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해오면서 지금처럼 기도에 회의적인 때가 없는데요.
기도가 무엇인지, 또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하는지 정도는
알고있다고 생각하구요..어쩌면 모르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기도는 하나님 뜻을 구하는것이고 그분 뜻이 이루어지길 소원하는것으로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라고
그게 우리가 해야할 기도라고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가 응답이 되고 있는지..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제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도 없고 우리안에도 없는것 같거든요.
이와 연관지어서 제가 요즘 고민중인 문제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들꽃도 공중의 새도 돌보신다는 하나님이
왜 인간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넓게는 창조세계) 침묵하시는가입니다.
가장 이해가 되지않는게 유전으로 인해 죽을병을 안고 태어나는 아기들...
태어나자 마자 극심한 고통가운데 숨만 헐떡이다 죽어가는 아기들
죄도없이 굶주리거나 학대받거나 처형당하는 생명들 ..
이렇듯 처절한 고통으로 신음하는 생명들의 소리를 외면하시는 하나님,
그냥 죽어갈 뿐이더군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또 한가지는
태초에 만드신 이 자연세계가
왜 어느 생명이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 살아가게 만드셨는지
자기의 생명연장을 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하는 이 시스템,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인간은 다행히? 그럴 일이 없지만..
인간이 모든 육식동물들의 먹이감이라고 가정해보신다면
이 시스템의 부당함? 을 좀 더 피부로 느낄 수 있지않을까요..
오로지 인간의 먹이감이 되기위해 태어나고 죽여지는 수 많은 생명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여러분들의 생각, 도움의 글을 부탁드립니다..
죄 없는 가자 지구의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이 폭격으로 죽어가고, 좁게는 자신의 몫을 지키려고 경찰과 극한적 대치를 하는 상황에서 공권력의 미필적 고의 살인에 의해서 죽어가는 이 세상의 모순 속에서도 태연자약하게 아무 일 없이 편안히 살아가고 있는 저 자신은 도대체 무엇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답답하기도 합니다...
엄청난 집중 포화로 이라크 사람들이 죽어가고 겁에 질려서 울고 있던 그 시간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 마누라인 로라 부시와 그 딸은 몸뚱아리 치장하느라 행복한 고민에 빠져서 호사스런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마지막 가는 길조차도 비참하고, 행복에 겨워서 어쩔 줄 모르는 인간들은 마지막 가는 길조차도 고상하고 호화롭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C.S.루이스가 진지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 자신도 자신의 고난(사랑하는 여인의 죽음)
앞에서는 무너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같은 고민으로 본회퍼는 감히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을 합니다.
성경에서는 욥기에서 같은 고민을 심각하게 합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21장 7-13)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된 적이 있느냐? 폭풍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된 적이 있느냐?
너희는 "하나님이 아버지의 죄를 그 자식들에게 갚으신다" 하고 말하지만, 그런 말 말아라! 죄 지은 그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제 죄를 깨닫는다.
죄인은 제 스스로 망하는 꼴을 제 눈으로 보아야 하며,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한다.
무너진 삶을 다 살고 죽을 때가 된 사람이라면, 제 집에 관해서 무슨 관심이 더 있겠느냐?
(21장 17-21, 표준새번역)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21장 23-26)
이러한 욥의 불평 불만에 대하여, 하나님의 응답은,
제가 듣기에는
"니가 뭔데, 뭘 안다고, 창조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느냐?"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피조물'인 욥이 입을 닫아 버리고 말죠.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도 이해하는데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과거 완료),
완전한 세상을 만들어 가시고 있으며(현재 진행)
우리가 보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각종 부조리(악, 불의, 불공평)가
완전한 세상으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 필요한 재료들 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창조 과정은 창조주의 고유영역이므로,
내가 알 수도 없고,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
하나님을 판단할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 바깥에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 그 자신이 그냥 '선' 그 자체 이므로,
우리의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거죠.
그냥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신성모독이라뇨, 절대로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위와 같이 하나님에게 막가는(?) 욥에 대해서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욥 42장)
라고 하셨으니까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이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안계신 것 같다거나 하나님께서 아무런 생각이 없으시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음 아파하고 있으실 것 같습니다. 잘모르지만...
다비아 곳곳에 하나님의 개입에 관한 글들이 꽤 있습니다.
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라이프님보다 성경적 지식은 제가 훨씬 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다 모른다는 것은 저만 아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것을 알려드리려고 쓴 문장이 아니고 그냥 글을 써내려 간것인데...
글을 풀어나가는 재주가 없어서... 님의 이해를 바랍니다.
전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이건 저의 기준입니다. 그냥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전 하나님을 무조건 믿습니다.
믿기 위한 증거나 믿기 위해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비아에도 열심히 드나들고 성경도 읽고 이런 저런 책도 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알아가고 있고 앞으로 알게 될 것을 다 포함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모를 수도 있고, 조금 밖에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부모를 이해할 수 없듯이.
그래도 전 하나님을 여전히 믿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일을 그냥 그대로 방치 하고 계시거나, 관여하고 계시거나 등등의 것들을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방치하고 계시는지 어쩐지를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이기에
이런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과 어떠한 연관도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전 무조건 아멘입니다.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신학책을 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 전 그렇게는 못하지요.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말씀과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서 쓴 책들을 읽으며
저에게 다가온 하나님을 전 무조건 믿고 아멘합니다.
저와 여기서 구약, 특히 지혜, 욥기 등을 전공하는 선배는
욥기 38장 이후에 드러나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주는 강조점은
"인간의 한계"를 발견케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더군요.
너무 뻔한 답인가요? 그런데 제게는 가장 본질적 측면의 대답이라고 여겨집니다.
판넨베르크도 신정론(왜 악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문제에 대하여,
피조물들의 현존이 가지는 종말성(Endlichkeit)으로 답합니다(Pannenberg, STh II, 200).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창조의 질서 가운데에서
선한 자가 저주를 받고 악한 자가 잘나가는 듯한 세계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 모두가 "종말"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창조자", 그 영원하신 분 때문이고요.
신은 창조자이니까 이 세계를 마음대로(자의적으로) 지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신과 인간의 다름, "구별성"이 여기서는 중요합니다.
종말성을 부정한다는 것, 그것은 곧 바벨탑을 쌓았다는 원역사에서 드러나듯이
신이 되겠다는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인간, 피조물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피조물의 피조물"됨"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죽음에는 강약이 있겠지만 제반 고통이 뒤따를 것이겠지요.
이런 피할 수 없는 사실, 욥기가 말하는 "한계"에 귀를 기울여볼 만 합니다.
이것이 끝이라면 재미 없겠지요?
그래서 창조 이해는 종말 이해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이겠고요.
시드니님께서 매우 마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악도, 우리가 "악"이라 "평가"하는 것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여전히 "악"인지
우리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지혜"가 인식됩니다.
이것은 오로지 "종말의 빛"을 통해서는 환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야기해도 미심쩍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당장 지금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것 말입니다.
오늘내일 하며 유명을 달리해가는 이웃들에게
저의 이런 말들이 씨알도 안먹힌다는 말이죠.
저는 두가지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앞서 한가지 전제가 있는데
피조물은, 공동피조물(Mitgeschoepfe)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홀로 지음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고
개나 고양이도 또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의 강조이며,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협력한다는 의미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몰트만의 창조안에 계신 하나님인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독일 법에 명시되어 있다는 걸 읽은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군요.
동물 보호법을 위해? 어쨌든)
따라서 제가 말하려는 두 가지는,
그 이웃들에게는 "우리"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희망"(종말)을 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종말성(Endlichkeit)을 가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돕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이와 다름 아닙니다.
구체적 사안들을 낱낱이 들여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이 세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낱낱이 들여다보면 결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 세계의 성질이기도 합니다.
전체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내놓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환원 불가능한 것"이 이 세계의 특징이지요.
분자들의 단순한 결합이 인간이 될 수 없듯이(생물학적으로는 그저 분자들의 결합에 불과하기는 합니다!)
개별 피조물들의 조합으로 창조세계를 특징지을 수는 없습니다.
제게 창조 이해는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존재로는 이해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존재는 머리나 가슴으로 이해하거나 느끼기 이전에
"알고" 있었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기도 또한 "존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존재의 기도의 완벽한 표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일 겁니다.
참 인간이기도 하셨던 예수께서는
머리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의지를 거부하고 싶기도 하셨지만
자신의 존재를 십자가에 내던지므로써
삶과 기도를 일치시키고
존재의 길을 걸으신 것은 아닐런지요.
답글 감사합니다..
그런데..제가 하는 질문이 선과 악에 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모두 답변해주신 분들이 그렇게 얘기를 풀어 가시는것 같습니다.
전 악의 창궐에 대해 말하려는게 아니거든요..
생명이 다른 생명을 죽여서 생명을 연장시키는 시스템,
"유전적"으로 죽을병을 안고 태어나는 아이들
이렇게 그 이유도 모르고 죽어가는 생명들에게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되는지,
우리는 그들에게 "희망"(종말)을 말해야 한다" 고 하신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씨알도 안먹힌다고 하신" 표현이 적절할듯싶은데요.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하나님을 돕는 일이 될 것이라구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도를 많이 닦게 되면 그렇게 고상하게 생각하게 되는건가요?
예를 들어 생각해보세요..
안목사님 아들이 이유도 모르는 죽을병을 안고 태어나서
하루 하루 견딜수없는 끔찍한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어도
또 다른 아들이 정글에서 사자밥이 되어 찟겨 죽임을 당해도
그렇게 생각하실수 있으신가요?
(제가 따져묻듯이 글을 써서 죄송합니다..
이해해주세요.. 감정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고
답답하고 공허한 심정에서 그런거거든요..)
신학적으로는 질문하신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악의 문제로 귀결시킬 수 있습니다.
악을 "악한 짓"으로만 한정짓고 계신가요?
악은 그러한 행위 뿐 아니라 뒤틀려진 우주, 세계 속의 질서(신의 질서)까지도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거나 저거나 접근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요 라이프님.
저는 씨알도 안맥히는 그런 말을 씨부리고 있답니다.
물론 라이프님도 그렇고요.
무슨 실존의 문제를 붙잡고 계신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여기다 질문하신 것만 봐도
답도 없는 질문을, 게다가 답을 들을 준비도 안된 질문자의 글을
우리가 보고 있군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러니 이런 대답이 공허할 밖에요.
라이프님의 질문의 방향을 잘 알고 있습니다.
라이프님.
저도 그런 질문 수없이 받아왔고
저 또한 되풀이하여 질문하는 것이지만
그 대답은 질문에서 찾을 수 없답니다.
다시 삶(라이프)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살아내야 합니다.
아주 비극적인 예를 드셨군요.
피하고 싶은 예인데
일어난다면, 이미 일어난 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어요.
그냥 살아야지요.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이 울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살면서 어쩌면 그 답을 얻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요, 얻는다 해도 말하지 못합니다.
그게 라이프님이 질문하신 그런 것들의 진정성입니다.
하지만 질문이 되었다면
저는 방금 쓴 리플을 또 반복해서 쓰겠지요.
그게, 고상하다고요?
도를 닦아서 그렇다고요?
아픈 자에게
"참 아프시겠어요" 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
참으로 언어가 값싸게 들리지요?
그런데 어쩌지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 뿐인데.
그의 곁에 있어주고
그에게 희망을 말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 같은데
이게 무슨 해석이 필요한 말이겠어요.
이게 무슨 고상한 말입니까.
제 아들이 아프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고상해졌으니 한번 더 고상한 소리를 늘어놓을까 합니다.
우주는 태초에 한 점(특이점)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우주는 지금처럼 팽창했고 또 팽창해가고 있습니다.
그 과학적 사실과 믿음대로라면,
라이프님과 저는 한 점으로 귀결된답니다.
지금 오늘 여기, 삶과 죽음을 논하는 것들도
그냥 한 점에서 시작되었고
또 언젠가 우주의 수축으로 특이점으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죽음이요?
저를 포함한 개별 생명체들에게는 참으로 두려운 것이겠지만
온 우주를 조망해볼 때,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늘 바늘에 찔리면 여전히 피나고 아픕니다.
그런데 인생은 덧없이 지나가 버리거든요.
시간이란 "현재"(Gegenwart)라는 무수한 점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과거와 미래란 표현은 인간 의식의 지표에 불과하답니다.)
시간 또한 한 점에 불과합니다.
순간이고요.
그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설명하는 창조의 세계랍니다.
헛되고 헛된 세계를 지은 하나님은 도대체 뭐냐고요?
그 질문을 손쉽게 여기서 얻으려 하지 마시고
(질문 자체가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의도도 아닌 것을 압니다.
그리고 얼마나 답답하실지도 경험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라이프님께서 자신의 존재로 살아내는 것으로 가능케 하십시오.
인생의 종말에 "얻었다" 함을 고백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봤을 때, 그것은 깨달음의 도이지 수확하고 소유할 수 있는 지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도 인간은 이것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결국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참 아프시겠어요."
아직도 이 언어가 값싸게 들리시나요?
예전에 제가 저희교회 목사님 앞에서 님과 비슷한 질문을 했더니
'시험 들었' 으니 기도하라고 하시더군요. ㅎㅎ
그때 저는 그 왜, '지선이'라고.... 멀쩡하게 신앙생활 잘 하던 예쁘장한 여대생이
차가 뒤집어져 온 몸에 화상입고 죽을 고생을 하다가 괴물같이 변해버린 그 얼굴....
그 친구가 생각날때마다 '하나님이 왜그러셨을까... '싶었거든요.
결과적으로 지선이는 그렇게 고백한다고 해요.
'화상입기 전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 구요.
어떻게 그런 고백이 가능할까....
어쩌면 극심한 고난중에 경험한 하나님'존재'의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인간이 겪는 '생사화복'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또한 인간의 경험이니 한계가 있겠지만,
그것이 기적이며 은총이 아닌가 싶습니다.
라이프님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지만 이루어지고 있는지 회의적이라고 하셨는데요,
어쩌면 지선이가 화상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참고로, 저는 신학도 뭣도 암것도 모르는 평신도에다
가끔 이곳에 황당한 질문이나 쏟아놓는 초보일 뿐입니다만
님의 고민에 공감하고, 조금이나마 함께하고자 짧은 생각 몇마디 주절거려봤습니다.
힘 내시고요, 기도는 멈추지 말아주세요.
정 답답하시면 하나님께 한번 따져물어보세요. 답 주실겁니다.
라이프님..
질문이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관한 것을 어느 누구도
이렇다 저렇다 확실하게 말할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본인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기 위해
기도하며 말씀에대한 연구와 묵상이 요구되는 문제인것 같군요.
다른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체험을 제시하는 정도에 그칠수밖에 없겠지요.
인간에게 불평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은 상대적이지요.
슬픔이 없으면 기쁨이 무엇인지 모를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의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고통이 없다면 평안이 무엇인지 모르겠지요.
만일 세상 모든사람이 먹을것 부족하지 않고
재물도 풍부하고 고통과 고민이 없는 삶이라면
인간 삶은 길가의 돌맹이와 같은 무미건조한 것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교만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타락의 길을 걷겠지요.
메기이론 들어보셨지요.
어느 운송업체가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산채로 런던으로 운송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답니다.
대부분의 청어가 장거리 운송도중 죽어버려 신선도가 떨어지므로
운송업체는 고민끝에 청어를 운반하는 수조에 메기 한두마리를 넣어
청어들에게 절박감을 준 결과 대부분의 청어가 살아남고
그 업체는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는 얘기입니다.
미꾸라지는 민물고기이고 청어는 바다생선이라 혹 어종을 착각한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메기에게 먹히는 한두마리의 청어와 그 가족은 부당함을 호소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내가 먹혀야 되냐'고
그러나 그들의 희생으로 전체가 살아남았습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죄없어보이는 생명들이 고통당하고 희생당하는
모든 현상들이 살아있는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묵상중에 해보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흘러가면 되돌아오지않는 그런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속해있으므로
그들이 죽어서 지옥에 갔다, 천국에 갔다 이런 논의도 옳지는 않다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공의를 실현하신다는 것만 믿습니다.
오늘날 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어거스틴도 라이프님과 비슷한
선과 악에 대한 의문으로 끊임없는 두려움과 불안속에 휩싸여있었습니다.
그분은 성실히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여정속에 회심을 경험하였고
의문은 눈녹듯이 사라져버렸다고 참회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구도자적인 신앙의 길을 가고있습니다.
성어거스틴과 같은 회심의 체험으로 제가 희미하게 아는것들이 보다 확실하게 다가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을 담은 부족한 글이지만 함께 나누었으면 해서 적어봅니다.
저도 죽음이란것이 인간에게는 오히려 복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아마 이런 비슷한 내용을 주제로 한 영화도 있는걸로 아는데요..
영생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죽음을 소원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느껴봐야 행복함을 알수있다는 얘기는
별로 공감할 수 가 없습니다.
서커스를 위해 사육당하고 길들여지는 동물들 얘기같거든요.
채찍으로 맞고 배고파봐야 고통없이 먹고 살수있는
그래서 "누구" 좋으라고 계속 쇼를 해대야하는
불쌍하고 바보같은 원숭이나 코끼리 얘기랑 뭐가 다르겠어요?
암튼..함께 고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성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해본 생각일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 중의 하나이구요.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는 일까지 생기더군요.
다시 돌아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을 때(전 37살에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습니다.)
제가 얼마나 부질없는 질문과 고민을 했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더욱 더 다가갈 수 있었고 전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찍을 들고 저를 우주 만물 앞에서 "앞발 들어 , 공 굴려, 불 속으로 통과해" 하시면
당연히 전 그렇게 해야지요. 우주 만물들은 제가 불쌍하고 바보같다고 왜 사람으로 태어나서 저꼴을 당하는지 모르겠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주인의 말에 순종하고 있는 저는 충분히 행복할겁니다.
아마 써커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갖가지 짐승들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 중에 사람처럼 영리한 짐승이 있다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것이고 결국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써커스 예를 드시면서까지 고민하실 정도면 자칫 하나님을 부정하시는 방향으로 가실 수 있다는 우려에(저처럼)
그러지 않으시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제게 여섯살 먹은딸이 있습니다.
얼마나 순진한지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의심이 전혀 없습니다.
타인이 보았을때 제 딸에게 아빠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제딸은 자기의 믿음이 확고하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의심이라는게 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저 제 딸에게는 아빠가 세상에서 힘이 제일 세다는 것이 사실일 뿐입니다.
이렇게 의심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믿음을 말씀하신것이라 생각해봅니다.
라이프님께서 제 글을 오해하셨습니다.
반드시 고통을 느껴봐야 행복할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위에 말씀드린 의심과 믿음의 관계 같이 고통, 고난이 무엇인지 그 개념자체가 없다면
그 반대개념인 행복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의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같이 라이프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반드시 해답을 찾으시리라 믿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하나의 "신비"로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겟지요
하나의 예를 든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남을 보아도
내가 왜 그 시기에 그곳에서 생겻고, "지금 여기" 에 잇는 이유를
어떤 지식으로도 그 대답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수 많은 깨달음 이란것도 결국은 자기 결단의 하나 일 뿐이지
수학공식 같은 답은 아니지요
이런 것은 "신비"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언설도 확실한 대답은 아니지요
다만 개인적인 느낌의 하나이지요
욥기, 전도서, 잠언, 시편 같은 성서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지만
그것도 완벽한 답은 아니지요
결국은 개인의 결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now and here)" 에서 삶의 충실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에 대한 저의 한가지 이해는
하나님이 악인도 사랑하시는게 아닌가 싶습니다...(악은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사랑하신다가 더 맞는 거겠지요?)
얼마나 사랑하시냐면... 그분의 속성상 허용하실 수 없는 악으로 충만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된 인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마도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속성을 이어 받은것인지)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느낌입니다.(도무지 실존이랑은 매치가 안되는 부조리한 부분이네요... 저에게는) 그러고보면 인간의 '공정'한 시각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정신지체,유아 등등)때문에 중세에 연옥이란 환타지가 생긴것도 같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만드시지 않으셨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전권'을 부여받은 인간에 의해 세상이 변질되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무능력한 인간의 어리광... (이것도 환타지일지...)
그리고 보면 현재의 인간들은 꼭 아름답지만 방탕한 '그리스의 신들' 같은 이미지네요...
지우파 님께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시긴 했는데... 성경 말씀에도 누구에게도 견디지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는다는 말이 있고 고난의 열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 것도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죽음에 이르도록 가혹한 그런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때론 불교적 세계 이해가 더 끌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나 자연세계의 질서는 형이상학(을 넘어서 신학)의 영역인 것 같고, 구체적인 각각의 고통과 죽음들에 관계하는 하나님은 각 사람의 신앙의 영역에 속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라는 질문은 신학의 영역에 속한 질문으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답변을 찾아야 할 것이고, 구체적인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는 '하나님 도우소서'라는 기도가 필요할 것 같아요. 물론 그 두 영역이 서로 동떨어진 별개의 영역인 것은 아니겠지요. 신학의 영역에서 좋은 답변을 찾는 것이 신앙의 영역을 더 풍성하고 든든하게 만드어 줄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 신앙이 '제가 보기에도 이 세상이 이렇게 끔찍한데 하나님은 얼마나 괴로우신가요'라고 기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데, '이렇게 끔직한 세상을 언제까지 두고 보시기만 할 겁니까?'라고 기도할 수 있는 신앙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라이프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으로서, 논리성을 부여하는 세계관과 그 세계관을 토대로 살아가는 실존적 삶으로 구분하여 답해보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사변적인 세계관보다는 실존적 삶의 문제가 더욱 절실하기에 라이프님의 질문은 저의 주 관심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이전에 세계관과 삶에 대하여 생각한 바가 있었고, 비록 저의 관점이 매우 주관적일지라도 서로 다른 관심을 가진 분들과 함께 저의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세계관과 삶이 일치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그러나 현 한국사회에서는 급격한 민주화와 산업화를 자랑하는 풍요의 이면에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내면적인 불일치에 기인하는 문제점들이 너무 많지요. 그러한 불일치에 따른 삶의 스트레스는 현 한국 기독교에서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라이프님의 질문도 결국 세계관과 삶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저의 답변 이전에 제가 얼마 전에 여행하였던 태국의 산간지역 소수민족에 대한 예를 들겠습니다. 여행목적은 삶의 환경도 열악하고 빈곤한 그들을 돕자는 것이었는데, 저의 눈에 비친 그들은 오히려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곳 선교사님에 의하면 그들은 불교의 윤회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실제적인 삶도 그 세계관과 일치되어 있답니다. 따라서 비록 그들 현재의 삶이 알 수 없는 질병과 빈곤가운데 살아가지만, 그 원인은 그들의 전생의 업에 따른 숙명이므로 불만이 있을 수 없답니다. 또한 현재의 선업을 쌓아 내세를 기약할 수 있으니 행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행복한 그들에게 알량한 선행으로 조금 더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도록 도와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본론적인 저의 답입니다. 최근의 기독교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의 관점에서 그 동안 역사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신학, 철학, 과학 분야의 제반 문제점인 영/육, 성/속, 공/사, 사실/가치의 이원론을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아울러서 현재의 문제해결방안과 그 문제의 기원 및 미래 종말에 대하여 총체적이고 균형적인 논리를 부여할 수 있는 성경적 진리라고 하지요.
기독교세계관에 따르면 라이프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원래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죄에 따른 타락으로 인하여 그러한 부조리들이 발생하는 것이라고요. 그러한 죄악과 왜곡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우리 일상의 모든 영역과 생태계까지 만연되어있지요. 그러기에 크리스천의 현재 사명은, 사변적인 질문대신, 그렇게 부조리한 현실을 실천적으로 바로잡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지요. 그 임무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이기에, 하나님의 위임자인 청지기로서 예수님 재림으로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그때까지 수행해야 할 총체적 선교라고 하지요.
저의 진정한 고민은 이러한 사변적인 세계관 논리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삶에 있습니다. 저 자신의 매일의 삶 자체가 이렇게 버거운데, 고통 받는 이웃에게 무슨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인가요? 사실상 저에게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건 안되건 간에,
결론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자유의지를 가진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어 완벽한 낙원 에덴동산에서 살았지요. 그럼에도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은 결국 범죄하여 타락하였고,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시작되어 현재에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취되어 가는 창조의 과정에 있지요. 비록 사람들은 참 사랑이 없고 사랑의 그림자만을 흉내내면서 살아갈 뿐이지만, 현재를 사는 크리스천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실현하는 성령의 활동에 부분적이라도 참여하며 살 수 있는 길이 주어진 것이지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상상과 인식을 초월하겠지만, 현세와 연속되는 것 하나는 성령활동에 크리스천들이 참여한 실체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이프님의 꼭지글과 훌륭하신 다비안 여러분들의 댓글을 정독하면서 떠오르는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엔도 슈샤쿠의 "침묵"입니다.
도움이 되실 거란 생각이 들어서 추천 드립니다.
욥과 친구들의 정죄와 교만의 대화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 하숙집 좁은 방에서 친구들과 오밀조밀 둘러 앉아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청춘과 사랑 그리고 정의를 허공에 외치며 밤을 새듯
푸근함과 친근함과 더 큰 세상을 얻은 자부심까지 느끼며
다비안님들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죄와 구원'이라는 저의 질문에 대한 답을 라이프님의 질문으로 파생된
다비안님들의 글들을 통해서 감사와 기쁨가운데 얻게 되네요.
다비안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욥과 그 친구들은 다 모인 게 확인이 되는데
하나님은 언제 왔다 갔는지 모르겠네요.
벌써 다녀가셨겠지요?
기다리던 단비가 시원하게 내립니다.
다비아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스며들길 바랍니다.
샬롬.
새벽기도님 글을 읽고 보니, 나름대로 심사 숙고한 저의 이전 글도 역시 욥의 친구의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욥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내용의 욥기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포함되어있지요.
제가 아는 크리스천 한 분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해서는 어떤 위로도 받을 수 없었답니다. 그러던 중 욥기를 읽다가 23장 8-9절의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라는 성경말씀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논리와 인식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