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쓰고 있는 행복 이야기의 서문입니다.
왜 행복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읽고 비평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인의 심장 속에는 한(恨)의 유전자와 흥(興)의 유전자, 정(情)의 유전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반도에 몸 붙이고 살면서 숱한 아픔과 굶주림,
전쟁의 상흔, 고난과 위기로 점철된 반만년의 질곡 깊은 삶을 온 몸으로 겪어내면서
가슴 깊이 한을 곰삭혀 왔습니다.
그리고 곰삭혀진 한 속에서 흥이라는 전혀 다른 유전자를 발효시켜냈습니다.
한에서 발효된 흥의 유전자는 한을 달래주었을 뿐 아니라
흥의 가벼움을 한의 깊이로 승화시켜주었습니다.
하여, 한국인의 한과 흥은 단순한 한이 아니고 단순한 흥이 아닙니다.
두 가닥을 비벼 꼬아 만든 새끼줄처럼 한의 유전자와 흥의 유전자가 서로 엮이면서
한 속에 흥을 담고 흥 속에 한을 담은 묘한 조화를 이루어냈습니다.
한이 흥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흥을 끌어내고,
흥이 한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을 품어내는
참으로 영묘한 한과 흥의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웃음과 해학을 잃지 않는 흥의 문화,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나눔을 잃지 않는 정(情)의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한(恨)에서 끌어낸 흥(興)과 정(情)의 문화야 말로 한국인 고유의 생활문화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생활문화의 핵심 요체가
바로 한(恨) ‧ 흥(興) ‧ 정(情)의 조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이나
10년 전 IMF 금융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한에서 끌어낸 흥과 정의 유전자가 활성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고,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빨리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도
한과 흥이 조화된 문화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강점이고 정체성의 요체인 한(恨) ‧ 흥(興) ‧ 정(情)의 조화가 깨졌습니다.
흥은 한없이 가벼워졌고, 한을 흥으로 풀어내는 멋과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나눔과 웃음을 잃지 않았던 해학과 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무한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폭발의 위험 수위가 점차 높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기에 위험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한강의 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대단한 경제 부흥을 이루었는데
왜 사는 건 팍팍하고 힘든 것일까요? 왜 위험 사회가 되었을까요?
내 생각으로는 성공과 돈으로 한을 풀어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판단됩니다.
한국인은 반만년 동안 한을 흥으로 풀어왔는데
갑자기 한을 돈과 성공으로 풀어내자 한과 흥의 조화가 깨지고,
돈과 성공에 대한 욕망이 한과 흥의 유전자를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문화가 몸살을 앓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인의 유전자가 혼수상태에 빠진 나머지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국사회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유전자를 다시 살려내는 길밖에 없습니다.
한(恨) ‧ 흥(興) ‧ 정(情)이 조화를 이룬 생활문화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한국사회가 위험한 사회에서 안정된 사회로,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생활문화가 조화로운 생활문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모드’(Success Mode)에 맞춰졌던 삶의 모드를
‘행복모드’(Happy Mode)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최상의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동안 지나칠 정도로 성공 욕망에 휩쓸려 살았습니다.
돈과 성공을 바라보며 악착같이 달려왔습니다.
하여, 성공의 가벼움 ‧ 성공의 공격성 ‧ 성공의 포악성을 볼 수 없었습니다.
성공 욕망이 한(恨)과 흥(興)과 정(情)의 유전자를 어떻게 파괴했는지조차 돌아볼 겨를이 없이 돈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보류하고 희생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한국의 지난 1960년대와 70년대를 호령했던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1980년대 초반에 막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그 구호가 1970년대까지는 한국사회에 유익한 처방이었던 게 사실이지만
하나의 처방이 언제까지나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1990년대부터는 한국사회를 이끌 새로운 처방전을 제시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과거의 구호가 죽지 않고 ‘성공’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포장만 바꾼 채
전 국민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성공 욕망이 우리의 유전자를 공격하며 우리의 생활문화를 파괴한 결과
오늘의 위험 사회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21세기 한국사회를 주도할 새로운 처방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삶의 모드를 ‘성공모드’에서 ‘행복모드’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근본적인 전환이 없이는 한국사회의 내적인 분열과 위험수위를 잠재울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새로운 처방전으로 감히 행복모드로의 방향 전환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회학자도, 정치가도 아닙니다. 사회운동가도 아닙니다.
매우 평범한 백성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처럼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한국사회 치유를 논하고, 21세기 처방전을 말하는 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사회를 염려하는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을 널리 혜량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성공’에게 빼앗긴 ‘행복’이라는 말을 다시 되찾아오는 꿈.
삶의 모드를 ‘성공’에서 ‘행복’으로 전환시키는 꿈.
대한민국이 부자 나라가 되는 것보다는 행복한 나라가 되는 꿈.
우리 후손들이 부자 나라에서 살기보다는 행복한 나라에서 사는 꿈.
김구 선생님이 꿈꾼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중에서>.
나는 우리 모두가 이 꿈을 가슴에 품고 살면 좋겠습니다.
한국인의 행복한 내일을 열고, 따스한 정이 흐르는 조화로운 미래를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의 생활문화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왜 성공에서 행복으로 생활방식을 전환해야 하는지 곰곰이 따져보면 좋겠습니다.
한(恨)과 흥(興)과 정(情)이 조화된 우리 고유의 생활문화 회복을 위해. 행복한 내일을 위해.
너무나 달려온 富의 성공에 욕망에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습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달려서 성취된 돈의 우상에 절하고 닮아가기를 우리 모두가 소망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세계가 꽁꽁 얼어 붙고 있습니다.
문제는 힘없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끔찍한 악몽이 실현되다는 것입니다.
빈부의 격차는 더 없이 커지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는 길은 더 어려워 지고, 직장에서의 정리해고는
회사가 살아야 한다는 명분아래 거침없이 칼은 휘들러지며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상위 10%를 살리기 위해 그나마 있던 서민층 복지예산은 대폭 삭감되어가는 현실에서 막막한 벽을 보게 됩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꿈과 이것을 이룰수 있는 현실이 가능하건가요?
이 땅의 사람들은 5천년 넘게 살아오면서 온갖 힘든 역경을 다 견디어 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한때의 한 시절이 되기만을 바랍니다.
이것은 정병선 목사님이 말씀때로 곰삭은 恨을 興으로 다시 승화시키고 情으로 다시 회복되어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살 맛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