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0
30년 지기 선후배 일곱 부부가 2박3일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갔다.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제주의 향기에 취하고 싶어
조금은 호사스러운 숙소를 예약했다. 해비치 리조트.
사실 이런 때가 아니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언제 호사를 누려보겠는가?
하여, 해비치 리조트 에서도 바다가 잘 보이는 전망 좋은 방으로 예약을 하고 떠났다.
점심 때 쯤 제주 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갈치조림으로 점심을 먹고 ‘한림공원’에 갔다.
38년 전 재암 송봉규 선생이 10만여 평의 황무지 모래밭에
야자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서 오늘날 세계적인 식물의 낙원으로 만들었다는
한림공원에 들어서자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오른 야자수와 아열대 식물들,
그리고 소나무와 어우러진 묘한 분위기가 색다르게 다가왔다.
땅에 뿌리박은 선인장 줄기가 아가씨 허리둘레만큼 되는 것이 있어 주먹으로 쳐보니
나무처럼 딱딱하고 단단한 것이 선인장 같지 않았다.
어떤 것은 내 키를 훌쩍 넘는 놈도 있었다.
언젠가 선인장만 키우는 식물원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 종류의 다양함과 형형색색 꽃의 아름다움에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선인장 하나만 해도 그 모양과 크기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처음 알았다.
꽃의 모양과 색깔 또한 말할 수 없이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선인장 하나만 해도 2천 수백 종이 넘는다고 하는데
지구의 모든 꽃과 식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으면 그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이 어떠할까?
아마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다.
한림공원 안에는 5백여 점의 분재들이
기이한 형상으로 제각각 자태를 뽐내고 있는 석분재원도 있다.
수령이 200년 ∙ 300년 된 것도 있는데, 그 밑동의 우람함이 세월의 흔적을 충분히 전하고 있었다.
분재를 보면서 나는 자연과 인공의 합작품이 분재라는 생각을 했다.
자연을 공격해도 안 되고, 방치해서도 안 되고,
오랜 세월을 가꾸고 돌보며 보호해주어야만 탄생하는 예술이 분재라는 걸 새롭게 발견했다.
분재가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은 자연에 사람의 오랜 정성과 수고의 손길을 더해
나온 작품이라는 점이다.
사람의 손길은 거의 언제나 자연을 해치기 일쑤인데
분재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더 깊은 맛과 멋을 불어넣는 예술이라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한림공원의 자연 속에서 보냈다.
공원을 나오니 벌써 겨울 햇살은 서산에 기울어 있었다.
우리는 ‘유리의 성’으로 달려갔다.
‘유리의 성’은 자연을 살렸다기보다는 자연을 이용한 예술의 장소로서
한림공원과는 매우 대조적인 곳이었다.
여러 나라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선명한 색상과 기묘한 자태들이 각국의 특징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특히 삼각으로 이루어진 유리 공간 속에 들어가자
수천의 내가 끝도 없이 같은 동작을 하고 있었다.
오래 전 보았던 영화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이 유리 거울 속에서 싸우던 장면이 생각났다.
나는 분명 하나인데 유리 속의 나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유리 속의 나를 보면서 문득
‘인간 복제 세상이 되면 내가 그렇게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의 성’을 빠져 나오니 이미 해는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중문에 있는 해물 뷔페에 가서 여유있게 저녁식사를 하고
뷔페 1층에 있는 노래방까지 들러 소화를 시킨 다음 숙소로 달려가니 밤 11시였다.
호텔 입구와 주변에는 깨알 전구로 멋지게 장식해 놓은 야자수들이 즐비했다.
내심 전경이 멋질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늦은 잠을 청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말자 제일 먼저 창밖을 보았다.
창밖에는 푸른 바다가 한 가득이었다.
곧게 뻗은 야자수들은 하늘에 닿아있었고, 하늘은 손에 닿을 듯 했다.
반백년을 대한민국 이 땅에서 살면서 제주도 여행을 몇 차례 했지만
그처럼 아름다운 아침의 정경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둘째 날은 하루 종일 칼바람이 불고 눈발이 휘날려 제대로 관광을 할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말을 타긴 했지만 제대로 야외 관광을 할 수가 없어
오후에는 사우나에서 지친 몸을 달래야 했다.
그리고 셋째 날 아침 7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나는 커튼을 재치고 밖을 보았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출렁이는 바다는 온통 파란데 바다 멀리에는 한 무리의 구름이 앉아 있고,
온 대지와 야자수 잎에는 순백의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게 아닌가.
눈을 뗄 수가 없어 보고 또 보아도 지겹지가 않았다.
우리만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다. 정말 한 폭의 그림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니 바다 위에 떠 있는 검은 구름 사이로 붉은 해가 떠오르는데
마치 화산의 용암이 뜨겁게 분출하는 듯 했다.
일행 중에 한 사람은
“바다는 구름을 병풍 삼고, 대지는 설경에 묻혀 잠자누나! 키 튼 야자수 구경하고 있네!”
라고 즉흥시를 짓기도 했다.
나는 행복에 겨워 모두에게 말했다.
이 정경을 본 것만으로도 제주도 여행은 충분히 본전을 뽑은 것이라고.
그랬다. 그 하나의 장면을 보기 위해 우리는 먼 길을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건 우리의 계획이 아니었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때, 그 장소에 있던 자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선물이었다.
우리는 눈길을 밟으며 가까운 음식점에 갔다.
주인 할머니께서 5년 만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렸다고 했다.
나는 우리에게 멋진 선물을 주시려고 하늘이 맘먹고
오랜만에 많은 눈을 주신 것 같아 코끝이 찡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돌아올 때는 순백의 하얀 눈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담요 위에 어느 누가 드러눕지 않으리.
어린 시절 눈 위를 뒹굴던 그때처럼 부부들마다 눈 위를 뒹굴었다.
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사진 속에 담아두고 싶었던 우리는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숙소에 돌아와 짐을 정리한 우리는 마지막 감사기도를 했다.
그런데 1분 정도 감사 기도를 하고 나서 눈을 떠보니
그처럼 밝고 햇살 가득했던 날씨가 어느새 돌변해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마치 옆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 거짓말 아니냐고, 과장하는 게 아니냐고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과장이 아니다. 정말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탄성을 질렀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의아해했다.
하늘에 계신 분께서 제주도의 겨울이 연출할 수 있는 최고의 멋을
남김없이 보여주시려고 작정하신 것 같았다.
행복은 때로 우연처럼 다가온다.
누구도 예상하거나 계획하지 않았던 일을 통해 행복이 찾아오는 경우가 참 많다.
행복은 어쩌면 의외성이 주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돈을 들여가며 여행을 하는 것도 낯섦과 의외성을 경험하고 싶고,
그 낯섦과 의외성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닐까.
사람이 애써 가꾼 한림공원의 멋과 아름다움도 우리에게는 커다란 행복이었다.
하지만 5년만의 눈사태, 하얀 눈과 파란 바다의 조화,
그리고 병풍처럼 서있는 구름과 남국의 야자수가 어우러진 순간의 예술,
우리는 그 순간의 예술을 보았고, 그로 인해 최고의 행복을 만끽했다.
너무 행복한 겨울여행이셨든 듯 합니다.
'낯섦과 의외성'을 경험하기는 커녕
'낯익음과 당연성'에 묻쳐서 사는 저는
을매나 불행한지......
위로하시지 마세요.
목사님께서 그렇다고 하셨잖어요.
여하튼 목사님이라도 모처럼의 겨울여행으로
숨을 돌리시니 저도 덩달아 속이 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