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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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공부를 정리해봅니다.
우리가 언제 이 공부를 시작했지요? 이것은 꼼꼼하신 루비선생님이 챙겨주실거고. 하여튼 진리에 대한 강렬한 열망, 내면에 풀어지지 않는 몇 가지 의문을 이 공부를 통해서 풀어보고자 시작을 했습니다. 하면 할수록 더더욱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이 공부일 줄 알았더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고 지냈으면 더 편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공부가 난해해집니다. 무언가 똑 부러지게 결론으로 와 닿는 것이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기보다 새로 배우는 모든 것들이 기존 갖고 있는 것과 같이 혼합되어 의심의 안개만 자욱하게 황사처럼 일어나 내가 과연 길을 제대로 가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지요. 인도에서 이런 공부를 할 수 있을 줄 정말 몰랐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루비님의 기대의 눈빛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아 인도자로서 은근히 조바심이 생기네요. 걱정도 팔자시라고요. 네. 좋습니다. 주욱 가지요. 앞으로 루비님의 강의 계획에 따르면 6주를 더 해야 하겠지요.
지난주의 읽어야 할 분량이 70쪽이나 되었지요. 구약성서 및 그 안에 있는 질답시간까지 다 소화를 하려고 했으니 아무리 우리가 3-4시간을 휴식시간도 없이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좀 무리이기는 했지요. 그래서 이 분량을 제시한 루비님은 그 책임감 때문에 다 읽어 오셨지만 러브님은 요약된 ‘기다’편을 읽으시고 조이님은 모르겠네요. 쁘리야님은 주말에 읽으려고 계획을 세워놓으셨다가 갑자기 야간작업을 이틀이나 하는 바람에 읽고 오지 못하셨고요. 방대한 분량, 예습을 하더라도 그 분량을 다 소화해 낸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 한 일인데 공부를 이끌어가는 사람의 깜냥이 한 주제를 붙들고 치열하게 대화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되지 않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진도만 나가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 숨겨진 우주처럼 큰 수많은 주제들이 자기를 알아 달라고,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우리는 너무 바빠. 빨리 뭔가 결론을 내야 해 하면서 모르쇠로 그냥 지나왔지요.
아마도 오늘의 정점은 쁘리야 선생님이 제기한 ‘부활의 리얼리티’였지 않나 합니다. 언젠가 루비선생님이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언뜻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신 기억이 납니다. 그것이 고달픈 이 땅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에 할 수 있으면 빨리 안착하고픈 열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열망이 부활의 리얼리티를 체험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전에 부활이 무엇이며 현실성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고유하고도 유일한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중구난방으로 그 부활을 경험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부활 경험에 대한 증언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결단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하고 다른 종교를 선택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 부활의 실체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은 곧 끝이 났습니다. 다시 예수님이 없는 현실속에서 다시오실 예수님에 대한 희망만 남았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사도들도 죽고 그 부활의 소식을 사도들을 통해 들은 사람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 후 2천년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또 살다가 희망가운데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부활의 리얼리티를 체험하기를 원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부활의 실체를 경험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다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이 성령은 부활의 영이시며 종말의 영이시며 현재는 그것을 선취하여 사는 우리에게는 생명의 영이 되십니다. 현재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생명경험은 바로 부활의 실체되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쁘리야선생님은 창조의 하나님은 믿기 쉽기 때문에 믿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창조를 믿는다면 종말도 믿게 되는 것이지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시종(始終)은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 하나님이 바로 이 땅에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예수님으로 오신 사실을 믿는 것은 믿음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이성으로 쉽사리 받아들여지기 힘든 신앙의 세계이지요.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이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청년 예수의 모습과 일치될 수 있는가? 이 청년 예수가 어떻게 나의 인생과 삶의 심연부터 맞닿아있는 나를 지으신 이요. 나의 숨결 속에 함께 하시며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시고 종국에는 나의 삶을 그 안에서 완성시켜 가실 그 하나님이시란 말인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아득해집니다. 믿자 믿어야만 한다는 광신(狂信)도 아니고 믿지 못하면 어쩌지 못하는 자기연민도 아닌 두 눈이 또랑또랑한,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이 부활의 실체되신 예수님을 생명의 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감화감동하게 하심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통치에 집중해야 하겠지요.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없음과 있음의 세계를 주관하시는 ‘I am that I am’의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생명의 영의 움직임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집중하여야 하겠지요. 그럴 때 나의 일상에 일어나는 이 조그만 사건 하나하나가 ‘경이’ 그 자체임이 다가옵니다. 이것이 쁘리야선생님이 질문했던 부활의 리얼리티가 아닌가 합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삶은 여상하고 다시 감당하여야 할 또 다른 하루는 초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불쑥 새벽으로 다가오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삶, 나의 존재의 죽음과 다시 삶, 그 삶의 경계선에 서게됨으로 말미암아 체험하게 된 그 경이로움은 삶의 묵직한 중심(重心)이 되어 삶을 더 이상 요동하지 않게 합니다. 아니 요동하게 하더라도 그 중심, 그 닻이 탄탄하여 다시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동녘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이 천정에 달아둔 모바일 장난감을 어렴풋이 인식하여 움직이는 갓난아기의 눈동자처럼(여전히 안보이는) 생명의 영이 이끄는 세계에 가까스로 눈을 뜬 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실체를 체험하고 싶다는 쁘리야님과 저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별의미는 없지만 굳이 차이를 따진다면 생명의 영의 움직임에 제가 조금 먼저 반응을 하는 은총을 입었을 뿐입니다.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실체, 그 희망의 실체가 잘 안 보이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이니 도진개진입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이일에 ‘키리에 엘레이송’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너무 간절하여 빨리 죽고 싶다 시던 루비님도 우주에 가득한 생명의 영에 집중하시다 보면 세상과 나는 간곳없는 그 무풍지대에서 부활의 주님과 댄싱 하는 나날을 살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또 너무 오버했지요? 다음 주까지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인도의 다비아 동지들이여!
(09.6.6일 인도 다비아 공부를 마치고)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기독교의 거의 모든 것이 들어있어 보화를 캐는 기분입니다.
주마간산으로 나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내용들이지요.
오늘은 '빛이 있으라'하는 구절이 몇 번씩이나 '말할 수 있으라'로 바뀐 부분을 읽으며
한참을 웃었죠. 저는 제가 타이핑 이렇게 한 것 아닙니다라고 변명하면서 또 웃구요.
올해 내로 다시 교정판을 볼 수 있겠지요.
공부하는 책상이 늘 먹거리로 풍성합니다.
달고나 커피도 있고 한국 처럼 다양하지는 않지만 각종 음료수와
그리고 수박.
깍두기 보다 조금 크게 썬 이 수박이 종종 강의의 열기를 갈아앉히는 역할을 합니다.
수박 한 조각 먹으면서 먹거리 속에 담긴 세례나 성찬이나 생명의 영을 이야기하는 저를
조금은 쌩뚱맞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이 분들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아마 아직 실증의 세계속에서 익숙해왔던 삶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계로의 인식의 전환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서 그런 거라고 받아들여 집니다.
기꼬를 공부하면서
이런 길을 열어가시는 목사님의 존재가 너무 귀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으로 하여금 더 깊은 영성의 세계를 열어나가시도록
직간접적으로 도우시는 눈꽃님의 수고가 참 많이 감사하구요.
샘터교회 운영위원님들 한 분 한 분의 애씀이 있기에
그 열매의 은택을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입게 되는군요.
그래서 이번 여름의 '말라기 영성 수련회'가 너무나 기대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휴가를 내서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니 아예 목사님을 인도로 모셔다가 시설좋은 히말라야 산장에 모시고
옛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부흥 사경회를 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입니다.
늘 바닥을 기는 듯한 데서 오는 갈급함이지요.
이제 이 세계에 조금 눈을 뜨는 아기같은데 벌써 올해도 반이 지나갑니다.
이번 말라기 영성 여름수련회를 통해
말라기 선지자가 처했던 그 치열한 삶의 자리를 배우고
한층 더 깊어지는 영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관심갖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교사님, 그 옛날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 편지를 받아든 본국의 성도님들도 이같은 심정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저도 정목사님을 뵙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 거룩'에 대한 바른 깨우침을 받은 거 같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가슴앓이는 해 왔겠지만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일기>를 읽고 한 동안 바보처럼 아무말도 못하고,
멍하니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하나님의 영광, 거룩이라는 의미를 어렴풋이 터득했었나 봅니다.
그리고 5년이 흘렀을때 정 목사님을 뵈었군요.
어제는 예배를 드리면서, 영광의 찬송을 드리면서,
스랍들과 온 우주와 그리고 우리 믿음의 선후배들과 함께
찬양의 기쁨을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 옛날 이사야 선지자의 하나님 경험을 지금, 여기서 경험하게 되다니요!!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이렇게 바닥을 기는데,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초월하시는 군요.
인도에서 오는 소식은 제게는 늘 감로수와 같습니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시는 믿음의 형제 자매님들,
그리고 늘 그자리에 계시는 선교사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오히려 제가 '진지한' 사람으로 여겨졌다니, 부끄러우면서 감사 (?)하네요.
'따진다'는 표현은 삿땨님의 '첫인도 기꼬'에 나온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
눈꽃님,
저도 방갑습니다.
그 천국에 관한 것은...사실 제가 그리 간절히 소망한 것은 아닌 듯 싶네요. 삿땨님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니, 제 표현이 분명하지 못했나 봅니다.
이 땅에서의 것들이 거울을 통해 보는 것과 같기에, 어서 그곳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고요.
히브리인들의 시간개념이 익숙하지 않아서인가요? 여전히 Ruby의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이제는 '그곳'이라기 보다 '종말'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네요.
삿땨님,
솔직히 제가 '차분', '조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러시면...삿땨님에대한 신뢰도가 떨~어~지~십~니~다~~
7번째 class '부활의 reality'에대한 풀이 잘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셔서 보내시는 성령, 그 생명의 영이 우리를 감화감동시켜 우리도 그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하였고, 하고, 종말까지 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부활의 reality'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며 그의 충만하심으로인한 것이네요...
성령의 역사 (또는 충만함)의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어서 주관적인 그 경험은 어떠한 표현으로도 타인에게 이해되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책자가 제 옆에 없어서 어느 class에서였는 지 알려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정도나 때도 다를 것이고요...
또 성령의 역사는 인간에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뤄지는 것일텐데요.
그렇다면, '부활의 reality'에 '집중하라' 또는 '들어가라' 등의 표현보다는 '성령의 충만함'을 '소망하라' 또는 '기대하라'가 이해를 빠르게 해줍니다.
성경공부를 시작하셨다는 말씀을 지난번에 들었는데,
그래서 후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애구, 이제야 올려 주시는 군요.^^
루비님, 러브님,조이님, 쁘리야님,선교사님, 다섯분이시군요.
아름다운 그림이 연상됩니다.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시다가 때로는 격정적인 질문을 쏟아내셔서
선교사님을 마구 난처하게도 하실 것 같군요^^
특히 루비님께서요.^^ 하하
부럽습니다.
제가 선교사님 계신 곳이 이 근방이라면 당장 달려가서 합류하고 싶네요.
항상 건승하세요. 선교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