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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초 89의 고백
- 지관해, 『40초의 고백』리뷰
0. 이 책은 쉽게 풀어쓴 사도신경 이야기이다. 저자의 의도가 학술적이거나, 교조적인 관점이 아니라, 다분히 목회적인 위치에서부터 ‘쉽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기에 이 서평도 그 ‘쉽게’의 정신을 지향하려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저자는 그 ‘쉽게’ 가운데 ‘깊이’가 있지만, 이 서평은 ‘쉽게’ 가운데의 ‘경박함’을 모토로 한다. 참고로 난 사도신경(새 사도신경 버전)을 읊는데 35초 89가 걸렸다. 좀 천천히, 깊이 있게 고백해야지 했는데, 아직도 난 멀었나보다. 한 2시간 천천히, 천~천히 읊어봐야겠다.
1. 예전 기억이 난다. 불과 몇 년도 안 된 학부 시절 일인데, 언제나 그렇듯 학기 초에는 온갖 치열한 계산과 암투, 그리고 머리 굴림이 있다. 바로 수강신청인데, 어떻게 하면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 시험 배분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 보다는, 어떻게 하면 공강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을까? 가 주된 관심사이긴 하다. 아무튼, 그때도 이리저리 수강 신청을 고쳐보며 머리를 굴리던 중 눈에 띄는 수업명이 있었다. ‘사도신경연구’ 처음 보는 교수님에, 처음 보는 강의 명이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이신건 교수님이셨다;) 결국 약간의 호기심과 대부분의 머리 굴림으로 신청한 그 수업은 말 그대로 ‘사도신경’에 관한 세미나였다.(아마 내 기억으론 행정상의 해프닝으로 6명이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7명이었던가?) 교수님의 설교문을 기반으로 사도신경을 이루는 여러 문장들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다루는 세미나였는데, 10주 수업 중 몇 주를 휴일로 빠지고 해서, 결국은 사도신경은 다 다루지도 못한 채 끝나버렸던 아쉬운 수업이었다. 그 뒤에 사도신경연구(2)를 개설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던가?
2. 이 책은 바로 저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때처럼 사도신경의 내용들을 한 문장 한 문장 짚고, 두드리고, 쓰다듬어가면서 그 안에 담겨진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살피는 책이다, 이 책은. 사실 18주 동안의 수요 예배 설교문이기 때문에, 로호만이나 판넨베르크의 작업처럼 학술적으로 치밀하거나 체계적이고, 짜임새가 조밀하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처럼 사도신경이라는 신학적 정수를 대중들이 알기 쉽도록 쉽게 풀어썼다는 측면은, 비록 로호만이나 판넨베르크의 작업과는 다른 방향이긴 하나 똑같이 유의미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학적 조명들 사이를 잇고 있는 예화들과 유비들은 본문들의 방향성을 더욱 뚜렷하게 하는 역할을 충분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마치 하나의 직물을 보듯, 굵고 곧은 신학적 씨와 섬세하고 풍성한 날이 유기적으로 짜여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3. 내용적으로 들어가자면, 물론 독자 개인의 입장, 관점, 특히 신학적인 위치를 고려하자면 동의하는 사안도 있고, 동의하지 못할 가능성도 분명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많은 부분 저자는 판넨베르크의 해석을 지지하고 있는 언급들이 있다. 또한 어떤 부분에서는 사도신경이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는 명제들을 문장 그대로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명시적 명제들을 문자적으로 지지하는 것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 관조, 혹은 고민하는 방향을 선호하기도 한다. 이런 저자의 모습들은, 물론 현장 목회의 설교자라는 입장을 고려해야 할 것이지만 다소 ‘분명하지 못하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특히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적인 한국 교회의 대중적 성향을 생각해보자면 저자의 ‘분명하지 못한’, 다른 말로는 ‘딱 부러지지 못한’ 태도는 선호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그래서 이 책의 판매량에 대해선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꿈꾸는 터》는 쉽지 않은, 돌아가는 선택을 한 것이다. 어쩌겠는가, 다 출판사 팔자인 것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그리고 바람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분명하지 못한’, ‘딱 부러지지 못한’, ‘모호한’ 서술은 오히려 ‘솔직함’이라는 미덕으로 재평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솔직함’의 미덕은, 특히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무지하게’ 소외받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 중요성이 재평가 받고 있는 덕목이다. 그것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사회에선 믿을 수 있는, ‘비빌 언덕’이 될 만한 것은 구성원 개인 개인에 대한 신뢰이고, 그 신뢰의 근본은 ‘솔직함’에 있기 때문이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신앙이라는 것은, 히브리서를 쓴 ‘히브리(!)’가 말하듯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그렇기에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솔직함은, 어떤 면에서는 가장 신앙의 근본에 근접한 것일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이 책에서 나타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저자의 모호함은 이 솔직함의 미덕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몸통’에서는 모호함으로 일관하다, 결론부에서 ‘뚜렷한 답’을 제시하고자 ‘도약’을 하는 일부 단락에서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느껴졌다.(아, 물론 설교라는 특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다. 다 현실의 한계 아니겠는가?)
4.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책의 판매량은 앞으로 주목할 만하다. 책의 사이즈로는 전문적인 학술 서적이나, 설교 출간물보다는 신앙적=신학적 교양서적으로 이 책의 정체성을 짐작할만하다. 또한 ‘쉽게 풀어 쓴’이라는 소제목으로 독자들을 ‘낚는’ 출판사의 홍보 전략을 볼 때도 이 책의 주 타겟층은 아마도 지하철에서, 버스 안에서, 잠자리 머리맡에 두고 짧은 시간동안 읽어 내릴만한 교양서적을 필요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누누이 말하지만 ‘쉽게 풀어 쓴’책이기 때문에 쉽게 읽힌다.(내 경우는 죽-읽어 내려가는데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 듣는 시간이 걸렸다.) 다만, 명시적으로는 가벼운, 라이트-교양서적을 지향하지만, 내용으로 깊이 파고들자면 이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의 정수인 사도신경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아무리 저자가 ‘쉽게’를 지향했다고는 하나 결코 ‘가볍게’ 다루어지진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 책은 2번 읽는 것을 권장한다.(2번‘만’ 읽으라는 건 아니다;) 한번은 자기 전 베개를 허리에 받치고 죽-읽어 내려가라. 그리고 한숨 늘어지게 잔 다음, 책상에 앉아서 펜을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파고들면서 읽으라. 물론 중간 중간 예화는 중간 중간 휴식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숨을 돌려도 된다. 그렇게 깊이 한번 읽어본다면,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100% 완전하게 체득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그 ‘깊이’있는 늪에 발목을 담갔다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바닥없는 늪에 발목을 담갔으니, 이젠 빠져드는 일만 남았다. 어쩌겠는가? 빠질 수 밖에. 숨 크게 한번 들이쉬고 과감하게 몸을 던지라. 그 늪 바닥에는 ‘그 분’이 계시다.
2. 교보문고에 좀 수정할 게 있더군요. '40초의 고백: '시'도신경~~~' 이렇게 되어있는데요... 졸지에 시도들이 고백한 신경이 될 뻔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