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mms://61.111.3.15/pwkvod/daoff/2009(1).mp3 |
---|
당분간 사랑채에 놓았다가 나중에는 동영강 강의 메뉴로 옮길 예정입니다.
녹음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군요.
*아래는 강의 초안입니다.
골로새서 공부
주제: 위의 것을 찾으라!
주제에 대한 설명
좋은 신앙이란 무엇일까? 교회가 요구하는 모범적인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런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핵심은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것이 곧 기독교 영성이다. 즉 신앙의 근본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지는 태도가 바로 영성이다. 왜 그런가? 영성은 영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영은 생명의 가장 심층적 차원에서 생명을 가능하게는 능력이다. 그것은 우리가 범주화할 수 없는 존재론적 힘이다. 생명의 심층적 차원은 우리에게 아직 완전하게 열리지 않다. 그러니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신앙을 회의론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진리에 대한 궁금증과 회의는 다르다. 전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의존하는 우리의 인식론적 열정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기의 인식론에 대한 신뢰에 의존해서 하나님을 재단하려는 주관적 열망이기 때문이다. 이 둘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그야말로 성령에 의해서만 구분이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작은 기준을 찾는다면 기독교 전통에 대한 태도가 그것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는가, 아니면 그것과 단절한 채 자신의 실존적 경험에 근거해서 질문하는가로 구분할 수 있다.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은 왜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은가? 정말 모든 걸 다 알기 때문인가, 아니면 전혀 모르기 때문인가? 알아도 질문하지 않지만 몰라도 질문하지 않는다. 이건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상살이, 세상학문과 예술에서도 똑같다. 아는 게 있어야 궁금증이 생기고 궁금증이 있어야 학문이 일어난다. 베르디의 <레퀴엠>과 클라우디오 아바도.
또는 질문이 불신앙이라고 배웠기 때문인가? 세 가지 중에 어느 쪽인가? 대개는 세 번째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끝이 없다.
1. 하나님은 누구인가?
2. 성경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3. 구원은 무엇인가?
4. 예수는 왜 그리스도인가?
5. 부활은 무엇인가?
6. 예수의 재림은 확실한가?
7.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8. 왜 예배에 참여해야 하는가?
이번 수련회의 주제 “위의 것을 찾으라!”는 골 3:1절에 나오는 명제이다. 여기서 ‘위의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그 하늘은 분명히 땅과 대별된다. 하늘에 있는 것을 찾으라는 말은 곧 땅의 것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땅에 있는 것을 골로새 기자는 음란, 부정, 사욕....이라고 말한다.(골 3:5) 땅과 하늘의 이원론적 생각이 바로 기독교의 가르침인가?
이런 질문의 대답을 찾으려면 우선 그 당시 사람들이 세상(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가? 세상은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지나간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구 나이가 45억년인데, 앞으로 그런 세월이 지난 뒤에 사라진다. 지구에서 벌어졌던 모든 현상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해도 비슷하다. 우리의 지난 삶은 무엇인가? 금년에는 한국의 인물들이 많이 세상을 떠났다. 김수환, 노무현, 김대중에게 이 세상은 무엇인가? 2천 년 전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나 똑같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그들보다 자연과학적인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긴 하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가장 원초적인 생명은 단세포 생명체인 박테리아다. 박테리아에서 복잡한 구조의 생명체로 진화하는 핵심은 DNA이다. 이를 기초로 해서 인간에 이르는 생명체로 발전이 일어났다. 무기물에서 유기물인 박테리아가 나왔다는 사실과 박테리아에서 고등생명체로 진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결국 무기물과 인간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모든 걸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보편적인 실체가 물, 불, 공기, 흙이라는 헬라 철학의 네 원자설은 일리가 있다. 헬라 철학이 말하는 네 가지 원자설은 일리가 있다. 물, 불, 흙, 공기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미립자들이다.
이 세상의 토대가 그렇게 단순하다는 말은 동시에 이 세상의 존재론적 토대가 매우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얼마나 취약한가? 30분 동안 숨을 쉬지 않거나 심장이 뛰지 않으면 죽는다. 인류는 아직도 바이러스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혜성의 충돌은 지구를 불바다로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죽는다. 현재도 삶의 충만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확실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고대인들의 처지는 오죽 했겠는가? 어린아이가 어머니 곁을 떠나면 불안해하듯이* 고대인들은 이 땅의 삶에서 자신들의 모든 존재론적 근거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희구할 수밖에 없었다.
*빙하기 앞에서 유인원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이 간다. 종족 전체가 멸종하리라는 예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인간의 조상인 한 유인원만 빙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멸절의 공포는 오늘도 여전하다. 다만 인간 문명에 도취하여 그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 수련회의 주제인 ‘위의 것을 찾으라’는 골로새의 중심 주제는 고대 헬라 철학의 이데아론과 연결된다. 양자 모두 구원을 세상 초월로 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태도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세상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로 보지만 헬라철학은 악으로 본다. 전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후자는 세상에서 금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1강: 골로새서의 송영
(골 1:15-20)
신약성서는 4권의 복음서, 1권의 사도행전, 21권의 서신, 1권의 요한계시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골로새서는 바울의 개인 편지라기보다는 디모데와 공동으로 쓴 편지라고 보는 게 옳다. 젊은 디모데가 주로 썼고, 늙은 바울은 마지막에 “친필로”(골 4:18) 그 내용을 확인했다. 골로새서가 바울의 오리지널 작품이 아닌 근거는 이 안에 바울의 사상과 구별되는 내용과 구별되는 글쓰기 방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바울의 신학의 특징인 칭의론과 성령론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성서가 바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의 신학에 정통한 사람이 바울의 신학을 대변하는 차원에서 기록한 성경이기 때문에 바울의 편지로도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골로새는 소아시아 중부에 있는 라오디게아에서 동쪽으로 별로 멀지 않는 곳에 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아니라 에바브라가 개척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당대의 역사적 배경이다. ‘삶의 자리’라고도 하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전제되지 않으면 본문이 오해될 염려가 많다. 지금도 편지는 구체적인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다. 2천 년 전 골로새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었을까?
1:2 은혜
일반적으로 “은혜”, 혹은 “은총”(카리스)은 하나님이 값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선물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는 “은사”(카리스마)라는 단어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는 게 아니라 개인에 따라서 특별하게 베풀어주는 것을 가리킨다. 구원과 영생은 은혜이지만 예술적 기능과 지적인 능력은 은사다.
은혜의 왜곡 현상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은혜 편의주의이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견뎌내야 할 삶의 무게를 너무나 쉽게 은혜에 기대어 벗어버리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본회퍼가 말하는 대로 ‘값싼 은혜’이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은총 무용론이다. 이들은 오직 자신의 업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총을 업신여긴다.
1:2 평강
평강, 또는 평화(에이레네, 샬롬)라는 단어는 성서 안에서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추구한 가장 완전한 삶의 상태를 가리킨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다툼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한 문명을 일구어낸 사회라 하더라도 완전한 평화를 이룩하지 못했다.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말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나뉘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회복되는 길은 죄가 해결되는 데에 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며,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게 된다.
1:4 믿음과 사랑
바울은 골로새 교우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한 번도 직접 방문한 적이 없지만 바울의 가르침을 에바브라가 대신 전달해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마음을 많이 쏟은 것 같다. 더욱이 바울은 옥에 갇힌 자로서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바울은 골로새 교우들과 영적으로 하나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2:5, 4:3). 그 이외에도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우들과 서로 연락을 취하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라오디아교회에도 보내고 라오디게아에 보낸 편지를 골로새 교우들도 받아서 읽으라고 지시한다(4:15,16).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은 어떤 관계인가?
1:5 소망
바울은 이 믿음과 사랑을 독립적인 세계로 생각하지 않는다. 5절에서 그는 하늘에 쌓아 둔 소(희)망에 대해서 말한다. 믿음과 사랑의 뿌리는 소망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소망으로부터 믿음과 사랑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1:5 하늘
바울은 희망이 ‘하늘’에 쌓아 둔 것이라고 했다. 성서 시대의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생명이 숨겨진 곳이었다.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런 생명 형식과 전혀 다른, 우리의 인식으로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세계라고 말이다. 그들은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했다. 조금 유치한가? 유치한 게 아니라 신비로운 것이다.
1:6 복음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율법적인 복음 공동체? 모든 업적의(義), 또는 자기의(義)로부터의 해방이다.
1:8 성령 안에서
거룩한 영인 성령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으나 현실적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만 사랑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1:9 신령한 지혜와 총명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믿음생활에서도 중요하다.
1:10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신앙의 성숙, 심화다. 이것은 강화와는 다르다. 어떻게 자라는가? 여기에 자기 개방성, 자기 초월성이 필요하다.
1:14 속량 곧 죄사함
죄란 무엇인가? 아모르 수이, 휘브리스, 자기집중, 자기연민, 자기단절, 자폐를 가리킨다. 성서기자들은 왜 죄를 생각하나? 그것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악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죄 사함이 필요한 이유는? 죄의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 사함만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길이다. 어떻게 죄 사함이 가능한가?
초기 기독교의 찬양
-만물과의 화해- (1:15-20)
1:15 하나님의 형상
바울은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형상은 헬라어 ‘에이콘’의 번역이다. 그 뜻은 likeness, image, form, appearance, statue 등이다. 루터는 Ebenbild로 번역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하나님의 현시’로 번역된다.
하나님은 불가시적 존재이다. 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분은 불가시적 현실성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더 현실적인 것이 무엇인가? 더 근본적으로 현재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이덱거-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무는 도대체 없는가? Seiende, nichts, Sein.
불교- 색즉공, 공즉색,
성서- 하나님은 미래에 존재하게 될 바로 그 존재이다.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출 3:14)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만물이 그리스도에게서, 그를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의 근거는 무엇인가? 만물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포함된다.
‘만물’이라는 단어가 16, 17, 18, 20절에 반복해서 나온다. 이 찬양이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사실이다. 그걸 우리가 얼마나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을까?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하다. 첫째, 이 찬양은 시와 같다. 사실적인 언어가 아니라 시적인 언어이다. 둘째, 그 안에 있는 현실성을 확보해야 한다.
1:18 교회의 머리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표현은 메타포(은유)이다. 그걸 직접 그려낼 수는 없다. 엡 1:21-23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머리와 몸의 메타포는 두 가지 의미이다.
1) 몸과 지체는 머리의 명령을 따른다. 오늘 이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2) 몸과 지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전 12:12 이하) 분열의 극치를 향하고 있는 오늘 한국교회에서 이런 유기적 일치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1:19 모든 충만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충만하게 거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베레 호모’(참된 인간)인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일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를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믿음이 가능하려면 일단 설득이 되어야 한다. 이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예수가 역사 내재적 존재인 반면에 하나님은 역사 초월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있다. 어떻게 역사 내재와 초월이 일치할 수 있는가?
1:20 십자가의 피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슨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자라고 했을까?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20a절은 다음과 같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는 곧 진정한 평화다. 여기서 ‘익명의 기독교인’ 개념이 가능하다.
1:20 화평을 이루사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궁금증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 세상에 평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세상은 폭력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미 하나님의 궁극적인 역사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가 일어났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평화이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평화를 위해서 살게 된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찬양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완성하는 행위가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창조와 완성 사이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주로 존재할 것이다.”(에두아르트 쉬바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