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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s 517
며칠 동안 "칼바르트의 신학"(김명용 저)을 읽으면서(아직 완독은 못했음) 생각나는게 있어서 이 방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칼바르트에 따르면, 성서는 인간의 기록물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결점들이 드러나지만 그것 때문에 성서를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기록한 문서라고 규정하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인지 바르트는 성서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성서를 한낱 신체험 내지 종교적 체험의 문서로 규정하던 19세기 자유주의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더군요. 또 바르트가 성서의 역사비평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과 동시에 그러면서도 역사비평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부분에서는 신학자로서 겸손을 배울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바르트가 분명히 성서의 역사비평을 인정하였음에도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성서이해가 신체험, 또는 종교체험의 문서에 놓여있다는 비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정목사님의 글에서, 일례로 복음서는 제자들의 예수부활사건을 체험한 이후에 쓰여진 기록물이라는 말씀을 자주 언급하셨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성서이해 또는 성서관이 바르트가 비판하는 신체험적 성서관이나 종교적 체험의 문서로 보는 근거가 되는 것인지요?바르트가 말하는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이, 현재 정목사님께서 성서를 이해하는 그런 유의 성서관을 말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저의 질문에서 혹시라도 종교재판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오해를 푸십시요. 그런 동기는 털끝만큼도 없으니까요. 다만 저는 정목사님의 성서이해에 반감보다는 공감이 더 가고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또 한가지는 정목사님의 글에서 전적타자, 질적변화, 성서의 놀라운 세계 등등 바르트적 표현이나 요소가 다분히 묻어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바르트의 신학을 읽으면서 이런 면에서는 정목사님이 바르트의 신학과 노선을 달리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저는 바르트의 위대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신학이 바르트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누누이 주장하신대로 모든 신학은 잠정성을 띠고 있으니까요. 바르트의 성서이해와, 정목사님의 성서이해가 어떤 점에서 일치하며, 혹시 다르다면 어떤 면에서 다른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정목사님의 대답을 들어봐야 더 깊은 질문이 가능하겠지만 판넨베르크를 공부하신 정목사님이 바르트와 똑같은 성서관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지 신학적인 설명을 더 듣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는 것입니다.
2008.01.11 17:14:16
감사합니다.
위의 대글에서 삼분의 이까지는 쉽게 읽어 갔는데
음악적 영감 다음부터는 찬찬히 세 번 생각하면서
글을 씹어 먹으면서 읽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좀 알 것 같군요.
비유가 만점짜리였고
제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존재론에 대한 인식론적 공부가
기독교 계시 이해에 필수적이군요.
바르트가 비판한 "신체험"과
목사님이 주장하는 "계시경험"을 제가 구분하지 못했군요.
체험과 경험이란 비슷한 두 낱말 때문에
순간적이나마 제 안에서 인식론적 혼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대글에서 또 한번 신학적 통찰력을 얻고 갑니다.
다가오는 주일 설교가 자꾸만 기다려집니다.
평안을 빕니다.
위의 대글에서 삼분의 이까지는 쉽게 읽어 갔는데
음악적 영감 다음부터는 찬찬히 세 번 생각하면서
글을 씹어 먹으면서 읽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좀 알 것 같군요.
비유가 만점짜리였고
제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존재론에 대한 인식론적 공부가
기독교 계시 이해에 필수적이군요.
바르트가 비판한 "신체험"과
목사님이 주장하는 "계시경험"을 제가 구분하지 못했군요.
체험과 경험이란 비슷한 두 낱말 때문에
순간적이나마 제 안에서 인식론적 혼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대글에서 또 한번 신학적 통찰력을 얻고 갑니다.
다가오는 주일 설교가 자꾸만 기다려집니다.
평안을 빕니다.
2008.01.14 09:45:49
목사님, 제가 잘못 이해한건지 모르겠는데, 다음 부분에서 "전자"와 "후자"가 바뀐것 아닌가요??
"그게 영감이 인간의 실존적 경험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고,
음악의 존재론적 자기 노출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음악의 존재론에 방점을 두는가,
아니면 인간의 경험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전자는 바르트의 계시론적 하나님 이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유주의의 인간론적 하나님 이해입니다"
"그게 영감이 인간의 실존적 경험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고,
음악의 존재론적 자기 노출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음악의 존재론에 방점을 두는가,
아니면 인간의 경험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전자는 바르트의 계시론적 하나님 이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유주의의 인간론적 하나님 이해입니다"
2008.01.14 10:02:19
음악의 존재론에 방점을 두는가 아니면 아니면 인간의 경험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위의 문장에서
전자는 계시론적 하나님 이해이고(음악의 존재론)
후자는 자유주의의 인간론적 하나님 이해(인간의 경험)인 것 같은데요.
위의 문장에서
전자는 계시론적 하나님 이해이고(음악의 존재론)
후자는 자유주의의 인간론적 하나님 이해(인간의 경험)인 것 같은데요.
2008.01.14 15:48:36
닥터케이 님,
제 글의 논리가 그 대목에서 약간 허물어졌지만
아주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게 영감이 인간의 실존적 경험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고,
음악의 존재론적 자기 노출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는 문장이 있고,
이어서
<음악의 존재론에 방점을 두는가,
아니면 인간의 경험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아래의 문장에 따르면
<전자는 바르트의 계시론적 하나님 이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유주의의 인간론적 하나님 이해입니다.>라는 말은 옳은 것이고,
위의 문장에 따르면 지적하신 대로 바뀐 것이지요.
아래 문장에 가깝게 있기 때문에
결국 틀린 게 아니랍니다.
홍시 님의 짚은 대로, 그렇습니다.
제 글의 논리가 그 대목에서 약간 허물어졌지만
아주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게 영감이 인간의 실존적 경험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고,
음악의 존재론적 자기 노출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는 문장이 있고,
이어서
<음악의 존재론에 방점을 두는가,
아니면 인간의 경험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아래의 문장에 따르면
<전자는 바르트의 계시론적 하나님 이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유주의의 인간론적 하나님 이해입니다.>라는 말은 옳은 것이고,
위의 문장에 따르면 지적하신 대로 바뀐 것이지요.
아래 문장에 가깝게 있기 때문에
결국 틀린 게 아니랍니다.
홍시 님의 짚은 대로, 그렇습니다.
바르트의 종교비판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에 근거한 신학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은 사실 본회퍼에게도 있습니다.
그의 신학용어인 비종교화가 바로 그것이지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계몽, 종교성, 윤리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설파하려고 했는데,
바르트는 그것 근본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이 말은 곧 신학이 계시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인간론에서 시작했다는 비판입니다.
자유주의신학에서 신론은 곧 인간론이라고 한다면
바르트에게는 신과 인간이 질적으로 다르지요.
신은 하늘에, 인간은 땅에 있는 것만큼 다르지요.
이야기를 좁혀야겠군요.
제자들의 부활경험에 대한 저의 설명이 바로
바르트가 비판하고 있는 종교성이 아니냐, 하는 질문이지요?
그게 아닙니다.
부활경험이 바로 계시경험입니다.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는 거지요.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작곡자가가 음악적 영감을 얻지요?
그게 영감이 인간의 실존적 경험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고,
음악의 존재론적 자기 노출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음악의 존재론에 방점을 두는가,
아니면 인간의 경험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전자는 바르트의 계시론적 하나님 이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유주의의 인간론적 하나님 이해입니다.
저는 제자들의 부활 경험이 바로 전자라고 보는 거지요.
바르트의 성서이해와 나의 성서이해의 차이점?
나는 바르트의 신발끈도 풀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