아’ 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밥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머니가 밥을 해주기 때문에 이 아이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조금 다르게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은총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종교적 업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만 했습니다. 그게 업적으로 나타나고, 그런 업적이 구원에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런 업적에 대한 요청은 두 가지 문제와 연결됩니다. 하나는 구원이 과정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런 과정에서 신자들이 종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주장과 가톨릭교회의 주장은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관점의 차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전자는 구원의 출발과 완성을 하나로 보는 관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그것을 구분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회 안에서도 성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후자의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의 관점이라 하더라도 호산나의 외침은 필요불가결의 요소입니다. 구원의 과정과 성화를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순간에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는 외침이 울렸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원의 원천이며, 구원의 근거이고, 구원의 목표이며, 과정입니다. 호산나!
며칠 전 새벽녁에,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성품(사랑,평화,...)도 배제돼고, 어떠한 이미지(형상)도 떨쳐지면서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근원)이며 샘이라는 것과 지금도 그 분과 생명의 호흡으로 연결되어 있슴을, 그 사실이 놀라울 만큼 선명히 다가왔습니다.
그러한 지혜를 이곳에서 그리고 지혜의 책들에서 얻음은 큰 은총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