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열린토론방>에서 다비아의 보수성에 관한 토론 내용을 읽던 중에,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진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수와 진보 논쟁이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또는 시대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반면, 진리란 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우선적으로 진리논쟁의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경계 또는 한계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드립니다.
저의 질문 자체가 아직도 불분명하고, 자유주의 신학의 범주가 매우 넓을 뿐만 아니라 스펙트럼이 다양하여 그 경계를 구분 짓기가 쉽지 않겠지요. 이에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문외한인 저의 의견을 기술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잘 못 생각하고 있는 오류만 정정해주시면 되므로 답변이 조금 수월하겠지요.
자유주의 신학이란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무게중심을 두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되,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구세주 즉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것이겠지요. 즉 예수 님은 참 인간으로서 모든 인류가 따라야 삶을 사셨고 십자가의 바른 길을 제시하셨음을 인정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 되심은 믿지 않는 것이지요.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분의 부활과 재림을 실체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 대척 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신학 (또는 신앙)은 예수님의 참 인간되심과 함께 삼위일체의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핵심으로 그분의 실체적인 부활과 다시 오심을 믿는 것이지요.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하여서도 얼마든지 종교와 신앙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개토론이라도 벌인다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죽은 사람의 부활과 재림을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를 너무 잘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진리로 믿는 입장이고, 다비아 원장이신 정용섭 목사님과 칼럼 방을 개설하신 분들도 저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전인수? ^0^) 당연히 세세한 사항들이야 얼마든지 다를 수 있겠지만, 그 핵심이 되는 신앙기반은 같다고 생각하기에 저도 다비안이 되었지요.
결국 자문자답 형식의 이상한 질문이 되었지만, 다비안님들께서 저의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 조언을 포함하여 어떠한 답변을 해주셔도 감사 드리겠습니다.
1. 까마귀님 고맙습니다. 추천하신 책은 이미 샀는데 아직 못 읽었어요. 곧 읽어볼 예정입니다.
2. 정목사님 답변에 감사 드립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기준으로 경계 지을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정통 보수를 자랑하는 한국 기독교계에 만연된 ‘긍정의 힘’ 류의 신앙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울러서 추가로 제시해주신 2개의 기준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저의 생각들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3. 제가 섣불리 자유주의 신학과 예수그리스도 신앙(=진리)으로 대비하였던 것은 명백한 오류였습니다. 보수와 진보, 또는 자유와 평등의 대비처럼, 자유주의 대비는 정통주의 이어야 함이 보다 타당하였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오류를 통하여 진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진리를 규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언어로 할 수 밖에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완전한 규명은 불가능한 언어도단이고 겨우 진리의 파편만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진리를 진보와 보수로 또는 자유주의와 정통주의로 가두거나 편가르기 할 수 없고, 단지 진리를 향한 끈임 없는 순례만이 있을 뿐이겠지요. 다른 말로는 진리의 파편들은 보수와 진보, 정통과 자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삼위일체 신앙조차도 생명력을 잃은 고목처럼 말라버린 교리만 남아있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정통주의가 예수그리스도의 신앙을 죽은 교리로만 신봉할 때, 이제는 진리이기는커녕 오히려 무자비한 종교탄압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고, 그러한 사례들이 과거 역사에서 있어왔지요.
4. 다행히 다비아는 활짝 열린 사이버공간이므로 웅덩이의 고인 물이 아니라 항상 다양하고 생생한 생각들과 의견들을 접할 수 있지요. 이를 통하여 진리를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얻기에, 정용섭목사님, 칼럼방 주인들, 그리고 여러 다비안 님들께 재삼 감사 드립니다.
피스 님,
안녕하세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피스 님의 정의가
기본적으로는 옳지만,
말씀하신대로 그 스펙트럼이 넓어서
어떤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나
또는 다른 개념과의 관계 안에서 언급해야만 하지
그냥 일반론적인 관점으로만 말하면 추상적인 개념이 되고 맙니다.
예컨대 자유주의신학이 이성과 자유에 무게의 중심을 두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판넨베르크만 해도 개신교 신학자 중에서 보수적(?)인 스텐스를 취하는 학자이지만
이성의 신학자로 일컬어질만큼 신학과 신앙에서 이성의 자리를 높게 평가합니다.
우리의 이성적 능력이 없으면
신앙과 신학은 불가능합니다.
루터와 칼빈의 책을 보면 이성적인 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도 이성의 능력이 뛰어났구요.
그는 설교에서 조직신학의 역할을 필수적이라고 할 정도였답니다.
물론 여기서 이성은 우리의 인식론적 능력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건 아닙니다.
늘 하나님의 계시가 우선적이고, 주도적입니다.
그것에 반응하는 우리의 능력은 바로 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영적이라는 말은 이성적이라는 말과 비슷하답니다.
교회사적인 차원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감정, 윤리, 계몽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삼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쉴라이에르마허, 리츨, 하르낙, 트릴취 등등이 대표자들입니다.
그들을 자유주의신학자들이라고 매도하는 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를 변증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정신사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건
한국의 복음주의라고 하는 분들이
바로 그런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가 감정적이고,
도덕주의적이고, 계몽적이죠?
도덕주의적이라는 말과 계몽적이라는 말은 사실 비슷한 거기 합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자유주의적 특성은
'긍정의 힘' 류의 신앙입니다.
그건 가장 비기독교적인 관점인데도
가장 열렬히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죠.
피스 님이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진리로 믿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에 우리의 영혼을 걸어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역사적 예수만이 홀로 '그리스도'라고 믿는가,
아니면 그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믿는가에 따라서
자유주의냐 아니냐 하는 게 달라질 수 있구요.
2. 그리스도의 사역인 구원이 인간의 외부에서(extra nos)에서 일어나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일어난다고 보는가에 대한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