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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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묘수를 두는데 바둑을 질까요?
묘수를 두어야 하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바둑기사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에 묘수를 두셨다는 간증을 많이 듣게 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대부분의 이런 고백은 하나님을 자신의 눈높이로 이해해서 생긴 것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눈높이로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도 인간은 자신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생긴 일들을 나름대로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과 혼동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과는 상관 없다는 말도 너무 무책임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제 생각에는 하나님은 모든 능력의 근본이 되시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능력을 사용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우리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편이기 때문에 우리를 더 위해 주셔야 하고
우리 편이기 때문에 저쪽 편은 응당 화를 더 받아야 합니다.
축구경기를 하는 양쪽 편에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때는 하나님 머리가 쥐난다는 농담도 있으니까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악인들이 세상적인 복을 더 받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내세가 없었기 때문에 현세에서 결판이 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다 아시다시피 구약성서의 하박국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선택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면서
하박국 선지자는 절망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은 교만하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인해 살 것이다’ 였습니다.
과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사는 것의 의미의 중심은 변하지 않았겠지만
이 말씀을 보는 관점은 그 시대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구약의 역사는 잘 모르지만 그 당시 유대인에게는 이에 대한 협의적인 의미로는
‘이스라엘이 결국 복을 받고 바벨론은 망할 것이다’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벨론이 망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이 복수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협의적인 의미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역사가 흐른 것 같지는 안습니다.
하박국에게는 당장의 현실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신실한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의미였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 사람들에게는 묵시적인 희망,
즉 이 세상이 곧 종결 될 것이란 소망을 뜻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종말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에도 종결을 보지 않고
계속 미래로 열려져 있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빙하시대가 와서 인간이 멸종한다면 그 때의 이 말씀의 의미는 또 다를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는 그렇지 않은 나라들도 있지만 서방을 비롯한
현재 역사를 주도한다는 나라를 휘어 잡는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와 성공주의입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욕 중에 제일 센 욕은 ‘실패자’(loser)인 것 같습니다.
‘Fuck’이 들어가는 욕 보다도 loser 라는 단어를 듣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눈이 뒤집히고 죽일 듯이 달려듭니다.
그만큼 자신이 실패자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고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자신이 실패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합리화’가 동원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가 ‘모든 실패자는 진정으로 실패자가 아니다’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예수는 인간적으로는(세계내적으로는) 가장 큰 실패자 중 한사람입니다.
비참한 죽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하나님나라가 ‘옳다’는 것을 주장했지만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예수를 반대하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등에 의해서 짓밟힘을 당하고 죽음까지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의 주장이 하나님에 의하여 거절을 당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이
기존 유대민족의 율법주의 등에 패배를 당하는 상황이 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절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겠지만 이런 절망감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물론 예수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는 했지만)
예수 곧 하나님의 실패 안에서 인간은 어떤 실패도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수는 묘수가 아닌 역설적인 수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실패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십자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인간인 우리가 ‘실패’라고 부르는 것들이 참 실패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순간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이 등장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인 합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합리적인 설명을 하려면 ‘복수’나 ‘지옥’이 등장해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제 셋째 딸을 보면서 인간이 왜 자식을 낳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분신을 세상에 심어 놓는 것의 무상함을 이해한다면
또 하나의 자기를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면
왜 아이를 낳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긴 인생 동안 부부 사이만으로는 심심하니까 정신을 쏟아 놓을 대상으로 아이가 필요할까요?
노후의 안정을 위해 필요할까요? 남들도 다 낳으니까 나도 낳는 것인가요?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창조적인 사건인 ‘자식 낳기와 키우기’는 합리적으로 설명이 잘 되지 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도 합리적인 설명이 안 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요?
인간에게 합리란 ‘인간적인 이득’이 없으면 인간은 도무지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기본으로 가지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쳐 놓고라도 인간도 합리만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고 세상에서 복 받고 저 세상 가서도 복 받고…’
이런 설명은 오히려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됩니다.
합리적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 역설적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맞는 말씀이 아닌 것을 우리는 대부분 동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전도서에 있는 말씀처럼 인간은 ‘영원’을 갈망합니다.
여기서 영원이란 단순한 시간적인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영원한 시간이 아닌 근본과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전도서기자는 이렇게 인간이 영원을 갈망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원을 갈망하지만 그 시작과 끝은 다 알 수 없다고 전도서 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인간과 하나님의 현실에 대해서 솔직히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무슨 복을 받느냐? 혹은 이득이 있느냐?를 따지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심연이 아닌 표면일 뿐입니다.
복은 합리적인 것이 아닌 ‘생명’이고 ‘진리’입니다.
생명과 진리는 합리적인 것이 아닌 ‘비합리’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중요함을 다 압니다.
아무리 세속적인 인간이라도 돈이나 명예가 전부가 아닌 것은 대부분 사람이 압니다.
다만 그것을 누리거나 좇을 때 아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을 때 잘 깨닫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 죽은 사람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한 번 죽어본 사람은 살아 있을 때에 얽매이기 쉬운 것으로부터 벗어날 자유가 생깁니다.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 잘 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중립적(neutral)이 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길의 전부가 아닌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이 아웅 다웅 하면서 인간적으로 여러 부족함 가운데 살지라도
나 자신이 생명 가운데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생명 안에 있음을 압니다.
그 생명은 초월적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이미 현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생명의 처음과 끝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인간에게 알려져야 하는 부분은 이미 알려진 것 같습니다.
미래의 하나님 안에 있는 희망을 가지고 믿음 안에서 생명의 실체를 더듬으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렇다고 우리의 인생의 짐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고통은 가장 친밀한 사람과도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그것이 좋던 싫던 간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나 자신의 실체를 건드리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의 의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