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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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공부해 온 나로서는 무엇이든지 회의해 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물론 분석력이 탁월한 혹자는 바로 앞의 이 문장을 딱 보자마자 회의해 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을 회의해 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겠다. 이것을 회의해 본 적이 있다. 이것에 관해서 묻는다면 따로 글을 한편 써 올리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조금 무관하기 때문이다. 다시 본래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돌아오자.
이곳(다비아)을 알기 전에 나는 그나마 열린 사고를 한다고(?) 소문을 들은 기독 카페에서 활동을 했었고, 그곳의 논객(?)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바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과 그것을 강요하려는 형태의 행각 및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조언 아닌 조언의 모습을 보고서 신과 기독교 그리고 종교에 관하여 스피노자적 삶을 살아가려는 본인의 삶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과감하게 탈퇴를 했었다.
탈퇴의 근본 이유는 제목에서 잘 말해주듯이 종교 단체나 종교 카페에서 난 회의하는 것 때문에 왕따였고, 왕따이기 때문에 굳이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공부하는 분야에서는 회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동네이고, 그러한 회의는 곧 현재까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사상적 지평 혹은 인간 세계관의 지평 및 관점의 지평을 새로 새워나가는데 있어 가장 큰 전제가 된다.
모든 것은 회의해도 신 그리고 성경 아울러 신이 세웠다고 주장하는 성직자에 관해서 회의하는 것은 신에 대해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A : 신은 인간을 포함한 세계라고 하는 공간 및 시간의 흐름 그리고 모든 만물을 만들었다.
B: 인간은 회의를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신으로부터 왔다.
C: 따라서 신으로부터 온 이성을 잘 활용하여 신 존재에 관해서 회의를 품어 보는 것은 신의 능력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좋다. 이것에 대해 그닥 동의하고 싶지 않다면 인정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사랑으로 품어 준다고 하는 그들이 믿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믿고 싶어하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왜 나를 포함한 회의하는 인간 존재를 거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변을 들은 바 없지만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난 존재한다고 했던가. 그럼 나는 나는 회의한다. 고로 난 왕따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곳(다비아)을 알기 전에 나는 그나마 열린 사고를 한다고(?) 소문을 들은 기독 카페에서 활동을 했었고, 그곳의 논객(?)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바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과 그것을 강요하려는 형태의 행각 및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조언 아닌 조언의 모습을 보고서 신과 기독교 그리고 종교에 관하여 스피노자적 삶을 살아가려는 본인의 삶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과감하게 탈퇴를 했었다.
탈퇴의 근본 이유는 제목에서 잘 말해주듯이 종교 단체나 종교 카페에서 난 회의하는 것 때문에 왕따였고, 왕따이기 때문에 굳이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공부하는 분야에서는 회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동네이고, 그러한 회의는 곧 현재까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사상적 지평 혹은 인간 세계관의 지평 및 관점의 지평을 새로 새워나가는데 있어 가장 큰 전제가 된다.
모든 것은 회의해도 신 그리고 성경 아울러 신이 세웠다고 주장하는 성직자에 관해서 회의하는 것은 신에 대해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A : 신은 인간을 포함한 세계라고 하는 공간 및 시간의 흐름 그리고 모든 만물을 만들었다.
B: 인간은 회의를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신으로부터 왔다.
C: 따라서 신으로부터 온 이성을 잘 활용하여 신 존재에 관해서 회의를 품어 보는 것은 신의 능력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좋다. 이것에 대해 그닥 동의하고 싶지 않다면 인정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사랑으로 품어 준다고 하는 그들이 믿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믿고 싶어하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왜 나를 포함한 회의하는 인간 존재를 거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변을 들은 바 없지만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난 존재한다고 했던가. 그럼 나는 나는 회의한다. 고로 난 왕따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비주류, 소수자, 언더그라운드 가 편안하신 버클리님 ... 하이룽~!!
여기서 또 뵙네욤ㅎㅎㅎ
예수님 사신 삶'이 왕따의 삶이었으니,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시겠네요 ...
스피노자 적으로 사신다니, 감사가 넘치실텐데 ...
왕따가 싫으신건가요?? ㅎㅎ
걍 인사겸 리플 냄깁니다. ^^
아 차 - 영화 "미쓰 홍당무" 영화가 생각나네요 ..
현대가 보편적 질서의 강압에 저항하고, 해체하는 움직임이 영화에도 많이 영향을
미치는 듯이 보입니다. 의식이 많이 변하고 있어요. 이제는 조금씩 왕따도 살만해져가는 듯 한데 ...........
더 길어지면, 걷잡을 수 없을 듯 해서, 여기서 줄입니다.ㅎㅎㅎ
여기서 또 뵙네욤ㅎㅎㅎ
예수님 사신 삶'이 왕따의 삶이었으니,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시겠네요 ...
스피노자 적으로 사신다니, 감사가 넘치실텐데 ...
왕따가 싫으신건가요?? ㅎㅎ
걍 인사겸 리플 냄깁니다. ^^
아 차 - 영화 "미쓰 홍당무" 영화가 생각나네요 ..
현대가 보편적 질서의 강압에 저항하고, 해체하는 움직임이 영화에도 많이 영향을
미치는 듯이 보입니다. 의식이 많이 변하고 있어요. 이제는 조금씩 왕따도 살만해져가는 듯 한데 ...........
더 길어지면, 걷잡을 수 없을 듯 해서, 여기서 줄입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