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15일
베드로의 울음(6)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14:71)
세 번이나 거듭해서 “당신은 예수와 한 통속이야.” 하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급기야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있을까요? 너무 심하지 않나요? 앞에서 두 번 부인한 수준으로 이번에도 부인하고 넘어갈 일이지 어쩌자고 저주 맹세를 한단 말인가요?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출생, 또는 운명을 저주할 수 있었습니다. “저주하다”는 뜻의 헬라어 ‘아나테마티제인’은 성서에서 늘 저주받아 파멸될 사람이나 도시에 저주를 내릴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저주 선언은 그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이 저주는 예수를 대상으로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상황에서 예수를 저주함으로써 형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저주는 이런 초기 기독교의 상황이 반영된 것인지 모릅니다. 둘째, 이 저주는 베드로 자신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는 곧 다음과 같은 뜻이겠지요.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예수와 관련이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도 좋소. 이를 통해서 베드로의 결백이 강력하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첫째 해석이든지 둘째 해석이든지 예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베드로의 주장은 최종적인 승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를 누가 믿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는 마지노(Maginot) 선(線)을 넘은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가슴이 저며 오는군요. 배교에 가까운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 탓인지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저주의 맹세는 인간 스스로의 약함에 대한 고백이지 아닐까요?
이 세상에는 주군을 위해 절대 충성하며,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선망하는 자에게 목숨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의 명분과 앞으로의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항명하기도 합니다.
뭐가 생명까지 희생하며 지켜온 명분인지 모르겠지만요.
베드로는 순간적인 위험을 넘어가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지만 우리가 그를 비난할 수있을까요?
그의 연약한 거짓 고백에 인간이 한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합니다.
처량하게 무너지는 예수님을 목도하면서 베드로는 한없이 떨어지는 모습에 연민을 느낍니다.
거짓 고백으로 인해 그가 앞으로 짊어지어야 할 무거운 짐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울음을 묵상하면서 슬프기만 합니다.
스팰리 같은 분은 인간에게는 두가지 마음과 의식이 존재한다고 그의 실험 보고서에서 임상 실험 결과를 말하고 있더군요. 베드로는 울었을 겁니다. 그토록 존경해 오던 따르던 예수 그러나 그에게 닦친 상황은 우리가 이해하여 평가하기에는 판단을 보류해야 할 것들이 있을꺼예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가 주님을 사랑했다는 거지요. 이런 측면에서 오늘 날 사이버 네틱스와 같은 학문이 등장하게 되 거지요. 기억의 매체는 그의 가슴에 한 없는 눈물로 통화하게 하면서 아마 편도 핵이 작용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마 하나님은 과거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의 눈물을 거두시게 하시고 천국에서 예수님과 그 때 그 시절 아름다웠던 동산의 노래를 부르고 계실 꺼예요. ...카드라 통신은 언제나 불신은 낫는 경우가 많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