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mms://61.111.3.15/pwkvod/daoff/2009(2).mp3 |
---|
당분간 사랑채에 놓았다가 나중에는 동영강 강의로 옮길 예정입니다.
녹음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군요.
*아래는 강의 초안입니다.
제2강: 골로새 철학과의 투쟁
(골 2:8-23)
기독교 신앙은 늘 투쟁적이었다.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의 투쟁은 갈라디아서가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게 이상하다.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 그들은 왜 싸웠나? 무엇이 다른가? 싸울 만큼 다른가? 기독교 신앙은 관용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 안에 교회의 단일성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울은 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와 이단논쟁에 가까운 강도로 싸웠을까?
교부신학의 이단논쟁, 아다나시우스와 아리우스
구약의 예언자들 사이에 벌어진 싸움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그런 신학투쟁이었다.
필자의 설교비평은 일종의 진리투쟁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런 비판이 한국교회를 위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고 의아해한다.
2:1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
바울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우들을 염두에 두고 이 편지를 쓰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해서는 요한계시록 3:14-22절을 참조할 것.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교회였다.
2:2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바울은 찬양(골 1:15-20)을 끝낸 후 1:26, 27절에서도 이 ‘비밀’에 대해서 언급한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골로새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 자체가 비밀이다. 그것이 비밀인 이유는 구원의 역사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서 일어났다는 데에 있다.
2:3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이 담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게 근거가 있는 말인가? 무엇이 지혜이며 지식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2:4 교묘한 말
우리는 대개 세상의 지혜와 지식에 속을 때가 많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서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속지 말라고 말한다. 어떻게 속지 않을 수가 있을까? 무엇이 생명의 현실(reality of life)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골로새 철학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2:8 철학과 헛된 속임수
철학(philosophy)는 필로스와 소피아의 합성어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신학(theology)은 테오스와 로고스의 합성어이다. 하나님의 언어, 또는 하나님의 이성이라는 뜻이다. 철학은 그 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시대마다 지혜는 달랐기 때문에 어느 한 철학이 모든 시대를 다 지배할 수는 없다. 사실 자연과학도 역시 시대마다 달라진다.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경계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다. 세상의 초등학문은 어원적으로 ‘세상의 원소’를 가리킨다. 그것이 바로 골로새의 철학이다. 그들은 세상이 네 가지 원소고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물, 불, 공기, 흙이 그것이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이런 주장이 틀린 건 아니다. 우리는 죽으면 모두 원소로 해체된다. 그리고 순환한다. 원래 헬라 철학은 세계를 공간적인 차원에서 보고 그 안에서 모든 것들이 순환한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구약성서는 세상을 시간적인 차원에서 보고 모든 것들이 유일회적이라고 믿었다. 구약의 세계관에 뿌리를 둔 기독교 역시 이 세계가 순환이 아니라 종말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부활의 생명은 지난 삶으로 회복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다.
골로새 철학에 대한 설명을 Eduard Schweizer에게서 들어보자.(국제성서주석 40, 골로사이서, 144 이하) 필로에 따르면 인간 영혼은 승천할 때 네 개의 지상적 요소 각각에 그가 가진 것을 돌려준다고 한다. 인간이 숙명적인 ‘원소들의 순환’에 얽혀 있다는 뜻이다. 이를 넘어서려면 엄격한 금욕이 필요하다. 플루타르크는 골로새서 집필 시기의 직후에 원소들의 투쟁으로 규정되는 달 아래의 세계를 묘사했다. 영혼은 죽은 후 이 세계를 벗어나 먼저 달까지 승천한다. 그 영혼이 완전하게 순수하지 않으면 다시 원소로 떨어진다. 완전히 순화된 영혼들은 결국 에테르에까지, 지복으로 올라간다. 이들에게 구원은 육신의 쾌락을 완전히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초기 이단인 마르키온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런 모든 경향은 기원전 1세기의 ‘피타고라스학파’의 문헌으로 말미암는다. 우주는 4 원소로 생성되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신적이며 초월적인 원소는 에테르이다. 지상적인 원소의 세계는 제한적이다. 에테르와 완전히 대립해 있다. 인간은 신들에게, 영웅에게 경배를 드리고 정화의 목욕을 하며 성 관계가 없는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런 요소들이 골로새 2:16-23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피타고라스학파의 문헌에 나온다. 물론 골로새는 그것을 따르지 말라고 했다. 이런 피타고라스 철학과 골로새의 가르침은 위의 것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이 세상에 대한 관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는 세상을 이원론적인 차원에서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뤘다. 금욕을 삶의 원리로 삼지도 않는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다. 골로새 철학은 무조건 위의 것에만 몰두했다면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서의 삶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율법 철학과의 대화, 논쟁 등을 통해서 발전해왔다.(*신학단상 ‘창조와 세계’ 참조)
2:9 신성의 모든 충만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에 골로새 철학이 추구하는 신성이 충만하다.
2:12 세례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일치를 가리킨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운명을 건다는 신앙 고백적 징표이다. 그 세례는 성만찬에서 반복된다.(*신학단상 ‘세례’ 참조)
우주적 사건으로서의 세례
아래의 내용은 로마서 6장1-14절에 대한 필자의 주석으로 로마서 성경공부를 묶어낸 졸저 <법과 자유>(대구성서아카데미) 90-96쪽에 있다.
바울은 5장 끝 단락에서 은총이 죄를 능가하는 힘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돌입하게 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다. 자칫 바울의 주장을 오해하게 되면 죄와 은총의 역동적 긴장 관계가 이완되어서 단지 낙관적 은총론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5:20) 임하니까 무슨 죄를 지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 점을 이렇게 짚어주고 있다.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6:1)
아주 올바른 지적이다. 교회 안에서도 죄와 은총의 관계에 대해서 두 가지 극단적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죄의 숙명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죄의 낙관주의이다. 이 용어가 정확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개념은 분명하다. 즉 하나는 지나치게 죄의 힘에 억압당하는 쪽이며, 다른 하나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간과하는 쪽이다. 죄를 숙명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인간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손상당하며, 죄를 간과하게 되면 계몽주의에서 나타났듯이 인간과 그 역사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에 빠진다. 양측이 서로 상반된 개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거의 인간학적 토대에 서 있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기독교인이 가야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죄와 은총의 긴장 관계가, 또한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섭리 사이에서 작동하는 긴장 관계가 세례 사건에서 해명되고 있다.
세례는 죽음이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교리공부와 문답을 한다. 그런 공부를 통해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죽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런 정도의 교리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하나도 없겠지만 그것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런 말을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세례교육은 좀 더 철저하게 실시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최소한 6개월 동안 영세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서너 번 정도의 교육으로 끝이다. 형식적으로 6개월이라는 기간을 채우는 것으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개신교의 세계 교육은 준비가 소홀하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대충 세례를 받고 성수주일과 십일조나 잘 드리는 신자가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례는 죽음이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바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3절) 여기서의 죽음이 육체적인 게 아니라고 한다면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차원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가?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는다고 한다면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세례 전이나 후나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 지금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이 흐려져서 그렇지 초기 시대에는 실제로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그들도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았고 지금 우리도 역시 그렇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은 모습 그대로의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완전하게 살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대답으로, 세례를 받았는데도 죄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세례를 아무런 준비 없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교부 시대에는 세례를 죽을 때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순수한 것을 추려내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준비가 많았든지, 불충분했든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 이후에도 죄를 짓거나 시행착오를 많이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죽음은 죄에서의 해방이다
-죽음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율법은 죄이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상한 말을 한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7절) 죽은 사람은 그 이전의 모든 계약과 상관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의 근거이기도 한 율법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타당하다는 점에서 죽음은 곧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며, 따라서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말은 곧 죽음은 모든 율법적 규범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툭하면 자살을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보면 그 사람이 죽으면 모든 채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하고 죄를 확증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곧 죄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문제를 지나치게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같지만, 이런 해명은 보다 심층적인 인간과 세례 이해를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앞에서 바울은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고 과감하게 주장한 바 있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식인종들이 인간의 살을 먹는 행위는 죄가 아닐지도 모른다.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죽은 승려들의 시체를 토막을 내어 독수리 먹이로 준다고 하는데, 이런 행동이 그들에게는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행동도 역시 죄가 아니다. 법은 그 법이 인식되는 범주에서만 타당한 제도이기 때문에 죽음은 근본적으로 죄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은 기독교가 이해하는 생명은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단절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한다는 사실이다. 그럴 경우에만 바울의 이 말은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법과 종교적인 율법으로 규정되어야 할 이 땅의 삶에 한정되지 않는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런 논리는 허구이며 순수관념에 떨어진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절대적인 세계와 이 세상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늘 바울이 세례 사건을 해명하면서 전제하고 있는 이 절대세계의 논리를 이것 자체로만 생각하면 자칫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관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오늘의 현실적 삶을 외면하거나 간과해도 좋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늘 여기서의 삶이 가장 명확하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이것 자체로만이 아니라 이것이 근거하고 있는 어떤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제 율법과 상관없는 세계로 들어갔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죽은 자는 죄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우리가 죽은 게 아니라 예수가 죽었는데도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이런 죽음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직접 죽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죽은 것과 똑같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다
-신비적 결합
세례를 받은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점을 바울은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3,5절). 이 문제도 우리가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나? 전혀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는데 말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두 인격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죽음이라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 말이 옳다면 세례가 바로 죽음이라는 바울의 진술도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설명하기 힘들면 영적인 차원이라고 대답하지만 그 영적이라는 사태가 너무나 다르게, 또는 이질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대답은 충분하지 않다. 만약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한다면 변죽만 건드리지 말고 정곡을 찌르는 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우리가 실제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아니지만 그가 우리를 그렇게 인정하신다는 점에서 하나다. 이는 흡사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완전히 의로워진 게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받을 뿐이라는 사실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길은 전혀 없다. 이 일은 단지 예수에게서만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이니셔티브는 바로 그분에게만 있다.
인격적으로 다른 실체와 하나 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여기 어머니와 딸이 있다. 이 딸은 신용카드를 잘못 사용하다가 신용불량자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이미 예측한 어머니는 딸이 모르게 자기 통장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조치를 끝내두었다. 이제 두 사람의 금융 신용은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 딸이 자기가 신용불량자가 될까봐 매일 불안하게 살아간다면 이보다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세례는 새 생명의 사건이다
-생명-새생명-변화된 생명-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사실 세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더불어 죽었다는 사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는 사건이다.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세례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8절에도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습니다.”
결국 기독교인은 세례를 통해서 새 생명, 즉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리라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대로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만약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이 우리에게 일어나리라는 사실도 역시 분명하다. 이런 희망이 우리에게 명백하다면 당연히 지금의 삶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새 생명, 또는 부활에 대해서 자주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하지만 그 세계를 깨치지는 못하고 살아간다. 즉 새 생명이 정보의 차원에서는 우리와 연관되지만 실제 삶의 차원에서는 거의 무능력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을 피상적으로만 생각함으로써 실제적인 삶에서는 자기들의 작은 경험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이들의 인식은 닫혀 있다. 자신의 생물학적 능력을 확대시키거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나가는 것만이 곧 삶의 목표이며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어른들의 경우처럼 수평으로 그어진 선 중간에 반원의 곡선이 놓인 그림을 밀짚모자로만 생각하지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 구렁이로는 절대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과 비슷하다.
저는 여기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생명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층적이고 역동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그런 깊이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인생이 바로 오늘 우리의 삶이다. 이런 점에서 한 생명은 온 세상보다 귀하며, 아흔 아홉 마리의 양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역시 귀중하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 불행을 당한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새로운 생명의 근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불행과 하나님의 존재를 동시에 만족시켜줄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이 새 생명은 종말론적으로, 미래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세계일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선취(先取)된 사건이기도 하다. 미래가 현재 속으로 앞당겨졌다는 말이다. 이런 일이 도대체 가능할까? 현재는 현재이고, 미래는 미래일 뿐이지 어떻게 미래가 현재일 수 있나? 시간을 늘 빛의 속도에 의한 기계적인 진행으로 본다면 현재와 미래가 결합될 수 없지만 시간과 역사가 늘 그렇게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생명의 선취가 가능하다.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 미래를 향한 희망과 그것의 선취라는 긴장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좀더 분명하게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단지 미래의 희망에만 빠져 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현재에 집착하지 않는 그런 긴장관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자기 삶의 현재와 미래를 적당하게 균형을 맞추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숨어 있으면서, 동시에 계시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영적인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2:14 법조문으로 쓴 증서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
2:16-19 먹고 마시는 것, 천사 숭배
2:20-23 규례, 사람의 명령
21절의 내용은 육체적인 쾌락을 가리킨다. 골로새 철학은 금욕을 세상의 원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그런 금욕적인 삶을 옹호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쾌락주의도 아니고 금욕주의도 아니다. 세속의 삶을 절대화하지도 않지만 부정하지도 않는다. 일상의 거룩함을 경험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2:23 유익이 없느니라
골로새 철학이 주장하는 금욕과 이원론적 세계관은 몸을 괴롭게 할 뿐이지 육체의 정욕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금욕적인 삶은 이미 유대교에서 율법의 준수로 실행된 것들이다. 물론 기독교 전통에서도 이런 금욕적인 삶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몸과 세상을 악하다고 부정하는 건 아니다.
결론-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본문으로 한 판넨베르크의 설교 “하나님의 영이시다”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진지하고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 시대는 이것을 망각해버릴 위험에 봉착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일상이 세속화되면서, 소비적 삶의 행태가 압박해 들어오면서 질식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존에서 비상한 것들과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의 차원은 정말 간과되면 안 됩니다. 이런 차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맴돌 듯이 살아가는 현실성에서 정말로 소유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시각을 열어줍니다. 일상적인 삶의 한 중심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들을 뛰어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생각들이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구역질과 무료함,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초조감이 우리를 가득 채워버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사회적 삶에서도 불안이 엄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