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저는 정목사님의 여러 설교들을 접하면서 타설교자들의 통상적인 해석들과는 어느 정도 구별된 차별성, 그리고 진정성을 접해왔습니다. 특히나 설교집 <그날이 오면>을 보면 이런게 더 두드러집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위 설교본문(눅10:38-42)에서는 이런 점이 전처럼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과 별 차이를 느끼기 힘들어 보입니다.

이렇게 느끼게 된 계기는 김경희 교수(목원대)의 논문(누가복음10:38-42:마리아의 권리와 예수의 지지 선언)과 다른 몇 권의 책을 접하면서인데, 본 텍스트 해석에 대해 점차 회의가 들기 시작하더군요.

“우리에게 익숙한 가장 통상적인 해석에 의하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서로 상반되는 삶을 추구하는 두 전형이다. 즉 마르다는 물질적이고도 세속적인 것에 정신이 팔려 진정으로 필수적인 것을 놓치는 삶의 전형을, 마리아는 영적이며 영원한 것을 추구함으로써 진정한 제자의 삶을 구현하는 삶의 전형을 나타낸다.”(김경희,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5집, 88)

비록 정목사님께서는,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으레 마르다를 폄하는데 비해 마르다를 일방적으로 폄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다는 무조건 잘못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무조건 잘했다는 게 아닙니다.”(그날이 오면, 3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설교 텍스트는 전체구도에서, 마리아가 ‘더 좋은 몫’(p306)을 선택했다고 천명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마르다는 ‘덜 좋은 몫’을 선택했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게다가 마리아는 영적인 세계에 집중하는 사람으로 봄으로써 전통적인 해석의 범주에 머무는 것 같습니다.
또, 마리아와 마르다를 이원론적으로 분리시켜 두 여성의 태도 중 하나만이 양자택일적으로 더 바람직한 신앙인의 삶의 자세로 평가하는 듯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지만,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어 있는 영적인 세계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게 곧 영성입니다.”(그날이 오면, 306)

아마도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두 상반되는 전형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눅 10:41,42절’의 "많은 일"(41절)과 “한 가지”(42절)의 이 두 어구 때문인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선택 한 ‘한 가지’를 ‘좋은 몫’과 동일시함으로써 마리아를 영적인, 천상적인 일에 전력하는 신앙적 인간의 전형으로 해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텍스트의 관심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대립시키는데(41b-42a절)있지 않고 오히려 마리아의 권리와 이에 대한 예수의 지지를 부각시키는데(42b절) 있다."(김경희, 85)

그리고 위 텍스트(41b,42a절)의 ‘공동번역 개정판’은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로 나온데 비해 ‘개역개정판’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42a절에서 후 버전이 전 버전 보다 어구(몇 가지만 하든지)가 더 첨가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텍스트 전승’문제가 불거지는데 이 부분에 대한 사본만도 5가지나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몇 안 되는 것’(몇 가지-이 표현은 분명히 음식 가지 수를 시사한다)을 원래의 텍스트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면 “많은 것들”과 “한 가지”를 세속적인 것 내지는 상대적인 가치와 영적인 것 내지는 절대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파악하는 해석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한국기독교신학논총35집, 86.
그러므로 “필자가 보기에 이 텍스트는 ‘많은 것들’과 ‘한 가지’를 서로 상반된 상징으로 제시한다거나 마르다와 마리아를 두 상반되는 전형으로 나타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85)


제가 이 텍스트에 대해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한 때는 몇 개월 전에, 소위 '새관점'의 주창자 중의 한 명인 N.T.Wright의 책(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속에서 본문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내용을 보면서 부터입니다.

“사회인류학은 서로 다른 사회들이 서로 다른 세계관과 사회 규범들을 가지고 작용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이러한 사회인류학적인 고찰이 없다면, 마리아, 마르다, 예수 간의 대화는 단순히 마리아는 좀 더 ‘영적이고’ 마르다는 좀 더 ‘실제적인’ 사람이라는 식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대목(눅10:38-42)은 가사일 보다 기도가 우선이라는 식의 수많은 설교의 주제가 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 농촌의 문화를 들여다보게 되면, 즉시 이런 식의 해석을 뒤집는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리아는 당시 여자들에게 맡겨졌던 일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 것이다:
  예수가 마르다에게 한 말은 마리아가 그녀에게 기대되지 않은 공간에 이례적으로 있는 것이 옳다는 것  을 보여주는 데에 기여한다; 이 이야기는 마땅한 도리에 관한 원래의 인식을 의도적으로 뒤집는다.
그리고 누가의 이야기 속에서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기 위하여 식탁시중을 드는 일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보다 좀 더 큰 뉘앙스들을 지니게 된다.”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102)

그러나 이것만 봐서는 위 텍스트에 대한 라이트의 ‘정확한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에 대한 해석에 빛을 던져준 것이 <민들레 성서이야기>(김재성, 민들레책방) 중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서였습니다.  

“여자들에게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도 하락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짐승들에게 글이나 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자들은 그런 것을 배울 필요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을 하였다....유대인 남자는 공적인 장소에서 여자와 단 둘이 있어선 안 되었으며, 길에서 여자와 얘기하거나 인사하는 것도 수치로 여겼다. 부유층 여자들의 경우는 거의 집에 갇혀 있는 생활을 해야 했다. 처녀는 사랑방으로 통하는 문까지만, 결혼한 여인은 정원의 문 까지만 나올 수 있었다. 시골 여인들은 농사일도 거들어야 하고 물도 길러 가야 했기 때문에 이들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웠다.”(김재성, 민들레 성서이야기, 287)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눅10:38-42)는 여자들은 그저 부엌일이나 하고 공부는 해서 안 된다는 유대사회의 통념을 깬 이야기다. 부엌 일로 분주한 언니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 섭섭해서 예수께 이르지만, 예수는 마리아를 나무라지 않고 두둔해 준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랍비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모습과 같다. 예수는 이 이야기로 마리아에게 부엌일을 돕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여자는 배우지도 못하고 종 같이 일만 해야 한다는 그 사회의 통념을 깨고, 여자도 배울 수 있고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김재성, 292)

저 자신도 그동안 이 본문을 여러 차례 접하면서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전통적인 해석에 안주하며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자료들을 접하면서, 때로는 우리가 그동안 무심코 들어온 통상적인 해석들을 뒤집어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더군다나 누가복음이 어린이들과 억압받고 천대받던 여성들, 약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것을 볼 때 전통적인 해석을 뒤집는 이런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서 목사님의 답변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참고사항:'마중물'은 '글로리아'의 새로운 닉네임입니다.
              몇 몇 남성 다비안들의 쪽지를 통한 과도한(?) 관심으로 , 남성임을 밝히면서 바꿉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