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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s 517
(혹시 모르고 지나치셨나 싶어 다시 질문을 올립니다)
정용섭목사님!
인사가 늦었네요.
새해에도 강건하시고
샘터교회에 이전보다 더 좋은일, 신바람 나는 일이 많이 생기길 기도하겠습니다.
모든 다비안들에게도...
얼마전에 동영상으로 어떤 목사님의 설교(히브리서 5장과 6장) 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위의 본문으로 성도들에게 기독교의 초보적인 가르침,
예를 들어, 죽은행실을 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으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버릴 것을 말씀하시면서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더군요.
사실 위에서 말한 초보의 도리도 기독교 신앙에서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초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 한국교회안에는 위의 초보적인 가르침조차 제대로 돼있지 않은 듯 하다는
느낌이 들때가 많습니다.
초기기독교의 상황을 제가 정확하게 모르지만
아쉬운 점은 그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초보의 도를 버리라고만 하지
정작 성숙한 신앙이 무엇인지 길을 가르쳐 주지 않더군요.
어쩌면 그 목사님도 초보의 도를 버려야 한다는 건 알지만
성숙한 신앙이 무엇인지 설교자조차도 잘 모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히브리서 5장과 6장에서 말하는 성숙한 신앙(완전한 데 나아가는)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성숙한 신앙이란게 배교와 관련있기도 한것 같은데
잘 모르겠군요.
정용섭목사님!
인사가 늦었네요.
새해에도 강건하시고
샘터교회에 이전보다 더 좋은일, 신바람 나는 일이 많이 생기길 기도하겠습니다.
모든 다비안들에게도...
얼마전에 동영상으로 어떤 목사님의 설교(히브리서 5장과 6장) 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위의 본문으로 성도들에게 기독교의 초보적인 가르침,
예를 들어, 죽은행실을 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으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버릴 것을 말씀하시면서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더군요.
사실 위에서 말한 초보의 도리도 기독교 신앙에서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초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 한국교회안에는 위의 초보적인 가르침조차 제대로 돼있지 않은 듯 하다는
느낌이 들때가 많습니다.
초기기독교의 상황을 제가 정확하게 모르지만
아쉬운 점은 그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초보의 도를 버리라고만 하지
정작 성숙한 신앙이 무엇인지 길을 가르쳐 주지 않더군요.
어쩌면 그 목사님도 초보의 도를 버려야 한다는 건 알지만
성숙한 신앙이 무엇인지 설교자조차도 잘 모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히브리서 5장과 6장에서 말하는 성숙한 신앙(완전한 데 나아가는)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성숙한 신앙이란게 배교와 관련있기도 한것 같은데
잘 모르겠군요.
2008.01.05 01:41:36
정목사님 답변에 동의하면서 그냥 제맘대로 좀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초보적인 가르침이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기본이면서도
본질보다는 그 형식의 설명에 그치기 쉬운 신앙 원리 교육이 아닐까요.
마치 새신자/기초 성경공부 등이 신앙의 핵심인
구원, 회개, 성화, 부활, 심판 등을 가르치지만 단순한 원리교육에
그치기 쉽고 그 안에 담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등의 본질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이 보이네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려면 그 원리를 이해하거나 외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 속에 담긴 하나님과 그 은총을 깨닫고 오늘 이 자리에서 나와 공동체, 세계를 위해
그 하나님의 본질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계속해서 고민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때론 본질인 것처럼 보이는 신앙의 형식을 넘어서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겠고
이상이 아닌 내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의 본질이 무언가 곱씹어야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 매일묵상 말씀대로 도그마가 도그마주의로 변질되지 않도록 말이죠.
그렇지만 홍시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그리고 히브리서 5:12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한 성숙한 신앙으로 가기는 커녕 말씀의 초보원리도 다시 가르쳐야 할 형편인
경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편이 된 상황이
원리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형식에 집착하거나 본질에만 집중한답시고 삶의 자리를 외면하여
본인과 공동체를 어렵게 한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숙한 신앙의 문제를 다룬 고린도전서의 교훈이 오버랩되네요.
이러한 본질을 찾아가는 신앙의 여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다비아가 참 귀하다는 생각입니다.
초보적인 가르침이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기본이면서도
본질보다는 그 형식의 설명에 그치기 쉬운 신앙 원리 교육이 아닐까요.
마치 새신자/기초 성경공부 등이 신앙의 핵심인
구원, 회개, 성화, 부활, 심판 등을 가르치지만 단순한 원리교육에
그치기 쉽고 그 안에 담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등의 본질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이 보이네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려면 그 원리를 이해하거나 외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 속에 담긴 하나님과 그 은총을 깨닫고 오늘 이 자리에서 나와 공동체, 세계를 위해
그 하나님의 본질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계속해서 고민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때론 본질인 것처럼 보이는 신앙의 형식을 넘어서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겠고
이상이 아닌 내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의 본질이 무언가 곱씹어야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 매일묵상 말씀대로 도그마가 도그마주의로 변질되지 않도록 말이죠.
그렇지만 홍시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그리고 히브리서 5:12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한 성숙한 신앙으로 가기는 커녕 말씀의 초보원리도 다시 가르쳐야 할 형편인
경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편이 된 상황이
원리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형식에 집착하거나 본질에만 집중한답시고 삶의 자리를 외면하여
본인과 공동체를 어렵게 한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숙한 신앙의 문제를 다룬 고린도전서의 교훈이 오버랩되네요.
이러한 본질을 찾아가는 신앙의 여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다비아가 참 귀하다는 생각입니다.
히브리서는 참 어려운 성서에요.
위 질문은 신약학자가 대답해야하는데요.
성서주석을 본다고 해서 대답을 찾을 수도 없을 겁니다.
일종의 난해구절에 속하니까요.
그 당시 히브리서 기자가 놓였던 독특한 '삶의 자리'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으면 답을 찾기 힘들고,
자칫하면 오답을 찾을 수도 있어요.
제가 마틴루터 성경의 난외주를 보고 생각한 건데,
다음과 같이 보는 게 옳지 않을는지요.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이미 기독교의 근본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모두 신학교 공부를 한 사람들 정도가 되었겠지요.
부활, 심판 등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신앙의 삶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는 게 아닐는지요.
이해와 인식에 머무러서 삶이 따라오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신앙에 걸맞은 삶을 요구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초보라는 건 유치하다는 것보다는
토대라고 보아야 옳습니다.
성숙한 신앙이 무엇인지 물었지요?
신앙적 인식과 삶의 일치이겠지요.
요즘의 언어로 말하면 영성이겠지요.,
신학적 지식이 살아나려면
영의 리얼리티를 경험해야 하잖아요.
사과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말고
실제로 먹어야 하는 것처럼이요.
내 설명이 시원치 않았군요.
좋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