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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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고 물어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물어보고 자기 고백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재밌기도 하고 느끼는 점도 많고 해서요.
그런데 의외로 이런 식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나에게 하나님이란 부자인 양아버지 같다. 나에게 여전히 어렵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가혹하게 처벌하며, 그 처벌을 하면서도 자신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이야기 하고, 내가 알아서 비위 맞추면서 당신 뜻에 맞춰서 살아가면 그제서야 차가운 지갑에서 수표 한 장 꺼내서 주는 아버지...”
사실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도 이런 하나님 같아요. 제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한테서 벗어나려고 하면 매로 때리고, 그래서 정신 차리고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 뜻대로 살면 또 복을 주시는 하나님...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데 실상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항상 가위 눌린 듯 살아가는 거 같아요... 그들의 무의식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듯 하죠... 왜 하나님 같은 것은 있어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인간의 원초적 신앙은 나보다 강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복종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죠... 그래서 호랑이도 섬기고, 곰도 섬기고 하면서 토템 신앙이 생겼다고도 하구요... 그런데 기독교에서 섬기는 하나님이 곰, 호랑이와 다른 차이점은 “나름의 징벌 및 포상의 법적 정의” 를 가졌다는 거 외에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조폭 두목도 나름의 법적 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 조직의 구성원들의 잘잘못에 따라서 신체의 일부분을 작살내기도 하고, 그 반대로는 엄청난 금전적 포상을 하기도 하고 그렇죠... 그리고는 자신의 나와바리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듯이 세를 뜯어내고, 또 내는 사람들도 당연한 듯이 그 세를 내죠... (예수님도 성전세에 대해서 뼈있는 위트를 표현하신 적이 있죠)
솔직히 말하면... 저런 식이라면 하나님은 ‘거룩’ 이라는 성스러운 포장 말고는 양아버지, 조폭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을 말하라면요?
저에게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어머니 같습니다... 그 사랑은 나를 위해서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지만, 그 자신이 가진 것, 그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어머니... 자신의 생명까지도...
나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으로 느껴집니다... 예전에 “집으로” 라는 할머니와 손자 이야기에서, 그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떠오르더군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꼬부랑 할머니... 말도 못하는 꼬부랑 할머니... 가진 거라고는 손자에 대한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 그 사랑은 결국 그 손자를 변화시켰죠...
레미제라블의 미카엘 신부와 장발장 이야기도 하나님의 사랑의 유비를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출소 후에 배고프고 추운 장발장에게 그 누구도 잠잘 자리와 먹을 것을 내놓지 않지만, 미카엘 신부는 그 장발장을 받아 줍니다... 초라하지만 따뜻한 저녁과 포근한 잠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장발장 앞에 놓여진 현실은 너무 가혹하고, 말없이 떠나던 새벽 어쩔 수 없이 그는 은촛대 2개를 훔치게 됩니다. 그렇게 뒤도 안돌아보고 가던 도중 경찰에 잡히게 되고, 다시 미카엘 신부 앞으로 끌려오지만, 장발장은 의외의 반응에 뒤집어집니다...
“왜 나머지 하나는 안 가져 갔소??? 내가 다 주었지 않소???”
사실 장발장은 미카엘 신부가 법적 정의를 들먹이며 그를 경찰에 넘기고 성물인 은촛대를 다시 돌려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죠... 그러나 미카엘은 오롯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장발장의 ‘죄’ 가 미카엘 신부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죄’ 아닌 것이 되어버렸죠...
저는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랑과 공의” 의 모순이 해결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미카엘 신부의 인간을 넘어선 사랑은 그 속에 이미 공의와 심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구요... 그 사랑 속에서 깨어난 장발장의 영혼은 통곡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십자가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십자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제대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십자가는 부적이거나, 대속적 논리의 법적 정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일반적인 이슬람교인들은 아주 도덕적으로 산다고 합니다... 알라에게 복종하면서 그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현실 기독교도 이슬람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이슬람보다도 더 못하죠... 도덕적으로 살지도 않으니까...
저는 십자가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한없는 사랑이 심판과 처벌조차도 넘어서버린 지점이니까요...
어제 집사람이 나는 하나님이 안느껴진다고 토로하더군요... 솔직히 저도 하나님 안 느껴진다고 했죠... 또한 더 솔직히 말하면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하나님은 우리의 상대적인 오감과 지각으로 있다, 없다고 이야기 하는 수준을 넘어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느낀다는 궤변으로 대답했습니다...
어쩌면 내 영혼은 하나님의 주파수를 받는 장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하나님, 그 절대의 사랑을 향해서 무모하나마 안테나를 뻗는 사람만이 그 영혼은 살아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만이 고통에 대해서 정말 아파할 줄 알고, 나의 일상과 사람들 속에서 정말 섬세한 감성을 가질 수 있고, 한없는 자유와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영혼이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영혼이 상실된 사람들... 있어도 전혀 쓰지 않는 기계처럼 처박아 놓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이미 고장난 사람들...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서 메피스토텔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성서를 보면서, 신비적 영성가들을 통하여, 영혼이 파닥거리는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살아있지 않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도 기대할 수 없겠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위에 쓴 말이 기독교인으로서 거슬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힘있는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선포해왔고 들어온 크리스찬으로서는...
그러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약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의 상황은 너무 無神的입니다... 그러나 약한 것이 결국은 강한 것을 이기는 역설이 하나님의 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성도들이 예수를 진실되게 만나게 되면 자신을 부인하면서 십자가를 지게되는 것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자신을 포인트해 들어가면서부터 고난이자 축복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십자가 순결속에 숨겨진 생명이 되는 참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 순결속에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계시는 세상을 볼 수있으니 말입니다
하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나도 숨김없이 다 보여주고 계셔도 우리 인간들의 안목이 이 모양이니...
죄송합니다. 저 자신의 한탄입니다.
....
십자가없이 자신을 부인할 수도 없으며 자신의 부인없이 십자가를 질 수도없으니,
꺼꾸로 십자가의 고난이 없다는 것은 참 불행으로 보여집니다.
정용섭 목사님 말씀처럼
예수의 심장으로 가슴에 사랑하라는 이웃을 품고 기독교 영성의 깊은 중심에 잡혀 계셔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만 봐도 그 아름다운 신비의 은혜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십자가를 포인트해 주시는 것은
먼저 우리들 안목이 밖이 아니라 자신을 직시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저의 삶터에 항상 임재하시는 주님께로부터 배웠습니다.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없이 자신을 바로 볼 수있는 진리를 깨닫을 수가 없기에,,,
그러니 고난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가 없다는 것은... 진실로 사랑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자신이 깨어 부수어져야되는 사랑하는 원수가 없다는 것은 ...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부끄러운 소견이니 살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가 가장 하나님을 근접하게 말하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크게 보면 그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심상,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학, 이데올로기가 그의 삶을 순리로 이끄는가? 아니면 역리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인간에 의하여 말하여지는 하나님이 逆理 가 되기도 하고, 順理가 되는 차이가 있는 거 같다는 말이죠... 큰 역리를 두가지를 말하라면... 그냥 제 멋대로 살도록 자식을 내버려 두고 무조건 오냐 오냐 하는 아버지로 이야기하거나, 위에서 말한대로 징벌적이고 법적 정의에 의해 가혹하게 자식을 다루면서 때론 포상하기도 하는 그런 아버지로 이야기 하는 그런 예들이겠죠... 현실 기독교도 도 아니면 모 식으로, 전자나 후자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거 같아요...
이 것을 거꾸로 이야기 해보면, 한국의 현실 기독교의 경우, 그들이 사회에 일으키는 여러가지 역리, 즉 불화와 역기능, 잡음들은 - 이 것을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전쟁이라고 하고 필연적인 것으로 치장하지만 - 바로 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심상, 이해, 신학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일반적인 통념과 상식 수준에서도 인정될 수 없는 "공의와 심판" 은 기독교, 그들만의 리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조폭들도 사랑이 있고, 그들만의 정의와 심판이 있거든요...
아, 그리고 저는 하나님을 사랑 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어머니라고 이야기했죠... 이게 그냥 하나님을 가난뱅이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심상을 말하고 싶었던 거에요... 하나님 속에는 약함 속에 드러나는 강함, 가난 속에 드러나는 풍요의 역설이 존재하는 거 같아요... 신약 성서를 읽으면서 저는 그런 역설을 깊이 느껴보았어요...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다."(고전 1장 25절) 다른 말로 풀면 하나님이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고 약해 보이지만 기실 지혜롭고 강하다는 이야긴데, 이건 신비인 거 같아요...
그냥 덮어놓고 전능한 하나님, 파워풀 갓 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질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네요...
연타를 치시는군요.
글 중에
"어쩌면 내 영혼은 하나님의 주파수를 받는 장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하나님, 그 절대의 사랑을 향해서 무모하나마 안테나를 뻗는 사람만이 그 영혼은 살아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요 대목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같은 것이라도 표현을 달리 하시니 얼마나 새록새록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