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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s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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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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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3개 구절은 의를 행할시에 많은 불협화음이 있을것임을 말하는 것이며,
후반부 3개 구절은 그런 갈등상황에서의 정답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공의를 행하는것이 어렵다는걸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목숨을 걸고 공의를 행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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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해석인가요??
고수님들의 한수 지도 부탁드립니다..꾸벅!!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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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3개 구절은 의를 행할시에 많은 불협화음이 있을것임을 말하는 것이며,
후반부 3개 구절은 그런 갈등상황에서의 정답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공의를 행하는것이 어렵다는걸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목숨을 걸고 공의를 행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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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해석인가요??
고수님들의 한수 지도 부탁드립니다..꾸벅!!
2008.07.02 23:11:27
닥터 케이 님 의견에 동감입니다 . 그러나 예수님 "행태" 를 보면 유대교인 가정집안에서도 상당한 갈등과 번뇌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미친 사람으로 취급 될 정도였으니요...오늘날도 우리가 철저히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아마도 비슷한 갈등과 혼란이 오리라 생각됩니다. 글자 그대로 현실을 가지기는 힘들지만, 적당히 타협 하지 않는 한 가치관의 차이로 갈등이 오리라 생각됩니다. 한국의 선교 초기에도 얼마나 많은 갈등과 혼란을 가져 왔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며, 지금도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 가족을 사랑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자기 십자가"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8.07.03 05:15:01
정성훈님께서 드디어 뭔가를 결심할 시기가 가까온것 같습니다~
올리시는 글이 많은 부분 고민하시는 심경이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을 해봅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성령의 간섭하심이라면 어떤식으로든 갈 길을
보여주실겁니다. 그것은 아무리 거절하려 해도 쉽지 않겠지요.
정성훈님이 지금 미혼이신지 기혼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많은것들을 포기하셔야 할거예요~
닥터 케이님의 댓글은 참 감짝 놀랄부분들이 많습니다^^
평민님처럼 저도 동감합니다.
그렇다해도 제 소견으로는 비록 후대에 사도들이 삽입을 하였다 해도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영감으로 기록한 말씀이기에 거기에 인간적인 생각이 첨언되었다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저의 생각이랍니다.
이미 신앙한다는 것에는 나의 의지와 결단 이전에 그렇게 광야에 던져질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까지도 매몰차게 때로는 등을 돌려야만 하는 극단적인 순간이 필연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들이기 위하여 칼을 들어야 하는 순간처럼 말입니다.
모세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까지 만들어서 광야에 내어 보내시면서 그의 의지와 모든 자기힘을 뺀 후에
부르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관계속에서 필연적으로 부닥쳐야 하고 결단해야 하고 선택을 해야하는 시기가 온다면
그때 과연 어떻게 할까를 염려하거나 고민할 때에 스스로에게 답을 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인신공격과 수모를 당해야할 것입니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주의 말씀에 따를 것인가를 묻는것은 아닐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른다는 의미가 내가 생각할수 도 없는 그런 순간에서도
과연 결심할수 있는가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겠다고 감동적인 고백을 하던 사람에게
나는 머리둘곳이 없다고 하였지요?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하던 이에게는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지말라 하셨고요
부모의 장례를 치루고 따르겠다던 이에게 죽은자들에게 맞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지요.
그저 저의 생각입니다^^
올리시는 글이 많은 부분 고민하시는 심경이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을 해봅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성령의 간섭하심이라면 어떤식으로든 갈 길을
보여주실겁니다. 그것은 아무리 거절하려 해도 쉽지 않겠지요.
정성훈님이 지금 미혼이신지 기혼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많은것들을 포기하셔야 할거예요~
닥터 케이님의 댓글은 참 감짝 놀랄부분들이 많습니다^^
평민님처럼 저도 동감합니다.
그렇다해도 제 소견으로는 비록 후대에 사도들이 삽입을 하였다 해도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영감으로 기록한 말씀이기에 거기에 인간적인 생각이 첨언되었다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저의 생각이랍니다.
이미 신앙한다는 것에는 나의 의지와 결단 이전에 그렇게 광야에 던져질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까지도 매몰차게 때로는 등을 돌려야만 하는 극단적인 순간이 필연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들이기 위하여 칼을 들어야 하는 순간처럼 말입니다.
모세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까지 만들어서 광야에 내어 보내시면서 그의 의지와 모든 자기힘을 뺀 후에
부르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관계속에서 필연적으로 부닥쳐야 하고 결단해야 하고 선택을 해야하는 시기가 온다면
그때 과연 어떻게 할까를 염려하거나 고민할 때에 스스로에게 답을 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인신공격과 수모를 당해야할 것입니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주의 말씀에 따를 것인가를 묻는것은 아닐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른다는 의미가 내가 생각할수 도 없는 그런 순간에서도
과연 결심할수 있는가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겠다고 감동적인 고백을 하던 사람에게
나는 머리둘곳이 없다고 하였지요?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하던 이에게는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지말라 하셨고요
부모의 장례를 치루고 따르겠다던 이에게 죽은자들에게 맞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지요.
그저 저의 생각입니다^^
2008.07.03 07:34:29
작은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도 이 구절이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거짓말(?)이라는 주장을 하려는게
아니라, 이 말씀이 만약 후대의 결과물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인가를 파악해서 적용을
해야지, 기계적으로 무조건 가족들과 싸움질하면서 승리(?)하는게 능사라는 식의 해석을 하면 안된
다는걸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이 이 말씀에 부합하는 상황이라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겠지요.
저도 이 구절이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거짓말(?)이라는 주장을 하려는게
아니라, 이 말씀이 만약 후대의 결과물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인가를 파악해서 적용을
해야지, 기계적으로 무조건 가족들과 싸움질하면서 승리(?)하는게 능사라는 식의 해석을 하면 안된
다는걸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이 이 말씀에 부합하는 상황이라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겠지요.
2008.07.03 07:48:50
닥터 케이님~
저도 님의 의도를 모르고 그런것이 아닌줄 아시죠^^
다시와서 제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자를 버리라??는 의미에서
집착이나 매이지말고 자유하라는 것은 아닐까요^^
적절한지 모르지만
부모자식간에 집착의 관계가 아니라 독립적인 관계, 동반자의 관계로의 전환같은거 말입니다.
집착은 서로에게 짐이 될수도 있고 별것 아닌것으로 인하여 상처를 주고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어요^^
저도 님의 의도를 모르고 그런것이 아닌줄 아시죠^^
다시와서 제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자를 버리라??는 의미에서
집착이나 매이지말고 자유하라는 것은 아닐까요^^
적절한지 모르지만
부모자식간에 집착의 관계가 아니라 독립적인 관계, 동반자의 관계로의 전환같은거 말입니다.
집착은 서로에게 짐이 될수도 있고 별것 아닌것으로 인하여 상처를 주고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어요^^
2008.07.03 09:47:15
앞 뒤 구절을 볼 때 전 단순하게도 딱 한가지 생각만 드네요.
가족보다, 친족보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라.
제 1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제 2 계명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순서가 있는지는 제가 신학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같은 맥락이 아닐까하는..
그리고 이 둘은 항상 같이 붙어다녀야 큰 효력을 발휘한다는...
가족보다, 친족보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라.
제 1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제 2 계명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순서가 있는지는 제가 신학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같은 맥락이 아닐까하는..
그리고 이 둘은 항상 같이 붙어다녀야 큰 효력을 발휘한다는...
2008.07.04 21:48:13
눈사람님의 댓글을 읽다 문득 생각이 났는데요..
왜 예수님은 사람들이 지키지도 못할 계명을 지키라고 주셨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나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게
정말 가능한 걸까요?
왜 이렇게 실행 불가능한 계명을 주셨는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이 계명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시는 분 설명좀 부탁드립니다.. ^^
(좀 생뚱맞군요..^^;;)
왜 예수님은 사람들이 지키지도 못할 계명을 지키라고 주셨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나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게
정말 가능한 걸까요?
왜 이렇게 실행 불가능한 계명을 주셨는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이 계명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시는 분 설명좀 부탁드립니다.. ^^
(좀 생뚱맞군요..^^;;)
2008.07.06 00:31:31
눈사람님! 제 1계명과 2계명으로 나눈 것은 그것이 다른 것이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동일함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타 구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되어 있는 것 아시죠?
그런데 라이프님 말씀대로 예수께서 사람들이 지키지도 못할 계명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참 웃기지 않나요???
그런데 바로 여기서 기독교의 왜곡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여기서도 적용되어버리지요.
그래서 많은 목사와 성도 들이 그런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율법이지 실제로 실행할 수 없는 규정이라고 단정해 버리고는 결코 실행할 수 없다고 둘러대지 않나요?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많은 어록들이 직접 예수님이 하신 말이든 아님 후대의 교회공동체의 기록이든간에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율법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와 닿습니다.
바로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정신이 바로 이것이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이런 구절이라구요.
진짜 사람이 그렇게 살아내지 못할 것 같습니까?
정말 진지하게 깊이 생각해보시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지 않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시고 계시는 것이지
할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일 수가 없지요.
결코 지키지도 못할 윤리를 정해놓고 그것에 대해서 회개하라니? 무슨 그런 말이 있나요.
다만 그렇게 살아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가 쉽지 않지요.
제 생각에는 예수께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슴에 대해서 가르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타 구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되어 있는 것 아시죠?
그런데 라이프님 말씀대로 예수께서 사람들이 지키지도 못할 계명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참 웃기지 않나요???
그런데 바로 여기서 기독교의 왜곡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여기서도 적용되어버리지요.
그래서 많은 목사와 성도 들이 그런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율법이지 실제로 실행할 수 없는 규정이라고 단정해 버리고는 결코 실행할 수 없다고 둘러대지 않나요?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많은 어록들이 직접 예수님이 하신 말이든 아님 후대의 교회공동체의 기록이든간에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율법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와 닿습니다.
바로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정신이 바로 이것이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이런 구절이라구요.
진짜 사람이 그렇게 살아내지 못할 것 같습니까?
정말 진지하게 깊이 생각해보시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지 않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시고 계시는 것이지
할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일 수가 없지요.
결코 지키지도 못할 윤리를 정해놓고 그것에 대해서 회개하라니? 무슨 그런 말이 있나요.
다만 그렇게 살아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가 쉽지 않지요.
제 생각에는 예수께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슴에 대해서 가르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2008.07.06 01:45:45
월광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흔히.. 인간이 할 수 없는것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케 되었다고 하죠.?
그런데 그런 사랑이 어떤 모양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런 정도의 사랑은 하고 산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웃에 대해 목숨까지 내놓는 사랑의 모습들은 이교도에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고 보구요.
그래서 궁금합니다.
이게 뭐가 다른건지.. 정말 차이가 있는지..?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일텐데요..
그리고 저를 포함한 이땅의 많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사랑없는 모습들이 바로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케된 사랑의 모습"들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것이랍니다..
흔히.. 인간이 할 수 없는것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케 되었다고 하죠.?
그런데 그런 사랑이 어떤 모양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런 정도의 사랑은 하고 산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웃에 대해 목숨까지 내놓는 사랑의 모습들은 이교도에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고 보구요.
그래서 궁금합니다.
이게 뭐가 다른건지.. 정말 차이가 있는지..?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일텐데요..
그리고 저를 포함한 이땅의 많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사랑없는 모습들이 바로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케된 사랑의 모습"들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것이랍니다..
2008.07.06 15:31:04
하나님 말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엿보이는군요.
저를 불러도 뾰족한 답변을 들을 수가 없으니, 어쩌지요?
상식적으로만 한 마디 할 수 있을 뿐이에요.
라이프 님의 문제 제기는 두 가지이군요.
1.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명령은 불가능하다.
2. 그 명령을 기독교인보다 더 충실하게 따르는 이교도들이 많다. 혹은 큰 차이가 없다.
저의 대답은 두 가지 구분하지 않고, 그냥 한 통으로 나가겠어요.
우선 성서를 읽을 때 그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위의 어록은 특별한 대상을 향한 거에요.
또는 특별한 이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하구요.
그들은 곧 제자들입니다.
실제로 출가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갈 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은
가족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결혼하지 않는 신부나 승려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어떤 절대적인 세계에 자신의 삶을 걸어두기 때문에
상대적인 세계인 가족의 요청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지요.
이런 특별한 대상을 향한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일반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기독교 신앙이 가족과 충돌하는 건 아니에요.
물론 어떤 특수한 사안에서 생각이 갈릴 수가 있어요.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냐, 마냐 하는 충돌이요.
대개 여자분들은 꼬박꼬박 바치려고 하고 남자들은 뭐 그렇게 까지 하고 생각하지요.
이런 문제들은 궁극적인 게 아니에요.
그런 것은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에요.
가정을 하나도 살피지 않고 매일 교회에 나가 살면서
가족이 그걸 뭐라하면 고난받는다는 식으로 자기를 합리화 하는 건 코메디지요.
또는 현실과 역사와 문화를 완전히 무시하는 소종파의 종교적 열광주의에요.
가족과 예수 신앙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양자택일의 경우는 아주 특별한 때만 벌어지는데,
한평생에 한 두번 일어날까 말까 합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위의 명령을 일반화하지 말라는 게 대답이었는데요.
그렇다면 모든 걸 상황논리에 의해서 해결하라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하겠지요.
늘 현실과 타협하면서 신앙행위를 상대화하라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요.
그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판단해야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가족에게만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가족과는 헤어져야 합니다.
궁극적인 사건(죽음) 앞에서 우리는 가족을 버려합니다.
가족에 대한 연민이 많으면 결국 이런 궁극적인 사건으로 들어갈 수 없겠지요.
궁극적인 사건에 직면한 태도로 주변과의 관계를 맺어보세요.
그게 기독교 영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궁극적인 사건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위의 말씀도 역시 궁극적인 사건을 직면한 제자들의 신앙이에요.
그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그 사건 앞에서 모든 것은 주변적인 것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노파심으로 한 마디 더 하면,
궁극적인 사건이라는 말로 가족에 대한 무책임을 합리화하면 정말 안 됩니다.
그 둘은 지평이 다른 거에요.
범주가 다른 거지요.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를 같은 차원으로 끌어내려 일반화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허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깊이 알면
그때 주변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들어오겠지요.
좋은 주일 하오!
저를 불러도 뾰족한 답변을 들을 수가 없으니, 어쩌지요?
상식적으로만 한 마디 할 수 있을 뿐이에요.
라이프 님의 문제 제기는 두 가지이군요.
1.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명령은 불가능하다.
2. 그 명령을 기독교인보다 더 충실하게 따르는 이교도들이 많다. 혹은 큰 차이가 없다.
저의 대답은 두 가지 구분하지 않고, 그냥 한 통으로 나가겠어요.
우선 성서를 읽을 때 그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위의 어록은 특별한 대상을 향한 거에요.
또는 특별한 이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하구요.
그들은 곧 제자들입니다.
실제로 출가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갈 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은
가족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결혼하지 않는 신부나 승려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어떤 절대적인 세계에 자신의 삶을 걸어두기 때문에
상대적인 세계인 가족의 요청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지요.
이런 특별한 대상을 향한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일반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기독교 신앙이 가족과 충돌하는 건 아니에요.
물론 어떤 특수한 사안에서 생각이 갈릴 수가 있어요.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냐, 마냐 하는 충돌이요.
대개 여자분들은 꼬박꼬박 바치려고 하고 남자들은 뭐 그렇게 까지 하고 생각하지요.
이런 문제들은 궁극적인 게 아니에요.
그런 것은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에요.
가정을 하나도 살피지 않고 매일 교회에 나가 살면서
가족이 그걸 뭐라하면 고난받는다는 식으로 자기를 합리화 하는 건 코메디지요.
또는 현실과 역사와 문화를 완전히 무시하는 소종파의 종교적 열광주의에요.
가족과 예수 신앙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양자택일의 경우는 아주 특별한 때만 벌어지는데,
한평생에 한 두번 일어날까 말까 합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위의 명령을 일반화하지 말라는 게 대답이었는데요.
그렇다면 모든 걸 상황논리에 의해서 해결하라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하겠지요.
늘 현실과 타협하면서 신앙행위를 상대화하라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요.
그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판단해야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가족에게만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가족과는 헤어져야 합니다.
궁극적인 사건(죽음) 앞에서 우리는 가족을 버려합니다.
가족에 대한 연민이 많으면 결국 이런 궁극적인 사건으로 들어갈 수 없겠지요.
궁극적인 사건에 직면한 태도로 주변과의 관계를 맺어보세요.
그게 기독교 영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궁극적인 사건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위의 말씀도 역시 궁극적인 사건을 직면한 제자들의 신앙이에요.
그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그 사건 앞에서 모든 것은 주변적인 것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노파심으로 한 마디 더 하면,
궁극적인 사건이라는 말로 가족에 대한 무책임을 합리화하면 정말 안 됩니다.
그 둘은 지평이 다른 거에요.
범주가 다른 거지요.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를 같은 차원으로 끌어내려 일반화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허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깊이 알면
그때 주변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들어오겠지요.
좋은 주일 하오!
2008.07.07 09:58:51
특별한 사람에게 한 말을 일반화 시켜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씀이시군요.
마치 구약 성서에 있는 말씀을 신약 성경으로 끌어와 맞춰서 다시 그것을 현재로 끌어옴으로써
잘못된 것들을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맞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일반화 시켜서는 안되는 말씀들은 무엇 무엇인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하간에 저에게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께 오라는 말씀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목사님 덕분에 정신과에는 가지 않아도 되겠네요.ㅎㅎ
이 말씀이시군요.
마치 구약 성서에 있는 말씀을 신약 성경으로 끌어와 맞춰서 다시 그것을 현재로 끌어옴으로써
잘못된 것들을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맞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일반화 시켜서는 안되는 말씀들은 무엇 무엇인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하간에 저에게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께 오라는 말씀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목사님 덕분에 정신과에는 가지 않아도 되겠네요.ㅎㅎ
2008.07.07 14:06:11
몇해전에 수백억의 재산을 노리고 친부모를 살해한 엽기적인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돈문제로 단란했던 가족들이 분열되는 많은 경우가 있슴을 압니다 만약 우리중의 누가 수백억의 재산을 얻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피붙이와 결연히 싸우지 않으리라고 보장할수있나요? 저는 그럴 자신이 없군요 그래서 재벌들의 재산싸움에도 가급적 비난하는 말을 아끼려합니다 그런데,수백억의 재산보다도 귀한 복음을 위해서는 어떨까요?가족간의 사랑이야 귀하고 귀한 일이지만,육적인 일에 불과하고 복음이나 천국에 견줄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석씨나 공씨의 말에도 권위가 있거늘,우리가 주라고 시인하는 그분의 명령에 토를 달고' 절대 가족만은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가족교라는 다른 종교를 믿는바가 되겠지요 만약에 누가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며 자신의 자식사랑을 위하여 이웃을 위험에 빠트린다면 저는 그사람을 주저없이 '사이비'라고 부를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명령은 어떠한 조건이 붙는 '특수한'명령이 아님을 믿습니다그런데도 패역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이웃이 이용가치가 있다면)그를 사랑하겠습니다 (원수가 더큰 원수를 제압한다면)원수를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편의대로 믿고 있지는 아닌가요?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사랑' 명령에 '언제나'순복할수 있게되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명령은 어떠한 조건이 붙는 '특수한'명령이 아님을 믿습니다그런데도 패역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이웃이 이용가치가 있다면)그를 사랑하겠습니다 (원수가 더큰 원수를 제압한다면)원수를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편의대로 믿고 있지는 아닌가요?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사랑' 명령에 '언제나'순복할수 있게되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과연 공생애활동때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당시라면 "십자가"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구절은 아무래도 후대에 생성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잘 아시는 분 계시면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