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수련회특강(4)

Views 1388 Votes 0 2009.08.24 16:02:15
관련링크 : mms://61.111.3.15/pwkvod/daoff/2009(4).mp3 
2009년 8월21일-23일에 있었던 수련회 강의 엠피쓰리를 올립니다.
당분간 사랑채에 놓았다가 나중에는 동영강 강의 메뉴로 옮길 예정입니다.
녹음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군요.

*아래는 강의 초안입니다. 


제4강: 영적인 삶

(골 3:12-17)



본문은 이제 기독교인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권면한다. 우리의 믿음이 삶의 능력으로 드러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다. 여기서 삶의 능력을 곧장 행동주의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오히려 무위이무불위(無爲以無不爲)가 더 큰 능력이다.(*신학단상 ‘영적인 사람’ 참조) 믿음과 삶의 일치가 곧 영성이다. 이게 잘 되지 않는 이유는 결국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삶의 세계에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믿음의 세계는 삶의 현실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띠며, 삶의 현실은 믿음의 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믿음은 삶의 존재론적 근거이고, 삶은 믿음의 인식론적 토대이다. 


3:12 하나님이 택하사

성서는 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을까? 이 선택사상이 교회 안과 밖에서 오해를 받는다. 교회 안에서는 선택사상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편애로 받아들여서 구원 이기주의로 몰고 간다. 그것의 극단적인 경우가 이중예정, 또는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이다. 교회 밖에서는 이것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의 증거로 삼는다. 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진노의 신, 징벌의 신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이런 신 표상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심리 현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모두 잘못이다. 하나님의 선택 사상은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리킨다. 둘째,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와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성서는 간혹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인간을 질그릇으로 비유한다. 질그릇은 토기장이에게 불평을 할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을 숙명주의로 몰아가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는 적재적소에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 억울하게 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아름답다. 심지어 악까지도 역시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섭리를 파괴하지 못한다. 


3:12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램 참음

바울은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다섯 가지로 규정한다. 이런 말은 교회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으며, 누구나 이렇게 살고 싶어 한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있다.

1) 이런 삶의 태도는 쉽지 않다.

2)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특성들이다.

이런 삶의 노력이 필요한가? 아니면 믿음으로 이런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이는 곧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신학단상 ‘칭의와 성화’ 참조) 


3:14 온전하게 매는 띠-사랑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우리의 삶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말인가?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론이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고전 13장이 묘사하고 있는 사랑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신적 계시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사랑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치 음악의 존재론적 힘에 사로잡힌 작곡가가 음악을 작곡하듯이 사랑의 힘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사랑을 행할 수 있다. 이런 사랑에 의해서만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와 삶이 흔들리지 않는 토대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롬 13:8-10 절 참조. 


3:15 그리스도의 평강

‘에이레네 투 크리스투’가 우리를 주장하게 하려면 그리스도 사건이 우리 전 존재를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놀이에 취하듯이 말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가장 낮은 자리와 가장 높은 자리의 변증법적 긴장관계 아래 놓여 있다. 십자가는 가장 낮은 자리이며, 부활은 가장 높은 자리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 들어간 사람의 영혼은 세상의 것들로 요동하지 않으며, 가장 높은 자리에 들어간 사람도 역시 그렇다. 그게 참된 안식이다. 이런 안식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런 평화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 ‘감사’는 16절과 17절에서 반복된다. 


3:16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은 교회 공동체에서 예배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한다. 예배의 내용이 16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 가르침, 권면, 시, 찬송, 신령한 노래, 찬양이 그런 요소들이다. 정리하면 1) 말씀, 2) 권면, 3) 찬양이다. 성만찬은 보이는 말씀으로 자리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예배공동체’이다. 특히 주일예배공동체이다. 주일은 부활의 기쁨이고, 예배는 감사와 찬양이고, 공동체는 일치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는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이다. 예배에 종말과 메시아 개념이 담겨야 한다. 이런 주일예배공동체 개념이 세상 전체에 확산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주일예배 공동체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당연히 ‘주일 예배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곧 예배드리러 다니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다만 들은풍월뿐이고, 실제로는 예배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놓치고 있다. 예배가 청중들의 종교적 만족감이나 볼거리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각종 행사의 과부하에 걸려 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보다는 교회의 여러 행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오늘 한국교회의 개혁은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주일 예배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게 시급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게 무슨 말인지 세 단어의 개념을 따라가면서 살펴보자.

(1) 주일

원래 예배는 주일인 일요일에 드리는 주일공동예배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경우로 본다면 안식일인 토요일이다. 물론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들과 똑같이 안식일을 지키다가 로마 문화권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지키기 시작했다. 안식교회는 지금도 토요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지킨다.

안식일과 주일의 공통점과 차이점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생명의 잔치를 벌인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명의 잔치를 벌이신 하나님의 초청에 응한다는 것이다. 잔치에 와서도 돈을 벌 생각을 하거나 일 할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 날 우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해방과 자유를 경험하며, 그것을 통해서 생명을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은 바로 복된 소식, 즉 복음이다.

오늘날 성수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주일이 오히려 억압과 속박의 날로 자리를 잡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교회에 열정을 갖고 있는 신자들은 주일 하루 종일 많은 일을 요구받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스트레스도 제법 받는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각종 모임과 사건에 휘말린다. 쉼이 없다. 그렇게 종일 시달려도 그게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어머니가 여러 자식들을 위해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한 시도 쉬지 않으면서 일을 해도 행복한 것처럼 말이다.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쉼’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개는 자신이 그렇게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이건 임상 치료가 필요한 종교적 마조히즘 현상에 가깝다. 

(2) 예배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그냥 모여서 밥 먹고, 수다 떨고, 친교 나누는 것으로 충분히 쉴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예배인가? 안식, 쉼, 자유, 해방, 생명 등등, 이런 것과 예배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지 못하는가? 우리의 평소 삶 자체가 예배로 드려지는 게 바람직한 게 아닌가?

우리가 주일에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가장 종교적 의미가 깊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해방과 자유과 생명을 종교적 상징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예배이다. 그 내적인 원리는 계시와 응답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계시하고, 인간은 그것을 찬양한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우주 역사가 재현되는 축소판과 같다. 창조와 종말이 계시되고, 우리는 거기서 생명의 진수를 경험한다. 전체 인류 역사와 우주 역사를 종교적 상징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예배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인 계시와 응답을 통한 우주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이를 어찌 마다하거나 소홀할 수 있으랴?

이런 점에서 예배는 예전적이어야 한다. 자유롭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전승되어온 예전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다. 예전은 우리 개신교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라거나 너무 형식적이어서 성령의 감동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독교 영성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가 예전에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다. 첫째, 예전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계시와 응답이라는 신학적 근거에서 볼 때 가장 모범적인 예배가 갖추어야 할 틀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합창단이 노래를 부를 때 기분이 좋다고 해서 악보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 합창단원은 오히려 자기감정을 억제하고 악보에 충실함으로써 원래 작곡자가 경험했던 그 음악의 세계를 바르게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전예배는 이처럼 개인들의 종교적 열정보다는 2천년 기독교 역사의 영성에 의존하는 예배이다.

둘째, 예전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현재의 신앙적 실존에 떨어지지 않고 2천년의 기독교의 역사, 그리고 이후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을 함께 읽는다는 것은 이 신앙고백에 참여했던 지난 역사의 모든 기독교인들과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3) 공동체

예배를 집에서 혼자 드려도 큰 문제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 문제는 여기서 길게 말하지 않겠다. 혼자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틴 루터의 가르침처럼 우리는 모두 제사장들이기에 얼마든지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에 예배도 더불어서 드릴 때 바른 예배가 될 수 있다. 만약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면 어떻게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말씀을 전달받을 수 있겠는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예배는 고도의 영적 묵상이나 기도와는 다르다. 예배는 더불어서 궁극적인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의 계시를 듣고 거기에 공동으로 응답하는 사건이다. 이런 말이 너무 원론적이어서 실질적으로 들리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공동의 예배에 실제로 참여한 분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 말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더불어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말씀을 읽고, 그 설명을 전달받는다. 더불어서 예배드리는 그 공간 안에 소리, 글자, 물질, 색깔, 느낌 등등이 살아 있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놀라운 영적 경험이다. 이런 것을 혼자서는 경험할 수 없다. 하나의 공간에서 ‘너’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구원과 완성의 소리를 듣고 찬양한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 경험이다.

교회의 본질은 바로 이런 ‘주일 예배 공동체’에 놓여 있다. 그 이외의 일들은 오직 이 한 가지 사실을 위해서만 요청된다. 이런 기독교 영성의 중심을 모르기에 우리는 그 이외의 것들을 찾느라 우리의 삶을 소진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제라도 물을 찾는 목마른 사람처럼 우리 모두 주일예배에 우리의 영성을 집중시켜보자.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란 무엇인가?

이런 삶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영성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1) 종말

2) 메시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교회 개념

1) 단일성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한다면 이들은 당연히 그 내부에 단일성을 전제한다.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그 물건을 많이 팔아서 돈을 벌면 그만이지만 교회는 예수가 온 세계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선포하는 이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서로 배타적으로 경쟁할 수 없다. 기독교의 2천년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도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았으며, 그 분의 이름으로 성만찬에 참여했다. 구원론적으로 하나의 근원을 갖고 있다면 이들의 일치와 친교는 분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한국 교회를 본다면 어처구니가 없다.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현상이 한국 교회에 나타나고 있는데, 곧 백 개 이상으로 분열된 교파 현상이 그것이다. 세계에서 예수를 가장 열심히 믿는다는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분열과 분파 작용을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물론 이런 교파 분열로 인해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분열의 역사가 합리화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교회의 단일성은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매사에 만장일치, 또는 획일화라고 할 수는 없다. 즉 “자유 속에서의 일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비록 한국 교회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지만 이런 기회를 좋은 쪽으로 살려나갈 수 있어야 한다. 즉 각각의 교파가 자신의 특색을 살린 가운데 일치 정신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다양성 가운데서의 일치인 셈이다. 이러한 교회의 단일성과 일치는 분열된 이 세계 가운데서 진정한 일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징표가 될 수 있다. 우리 한국 교회는 그럴 가능성과 의지가 있을까?


2) 보편성

영어의 카톨리시티를 번역한 보편성은 원래 지역적인 교회에 대해서 대교구에 있는 주교회, 감독교회를 의미했다. 말하자면 지역교회도 역시 온전한 교회이고 그것을 감독, 관리하는 노회나 총회까지를 포함한 모든 교회가 온전한 교회라는 뜻이다. 따라서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일치와 연관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단일성이 교회의 수렴적인(intentiv) 보편성을 의미한다면,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확장적인(extensiv) 일치를 의미한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 카톨리시티가 로마 가톨릭교회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는 탓에 개신교회는 그것을 “일반적인”, 혹은 “기독교적인”이라는 말로 대치했다.

이런 교회의 보편성에 근거해서 한국교회의 모습을 반성해보자. 앞서 교회의 단일성에서도 언급한 문제이지만 기독교 교회는 구체적인 지역 교회만이 아니라 그런 교회들의 연대와 일치를 통한 전체로서의 교회라는 차원도 역시 중요한데, 우리는 이런 요소를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특히 개신교회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예컨대 교회 개척문제만 해도 대개는 개교회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실천되고 있지 전체 교회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 재정이 넘쳐나는 교회가 있는 반면에 여전히 미자립 교회가 30%에 이른다는 말은 교회의 보편적 지평이 말살되고 있다는 뜻과 다른 게 아니다.  


3) 거룩성

초기 기독교로부터 예수 믿는 자를 성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런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다. 성도를 뜻하는 “하기오스”라는 단어는 거룩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따로 구별된”이라는 뜻도 있다.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거룩한 힘을 체험한다는 것과 똑같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 들려온 음성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것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소리였다. 신약성서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성도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거룩한 자들이며, 구별된 자들인가? 만약 우리가 매 주일 교회에 나오고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드리고, 이러한 일정한 종교의식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라든지, 구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너무 축소시키는 일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이 세상적인 가치와 근본적으로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이 이룬 공동체라는 사실에서 인정된다. 말하자면 자기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설정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의 굳어진 질서를 변호하고 고착화시키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변혁과 개혁을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가난 속의 거룩함”이라고 표현했다.

교회의 거룩성이 왜곡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거룩성을 확보하려는 ‘세계 도피적 경건성’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 한 가운데서 영속적 기구로 자리함으로써 거룩성을 확보하려는 ‘잠정성의 망각’이 그것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그 안에서의 영속적 기구가 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 앞에서 모든 것의 잠정성을 깨닫고, 그 깨달음이 사랑의 창조적 동인과 연결되는 곳에 확보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4) 사도성

기독교 교회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 본다고 하더라도 순전히 사도적 전승에 의존해 있다. 예수가 직접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으며, 그의 가르침과 실천이 오로지 사도들에 의해서 전승되어 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직접 경험하는 게 아니라 사도들의 경험을 2차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는 온전히 사도적이라는 말이다. 쉴링크는 이렇게 말했다. “사도적인 증언 없이는 그리스도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며, 다만 이런 사도적 증언에 토대해서만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식된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교회의 세 가지 특징은 이 사도직에서만 명백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 사도직 문제에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첫째, 교회의 복음과 가르침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람, 즉 첫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길은 현대의 여러 사상에 우리가 얼마나 깊숙이 들어가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사도의 가르침, 특히 그들이 경험한 십자가와 부활과 얼마나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둘째, 교회는 사도의 선교적인 사명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가 조직으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온전히 사도적 사명에 천착하는 그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본질로부터 이탈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사도적 선교 사명에 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사도의 선교적 사명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부활절 사건에 의해서 종말론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3:17 주 예수의 이름

영적인 삶의 결론은 두 가지이다. 첫째, 기독교인의 모든 행위는 ‘주 예수의 이름’ 아래에 놓인다. 둘째,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모두 주 예수의 이름 아래 놓인다는 게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 오해가 가능하다. 아멘, 할렐루야를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생명의 깊이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인의 윤리가 필요하다. 바울의 편지에 이런 윤리적 요청이 따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골 3:18-25절은 몇 가지 예를 들고 있다. 부부, 부모와 자식, 종과 주인의 관계가 그것이다. 그들과 전혀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윤리는 우리가 책임지고 결정해야 한다. 그것의 기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감사한 삶에 대해서는 더 긴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잘 알고 있다. ‘그를 힘입어’라고 한다. 주 예수를 힘입을 때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걸 오해할 때도 있다. 자기 합리화가 그것이다. 이솝 우화에서 포도를 따먹지 못하는 여우가 “저 포도는 시어서 먹지 못할 거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감사는 실제적으로 감사할만한 이유를 알고 경험할 때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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