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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바울서신에서 묵시문학적 표현들을 꺼집어 낼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정확한지 모르지만 바울도 유대교 율법주의자로서 당연히 묵시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이 되어서요. 그렇지만 유대교 묵시사상을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하기보다는 기독론적으로 극복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 내용이 유대교적이든, 기독교적이든 간에 바울서신에서 묵시문학적 표현들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몇 가지 만이라도 ......
정확한지 모르지만 바울도 유대교 율법주의자로서 당연히 묵시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이 되어서요. 그렇지만 유대교 묵시사상을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하기보다는 기독론적으로 극복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 내용이 유대교적이든, 기독교적이든 간에 바울서신에서 묵시문학적 표현들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몇 가지 만이라도 ......
2007.11.25 21:47:58
목사님! 답변 감사하구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염치불구하고
묵시문학과 관련하여 한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묵시문학의 세계관은 이 세상에서의 삶 전체가 악하고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을만큼 타락했다고 보는 입장에서
현재의 악한 시대와 도래할 선한 세상을 극단적 대립으로 보는
이원론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닐카의 주장에 따르면,
신약성서는 철저히 대립되는 현 시대와 오는 시대에 관한
묵시문학적인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저 역시 당근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서 상당히 변형된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하네요.
바울의 입장은 악한 시대가 여전히 계속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선한 시대의 도래가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논조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약성서 가운데 마가복음 13장에서
전쟁,기근,가정불화,배교 등과 같은 마지막 악한 시대의
묵시문학적인 요소들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제가 좀 헷갈립니다.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마가 정도되면
충분히 기독론의 틀 안에서 종말론적 진술을 할 능력이 있었을텐데
왜 하필이면 유대교적인 묵시문학적 표상들을 빌려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비록 마가복음의 독자들의 처지가 핍박과 환난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독론적 종말론으로 충분히 위로하고 격려할 수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이런 의심 자체가 저의 영적능력이 딸린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요.
환난에 처한 신자들을 위로하는데는 기독론적 종말론보다는
유대교적 묵시문학적 표상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유대교와 기독교가 그렇게 선명하게 구분돼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우연의 결과인가요?
신약성서 안에 기독교적 종말론과 유대교적 묵시사상이 공존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유대교적 묵시사상 혹은 종말론과 기독교적 묵시사상이나 종말론,
이 두 사싱은 분명이 구분되면서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거라는 추측은 해 보는데
제 고민의 한계가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 깊은 질문은 드릴 수 없습니다.
질문을 요약하겠습니다.
신약성서는 이원론적 묵시문학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그닐카의 주장과
복음서 중에 마가복음 13장의 묵시문학적 표상들의 공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학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인 사유의 틀 안에서
성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준비하시느라 무척 바쁘실텐데
천천히 생각하시면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께 늘 감사합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염치불구하고
묵시문학과 관련하여 한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묵시문학의 세계관은 이 세상에서의 삶 전체가 악하고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을만큼 타락했다고 보는 입장에서
현재의 악한 시대와 도래할 선한 세상을 극단적 대립으로 보는
이원론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닐카의 주장에 따르면,
신약성서는 철저히 대립되는 현 시대와 오는 시대에 관한
묵시문학적인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저 역시 당근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서 상당히 변형된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하네요.
바울의 입장은 악한 시대가 여전히 계속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선한 시대의 도래가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논조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약성서 가운데 마가복음 13장에서
전쟁,기근,가정불화,배교 등과 같은 마지막 악한 시대의
묵시문학적인 요소들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제가 좀 헷갈립니다.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마가 정도되면
충분히 기독론의 틀 안에서 종말론적 진술을 할 능력이 있었을텐데
왜 하필이면 유대교적인 묵시문학적 표상들을 빌려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비록 마가복음의 독자들의 처지가 핍박과 환난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독론적 종말론으로 충분히 위로하고 격려할 수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이런 의심 자체가 저의 영적능력이 딸린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요.
환난에 처한 신자들을 위로하는데는 기독론적 종말론보다는
유대교적 묵시문학적 표상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유대교와 기독교가 그렇게 선명하게 구분돼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우연의 결과인가요?
신약성서 안에 기독교적 종말론과 유대교적 묵시사상이 공존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유대교적 묵시사상 혹은 종말론과 기독교적 묵시사상이나 종말론,
이 두 사싱은 분명이 구분되면서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거라는 추측은 해 보는데
제 고민의 한계가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 깊은 질문은 드릴 수 없습니다.
질문을 요약하겠습니다.
신약성서는 이원론적 묵시문학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그닐카의 주장과
복음서 중에 마가복음 13장의 묵시문학적 표상들의 공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학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인 사유의 틀 안에서
성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준비하시느라 무척 바쁘실텐데
천천히 생각하시면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께 늘 감사합니다.
2007.11.25 22:23:04
그닐카의 책을 읽었을 정도라면
나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이미 많은 걸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학적인 사유 안으로 들어갔단은 뜻이니까요.
아마 앞으로도 길을 잘 찾아갈 거라고 봅니다.
그닐카가 말한 내용을 잘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약성서의 종말론이 유대교의 묵시사상과 똑같지 않다고 했겠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혹은 영향을 받은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겠지요.
알로 님에게 문제는
이런 신학개념의 관계를 너무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구분하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묵시사상과 종말론을 칼로 자를 수는 없다는 뜻이에요.
서로 겹쳐 있고,
섞여 있습니다.
묵시사상도 수백년 동안 연연히 발전해온 사상이고,
그걸 샘의 근원으로 삼아서
기독교 종말론도 그렇게 발전해왔지요.
묵시사상의 어느 시점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종말론이 시작한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등에
묵시사상적 진술들이 포함되는 건 당연하지요.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게 아닌 것처럼
종말론과 묵시사상도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거꾸로 기독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것처럼
종말론이 묵시사상과 완전히 다른 점도 있구요.
왜 기독론적 종말론으로 청중들을 위로하지
묵시사상적 진술로 하느냐, 하고 질문했지요?
오늘 기독교가 구약으로 설교하는 것도 비슷한 거에요.
예수를 부정한 유대인들의 성서를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는 게
논리적으로 모순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 사이에 무엇이 개입해 있을까요?
대답이 됐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
좋은 질문, 감사.
행복한 주일밤.
나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이미 많은 걸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학적인 사유 안으로 들어갔단은 뜻이니까요.
아마 앞으로도 길을 잘 찾아갈 거라고 봅니다.
그닐카가 말한 내용을 잘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약성서의 종말론이 유대교의 묵시사상과 똑같지 않다고 했겠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혹은 영향을 받은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겠지요.
알로 님에게 문제는
이런 신학개념의 관계를 너무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구분하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묵시사상과 종말론을 칼로 자를 수는 없다는 뜻이에요.
서로 겹쳐 있고,
섞여 있습니다.
묵시사상도 수백년 동안 연연히 발전해온 사상이고,
그걸 샘의 근원으로 삼아서
기독교 종말론도 그렇게 발전해왔지요.
묵시사상의 어느 시점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종말론이 시작한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등에
묵시사상적 진술들이 포함되는 건 당연하지요.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게 아닌 것처럼
종말론과 묵시사상도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거꾸로 기독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것처럼
종말론이 묵시사상과 완전히 다른 점도 있구요.
왜 기독론적 종말론으로 청중들을 위로하지
묵시사상적 진술로 하느냐, 하고 질문했지요?
오늘 기독교가 구약으로 설교하는 것도 비슷한 거에요.
예수를 부정한 유대인들의 성서를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는 게
논리적으로 모순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 사이에 무엇이 개입해 있을까요?
대답이 됐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
좋은 질문, 감사.
행복한 주일밤.
바울서신과 묵시상이라...
신학석사 논문 테마군요.
바울이 묵시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당연한 말이겠지요.
기독교의 종말론 자체가 바로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거든요.
예수님에게도 거기서 배운 게 있으실 거구요.
바울은 빌립보에서 우리의 시만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했으며,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장에서 질적인 변화를 말했고,
데살로니까전서 4,5장에서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소리, 주의 날 등등을 언급했는데요.
그게 다 묵시사상과 연관된 진술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