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2일
대제사장 관저에서(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14:62)
예수님의 대답 중에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인 사실로 믿는 사람들은 아마 없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순진하기는 해도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렸을 때 “너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단다.”는 말을 사실로 받아들여 혼자 심각해 하던 어린아이와 비슷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분들보다 문제가 더 심각한 사람들은 위 구절을 무의미한 것으로 바라보는 냉소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연과학적인 실증이 아니면 아무 것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건 아닙니다. 뜬구름 잡는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없지 않으니까요. 문제는 그들이 그런 부정적인 현상에 사로잡혀서 성서와 기독교의 중심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씀은 손오공처럼 공중 부양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하늘 구름은 하나의 공간, 그런 사물에 불과하지만 성서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진원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바로 하늘이며, 그 구름입니다. 이런 고대인들의 인식을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어리석은 겁니다.
우리는 하늘 구름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고대인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의 생명 현상 너머의 근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근원을 향한 고대인들의 영적 관심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물리학과 생물학이 그것을 결코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 생명은 인간의 과학적 분석으로 처리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는 뜻입니다.
목사님, 하늘, 구름이라는 메타포는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 되는 거 같은데요^^
왜냐면, 저희들이 종종 그러거든요."아, 구름너머의 말씀을 듣고 싶다~!^^"
이건 아마도 심원, 궁극적인 생명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 아닐까 싶어요.
고대인들이 그런 영적 열망을 가졌다면, 그 열망은 당연히 전수되어지고 계승되어 오지 않았을까요?
그게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전통과 역사 아닌지요?
시편녹취하면서 세삼 느끼는 거지만,
고대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망에 탄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망은 그대로 초대교회에 전해 졌다고 믿어지구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그 맥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혹시, 그것은 '여기서의 생명현상' 에만 집착한 결과 아닐까요?
그래서 그 '실체'는 가려지고 우리는 헛된 열망만 쫒게 되는 것은 아닌지요?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답인데
하나님에 대해 앎 없이 대상에 대한 앎이 없이 어찌 믿음이 가능한지?....
그러하나 우리가 성서를 다 이해 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렇다 한들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 수 있을까요?
신비신학자 (에크하르트)와 말씀과 역사신학자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
한스 페터 뒤르, 클라우스미하엘 마이어 아비히, 한스디터 무췰러, 판넨베르크,
츠란츠 M 부케티츠 5명의 세계적인 석학들의 대담집 (신, 인간 그리고 과학)을 함께 읽으며
성서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려고 노력 중입니다만 ......
갈 길이 멀고 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인식 너머의 신비로움은 아직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세계을 경험하는 자만이 공유할 수있는 경이로움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종말의 구주가 하늘나라 구름타고 오신다는 고대인들의 새새명에 대한 신비로움의 고백이 부럽습니다.
기독교 영성이 아직도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가야만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숙명으로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