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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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목사님/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서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폐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얼마 전 구입한 책 "한국 현대시와 신학의 풍경"(차정식/ 이레서원/2008)에서 마주친 기형도 님의 시입니다.
지은이 차정식 교수는 한일 장신대학교 신학부 교수라고 하는군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아래 시를 올려 주신 목사님이 계시길래 반가운 마음으로 이 시를 옮깁니다.
기형도 시인의 눈으로 본 동네 목사님의 모습에 조금은 마음 한 켠이 쓸쓸해집니다.
책 속에 있는 지은이의 서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한 태초의 말씀이 오염되지 않은 언어의 뿌리라면 그것은 분명히 시의 원시적인 고향일 테다.또 그 말씀이 육신을 입은 일이 정녕 우주적인 구원사건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시의 순정한 원형일 테다. ....... 시학과 신학의 거리가 이다지도 가깝건만, 오호통재라, 오늘날 시인들은 신의 학문을 저버리고, 신학자들은 시인의 감수성을 외면한다."
얼마전 우리 동네 가까운 바닷가에서 찍은 노을입니다.
이 곳에서 지는 해가 한국에서는 뜨고 있나요? 재밌습니다. ㅎㅎ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서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폐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얼마 전 구입한 책 "한국 현대시와 신학의 풍경"(차정식/ 이레서원/2008)에서 마주친 기형도 님의 시입니다.
지은이 차정식 교수는 한일 장신대학교 신학부 교수라고 하는군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아래 시를 올려 주신 목사님이 계시길래 반가운 마음으로 이 시를 옮깁니다.
기형도 시인의 눈으로 본 동네 목사님의 모습에 조금은 마음 한 켠이 쓸쓸해집니다.
책 속에 있는 지은이의 서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한 태초의 말씀이 오염되지 않은 언어의 뿌리라면 그것은 분명히 시의 원시적인 고향일 테다.또 그 말씀이 육신을 입은 일이 정녕 우주적인 구원사건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시의 순정한 원형일 테다. ....... 시학과 신학의 거리가 이다지도 가깝건만, 오호통재라, 오늘날 시인들은 신의 학문을 저버리고, 신학자들은 시인의 감수성을 외면한다."
얼마전 우리 동네 가까운 바닷가에서 찍은 노을입니다.
이 곳에서 지는 해가 한국에서는 뜨고 있나요? 재밌습니다. ㅎㅎ
아마도 "우리동네 목사님"은 기형도의 시 속이나, 혹은 차정식의 신학적 해설 속에서나 존재하지
현실-특히 한국 현실- 에서는 존재 할 수 없는 목사님 입니다.
우선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는 식의 방법으로는
그야말로 "밥먹기 힘들고, 시에서 처럼 교인들의 환영도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또한 거꾸로 "평신도"가 그런다 해도 "목사"가 용납을 안하고 나가 달라고 하지요
이 땅에 언제나 "우리동네 목사님" 같은 분이 환영받고 성공(?) 하는 시대가 올런지요....
작금의 한국의 어느 대형교단(?) 사태와 어느 작은교회 사건을 접하면서
정말 "우리동네 목사님' 이 그리워 집니다
현실-특히 한국 현실- 에서는 존재 할 수 없는 목사님 입니다.
우선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는 식의 방법으로는
그야말로 "밥먹기 힘들고, 시에서 처럼 교인들의 환영도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또한 거꾸로 "평신도"가 그런다 해도 "목사"가 용납을 안하고 나가 달라고 하지요
이 땅에 언제나 "우리동네 목사님" 같은 분이 환영받고 성공(?) 하는 시대가 올런지요....
작금의 한국의 어느 대형교단(?) 사태와 어느 작은교회 사건을 접하면서
정말 "우리동네 목사님' 이 그리워 집니다
이 싯귀에 밑줄을 좌악 긋습니다.
시학과 신학이 한 몸임을 이야기하는 지은이의 서문 또한 밑줄좌악입니다.
신학에 시의 감수성이 녹아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좋은 그림,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