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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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영성, 그 신기루 같은 이상(理想)
한동안 비움, 내려놓음, 비움의 영성...
이런 말들이 유행처럼 떠돌았던 기억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비우지 못해,
신경쓰기를 멈추지 못해 고통받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생각된다.
그 무엇도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살아있음(실존) 자체가 문제라는
헤셀(아브라함 J. 헤셀)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날마다 비워 종국에 무(無)로 만들수만 있다면,
몸은 여기 있되, 실상은 죽은(?)
바로 천국이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왜, 비움의 영성이었는가...
비움의 영성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간 우리네 신앙행태들이
채움의 영성을 지향하여 온 것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리라.
채움의 영성이 기복신앙과 이기주의와 쉽사리 구별되지 않을뿐더러,
채우고자 하는 노력 대비 결과가 은혜라는 하나님 개입이 없이는
딱딱 떨어지지 않는 슬픈 현실을 절감하면서, 또한
그렇지 않아도 신경쓸 것이 많아 고통받는 현대인들인데,
이제는 할 수만 있다면 ‘무신경’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비움의 영성으로 관심을 돌리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비움의 영성, 에게 묻는 두 가지 질문.
하지만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채우면 안되는가? 좋은 것은 계속 채워나가야 되지 않을까?
비움에의 영성에 취사선택은 없다.
비운다면 전부에의 비움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종국에는 무(無)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밖에 없다. 좋은 것과의 즐거웠던 추억도 모두 비워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해서 무(無)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무신경’이기에
마음은 편하겠지만, 과연 내용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둘째는 이것이다.
비움의 영성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 말은 조금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비움의 영성으로 살고 있는 수도사, 스님 등등 많은 분들이 할 수만 있다면
비우기를 날마다 권면하는 판국에 비움의 영성이 가능하냐는 얼토당토않은
질문이라니.
물론 많은 영성가들이 추천하는 실천방법이 있기는 하다.
호흡을 크게 쉬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판단 없이 지켜보는 것.
그리고 생각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런데 비움의 영성이 비롯 ‘영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신경안쓰기’
‘무심해지기’의 다름 이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은 왜일까.
채움, 다시 정의하기
그동안 이쪽 영역(?)에서는 채움-비움의 이분법적 양자구도가 전부였다.(고 생각한다)
채움아니면 비움이였고, 비움아니면 채움이였다.
지금은 채움에서 비움으로 나아간 후 어느 정도 소강된 상태처럼 느껴지는데..
그렇게 하면서 놓쳐왔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버려둠’이였다.
그전에, 채움을 다시 정의해보자.
채움은 일단 비어있는 어떤 곳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어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채움을 이렇게 정의내려보면 어떨까?
‘나 자신의 존재를 당위라는 칼로 도려내어 분열시키는 모든 일련의 행동들’로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되어져야 할 나’로 공격하여 존재를
분열시키는 것을 채움이라고 한다면...? 아니 채움의 숨겨진 의도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비움’또한 이름만 달랐고, 방향만 반대였지, 실제는 ‘채움’이였지
않았을까.
채움과 비움을 넘어, 내버려둠으로.
기복신앙에 빠지지도 않고 소박하게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하며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강의를 찾아 들으며 살아가는 괜찮은 신앙인들이라고 하더라도 비움의 영성 앞에는
이유없이 주눅들며 할말이 없어지는 모습들을 보며, 실은 일련의 신앙적 노력들이 존재의
분열을 어떻게든지 메우고자 하는 발버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는지. 아니 오히려 존재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분열시키는 activity들은 아니였는지.
온전한 구원은 종말에 일어날 사건이라는데,
그 종말이 내일이 될는지 오늘이 될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엇 더 할 것 없이, 변할 것도 없이. 나 자신의 현존재 그 자체가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라는데.
채움이란 이름으로, 또 비움이란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해야 한다’로 분열시키고, 그 분열을
메우려고 좇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시간 낭비일까.
차라리 한 자락 작은 귀퉁이 ‘존재’의 영역이 있다면 그 안에 살며시 들어가 당당히 종말을
기다릴 일이다. 고로 자기 자신을 비우려고 귀찮게 하지 말자.
비움과 내버려둠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크게 차이가 없지요.
더군다나 비'우기' , 내버려'두기'에서 보듯이 두 단어 모두
행위를 그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쓴 글에서 '내버려둠'이 뜻하는 것은,
내버려'두기' 즉, '내버려둠'의 영성으로 나아가자는 작위(作爲)적인
그 무엇이라기 보다
오히려 '견딤'에 가까울 것 같아요.
견딤 또한 견'디기'처럼 내버려'두기' 또는 비'우기'와 같은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있지만,
견딤의 영성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부(不)작위로서의 견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성경읽는것 좋다. 기도하는 것 좋다. 교회가는 것 좋다.
예배드리는 것 좋다. 다 좋지만
좇기듯이,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하는
것은 존재의 분열을 강화시키는 것 아니면 결코 메워지지
않을 분열을 메우려는 억지라는 측면에서 차라리 신앙적인
노력을 하지 말고 종말을 기다리자는 그런 뜻도 있겠네요.^^
이건 마치 누에고치가 자신을 보호하던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어가는 필요한 과정 중에서 순리를 거스르고 때가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고치를 그냥 떼어 내다가 나비가 되기는 커녕 그냥 죽어버리는 경우와 같은 것 같아요...
인간이 절대자가 아닌 이상 자기 비움에 있어서도 절대자의 섭리에 의존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지만, 시간성 속에서의 성숙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그 것을 벗고 언젠가 나비가 될 수 있으니까요...
재미있는 글을 써주셨군요.
저같은 속물은 '비움'은 생각도 하지않고 지내는 편이고,
'채움'은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ㅎㅎ
중간에 '내버려둠'이라고 언급을 하셨는데
오히려 이쪽으로 비중을 두는 편입니다.
내버려두면 시간이, 환경이, 내면이...뜻밖의 다른 결과를 불러오거든요.
재미로 말씀드리면, 제가 저희 엄니한테 농담으로
만약에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오면 일단 무조건 반대해달라고...
그래야 뭔가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맛이 있고, 사랑도 땐땐해지고...ㅋㅋㅋ
저희 엄니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십니다만.
이건 무슨 소리인가하면 '내버려둠'을 하지 말라는 거지요.
내버려두면 안일해지고 탈색이 되니깐...
그래서 반대로 내버려두면 비워지기도 채워지기도 할 거 같아요.
제가 뭔 소리를 하는건지..^^
'내버려둠'은 결국 타율성을 띠게 되는지라
영성 운운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것을 타고나지않은 사람이
'내버려둠'을 실행하는 것은 쉽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