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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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위구르 족들이라고 한다.
불과 몇분전만 해도 거리를 행진하며 시위를 했던.
가족들이 모두 나왔을 것이다. 손자는 할머니의 손을, 딸아이는 부모의 손을 잡고.
이제는 어느 창고에 숨죽여 엇갈려 누워있다. 이 팔이 저 목 위에 걸터 있고, 저
다리가 이 허벅지위에 올라가있다. 눈을 뜨기도 하고 반쯤 감기도 했으며, 혀가 나온
사람도 있고 가능하지 않은 방향으로 팔과 다리가 꺽인 사람도 있다. 모두들 빨간 물
감으로 이리저리 이 몸 저 몸을 적셨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또 다른 사람 몇몇이 짐승의 수를 세듯 몇 '개'가 누워있는지
헤아려본다.
몇분전 외치는 소리는 산자의 소리였을까. 죽은자의 소리였을까. 모두의 추억으로
남겨진 살았있었음의 추억. 그게 불과 몇분 전이다. 그 추억 또한 행여 '몇분'이였을까.
이제 기억조차 나지않는다.
둘,
아저씨는 아직 살아있었다.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듯 벤치에 널퍼적 누워 왼쪽 가슴을 규칙적으로 흔들어대는 것이다.
아저씨는 노숙자다.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아저씨는 회사 옆 도서관 벤치에 멍하니 촛점을
흐린 채 앉아있곤 했다. 한두번 율무차를 건넸으나 그의 생명유지에는 턱없이 부족할 터. 곧 나는
나의 현실로 돌아왔다.
가끔 시청사거리 앞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있는 모습, 파주병원 앞 횡단보도가
파란 불로 바뀌어도 건너가지 않은채 가만히 서있는 모습 등등을 보며 아직 그가 생명을
부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곤 하였다. 그리고는 한참을 보지 못했다.
도서관 벤치에서도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웬지 아저씨 한테서 어떤 냄새가 슬며시 새어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냄새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 그가 나보란듯이 날씨 좋은 어느 오후,
예의 그 벤치에 누워 세상 모르게 오수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아~그것은 죽음 냄새였구나' 그때서야 알았다. 그 아저씨한테는 죽음 냄새가 났다는 것을. 죽음이
그 아저씨를 좇고 있었는지. 이미 죽음과 하나가 된 아저씨가 폴폴 냄새를 풍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같은 인간의 죽음 냄새를 멀찍이 떨어져 관찰하며 봄을 났었나 보다.
셋,
쌍용차 노조에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고 한다.
물, 음식, 의료품, 전기 등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공장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그것도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노조원들이 그나마 공장 안에 삶이 있음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자꾸 죽음의 냄새가 깔리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그래도 죽음이 인류에게 지켜온
예의 중 하나는 은밀하게 접근하여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인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 냄새를 맡아 보며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 섬뜻하다. 나도 살았다고 하는 사람. 너도 살았다고
하는 사람. 죽음은 확률과 무관한 영역인데. 너가 먼저 죽을 확률이 나보다 높은게 나는 불길하다..
삶과 죽음은 그 경계를 허물고 모호하게 겹쳐져있다. 죽음은 은밀하게 우리 삶에 침투해 들어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도가 지나친 일이 발생할 때면 여지없이 인간을 무너뜨린다. 언제나 그랬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난 허무해 지고 모호한 경계에 서서 가까스로 삶의 영위를 모색하기보다 확실한 죽음의
자리에 서 있기를 바라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듯하다. 걱정마라 나도 사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고 있다네라는 외침이
내가 사는 이곳에서 평택까지 전달이 될런지.
부디 건강하게 살아 나오시게.
죽음의 냄새가 자욱하여 여기도 매캐하지만. 기다리는 자식들, 가족들 한 번 안아봐야지.
부디 그랬으면.
위구르 족들이라고 한다.
불과 몇분전만 해도 거리를 행진하며 시위를 했던.
가족들이 모두 나왔을 것이다. 손자는 할머니의 손을, 딸아이는 부모의 손을 잡고.
이제는 어느 창고에 숨죽여 엇갈려 누워있다. 이 팔이 저 목 위에 걸터 있고, 저
다리가 이 허벅지위에 올라가있다. 눈을 뜨기도 하고 반쯤 감기도 했으며, 혀가 나온
사람도 있고 가능하지 않은 방향으로 팔과 다리가 꺽인 사람도 있다. 모두들 빨간 물
감으로 이리저리 이 몸 저 몸을 적셨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또 다른 사람 몇몇이 짐승의 수를 세듯 몇 '개'가 누워있는지
헤아려본다.
몇분전 외치는 소리는 산자의 소리였을까. 죽은자의 소리였을까. 모두의 추억으로
남겨진 살았있었음의 추억. 그게 불과 몇분 전이다. 그 추억 또한 행여 '몇분'이였을까.
이제 기억조차 나지않는다.
둘,
아저씨는 아직 살아있었다.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듯 벤치에 널퍼적 누워 왼쪽 가슴을 규칙적으로 흔들어대는 것이다.
아저씨는 노숙자다.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아저씨는 회사 옆 도서관 벤치에 멍하니 촛점을
흐린 채 앉아있곤 했다. 한두번 율무차를 건넸으나 그의 생명유지에는 턱없이 부족할 터. 곧 나는
나의 현실로 돌아왔다.
가끔 시청사거리 앞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있는 모습, 파주병원 앞 횡단보도가
파란 불로 바뀌어도 건너가지 않은채 가만히 서있는 모습 등등을 보며 아직 그가 생명을
부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곤 하였다. 그리고는 한참을 보지 못했다.
도서관 벤치에서도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웬지 아저씨 한테서 어떤 냄새가 슬며시 새어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냄새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 그가 나보란듯이 날씨 좋은 어느 오후,
예의 그 벤치에 누워 세상 모르게 오수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아~그것은 죽음 냄새였구나' 그때서야 알았다. 그 아저씨한테는 죽음 냄새가 났다는 것을. 죽음이
그 아저씨를 좇고 있었는지. 이미 죽음과 하나가 된 아저씨가 폴폴 냄새를 풍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같은 인간의 죽음 냄새를 멀찍이 떨어져 관찰하며 봄을 났었나 보다.
셋,
쌍용차 노조에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고 한다.
물, 음식, 의료품, 전기 등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공장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그것도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노조원들이 그나마 공장 안에 삶이 있음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자꾸 죽음의 냄새가 깔리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그래도 죽음이 인류에게 지켜온
예의 중 하나는 은밀하게 접근하여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인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 냄새를 맡아 보며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 섬뜻하다. 나도 살았다고 하는 사람. 너도 살았다고
하는 사람. 죽음은 확률과 무관한 영역인데. 너가 먼저 죽을 확률이 나보다 높은게 나는 불길하다..
삶과 죽음은 그 경계를 허물고 모호하게 겹쳐져있다. 죽음은 은밀하게 우리 삶에 침투해 들어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도가 지나친 일이 발생할 때면 여지없이 인간을 무너뜨린다. 언제나 그랬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난 허무해 지고 모호한 경계에 서서 가까스로 삶의 영위를 모색하기보다 확실한 죽음의
자리에 서 있기를 바라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듯하다. 걱정마라 나도 사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고 있다네라는 외침이
내가 사는 이곳에서 평택까지 전달이 될런지.
부디 건강하게 살아 나오시게.
죽음의 냄새가 자욱하여 여기도 매캐하지만. 기다리는 자식들, 가족들 한 번 안아봐야지.
부디 그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