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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신이예요?" [user friendly 신학의 본보기]
1. 질문
사람들은 끊질기게 묻는다: "예수님이 신이예요?" 혹은 "... 그러면 예수님이 신이 아니란 말이예요?" 쉽고도 어려운 문제요, 기독교인들에게는 영구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의 하나이다. 이미 여러 가지 경우에 대답을 하였지만, 이 곳에서 내가 만나는 이들이 아직도 묻기에 또 다시 대답을 시도한다.
2. 모든 신학도가 알아야 할 사전(事前) 상식
성경을 푼다 혹은 신학을 한다 -- 그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각자 자신의 주변 언어 세계를 반드시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언어에는 죽은 언어가 있는가 하면, 살아 있는 언어가 있다. 또한 적극적/긍정적, 좋은 언어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소극적, 나쁜 언어가 있다. 죽은 언어는 이제는 힘을 상실한 옛 말이다. 예컨대, "고려장"이라는 말은 죽었다. "효도"라는 말은 비실거리지만 아직은 살아 있다. 고려장이 한때는 효의 한 행위라고 간주되어, 긍정적/적극적인 언어였으며,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점차 소극적/부정적인 언어로 변하였고, 마침내는 온전히 죽고 말았다. 남녀칠세 부동석, 칠거지악 등의 말도, 또 남자는 하늘이라는 말도 이미 죽었다. 살아 있다고 하면, 죽여없애야 할 "나쁜 언어"일 뿐이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난다"는 말은 어떤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통한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이미 죽은 말이다. 그들의 경험 세계와 모순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면 부자가 된다는 말"은 아브라함과 신명기 시대에는 살아 있는,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예수 당대에는 "부자는 천국(복된 자 중)에 들어가기가 몹시 힘들다"는 말이 기독교 표준 사전에 수록된 말이었고, 따라서 오늘날과는 달리 "부자"라는 말이 소극적인 언어였다.
3. 사도신경 -- 기독교 언어의 중요한 표본
특정 언어가 일단 죽고나면, 그 언어에 대하여 긍정적, 좋은 말이냐 부정적, 나쁜 말이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긍정/부정을 따지는 것은 살아 있는 언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의 주요한 개념 대다수가 2세기의 작품인 [사도신경]에 드러나 있다고 믿기에 종종 사도신경을 되새겨 보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중 대다수의 언어가 이미 죽은 언어가 되었거나, 겨우 살아 있는 경우 매우 소극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사도신경을 통째로 되살려 낼 수 있을까? 내가 일생을 통하여 맡은 한결같은 숙제이다.
4. 신학하는 아픔
그 동안 나의 신학하기는 간혹 옥토에 떨어져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돌짝밭에 떨어져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때로는 잘 정돈된 남의 집 화단을 망친다 하여 나의 씨뿌리기 작업은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꽃씨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고통스럽다. 잊고 싶은 이야기, 다시는 남의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데, 오랜 동안 죽어 있던 지하묘소의 미이라 손안에 들어 있었다던 생명의 씨앗처럼, 나의 신학하기란 꽃씨는 오늘도 여기저기서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새싹을 낸다. 아,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는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듯이, 나는 나의 신학하기를 이젠 잊고 싶다. 정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지구 기독교의 미래는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다. 하느님 사업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나는 내 일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가끔씩 입을 연다. 씨앗을 땅바닥에 흘리듯. 그러면 가끔 싹이 트고 꽃이 핀다. 나는 괴롭다.
5. "연구 수업"
기독교 신학을 하기 수 십 년, 이제는 지치고 또 지쳤다. 알어먹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왜일까? 내가 무능한 탓만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나는 하느님과 하나다"라고 말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또 내부에서조차 질문 공세가 밀어닥쳤다 하지 않던가?
5-1.
당신이 하느님과 같다는 말이요? 사람인 주제에?
당신이 모세나 세례자 요한만큼은 된다는 말이지요? 별 볼 일 없는 보통 사람이면서?
당신이 황제, 아니 황실 내시도 못되는 주제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된다는 말이예요?
당신 "하느님, 아버지"에게 우리를 데려다 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를 보여 주실래요?
예수,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말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게 믿어지거든, 내가 "너희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아들)'"인 줄로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요14:11)
제자들은 또 불평이다: "아, 이 말이 어렵도다! 누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랴(요6:60)"
5-2.
이보다 더 좋은 신학 "연구 수업"은 없다. 초등학교 시절, 가끔씩 하면 우리가 "연구 수업"을 하면, 장학관 아저씨들이 구경(?)을 나오곤 하였다.
요한복음(특히 6, 10, 14장)은 바로 예수께서 보여 주신 신학 연구 수업의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한다. 과목명: "너희가 신학을 뭘로 아느냐?" 주제명: "예수라는 사람의 신성(神性)."
5-3. 예수라는 신학자의 신학하기
신학 발전사적으로 본다면, 요한복음은 매우 후대의 작품임이 확실하다. "예수가 누구냐?"하는 질문이 마가(마태, 누가)복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세련되어 있고, 이 질문의 언어학적 특수성이 주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서에서는 이 중요한 질문이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단순한 대답으로, 마태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덧붙여진 현재적 대답으로, 누가복음서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라는 혼합적 대답으로 각각 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동일한 질문을 기회 있을 때마다 끈질기게 반복하여 묻는다(대답의 하나: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 세상에 오고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사실은 기독교)의 주장이 매우 당혹스러운 말임을 감추지 않고 있다. 나아가, 예수와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기능적인 것, 구원론)만이 아니라, 그가 그의 "아버지"와 무슨 상관(근원론, 존재론)이 있는지를 캐묻는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직계 제자들조차 납득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음"이 첫 연구 수업 참관자요 장학사인 요한 보고서의 핵심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언어는 "당시 사람들이 능히 경험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놀랍다. 아니, 오늘 우리들도 경험할 수 있는 말들이라는 점에서 정말로 신기하다. 반면에, 다음과 같은 말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처녀 탄생, 어떤 사람이 사람임과 동시, 동일 수준에서 신(의 아들)도 된다, 삼위일체, 죽은 자가 무덤에서 되살아나 영원히 산다 등. 이런 말은 요한복음서에는 없다. 그런 말들은 그 후의 기독교에서 발전되어, 점차 제국의 시녀가 된 후기 기독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굳혔는데, 오늘 우리들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다. 우리의 경험 세계를 철저히 뛰어넘는 이런 말들이 "믿어지는" 이상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믿음이 좋은" 혹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로 자부하며, 반면에, 이런 것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스스로 "믿음 없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물론, 예수의 제자들과 요한복음서의 예수도 "믿음 없는 사람" 중에 든다. 천국? 그게 어딘지는 모르지만, 예수와 그의 직계 제자들이 간 곳이 아니겠는가? 즉 위에서 말한 그런 의미의 "믿음 좋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아니다.
[예수] 믿을 수 있으면 믿으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요10:38)
[제자들] 뭘 믿으라고요?
6. 예수가 "신"이라는 걸 믿으라!
6-1. 이제는 죽은 대답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만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비범하였으며, 아무에도 배운 바 없지만, 신과 직접 교신하여 학식이 어렸을 적부터 뛰어났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각종 기적들을 행사하셨으며,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우리들에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비밀스런 특권을 마련하셨는데, 언젠가는, 조만간 구름을 타고 다시 이 땅에 오실 분이다. 혹은 그는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시요, 온전히 동등한 분이시다. 사람들 중 참으로 유일하게 예수만이 동정녀 탄생자이시요, 신성과 인성을 한 몸에 지녔으며, 죽음을 영원히 이기시는 자이다.
이런 말은 우선 성경의 속뜻과 일치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예수의 신학 방식에 어긋난다. 기독교 안에서, 예수보다 자칭타칭 더 위대한 신학자 그 누구리요? (성경의 속뜻은 성경 학자들, 특히 예수 세미나 연구를 참고하라!) 예수의 신학 방식은 "우리의 경험 세계 밖"으로 우리를 몰고 나가지 않는다. 예전에는 황제들, 석가, 씨족의 조상이 동정녀에서 나오기도 하고 알이나 짐승에게서 나오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언어는 "속뜻"이 따로 있지(나는 이것을 믿는다) 않다면, 지금은 확실하게 죽은 언어이다. 예수가 그의 죽음 후에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아담의 형벌로 인하여 인류는 여전히 죽음의 독침을 맞고 있다. 예수는 아담의 후예 곧 인간들의 운명을 조금도 바꾸어놓지 못하였다.
6-2. 예수가 말하는 예수의 신성
다시 한번 예수의 신학 연구 수업을 참관하자.
당신이 하느님과 같다는 말이요? 사람인 주제에?
당신이 모세나 세례자 요한만큼은 된다는 말이지요? 별 볼 일 없는 보통 사람이면서?
당신이 황제, 아니 황실 내시도 못되는 주제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된다는 말이예요?
당신 "하느님, 아버지"에게 우리를 데려다 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를 보여 주실래요?
예수,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말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게 믿어지거든, 내가 "너희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아들)'"인 줄로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요14:11)
제자들은 또 불평이다: "아, 이 말이 어렵도다! 누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랴(요6:60)"
나에게 정말 어려운 대목은 제자들의 마지막 불평이다. 왜 제자들 상당수가 이 신학 수업을 끝으로 예수를 떠나고 말았을까? (이 대답은 성경 학자들에게 물어보라.)
6-3. 내가 아직 예수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
나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말과 행동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가 하시는 일, 그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을 직접 본 사람들도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 보지 않고도 믿는단 말인가?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믿는다는 말은 아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루살렘 군중 중에는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할지라도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시지는 못하리라"는 약삭빠른 계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가 많았다는 보도가 있다(9:31). 나는 그 수준이다.
사람은 저마다 잘 혹은 바로, 혹은 재미있게 혹은 보람있게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 여러 길로 노력한다는 점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어느 시기까지는 다신론자가 된다. 나도 그러했다. 예수를 알기 전에도, 알고 나서도, 지금도, 내게 주어진 운명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까 하여 여러 가지 궁리를 한다. 알게 모르게 예수의 길과 다른 길, 반대의 길도 가본다. 그러고는 늘 제자자리로 돌아온다. "예수, 당신은 하늘이 보낸 나의 영원한 스승, 다정한 친구입니다." 나는, 신약성경에 만연되어 있는 바와는 달리, 특히 바울이나 히브리서, 묵시록과는 달리, "보상"을 바라고 예수를 믿지는 않는다. 이미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발견한 예수, 복음서 속의 예수가 가르쳐 준 삶의 길이 나에게 삶의 재미, 적어도 삶의 보람을 주는 충분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신이예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 요한복음서의 예수 방식대로 그렇다.
즉, 이 세상에 신(神)이 있다면, 나는 그 신에게서 "내가 삶의 재미와 보람, 적어도 둘 중 하나를 느끼며 살 수 있는 지혜(와 힘)를 주십시오"하고 부탁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에게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7. 신학하는 아픔 -- 되짚기
예수의 아픔, 나의 아픔, 그리고 모든 신학하는 자의 아픔은 통하는 데가 있다. 어떤 신학교에서는 "예수는 만병통치약이라"고 가르치지만([사람들의 욕구를 알아내라. 주라. 그리하면 교회 사업이 잘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속의 예수는 그렇게 만능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도 만능은 아니었다(창세기를 보라!). 요즘 한국의 유행어 하나처럼, 하느님도 하늘에서 종종 "못해 먹겠다!"고 소리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만능자는 없다. 하늘의 신도 그렇지 못하다. 예수, 우리와 같은 사람, 그는 물론 만능이 아니다. 그는 "6백만불의 사나이"나 "스파이더맨" 정도도 아니다. 그래서 아픔이 있다.
신학 공부 한 강좌의 마감 시간에 되면, 으레 희비 쌍곡선이 그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해방을 얻고, 어떤 사람들은 심각하게 실망을 한다. "예수가 그러면 신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들이 못다한 말을 나는 안다: "그러면 예수가 6백만불의 사나이나 스파이더맨 정도도 힘이 없다는 얘기군요? 속았네요. 기독교 안에 뭔가 있는 줄 알았어요!"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지혜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너무 큰 것을 원한다. 하느님이 친히 오시더라도 할 수 없는 큰 일을 원한다. 아니,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말하면, 누군가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는 그 "큰 일"을 해 주면, 그는 사람들을 "사람 이하의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 나의 예수는 할 수 있어도 하지 못한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질상, 본질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 같은 어버이는, 아무리 힘이 있어도, 자식을 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큰 일"을 해 줄 신(神)을 찾고 있는 사람들, 요한복음서의 예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신학하는 자는 늘 가슴이 아프다. "원하는 바"를 늘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8. 건강한 신학의 3 기준
기독교 신학의 대법정은 누가 뭐래도 예수이다. 성경이 아니다. 교리가 아니다. 교회의 가르침도 아니다. 내 기분은 더더욱 아니다. 말하는 자의 힘, 무력은 물론 아니다. 세계적인 "큰 교회"의 큰 목사님들 중 내가 아는 몇 분들은 예수를 모르거나, 알고도 근거하지 않는다. "맘먹은 대로 된다," "복받는 비결" 등을 운운하는 목사는 기독교 목사가 아니다. 백보 양보하면, 그들은 건강한 기독교 신학을 모르는 이들이다. 예수에게 근거해 있지 않으면서 예수 이름을 파는 그들의 신학은 병든 신학이요,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이것이 신학의 첫째 기준이다. 예수.
요한의 예수 선생이 보여 주신 바대로, 사람들의 경험 세계 안에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그렇다고 신비나 초월을 잊으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다른 문제이다). 예수는 자신의 신격을 이스라엘 민족이 열방에 대하여 갖는 관계에 빗대어 해명하였다. 즉 유별난 일로 주장하지 않았다. 인간들 중 그 아무도 "신의 아들"로 불리울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 오늘날 -- 그는 자신의 역할, 신격을 전혀 다른 말로 표현하였을 것이 확실하다. 오늘날에는 아무리 성스런 삶을 살다간 사람이라도, 그/녀가 "아비 없이 임신"되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는 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는다. 이게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처녀 탄생의 예수"라는 말은 "새 부대"에 담겨져야 한다. 즉 신학의 둘째 기준은 "통하는 말"이다. 통하는 말은 곧 경험될 수 있는 말,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는 말이다. 처녀 탄생을 믿는 자와 아니 믿는 자가 삶에서 아무런 "차이"를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언어"이다.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말이다. "처녀 탄생"을 우리 시대의 말로 대충 되새기면, "비천한 태생 + 한 시대를 움직이는 인물" 정도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신학은 사람, 사회, 생명을 건강하게 치료하는 약이라야 한다. "차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약은 폐기처분 당해야 한다. 그러나 "독약"(니이체)이 있다면, 만방에 경고해야 한다. 조용히 폐기처분함으로써 끝날 일이 아니다. 지금, 서울에서, LA에서, 기독교 약을 먹은 오래 복용한 사람들(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면에서 더 건강한가? 이것이 셋째 기준이다. 좋은 변화.
9. 후기
셋이 있지만, 그 중 제일은 xxx이다. 바울 선생의 용기이다. 신학의 기준이 셋 있지만, 그 중 제일은 "제3 기준" 곧 "좋은 변화"이다. 판단은 각자가 한다. 각 시대가 한다. 각 공동체가 한다. 각 단위 생명 연대가 한다. 어떤 종교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고, 골동품이 되고 말 듯이,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예수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생명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레위기의 종교처럼, 죽은 시스템이 되고 만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아직도 예수를 붙들고 있는데, 무수히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오래 전에 이미, 사실상, 예수를 떠났다고 하는 요한 보고서의 사실이다. 이 대목에 오면 나는 늘 무서워진다. 내가 최후의 도망자가 되지 않을까 하여. 무섭다. 그래서 나는 "동굴 속의 후렴"을 다시 듣는다: "바알에게 키스하지 않은 자가 7천이나 있다!(왕상 19:18)" 하느님의 말씀이다.
홍정수 박사가 쓴 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1. 질문
사람들은 끊질기게 묻는다: "예수님이 신이예요?" 혹은 "... 그러면 예수님이 신이 아니란 말이예요?" 쉽고도 어려운 문제요, 기독교인들에게는 영구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의 하나이다. 이미 여러 가지 경우에 대답을 하였지만, 이 곳에서 내가 만나는 이들이 아직도 묻기에 또 다시 대답을 시도한다.
2. 모든 신학도가 알아야 할 사전(事前) 상식
성경을 푼다 혹은 신학을 한다 -- 그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각자 자신의 주변 언어 세계를 반드시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언어에는 죽은 언어가 있는가 하면, 살아 있는 언어가 있다. 또한 적극적/긍정적, 좋은 언어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소극적, 나쁜 언어가 있다. 죽은 언어는 이제는 힘을 상실한 옛 말이다. 예컨대, "고려장"이라는 말은 죽었다. "효도"라는 말은 비실거리지만 아직은 살아 있다. 고려장이 한때는 효의 한 행위라고 간주되어, 긍정적/적극적인 언어였으며,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점차 소극적/부정적인 언어로 변하였고, 마침내는 온전히 죽고 말았다. 남녀칠세 부동석, 칠거지악 등의 말도, 또 남자는 하늘이라는 말도 이미 죽었다. 살아 있다고 하면, 죽여없애야 할 "나쁜 언어"일 뿐이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난다"는 말은 어떤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통한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이미 죽은 말이다. 그들의 경험 세계와 모순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면 부자가 된다는 말"은 아브라함과 신명기 시대에는 살아 있는,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예수 당대에는 "부자는 천국(복된 자 중)에 들어가기가 몹시 힘들다"는 말이 기독교 표준 사전에 수록된 말이었고, 따라서 오늘날과는 달리 "부자"라는 말이 소극적인 언어였다.
3. 사도신경 -- 기독교 언어의 중요한 표본
특정 언어가 일단 죽고나면, 그 언어에 대하여 긍정적, 좋은 말이냐 부정적, 나쁜 말이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긍정/부정을 따지는 것은 살아 있는 언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의 주요한 개념 대다수가 2세기의 작품인 [사도신경]에 드러나 있다고 믿기에 종종 사도신경을 되새겨 보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중 대다수의 언어가 이미 죽은 언어가 되었거나, 겨우 살아 있는 경우 매우 소극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사도신경을 통째로 되살려 낼 수 있을까? 내가 일생을 통하여 맡은 한결같은 숙제이다.
4. 신학하는 아픔
그 동안 나의 신학하기는 간혹 옥토에 떨어져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돌짝밭에 떨어져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때로는 잘 정돈된 남의 집 화단을 망친다 하여 나의 씨뿌리기 작업은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꽃씨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고통스럽다. 잊고 싶은 이야기, 다시는 남의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데, 오랜 동안 죽어 있던 지하묘소의 미이라 손안에 들어 있었다던 생명의 씨앗처럼, 나의 신학하기란 꽃씨는 오늘도 여기저기서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새싹을 낸다. 아,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는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듯이, 나는 나의 신학하기를 이젠 잊고 싶다. 정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지구 기독교의 미래는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다. 하느님 사업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나는 내 일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가끔씩 입을 연다. 씨앗을 땅바닥에 흘리듯. 그러면 가끔 싹이 트고 꽃이 핀다. 나는 괴롭다.
5. "연구 수업"
기독교 신학을 하기 수 십 년, 이제는 지치고 또 지쳤다. 알어먹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왜일까? 내가 무능한 탓만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나는 하느님과 하나다"라고 말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또 내부에서조차 질문 공세가 밀어닥쳤다 하지 않던가?
5-1.
당신이 하느님과 같다는 말이요? 사람인 주제에?
당신이 모세나 세례자 요한만큼은 된다는 말이지요? 별 볼 일 없는 보통 사람이면서?
당신이 황제, 아니 황실 내시도 못되는 주제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된다는 말이예요?
당신 "하느님, 아버지"에게 우리를 데려다 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를 보여 주실래요?
예수,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말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게 믿어지거든, 내가 "너희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아들)'"인 줄로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요14:11)
제자들은 또 불평이다: "아, 이 말이 어렵도다! 누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랴(요6:60)"
5-2.
이보다 더 좋은 신학 "연구 수업"은 없다. 초등학교 시절, 가끔씩 하면 우리가 "연구 수업"을 하면, 장학관 아저씨들이 구경(?)을 나오곤 하였다.
요한복음(특히 6, 10, 14장)은 바로 예수께서 보여 주신 신학 연구 수업의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한다. 과목명: "너희가 신학을 뭘로 아느냐?" 주제명: "예수라는 사람의 신성(神性)."
5-3. 예수라는 신학자의 신학하기
신학 발전사적으로 본다면, 요한복음은 매우 후대의 작품임이 확실하다. "예수가 누구냐?"하는 질문이 마가(마태, 누가)복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세련되어 있고, 이 질문의 언어학적 특수성이 주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서에서는 이 중요한 질문이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단순한 대답으로, 마태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덧붙여진 현재적 대답으로, 누가복음서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라는 혼합적 대답으로 각각 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동일한 질문을 기회 있을 때마다 끈질기게 반복하여 묻는다(대답의 하나: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 세상에 오고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사실은 기독교)의 주장이 매우 당혹스러운 말임을 감추지 않고 있다. 나아가, 예수와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기능적인 것, 구원론)만이 아니라, 그가 그의 "아버지"와 무슨 상관(근원론, 존재론)이 있는지를 캐묻는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직계 제자들조차 납득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음"이 첫 연구 수업 참관자요 장학사인 요한 보고서의 핵심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언어는 "당시 사람들이 능히 경험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놀랍다. 아니, 오늘 우리들도 경험할 수 있는 말들이라는 점에서 정말로 신기하다. 반면에, 다음과 같은 말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처녀 탄생, 어떤 사람이 사람임과 동시, 동일 수준에서 신(의 아들)도 된다, 삼위일체, 죽은 자가 무덤에서 되살아나 영원히 산다 등. 이런 말은 요한복음서에는 없다. 그런 말들은 그 후의 기독교에서 발전되어, 점차 제국의 시녀가 된 후기 기독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굳혔는데, 오늘 우리들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다. 우리의 경험 세계를 철저히 뛰어넘는 이런 말들이 "믿어지는" 이상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믿음이 좋은" 혹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로 자부하며, 반면에, 이런 것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스스로 "믿음 없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물론, 예수의 제자들과 요한복음서의 예수도 "믿음 없는 사람" 중에 든다. 천국? 그게 어딘지는 모르지만, 예수와 그의 직계 제자들이 간 곳이 아니겠는가? 즉 위에서 말한 그런 의미의 "믿음 좋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아니다.
[예수] 믿을 수 있으면 믿으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요10:38)
[제자들] 뭘 믿으라고요?
6. 예수가 "신"이라는 걸 믿으라!
6-1. 이제는 죽은 대답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만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비범하였으며, 아무에도 배운 바 없지만, 신과 직접 교신하여 학식이 어렸을 적부터 뛰어났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각종 기적들을 행사하셨으며,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우리들에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비밀스런 특권을 마련하셨는데, 언젠가는, 조만간 구름을 타고 다시 이 땅에 오실 분이다. 혹은 그는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시요, 온전히 동등한 분이시다. 사람들 중 참으로 유일하게 예수만이 동정녀 탄생자이시요, 신성과 인성을 한 몸에 지녔으며, 죽음을 영원히 이기시는 자이다.
이런 말은 우선 성경의 속뜻과 일치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예수의 신학 방식에 어긋난다. 기독교 안에서, 예수보다 자칭타칭 더 위대한 신학자 그 누구리요? (성경의 속뜻은 성경 학자들, 특히 예수 세미나 연구를 참고하라!) 예수의 신학 방식은 "우리의 경험 세계 밖"으로 우리를 몰고 나가지 않는다. 예전에는 황제들, 석가, 씨족의 조상이 동정녀에서 나오기도 하고 알이나 짐승에게서 나오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언어는 "속뜻"이 따로 있지(나는 이것을 믿는다) 않다면, 지금은 확실하게 죽은 언어이다. 예수가 그의 죽음 후에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아담의 형벌로 인하여 인류는 여전히 죽음의 독침을 맞고 있다. 예수는 아담의 후예 곧 인간들의 운명을 조금도 바꾸어놓지 못하였다.
6-2. 예수가 말하는 예수의 신성
다시 한번 예수의 신학 연구 수업을 참관하자.
당신이 하느님과 같다는 말이요? 사람인 주제에?
당신이 모세나 세례자 요한만큼은 된다는 말이지요? 별 볼 일 없는 보통 사람이면서?
당신이 황제, 아니 황실 내시도 못되는 주제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된다는 말이예요?
당신 "하느님, 아버지"에게 우리를 데려다 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를 보여 주실래요?
예수,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말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게 믿어지거든, 내가 "너희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아들)'"인 줄로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요14:11)
제자들은 또 불평이다: "아, 이 말이 어렵도다! 누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랴(요6:60)"
나에게 정말 어려운 대목은 제자들의 마지막 불평이다. 왜 제자들 상당수가 이 신학 수업을 끝으로 예수를 떠나고 말았을까? (이 대답은 성경 학자들에게 물어보라.)
6-3. 내가 아직 예수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
나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말과 행동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가 하시는 일, 그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을 직접 본 사람들도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 보지 않고도 믿는단 말인가?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믿는다는 말은 아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루살렘 군중 중에는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할지라도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시지는 못하리라"는 약삭빠른 계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가 많았다는 보도가 있다(9:31). 나는 그 수준이다.
사람은 저마다 잘 혹은 바로, 혹은 재미있게 혹은 보람있게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 여러 길로 노력한다는 점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어느 시기까지는 다신론자가 된다. 나도 그러했다. 예수를 알기 전에도, 알고 나서도, 지금도, 내게 주어진 운명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까 하여 여러 가지 궁리를 한다. 알게 모르게 예수의 길과 다른 길, 반대의 길도 가본다. 그러고는 늘 제자자리로 돌아온다. "예수, 당신은 하늘이 보낸 나의 영원한 스승, 다정한 친구입니다." 나는, 신약성경에 만연되어 있는 바와는 달리, 특히 바울이나 히브리서, 묵시록과는 달리, "보상"을 바라고 예수를 믿지는 않는다. 이미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발견한 예수, 복음서 속의 예수가 가르쳐 준 삶의 길이 나에게 삶의 재미, 적어도 삶의 보람을 주는 충분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신이예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 요한복음서의 예수 방식대로 그렇다.
즉, 이 세상에 신(神)이 있다면, 나는 그 신에게서 "내가 삶의 재미와 보람, 적어도 둘 중 하나를 느끼며 살 수 있는 지혜(와 힘)를 주십시오"하고 부탁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에게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7. 신학하는 아픔 -- 되짚기
예수의 아픔, 나의 아픔, 그리고 모든 신학하는 자의 아픔은 통하는 데가 있다. 어떤 신학교에서는 "예수는 만병통치약이라"고 가르치지만([사람들의 욕구를 알아내라. 주라. 그리하면 교회 사업이 잘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속의 예수는 그렇게 만능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도 만능은 아니었다(창세기를 보라!). 요즘 한국의 유행어 하나처럼, 하느님도 하늘에서 종종 "못해 먹겠다!"고 소리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만능자는 없다. 하늘의 신도 그렇지 못하다. 예수, 우리와 같은 사람, 그는 물론 만능이 아니다. 그는 "6백만불의 사나이"나 "스파이더맨" 정도도 아니다. 그래서 아픔이 있다.
신학 공부 한 강좌의 마감 시간에 되면, 으레 희비 쌍곡선이 그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해방을 얻고, 어떤 사람들은 심각하게 실망을 한다. "예수가 그러면 신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들이 못다한 말을 나는 안다: "그러면 예수가 6백만불의 사나이나 스파이더맨 정도도 힘이 없다는 얘기군요? 속았네요. 기독교 안에 뭔가 있는 줄 알았어요!"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지혜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너무 큰 것을 원한다. 하느님이 친히 오시더라도 할 수 없는 큰 일을 원한다. 아니,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말하면, 누군가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는 그 "큰 일"을 해 주면, 그는 사람들을 "사람 이하의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 나의 예수는 할 수 있어도 하지 못한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질상, 본질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 같은 어버이는, 아무리 힘이 있어도, 자식을 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큰 일"을 해 줄 신(神)을 찾고 있는 사람들, 요한복음서의 예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신학하는 자는 늘 가슴이 아프다. "원하는 바"를 늘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8. 건강한 신학의 3 기준
기독교 신학의 대법정은 누가 뭐래도 예수이다. 성경이 아니다. 교리가 아니다. 교회의 가르침도 아니다. 내 기분은 더더욱 아니다. 말하는 자의 힘, 무력은 물론 아니다. 세계적인 "큰 교회"의 큰 목사님들 중 내가 아는 몇 분들은 예수를 모르거나, 알고도 근거하지 않는다. "맘먹은 대로 된다," "복받는 비결" 등을 운운하는 목사는 기독교 목사가 아니다. 백보 양보하면, 그들은 건강한 기독교 신학을 모르는 이들이다. 예수에게 근거해 있지 않으면서 예수 이름을 파는 그들의 신학은 병든 신학이요,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이것이 신학의 첫째 기준이다. 예수.
요한의 예수 선생이 보여 주신 바대로, 사람들의 경험 세계 안에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그렇다고 신비나 초월을 잊으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다른 문제이다). 예수는 자신의 신격을 이스라엘 민족이 열방에 대하여 갖는 관계에 빗대어 해명하였다. 즉 유별난 일로 주장하지 않았다. 인간들 중 그 아무도 "신의 아들"로 불리울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 오늘날 -- 그는 자신의 역할, 신격을 전혀 다른 말로 표현하였을 것이 확실하다. 오늘날에는 아무리 성스런 삶을 살다간 사람이라도, 그/녀가 "아비 없이 임신"되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는 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는다. 이게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처녀 탄생의 예수"라는 말은 "새 부대"에 담겨져야 한다. 즉 신학의 둘째 기준은 "통하는 말"이다. 통하는 말은 곧 경험될 수 있는 말,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는 말이다. 처녀 탄생을 믿는 자와 아니 믿는 자가 삶에서 아무런 "차이"를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언어"이다.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말이다. "처녀 탄생"을 우리 시대의 말로 대충 되새기면, "비천한 태생 + 한 시대를 움직이는 인물" 정도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신학은 사람, 사회, 생명을 건강하게 치료하는 약이라야 한다. "차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약은 폐기처분 당해야 한다. 그러나 "독약"(니이체)이 있다면, 만방에 경고해야 한다. 조용히 폐기처분함으로써 끝날 일이 아니다. 지금, 서울에서, LA에서, 기독교 약을 먹은 오래 복용한 사람들(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면에서 더 건강한가? 이것이 셋째 기준이다. 좋은 변화.
9. 후기
셋이 있지만, 그 중 제일은 xxx이다. 바울 선생의 용기이다. 신학의 기준이 셋 있지만, 그 중 제일은 "제3 기준" 곧 "좋은 변화"이다. 판단은 각자가 한다. 각 시대가 한다. 각 공동체가 한다. 각 단위 생명 연대가 한다. 어떤 종교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고, 골동품이 되고 말 듯이,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예수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생명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레위기의 종교처럼, 죽은 시스템이 되고 만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아직도 예수를 붙들고 있는데, 무수히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오래 전에 이미, 사실상, 예수를 떠났다고 하는 요한 보고서의 사실이다. 이 대목에 오면 나는 늘 무서워진다. 내가 최후의 도망자가 되지 않을까 하여. 무섭다. 그래서 나는 "동굴 속의 후렴"을 다시 듣는다: "바알에게 키스하지 않은 자가 7천이나 있다!(왕상 19:18)" 하느님의 말씀이다.
홍정수 박사가 쓴 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2008.04.04 05:51:54
글을 읽으면서 "혹시 홍정수 목사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역시 맞군요. "새부대"는 다 만드셨는지 모르겠네요. 신학의 첫번째 기준은 "예수" 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2008.04.04 16:42:34
그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어떤 깊은 생각을 품고 이런 글을 쓰셨는지 모르지만, 꼭 무신론자, 반그리스도인이 글을 쓴 것처럼 느껴지네요.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겠지만 목사님께서 어떠한 의도로 이런 글을 쓰셨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성경을 폄하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2008.04.04 18:28:46
저는 성경을 폄하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만... 예수님의 신성이나 인성을 정의 또는 판단하기 이전에, 믿기 이전에, 예수, 그 자체로서 족하다 라는 뜻으로 보여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정의되지 못한 이상은, 육신의 부활 또는 영지주의자들처럼 영의 부활... 이 모든 것이 인식되지 않은 성격의 것을 정의 내리려고 하다 보니, 육신 또는 영 이라고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 아닐런지요?
미지의 것에 대해, 홍 박사님의 인식에 근거해서 정의를 내리려 하다보니, 얼핏 보면, 반 그리스도적인 성향이 보여질 수도 있겠네요.
신학의 첫번째 기준은 예수가 아닐까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비로소, 메시야 라고 인식한 것이 아닌지요? 예수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분이 메시야다 라는 인식도 없었겠지요.
미지의 것에 대해, 홍 박사님의 인식에 근거해서 정의를 내리려 하다보니, 얼핏 보면, 반 그리스도적인 성향이 보여질 수도 있겠네요.
신학의 첫번째 기준은 예수가 아닐까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비로소, 메시야 라고 인식한 것이 아닌지요? 예수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분이 메시야다 라는 인식도 없었겠지요.
2008.04.04 22:35:51
베낀글이 아니고 질답게시판에 오른 글이라 저는 다 읽기 전에는 라베뉴님의 글인 줄 알았습니다.
글을 읽다가는 회원정보를 확인하고야 말았지요.
그리고는 많이 놀랐습니다. 20대에 이런 사고를 할 수 있다니요.
그리고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수십년 신학을 붙잡고 있다고 했으니 앞 뒤가 안맞았지요.
그리고는 홍정수 목사님의 글과 비슷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그렇다고 표시되어 있더군요.
홍정수 목사님과는 신학의 관점에서 저와 같은 과는 아니지만 위 글에서는 제 개인적으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군요.
눈사람님의 생각에는 위 글이 성경을 폄하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런 사고에서 봐야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눈사람님의 신앙적 여정과 지금까지 주입된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이지만, 결코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누구냐, 예수가 누구냐, 믿음이 무엇이냐, 구원이 무엇이냐 등 수 많은 기독교 적 질문 속에서 하나님의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시각이 눈사람님의 시각이나 관점은 사실은 극히 일부분의 시각일 뿐입니다.
미국의 복음주의가 창조론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근본주의로 갈라져 나간 입장이 창조과학회를 지지하는 쪽이며, 그외의 복음주의는 창조과학회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복음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라기보다는 근본주의와 가깝지요.
그 관점이 대부분 성경무오설, 축자영감설, 젊은 지구론(진화론과 천체물리학의 과학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입장) 등을 지지하는 한국교회는 미국의 복음주의와도 조금은 동떨어진 근본주의적 신학을 따르고 있으며, 그 마저도 자본주의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홍정수 목사님도 아직 그 여정이 끝난 것이 아니라 과정이라 여기는 듯이 보이며, 저도 오늘의 제 생각이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그 순간 바로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생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이 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는 위의 글에 지지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글을 읽다가는 회원정보를 확인하고야 말았지요.
그리고는 많이 놀랐습니다. 20대에 이런 사고를 할 수 있다니요.
그리고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수십년 신학을 붙잡고 있다고 했으니 앞 뒤가 안맞았지요.
그리고는 홍정수 목사님의 글과 비슷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그렇다고 표시되어 있더군요.
홍정수 목사님과는 신학의 관점에서 저와 같은 과는 아니지만 위 글에서는 제 개인적으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군요.
눈사람님의 생각에는 위 글이 성경을 폄하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런 사고에서 봐야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눈사람님의 신앙적 여정과 지금까지 주입된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이지만, 결코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누구냐, 예수가 누구냐, 믿음이 무엇이냐, 구원이 무엇이냐 등 수 많은 기독교 적 질문 속에서 하나님의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시각이 눈사람님의 시각이나 관점은 사실은 극히 일부분의 시각일 뿐입니다.
미국의 복음주의가 창조론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근본주의로 갈라져 나간 입장이 창조과학회를 지지하는 쪽이며, 그외의 복음주의는 창조과학회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복음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라기보다는 근본주의와 가깝지요.
그 관점이 대부분 성경무오설, 축자영감설, 젊은 지구론(진화론과 천체물리학의 과학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입장) 등을 지지하는 한국교회는 미국의 복음주의와도 조금은 동떨어진 근본주의적 신학을 따르고 있으며, 그 마저도 자본주의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홍정수 목사님도 아직 그 여정이 끝난 것이 아니라 과정이라 여기는 듯이 보이며, 저도 오늘의 제 생각이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그 순간 바로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생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이 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는 위의 글에 지지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2008.04.05 00:15:34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
도대체 예수 그는 누구인가?
이상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런 질문을 해야 할까요?
이미 성경을 통해 입증된것이고
물론 아직 믿지 않겠다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궁금해 한다면 말이 되지요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리지 않겠다면 몰라도
사도들의 기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몰라도
왜 이걸 이해하려고 애를 쓸까요?
신학과 철학은 이렇게 질문으로 시작해서 끝이 없는것 아닐까요?
성경은 이해하는게 아니라 경험하는게 아니라
믿어야 하고 수긍해야 하고 믿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내가 어떤존재인가를 알게 합니다
내가 이렇게 죄인이었구나를 알게 합니다
예수가 신이예요?
함 찾아봅시다
오랜 시간을 두고
각종 사상들과 철학들이 버무려져서 한바탕 싸움을 합니다
피차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결국은 성경에서 증언한 예수가 하나님 맞네요
이미 주어진 것을 애써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성경이 맞네요
이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연구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내가 알아야 겠다고 우깁니다
저처럼 이렇게 단순하게
덜커덕 믿는 저같은 이들을 이상하게 봅니다
맹신이며 무지하다고 불쌍하게 봅니다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절대입니다
사람이 알아서 믿는게 아니죠
안다고 다 믿는것 아니라고 봅니다
몰라서 못믿는것도 아니죠
믿음과 구원은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며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보수 골통이라고 조롱하겠지만요
어쩌겠어요^^
도대체 예수 그는 누구인가?
이상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런 질문을 해야 할까요?
이미 성경을 통해 입증된것이고
물론 아직 믿지 않겠다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궁금해 한다면 말이 되지요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리지 않겠다면 몰라도
사도들의 기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몰라도
왜 이걸 이해하려고 애를 쓸까요?
신학과 철학은 이렇게 질문으로 시작해서 끝이 없는것 아닐까요?
성경은 이해하는게 아니라 경험하는게 아니라
믿어야 하고 수긍해야 하고 믿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내가 어떤존재인가를 알게 합니다
내가 이렇게 죄인이었구나를 알게 합니다
예수가 신이예요?
함 찾아봅시다
오랜 시간을 두고
각종 사상들과 철학들이 버무려져서 한바탕 싸움을 합니다
피차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결국은 성경에서 증언한 예수가 하나님 맞네요
이미 주어진 것을 애써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성경이 맞네요
이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연구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내가 알아야 겠다고 우깁니다
저처럼 이렇게 단순하게
덜커덕 믿는 저같은 이들을 이상하게 봅니다
맹신이며 무지하다고 불쌍하게 봅니다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절대입니다
사람이 알아서 믿는게 아니죠
안다고 다 믿는것 아니라고 봅니다
몰라서 못믿는것도 아니죠
믿음과 구원은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며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보수 골통이라고 조롱하겠지만요
어쩌겠어요^^
2008.04.05 01:20:18
아... 참... 본문을 읽으면서 정말 가슴속을 후벼파는 아픔을 공감합니다.
요즘 제 마음속의 고민과 놀랍도록 유사한 내용들이라서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제대로 알게되는건 언제쯤이나 가능할까요?
오늘 이자리에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일른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게 된다고 말씀들 하시고 저도 그렇게 말하고는 했지만,
요즘 성경에 대한 저의 생각은 예전과 같이 성경의 모든 한구절 한구절이 다 보석이 아니라
유리조각들 속에 보석들이 숨어있는.... 그런 형상으로 느껴집니다.
반짝인다고 다 보석이 아니더라는.... 보석인줄 알고 꽉 움켜쥐다가는 손이 베일수도 있는....
그러나 그 속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진짜 보석들이 숨어있으니....
주여, 당신을 깊이 알고 싶은데 나의 눈은 너무나도 어두워서 답답합니다... 내게 빛을 주소서...
요즘 제 마음속의 고민과 놀랍도록 유사한 내용들이라서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제대로 알게되는건 언제쯤이나 가능할까요?
오늘 이자리에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일른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게 된다고 말씀들 하시고 저도 그렇게 말하고는 했지만,
요즘 성경에 대한 저의 생각은 예전과 같이 성경의 모든 한구절 한구절이 다 보석이 아니라
유리조각들 속에 보석들이 숨어있는.... 그런 형상으로 느껴집니다.
반짝인다고 다 보석이 아니더라는.... 보석인줄 알고 꽉 움켜쥐다가는 손이 베일수도 있는....
그러나 그 속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진짜 보석들이 숨어있으니....
주여, 당신을 깊이 알고 싶은데 나의 눈은 너무나도 어두워서 답답합니다... 내게 빛을 주소서...
2008.04.05 01:00:15
예수를 제대로 알게 되는것은 언제쯤이나 가능할까....
이렇게 고뇌하시니까 제가 민망합니다^^
저는 예수를 제대로 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모릅니다
그래도 믿어지는걸 어찌 설명할까요...
어린아이가
이분이 정말 내 부모가 맞나 고민할까요
부모에 대하여 이해한다고 믿어질까요
부모에 대하여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고 고뇌하는 그 모습이좀...
이렇게 말하면 제가 신비주의자같거나
지독한 맹신주의자같이 들리겠네요
저도 정확하게 안다고 장담 못합니다
다만 믿고 보니 편안하네요^^
대책 없죠^^*
이렇게 고뇌하시니까 제가 민망합니다^^
저는 예수를 제대로 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모릅니다
그래도 믿어지는걸 어찌 설명할까요...
어린아이가
이분이 정말 내 부모가 맞나 고민할까요
부모에 대하여 이해한다고 믿어질까요
부모에 대하여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고 고뇌하는 그 모습이좀...
이렇게 말하면 제가 신비주의자같거나
지독한 맹신주의자같이 들리겠네요
저도 정확하게 안다고 장담 못합니다
다만 믿고 보니 편안하네요^^
대책 없죠^^*
2008.04.05 01:12:42
작은자님! 이상할 것 하나 없습니다.
작은자님은 하나도 의심없이 믿으지시니 믿으시는 것이고, 저같은 의심많은 사람은 그대로 믿어지지가 않으니 믿게 해 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성경에서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고 싶은 것이고,
사도들의 기록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줄 알아야 그 말이 의미가 있겠지요.
작은자님처럼 단순하게 믿는 사람은 이상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왜냐면 보지 못하고 믿는 정도가 아니고 이해가 안되고도 믿으니 그야말로 대단한 믿음아닌가요?
그런데, 많은 기독인들이 욕을 먹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가르침은 안믿는다는게 아이러니한 이유가 됩니다.
분명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예수 외에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외치면서도
그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초대교회 공동체들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기록해 놓은 명령 들은 무시를 하거든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방법임을 가르치고 있는데도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한다고 들 하신다 말입니다.
얼마전에 순*이님의 댓글에 정용섭목사님이 답을 해 놓으신 것이 있는데 제 생각에는 작은자님에게도 해당되시는 글이라 생각이 듭니다.(사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꼭 옳지 않을 수도 있음에도..)
님처럼 성경말씀이 절대적이라 하신다면
오히려 성경에서는 우리더러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안다는 것이 그냥 여호와가 하나님이다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호와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 그렇게 살라고 말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라.
그 명령 안에 거하라.
그리하여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거하며 하나가 된다고요.
그래서 저는 주님과 한 몸인체로 살고 싶어서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알아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끔은 뒷걸음도 치면서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된 것 같습니다.
작은자님은 하나도 의심없이 믿으지시니 믿으시는 것이고, 저같은 의심많은 사람은 그대로 믿어지지가 않으니 믿게 해 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성경에서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고 싶은 것이고,
사도들의 기록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줄 알아야 그 말이 의미가 있겠지요.
작은자님처럼 단순하게 믿는 사람은 이상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왜냐면 보지 못하고 믿는 정도가 아니고 이해가 안되고도 믿으니 그야말로 대단한 믿음아닌가요?
그런데, 많은 기독인들이 욕을 먹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가르침은 안믿는다는게 아이러니한 이유가 됩니다.
분명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예수 외에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외치면서도
그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초대교회 공동체들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기록해 놓은 명령 들은 무시를 하거든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방법임을 가르치고 있는데도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한다고 들 하신다 말입니다.
얼마전에 순*이님의 댓글에 정용섭목사님이 답을 해 놓으신 것이 있는데 제 생각에는 작은자님에게도 해당되시는 글이라 생각이 듭니다.(사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꼭 옳지 않을 수도 있음에도..)
님처럼 성경말씀이 절대적이라 하신다면
오히려 성경에서는 우리더러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안다는 것이 그냥 여호와가 하나님이다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호와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 그렇게 살라고 말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라.
그 명령 안에 거하라.
그리하여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거하며 하나가 된다고요.
그래서 저는 주님과 한 몸인체로 살고 싶어서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알아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끔은 뒷걸음도 치면서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된 것 같습니다.
2008.04.05 01:23:27
제가 댓글을 쓰시는 사이에 작은자님이 또 글을 쓰셨군요.
어린아이가 그 부모가 내 부모인가 아닌가 고민하지 않으신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이 사람이 진짜 내 부모인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합니다.
주로 그 부모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거나 수긍되지 않으며,
그 사랑이 피부에 와닿지 않으면 그러는 때가 있습니다.
믿고 안믿고가 문제가 아니라 아닐 수도 있다는 고민을 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제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설사 아이가 그 부모가 자신의 친부모인 것을 이해를 떠나서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부모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부모의 뜻대로 살지를 못합니다.
더 나아가 이해를 하더라도 부모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지 아니하면 결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부모의 뜻대로 살기로 아무리 결심하고 결단하더라도 그 부모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면 그렇게 살지 못하겠지요.
아무리 자녀가 그 부모의 뜻을 이해하고, 또 그 뜻대로 살고자 결단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부모의 뜻에 따라 다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찌 다 이해하며, 이해한다고 한 들 어찌 다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뜻안에 거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내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그래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지해서 조금이나마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 헛되다 하신다면 저야 할 수 없지요.
저는 도저히 알지 못하고는 아버지의 뜻을 짐작도 못하니 어떻게 그 분과 하나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어린아이가 그 부모가 내 부모인가 아닌가 고민하지 않으신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이 사람이 진짜 내 부모인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합니다.
주로 그 부모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거나 수긍되지 않으며,
그 사랑이 피부에 와닿지 않으면 그러는 때가 있습니다.
믿고 안믿고가 문제가 아니라 아닐 수도 있다는 고민을 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제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설사 아이가 그 부모가 자신의 친부모인 것을 이해를 떠나서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부모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부모의 뜻대로 살지를 못합니다.
더 나아가 이해를 하더라도 부모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지 아니하면 결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부모의 뜻대로 살기로 아무리 결심하고 결단하더라도 그 부모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면 그렇게 살지 못하겠지요.
아무리 자녀가 그 부모의 뜻을 이해하고, 또 그 뜻대로 살고자 결단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부모의 뜻에 따라 다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찌 다 이해하며, 이해한다고 한 들 어찌 다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뜻안에 거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내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그래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지해서 조금이나마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 헛되다 하신다면 저야 할 수 없지요.
저는 도저히 알지 못하고는 아버지의 뜻을 짐작도 못하니 어떻게 그 분과 하나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2008.04.05 01:40:03
제가 타자에 익숙하지 못해서 좀 대응하기가 힘드네요^^
올리브님의 의견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구요
제가 무슨 말인지를 못알아 듣는것도 아닙니다
올리브님의 생각이 틀리다거나
제가 하는 생각이 맞다거나가 하는 것이 아닌줄 이해할 줄 믿습니다^^
꼭 억지로 두둘겨 맞추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해 합니다~
시각의 차이지요^^
사람은 대개의 경우 확인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나봅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떤이는 좀더 세밀하게 자세히쪽일거구요
저같은 경우는 단순한거죠
믿음이 성적이나 공로가 아니듯이
보지 않고도 믿는다고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고 믿든 모르고 믿든 우리의 운명은 보이지 않고 알수도 없는 그분께서
이끌어 가시기에 누구나 큰소리 할 필요는 없겠죠^^
오히려 이렇게 다비아를 통해서 각자가 서있는 자리를 확인할 수 있으니
이것도 제게는 유익입니다^^
샬롬~
올리브님의 의견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구요
제가 무슨 말인지를 못알아 듣는것도 아닙니다
올리브님의 생각이 틀리다거나
제가 하는 생각이 맞다거나가 하는 것이 아닌줄 이해할 줄 믿습니다^^
꼭 억지로 두둘겨 맞추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해 합니다~
시각의 차이지요^^
사람은 대개의 경우 확인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나봅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떤이는 좀더 세밀하게 자세히쪽일거구요
저같은 경우는 단순한거죠
믿음이 성적이나 공로가 아니듯이
보지 않고도 믿는다고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고 믿든 모르고 믿든 우리의 운명은 보이지 않고 알수도 없는 그분께서
이끌어 가시기에 누구나 큰소리 할 필요는 없겠죠^^
오히려 이렇게 다비아를 통해서 각자가 서있는 자리를 확인할 수 있으니
이것도 제게는 유익입니다^^
샬롬~
2008.04.05 11:58:45
아이가 부모를 의심하거나 부모에 대해 낱낱이 분석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자세인지 의문입니다. 저도 부모입니다만 내 아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런 행동을 보인다면 아주 섭섭할 것 같습니다. 설령 제가 양부모라 할지라도 내가 최선을 다해서 키우고 있는데 친부모라 믿고, 어떤 말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믿고 따라준다면 그 아이는 얼마나 예쁘게 보이겠으며 그 아이 또한 얼마나 올바르게 자라 가겠습니까. 우리도 그럴진데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올리브님의 마지막 멘트처럼 분명 보지 않고 따지지 않고 믿는 복 만큼 큰 복은 없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렇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찌 다 이해하며, 이해한다고 한 들 어찌 다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뜻안에 거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내는 것 아니겠어요?
=> 너무나 동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 올바르게 아느냐 모르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얼마나 신뢰하느냐 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속속들이 파헤쳐서 낱낱이 아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생각임을 저도 인정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이미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자칫 잘못 흘러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이 무오하냐 안하냐, 성경을 성령님이 썼느냐 사람이 썼느냐, 우리가 성경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하느냐 다 파헤쳐야 하느냐 등등의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결코 부인하지 않아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그리스도시요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않은채 성경을 이해하려 하고 고민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여전히 보수 교회의 목사님들 설교와 그동안에 들어왔던 잘못된 것들이 저의 사고 방식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세뇌가 되어있어서 라고 말씀하신다면 제가 무어라고 더 드릴 말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어떠한 경우라도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올리브님과 그 외 다른 다비아 회원님들도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저와 같지 않으신가요?
제가 이곳에서 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새로운 시각도 보았습니다.
별 것 아닌 느낌하나 말씀드리면
작은자님은 다비아 회원님들과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서로 약간의 대립이 보입니다.
그리고 작은자님을 제외한 많은 다른 분들은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계시고
설령 자신의 생각과 약간 다른 댓글이 달리거나 글이 올라올지라도 감싸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판단할 의미도 필요도 없이 서로 생각은 달라도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소가 이곳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추구하는 것이나 근본적인 생각이 같다면 약간 다른 것이 있다할지라도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지 상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떠한 시각이든지 아무 것도 아닌 인간들이 보는 시각이 얼마나 정확하고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합당하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누구나 자신의 시각에서 보여진 것을 말할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과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서 어떠한 의견을 내놓을때
그 사람을 한 수 아래로 보거나, 잘못된 목사님들로부터 교육 당해 온 불쌍한 사람으로만 보지 마시고
한 번쯤 그래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글로 받아들여주시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찌 다 이해하며, 이해한다고 한 들 어찌 다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뜻안에 거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내는 것 아니겠어요?
=> 너무나 동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 올바르게 아느냐 모르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얼마나 신뢰하느냐 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속속들이 파헤쳐서 낱낱이 아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생각임을 저도 인정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이미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자칫 잘못 흘러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이 무오하냐 안하냐, 성경을 성령님이 썼느냐 사람이 썼느냐, 우리가 성경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하느냐 다 파헤쳐야 하느냐 등등의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결코 부인하지 않아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그리스도시요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않은채 성경을 이해하려 하고 고민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여전히 보수 교회의 목사님들 설교와 그동안에 들어왔던 잘못된 것들이 저의 사고 방식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세뇌가 되어있어서 라고 말씀하신다면 제가 무어라고 더 드릴 말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어떠한 경우라도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올리브님과 그 외 다른 다비아 회원님들도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저와 같지 않으신가요?
제가 이곳에서 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새로운 시각도 보았습니다.
별 것 아닌 느낌하나 말씀드리면
작은자님은 다비아 회원님들과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서로 약간의 대립이 보입니다.
그리고 작은자님을 제외한 많은 다른 분들은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계시고
설령 자신의 생각과 약간 다른 댓글이 달리거나 글이 올라올지라도 감싸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판단할 의미도 필요도 없이 서로 생각은 달라도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소가 이곳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추구하는 것이나 근본적인 생각이 같다면 약간 다른 것이 있다할지라도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지 상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떠한 시각이든지 아무 것도 아닌 인간들이 보는 시각이 얼마나 정확하고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합당하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누구나 자신의 시각에서 보여진 것을 말할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과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서 어떠한 의견을 내놓을때
그 사람을 한 수 아래로 보거나, 잘못된 목사님들로부터 교육 당해 온 불쌍한 사람으로만 보지 마시고
한 번쯤 그래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글로 받아들여주시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2008.04.05 12:05:23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진정 2000년 전에 그 예수는 우리에게 무얼 바라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기 이전에 예수, 그 자체를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저는 예수님을 너무너무너무 사랑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잘 모릅니다. 그 분의 실체도 아직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예수님이 메시야여서 사랑하고, 예수님이 우릴 구원하셔서 사랑하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 무언가를 받았으니까, 반대급부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지 않을까요?
----"예수, 당신은 하늘이 보낸 나의 영원한 스승, 다정한 친구입니다." 나는, 신약성경에 만연되어 있는 바와는 달리, 특히 바울이나 히브리서, 묵시록과는 달리, "보상"을 바라고 예수를 믿지는 않는다. 이미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발견한 예수, 복음서 속의 예수가 가르쳐 준 삶의 길이 나에게 삶의 재미, 적어도 삶의 보람을 주는 충분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신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구요. 다비아 분들이 이 말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했습니다. 전 이 글을 읽고, 너무 많이 가슴이 아팠거든요. 난 예수에게 보상을 바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은 조건있는 사랑이 아니잖아요. 그 분이 절 구원하셨기에, 하나님이 절 사랑하시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본능적인 것인데...
그 예수는, 제 삶을 일깨웠고, 그 분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란 무엇인가, 저를 각성시켰어요.
그 예수를 통해서, 전 새롭게 변화되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일반적인 성공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이 아닐까요?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따르미로서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부활신앙이 아닐런지요. 예수가, 신이고, 인간이고를 떠나서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수, 참 좋은 나의 친구...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기 이전에 예수, 그 자체를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저는 예수님을 너무너무너무 사랑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잘 모릅니다. 그 분의 실체도 아직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예수님이 메시야여서 사랑하고, 예수님이 우릴 구원하셔서 사랑하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 무언가를 받았으니까, 반대급부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지 않을까요?
----"예수, 당신은 하늘이 보낸 나의 영원한 스승, 다정한 친구입니다." 나는, 신약성경에 만연되어 있는 바와는 달리, 특히 바울이나 히브리서, 묵시록과는 달리, "보상"을 바라고 예수를 믿지는 않는다. 이미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발견한 예수, 복음서 속의 예수가 가르쳐 준 삶의 길이 나에게 삶의 재미, 적어도 삶의 보람을 주는 충분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신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구요. 다비아 분들이 이 말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했습니다. 전 이 글을 읽고, 너무 많이 가슴이 아팠거든요. 난 예수에게 보상을 바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은 조건있는 사랑이 아니잖아요. 그 분이 절 구원하셨기에, 하나님이 절 사랑하시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본능적인 것인데...
그 예수는, 제 삶을 일깨웠고, 그 분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란 무엇인가, 저를 각성시켰어요.
그 예수를 통해서, 전 새롭게 변화되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일반적인 성공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이 아닐까요?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따르미로서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부활신앙이 아닐런지요. 예수가, 신이고, 인간이고를 떠나서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수, 참 좋은 나의 친구...
2008.04.05 12:42:06
라베뉴님의 위 댓글이 저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옴을 느낍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토씨 한마디도 빼지 않고 다 동의하고 이 말씀에 감동먹었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지네요.
2008.04.07 09:36:50
한가지 질문입니다. 여기서 논의되는 "神" 이란 말은 어떤 신을 의미하나요, 희랍철학적인 의미인가요? 아님 희브리적인 의미인가요? 아니면 한국적 사고속의 신을 의미하는가요 ? 신 이해는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른것 같은데요...구약성서 신약성서에서 일커러지는 "신"의 의미는 다른것이 아닌가요?
2008.04.07 14:38:42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게 믿어지거든, 내가 "너희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아들)'"인 줄로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요14:11)
저도 이 부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잘 모르겠는데, 누군가 풀어주실 분 없나요?
저도 이 부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잘 모르겠는데, 누군가 풀어주실 분 없나요?
2008.04.08 15:30:16
라베뉴님의 질문이 위 댓글의 첫 질문으로 다시 돌아왔네요.
지난 번에도 이 질문에 답을 하려다 주석을 좀 찾아보고 답하려고 미뤄뒀는데 집에 가서 찾아보지를 않고 그냥 돌아와버렸습니다. (기억을 하지도 못했고, 사실 능력이 안되어서 미룬거죠.)
주말에 집에 가서는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아내의 눈치를 많이 보거든요.
사실 저 같은 사람이 답할 만한 사항은 아니라 생각되기에 정목사님이나 기타 다른 분 들의 답을 저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아무런 답이 없네요. ㅋㅋ
라베뉴님, 제가 보기에는 위 질문이 사실 생각보다는 심각한 문항입니다.
삼위일체 문제까지도 언급될 수 있는 질문이며, 예수를 인성과 신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고, 이미 다비아에서 여러 번 논의되었던 내용이라 굳이 윗 구절이 아니라도 그 대답을 찾아 보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야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지만, 공식적으로 이 곳에 올리기에는 좀 ...
하여간에 제가 개인적인 견해라도 올릴 각오가 생기면 한 번 적어 보겠습니다.
지난 번에도 이 질문에 답을 하려다 주석을 좀 찾아보고 답하려고 미뤄뒀는데 집에 가서 찾아보지를 않고 그냥 돌아와버렸습니다. (기억을 하지도 못했고, 사실 능력이 안되어서 미룬거죠.)
주말에 집에 가서는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아내의 눈치를 많이 보거든요.
사실 저 같은 사람이 답할 만한 사항은 아니라 생각되기에 정목사님이나 기타 다른 분 들의 답을 저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아무런 답이 없네요. ㅋㅋ
라베뉴님, 제가 보기에는 위 질문이 사실 생각보다는 심각한 문항입니다.
삼위일체 문제까지도 언급될 수 있는 질문이며, 예수를 인성과 신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고, 이미 다비아에서 여러 번 논의되었던 내용이라 굳이 윗 구절이 아니라도 그 대답을 찾아 보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야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지만, 공식적으로 이 곳에 올리기에는 좀 ...
하여간에 제가 개인적인 견해라도 올릴 각오가 생기면 한 번 적어 보겠습니다.
2008.04.15 14:27:11
"신" 이라는 것도 고래(古來)로 서양에서 발전되어온 관념적 틀이 아닐까 해서요... 예수는 신이다, 아니다... 이런 논쟁들이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구요... 이원론적으로 인간과 신을 구분하는 것이 썩 잘된 도식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뭐 그런 생각을 긁적 긁적 해봅니다... 종교학자님들도 많으신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 같아서 좀 쭐리긴 합니다만...
2008.04.15 15:05:27
불교를 보면서 참 매력을 많이 느낍니다. 보통 알기를 불교는 무신론의 종교다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서양적인 의미에서의 무신론이 절대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불교가 서양적인 의미에서의 유신론이냐... 그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요...
이 틀, 저 틀로도 규정할 수 없지만, 불교에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성을 수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성불"이란 것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이루어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짙게 느껴지거든요...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맑은 물이 담길 수 있도록 스스로를 빈 그릇으로 만드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그릇 속으로 맑은 물이 담기는 과정은 "신비" 입니다... 그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선승이나, 고상한 수도자라할지라도 그저 부질없는 고행과 자기학대를 하는 것 뿐이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견지에서 신과 인간을 생각하보면 신과 인간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라기보다는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가 신이며 인간이란 이야기도 이런 틀로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틀, 저 틀로도 규정할 수 없지만, 불교에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성을 수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성불"이란 것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이루어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짙게 느껴지거든요...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맑은 물이 담길 수 있도록 스스로를 빈 그릇으로 만드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그릇 속으로 맑은 물이 담기는 과정은 "신비" 입니다... 그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선승이나, 고상한 수도자라할지라도 그저 부질없는 고행과 자기학대를 하는 것 뿐이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견지에서 신과 인간을 생각하보면 신과 인간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라기보다는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가 신이며 인간이란 이야기도 이런 틀로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2008.04.16 15:29:09
첫날처럼님의 지난 번 댓글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군요.
사실 불교에 대해서 저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좀 이라도 알려고 하면 첫날처럼님처럼 느끼게 됩니다.
한국기독교가 왜곡된 지는 불과 얼마되지 않았지만, 한국불교가 왜곡된 길로 걸어온 지는 꽤 오랜세월이라 대중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그래도 수행자 들은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스스로의 힘으로 성불한다?
진짜 어불성설입니다.
기독교인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과 하나과 되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비워나가는 방법이 수행을 겸한다는 것이 좀 다르지요.
부처가 무엇인지, 법이 무엇인지, 승이 무엇인지만 제대로 알아도 불교를 단순히 무신론이라 치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불교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더 매력적인 것은 기독교입니다, 첫날처럼님!!!
사실 불교에 대해서 저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좀 이라도 알려고 하면 첫날처럼님처럼 느끼게 됩니다.
한국기독교가 왜곡된 지는 불과 얼마되지 않았지만, 한국불교가 왜곡된 길로 걸어온 지는 꽤 오랜세월이라 대중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그래도 수행자 들은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스스로의 힘으로 성불한다?
진짜 어불성설입니다.
기독교인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과 하나과 되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비워나가는 방법이 수행을 겸한다는 것이 좀 다르지요.
부처가 무엇인지, 법이 무엇인지, 승이 무엇인지만 제대로 알아도 불교를 단순히 무신론이라 치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불교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더 매력적인 것은 기독교입니다, 첫날처럼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정목사님... 답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