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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s 517
구원에 대한 검색어를 통해서 글들을 읽어보았는데 상처(?) 뿐인 영광이랄까..아픔이 있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질문을 해 봅니다.
오늘날 전통적인 구원관이 가져오는 폐해가 너무나 큰 것 같고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다비안들께서는 구원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전통적인 구원관은 존재의 이동에 무게가 더 있는 것 같고 구원 받았다는 식으로 소유의 관점에서
볼려고 합니다. 구원의 개념도 정확히 모르는데 구원의 확신부터 가르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정확히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김세윤 박사님은 '악과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방'이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구원이란 어떤 위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만
그렇게 본다면 예수 십자가 사건이 가져오는 구원행위는 특별하게 일어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질문을 요약하자면 예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구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제가 완전한 답을 알고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더 정확히 알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이니 좋은 의견 부탁합니다. 책을 소개해 주셔도 좋구요.)
저의 솔직한 심정은 느부갓네살이 꿈 내용과 해석을 동시에 알아내라고 요구하는 그러한 마음입니다.
그만큼 저 자신도 구원 진리에 대해서 목말라 하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질문을 해 봅니다.
오늘날 전통적인 구원관이 가져오는 폐해가 너무나 큰 것 같고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다비안들께서는 구원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전통적인 구원관은 존재의 이동에 무게가 더 있는 것 같고 구원 받았다는 식으로 소유의 관점에서
볼려고 합니다. 구원의 개념도 정확히 모르는데 구원의 확신부터 가르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정확히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김세윤 박사님은 '악과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방'이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구원이란 어떤 위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만
그렇게 본다면 예수 십자가 사건이 가져오는 구원행위는 특별하게 일어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질문을 요약하자면 예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구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제가 완전한 답을 알고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더 정확히 알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이니 좋은 의견 부탁합니다. 책을 소개해 주셔도 좋구요.)
저의 솔직한 심정은 느부갓네살이 꿈 내용과 해석을 동시에 알아내라고 요구하는 그러한 마음입니다.
그만큼 저 자신도 구원 진리에 대해서 목말라 하고 있답니다.
2008.10.01 09:52:54
저는 구원에 대해서 여기 저기서 들어본 것 외에 잘 모릅니다.
둘로스님은 저보다 더 많이 아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둘로스님처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알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제가 미리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지더라구요.
다른 사람에게도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고..
또한 아무리 안다고 해도 제대로 알았다고 장담할 수 없기에..
죄송합니다.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지 못해서.
저도 솔나무님처럼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고 살아가렵니다
둘로스님은 저보다 더 많이 아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둘로스님처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알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제가 미리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지더라구요.
다른 사람에게도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고..
또한 아무리 안다고 해도 제대로 알았다고 장담할 수 없기에..
죄송합니다.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지 못해서.
저도 솔나무님처럼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고 살아가렵니다
2008.10.01 10:15:51
둘로스님,
저의 개인적인 느낌의 이야기여서 뭐 그럴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적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뢰함이 내가 주님을 잡는 것이 아닌 주님이 나를 잡아주시는 분임을 신뢰함 이라고 할까요?
둘로스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같은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셔서 하셨던 그 말씀,그의 삶을 오늘 나도 살아내려고 애쓰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덤블링 선수가 아직 실력이 모자라지만 코치를 믿고서 높은 하늘을 향해 도움대를 밟고 공중돌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어떻게 착지하는 지를 이론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열심히 뛰는 것...공중돌기중 잃어버린 중심을 만져주시는
주님을 기대하는 것...뭐 어렵네요. 그 신뢰함이 무엇인지...날마다 부족함을 알고 체워가는 것...머리속에서 빙빙도네요.
아무튼 둘로스님의 궁금함이 모든사람이 갖고 있는 질문이겠지요. 뭔들 시원한 대답이 있겠습니까...마지막 날에...
저의 개인적인 느낌의 이야기여서 뭐 그럴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적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뢰함이 내가 주님을 잡는 것이 아닌 주님이 나를 잡아주시는 분임을 신뢰함 이라고 할까요?
둘로스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같은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셔서 하셨던 그 말씀,그의 삶을 오늘 나도 살아내려고 애쓰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덤블링 선수가 아직 실력이 모자라지만 코치를 믿고서 높은 하늘을 향해 도움대를 밟고 공중돌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어떻게 착지하는 지를 이론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열심히 뛰는 것...공중돌기중 잃어버린 중심을 만져주시는
주님을 기대하는 것...뭐 어렵네요. 그 신뢰함이 무엇인지...날마다 부족함을 알고 체워가는 것...머리속에서 빙빙도네요.
아무튼 둘로스님의 궁금함이 모든사람이 갖고 있는 질문이겠지요. 뭔들 시원한 대답이 있겠습니까...마지막 날에...
2008.10.01 17:38:16
여기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돌맞을 짓인 줄 알지만 배운게 도적질이라 어쩔 수 없이 써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5
이 성경은 문자적으로 구약성경이겠지요. 구약의 목적이 여러가지이겠으나 그 중에 중요한 것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정목사님의 글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간단히 명시한 내용이 있던데
100% 동의합니다.
다른 분들은 구원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시고 받아들이시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이 불완전하기에 여러분들의 생각을 통해서 더 온전하게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 번 주에 구원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5
이 성경은 문자적으로 구약성경이겠지요. 구약의 목적이 여러가지이겠으나 그 중에 중요한 것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정목사님의 글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간단히 명시한 내용이 있던데
100% 동의합니다.
다른 분들은 구원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시고 받아들이시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이 불완전하기에 여러분들의 생각을 통해서 더 온전하게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 번 주에 구원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데....
2008.10.01 17:51:14
눈사람님. 아래 치유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최대 은사'라는 책 추천합니다. 1966년도 출판된 책인데 책 제목이 약간 냄새가 나는 듯 하지만
전혀 예상을 깨는 책입니다. 절판되었는데 10월부터 대구의 보문서점에서 판매를 할 것입니다.
이 책을 보고 은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한때 은사에 심취한 적이 있지만 옳은 길로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준 결정적인 책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도 이 책을 열린 마음으로 읽게 되면 현대의 많은 은사자들이
정말 정직한 하나님의 종들이며 진정성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킬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단정적으로 치유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상적으로 치유된 사례들도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서도 베체트병이라고 병원에서도 포기한 집사님이 계셨는데 성경공부하다가 복음의 감격과 공동체의
사랑으로 치유가 되셨습니다. 1년이상이 지났지만 아직 괜찮으세요. 그 분 병원비만 해도 엄청 들었는데 본전 뽑으셨지요.
저는 치유은사가 없지만 무조건 기도해 주고 봅니다. 요란스럽게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조용히 기도합니다.
낫기도 하고 안낫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난 번 부교자로 섬긴 교회서는 6개월 시한부 선고 받은 권사님이
새벽기도회때 담임목사님의 안수 기도로 생명이 4년 연장되는 것도 보았고...
물론 치유은사를 가졌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환자가 치유되어야겠지요.
어쨋거나 눈사람님께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면 무엇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 입니다.
딴데로 샜군요. 이런...
'하나님의 최대 은사'라는 책 추천합니다. 1966년도 출판된 책인데 책 제목이 약간 냄새가 나는 듯 하지만
전혀 예상을 깨는 책입니다. 절판되었는데 10월부터 대구의 보문서점에서 판매를 할 것입니다.
이 책을 보고 은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한때 은사에 심취한 적이 있지만 옳은 길로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준 결정적인 책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도 이 책을 열린 마음으로 읽게 되면 현대의 많은 은사자들이
정말 정직한 하나님의 종들이며 진정성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킬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단정적으로 치유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상적으로 치유된 사례들도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서도 베체트병이라고 병원에서도 포기한 집사님이 계셨는데 성경공부하다가 복음의 감격과 공동체의
사랑으로 치유가 되셨습니다. 1년이상이 지났지만 아직 괜찮으세요. 그 분 병원비만 해도 엄청 들었는데 본전 뽑으셨지요.
저는 치유은사가 없지만 무조건 기도해 주고 봅니다. 요란스럽게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조용히 기도합니다.
낫기도 하고 안낫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난 번 부교자로 섬긴 교회서는 6개월 시한부 선고 받은 권사님이
새벽기도회때 담임목사님의 안수 기도로 생명이 4년 연장되는 것도 보았고...
물론 치유은사를 가졌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환자가 치유되어야겠지요.
어쨋거나 눈사람님께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면 무엇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 입니다.
딴데로 샜군요. 이런...
2008.10.01 17:57:18
머리 속에서 빙빙 돈다니 질문을 드리기가 좀 난처해 지네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점에서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이 생명이 있는 자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이 언제 들어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혹은 믿고 따르기로 결정할 때 생명이 들어오는 것일까요?
루터는 의에 이르기 위해서 수많은 수행과정을 거쳤지만 자신은 불가능한 존재임을 발견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결국,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인간의 노력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질문입니다. 반어법이 아니고..)
그렇다면 이 구원이 언제 들어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혹은 믿고 따르기로 결정할 때 생명이 들어오는 것일까요?
루터는 의에 이르기 위해서 수많은 수행과정을 거쳤지만 자신은 불가능한 존재임을 발견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결국,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인간의 노력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질문입니다. 반어법이 아니고..)
2008.10.02 00:43:54
둘로스님,
네...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의 분량이 아니라 절대 하나님의 자리라는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한다 그러나 주님이 결정하신다는...
루터의 발견이 인간의 한계를 본것이라면 그 넘어의 존재를 바라는 것이라는 의미이겠지요.
이미 주님이 내 안에 존재하시기에 장차 드러나게 될 구원의 완성...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질 것은 아닌 하나님이 장차 완성으로 이루심을 말하고 싶네요.
인간은 불가능하기에 포기라는 개념이 아니라 그 불가능을 알이게 전적으로 주님께 의탁하는 것 말입니다.
종말로 완성될 그 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하겠지만 그 구원의 실체를 이루실 주님을 기다리는 삶...
이 세계안에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실체가 장차 주님이 오시는 그때에야 알게 될 것이라는...
좀 막연하나요?...그래서 빙빙도는 개념인듯해보이지요. 뭐 더이상은...
가끔 교회에서 그래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장난스럽게 물어보곤 합니다.
"교회 왜 다니세요?"...그러면 십중팔구는 천국갈려고 다니지라는 대답...
"천국(구원)에는 어떻게 가나요?"...그야 예수 믿으면 간다고 합니다.
"정말 천국에 갈려고 예수믿고 교회에 다닙니까?"...당근이지...
"그러니까 그런말은 거짓말이 되는 거여요"...화들짝 놀라는 이야기라는 반응...
"천국을 가고싶어서 믿으려고 하는 예수님은 절대로 믿어지는 대상이 아닙니다."
"천국을 가고 싶어서 믿으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가게 되겠지요"의 이야기를 일반성도들은
잘 못알아듣습니다. 그것이 같은 말 아니냐는 반응이지요.
세상말에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가끔 교사들에게 나이먹었다고 괴롭게 하는 것은 천국,구원을 논하기를 넘어서 예수(하나님)게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것 별로 재미없어해요.그들은 천국에만 관심이 있어서...
일반 교회에서 자꾸 인간의 분량이 아닌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못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인간이 감당할 일과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는 일에 대한 분별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노하우에 민감해서 그 노하우속으로 깊이 들어가려는 노력이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중에 구원의 길이라는 명제를 선포하지 않으셨으면 오히려 예수님께 집중을 했을텐데...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바울과 등 복음전파자들이 의도와 다르게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보다는 인간의 복의
개념으로 구원이라는 가치와 선택함을 받았음에 대한 가치가 너무 부여되었다는 생각말입니다.
중간에 의도와 결론을 알아버리면 전혀 머리를 쓰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삶으로...
많은 말을 한다고 전달되는 가치가 아니기에 빙빙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제가 던지는 말씀들은 둘로스님이 다 아시는 그런 이야기이구요.
예수믿음...주님이 주실 은혜가 바로 구원...이미 우리 안에 오신 그 주님자체가...
네...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의 분량이 아니라 절대 하나님의 자리라는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한다 그러나 주님이 결정하신다는...
루터의 발견이 인간의 한계를 본것이라면 그 넘어의 존재를 바라는 것이라는 의미이겠지요.
이미 주님이 내 안에 존재하시기에 장차 드러나게 될 구원의 완성...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질 것은 아닌 하나님이 장차 완성으로 이루심을 말하고 싶네요.
인간은 불가능하기에 포기라는 개념이 아니라 그 불가능을 알이게 전적으로 주님께 의탁하는 것 말입니다.
종말로 완성될 그 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하겠지만 그 구원의 실체를 이루실 주님을 기다리는 삶...
이 세계안에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실체가 장차 주님이 오시는 그때에야 알게 될 것이라는...
좀 막연하나요?...그래서 빙빙도는 개념인듯해보이지요. 뭐 더이상은...
가끔 교회에서 그래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장난스럽게 물어보곤 합니다.
"교회 왜 다니세요?"...그러면 십중팔구는 천국갈려고 다니지라는 대답...
"천국(구원)에는 어떻게 가나요?"...그야 예수 믿으면 간다고 합니다.
"정말 천국에 갈려고 예수믿고 교회에 다닙니까?"...당근이지...
"그러니까 그런말은 거짓말이 되는 거여요"...화들짝 놀라는 이야기라는 반응...
"천국을 가고싶어서 믿으려고 하는 예수님은 절대로 믿어지는 대상이 아닙니다."
"천국을 가고 싶어서 믿으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가게 되겠지요"의 이야기를 일반성도들은
잘 못알아듣습니다. 그것이 같은 말 아니냐는 반응이지요.
세상말에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가끔 교사들에게 나이먹었다고 괴롭게 하는 것은 천국,구원을 논하기를 넘어서 예수(하나님)게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것 별로 재미없어해요.그들은 천국에만 관심이 있어서...
일반 교회에서 자꾸 인간의 분량이 아닌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못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인간이 감당할 일과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는 일에 대한 분별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노하우에 민감해서 그 노하우속으로 깊이 들어가려는 노력이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중에 구원의 길이라는 명제를 선포하지 않으셨으면 오히려 예수님께 집중을 했을텐데...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바울과 등 복음전파자들이 의도와 다르게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보다는 인간의 복의
개념으로 구원이라는 가치와 선택함을 받았음에 대한 가치가 너무 부여되었다는 생각말입니다.
중간에 의도와 결론을 알아버리면 전혀 머리를 쓰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삶으로...
많은 말을 한다고 전달되는 가치가 아니기에 빙빙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제가 던지는 말씀들은 둘로스님이 다 아시는 그런 이야기이구요.
예수믿음...주님이 주실 은혜가 바로 구원...이미 우리 안에 오신 그 주님자체가...
2008.10.02 00:56:46
둘로스님이 질문하신 전통적인 구원관 또는 예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구원에 대하여 저의 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이미 제가 목록 137번에 거듭난 생명이란 제목으로 정용섭목사님께 질문하였던 과거완료적인 구원과 내용이 동일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저의 생각들을 기술하였으며 저의 편협함도 공론화되어 바로잡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구원이란 천국 가는 티켓 등 소유나 목적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의 원천적인 문제는 죄이며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로부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저는 거듭난 생명이고 크리스천 삶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그 시작은 확실할수록 좋다는 의견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어느 개인의 구원이란 그 사람의 “죄를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로 사함 받았다고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 간단한 사실은 기독교인은 물론 비 기독교인까지 다 아는 상식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상식적으로 아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문제는 저의 언어로는 아무리 정확히 묘사하려고 하여도 한계가 있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 내용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제가 아는 만큼 위 내용의 핵심단어인 <죄>, <예수 십자가 보혈>, <믿음>으로 구분하여 열심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첫째, 죄의 문제로서 우리가 피상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지만, 정말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않거나 못하거나 하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손쉽게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이 정도는 괜찮아 라고 여깁니다. 즉 대부분 우리는 죄를 심상히 여길 뿐, 오직 하나님 만이 정확히 아시지요. 이때 우리의 죄를 바르게 인식하는 길은 역시 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하겠지요. 예를 들면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도 못하지요. 사랑은 고사하고 아무리 고상한 척 하여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는 산상수훈의 말씀으로부터도 전혀 자유롭지 못하지요.
둘째,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 앞에 의도적으로 안 나오거나 몰라서 못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의 자기 중심성이 문제로서 예를 들면 누가복음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의 자기 의와, 둘째 아들의 자기 애에 갇혀있지요.
셋째 우리가 우리 죄를 알고 예수님 십자가 보혈을 알았다고 하여도 정말로 우리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요? 확실한 것은 죄에 대하여 철저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진정한 복음이 되어 믿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 편에서는 억지로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이 또한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기 내면의 어떤 현상에 집착하는 등 자기 중심성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장황하게 분석하여 기술하였습니다만 역시 구원이란 나의 죄를 예수님 십자가 보혈로 사함 받았다고 믿는 것 이지요. 구원이란 이 사실을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골 1:6 의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은혜로 깨달아 알 수 밖에 없지요. 그것은 마치 수학공식의 의미도 모르고 문제를 풀다가 어느 날 참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구원은 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성령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는 신비한 방식도 아니지요. 부흥집회 등에서 무슨 뜨거운 체험을 한 것도 이상하지요. 복음전도집회에서 인도 하시는 분이 영접기도 대신 해주시고 여러분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것도 그렇고요. 감동적으로 복음성가를 잘 부르는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 받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도 거리가 멀 것 같습니다.
다음은 가장 그럴듯한 사례로서 연변 과기대 정진호 교수의 저서 <떡의 전쟁>에서 발췌한 간증의 일부를 적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로마서로 이어지는 성경공부를 통해 복음의 내용이 이성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 중략 ~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로마서 1장 16절에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그 말씀,”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 라는 말씀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 중략 ~ 갑자기 깨달음이 몰려왔다. 그렇다.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평생을 두고 목이 터져라 외처야 할 자랑거리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중략 ~ 내 죄로 인해 돌아가신 예수의 십자가가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속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교만한 생각들이 파편처럼 눈물과 함께 흘러 넘쳤다. ~ 중략 ~ 그 후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해 본 기억이 없다.
이상과 같은 정진호 교수의 고백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저는 구원이란 천국 가는 티켓 등 소유나 목적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의 원천적인 문제는 죄이며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로부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저는 거듭난 생명이고 크리스천 삶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그 시작은 확실할수록 좋다는 의견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어느 개인의 구원이란 그 사람의 “죄를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로 사함 받았다고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 간단한 사실은 기독교인은 물론 비 기독교인까지 다 아는 상식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상식적으로 아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문제는 저의 언어로는 아무리 정확히 묘사하려고 하여도 한계가 있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 내용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제가 아는 만큼 위 내용의 핵심단어인 <죄>, <예수 십자가 보혈>, <믿음>으로 구분하여 열심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첫째, 죄의 문제로서 우리가 피상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지만, 정말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않거나 못하거나 하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손쉽게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이 정도는 괜찮아 라고 여깁니다. 즉 대부분 우리는 죄를 심상히 여길 뿐, 오직 하나님 만이 정확히 아시지요. 이때 우리의 죄를 바르게 인식하는 길은 역시 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하겠지요. 예를 들면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도 못하지요. 사랑은 고사하고 아무리 고상한 척 하여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는 산상수훈의 말씀으로부터도 전혀 자유롭지 못하지요.
둘째,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 앞에 의도적으로 안 나오거나 몰라서 못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의 자기 중심성이 문제로서 예를 들면 누가복음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의 자기 의와, 둘째 아들의 자기 애에 갇혀있지요.
셋째 우리가 우리 죄를 알고 예수님 십자가 보혈을 알았다고 하여도 정말로 우리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요? 확실한 것은 죄에 대하여 철저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진정한 복음이 되어 믿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 편에서는 억지로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이 또한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기 내면의 어떤 현상에 집착하는 등 자기 중심성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장황하게 분석하여 기술하였습니다만 역시 구원이란 나의 죄를 예수님 십자가 보혈로 사함 받았다고 믿는 것 이지요. 구원이란 이 사실을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골 1:6 의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은혜로 깨달아 알 수 밖에 없지요. 그것은 마치 수학공식의 의미도 모르고 문제를 풀다가 어느 날 참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구원은 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성령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는 신비한 방식도 아니지요. 부흥집회 등에서 무슨 뜨거운 체험을 한 것도 이상하지요. 복음전도집회에서 인도 하시는 분이 영접기도 대신 해주시고 여러분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것도 그렇고요. 감동적으로 복음성가를 잘 부르는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 받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도 거리가 멀 것 같습니다.
다음은 가장 그럴듯한 사례로서 연변 과기대 정진호 교수의 저서 <떡의 전쟁>에서 발췌한 간증의 일부를 적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로마서로 이어지는 성경공부를 통해 복음의 내용이 이성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 중략 ~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로마서 1장 16절에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그 말씀,”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 라는 말씀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 중략 ~ 갑자기 깨달음이 몰려왔다. 그렇다.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평생을 두고 목이 터져라 외처야 할 자랑거리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중략 ~ 내 죄로 인해 돌아가신 예수의 십자가가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속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교만한 생각들이 파편처럼 눈물과 함께 흘러 넘쳤다. ~ 중략 ~ 그 후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해 본 기억이 없다.
이상과 같은 정진호 교수의 고백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2008.10.02 05:15:48
감사합니다 피스님!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것으로 표현해 주셨는데 동의합니다.
정진호 교수님의 신앙고백을 예로 들어주셨네요. 정교수님의 글은 오래전에 읽었는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 안나네요 ㅎㅎ
한편, 내가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고 예수 보혈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믿노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이 내게 실제한다는 것을
어떤 증거로 알 수 있을까요? 즉,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이 될까요?
정교수님처럼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확신을 가지는 것 또한 주관적인 확신은 아닐런지요?
방언은 왜 안되는가요? 구원의 증거가 방언이 모두가 아닌 어떤 이에게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참, 정목사님과 나누신 "거듭남"에 대한 글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정진호 교수님의 신앙고백을 예로 들어주셨네요. 정교수님의 글은 오래전에 읽었는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 안나네요 ㅎㅎ
한편, 내가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고 예수 보혈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믿노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이 내게 실제한다는 것을
어떤 증거로 알 수 있을까요? 즉,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이 될까요?
정교수님처럼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확신을 가지는 것 또한 주관적인 확신은 아닐런지요?
방언은 왜 안되는가요? 구원의 증거가 방언이 모두가 아닌 어떤 이에게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참, 정목사님과 나누신 "거듭남"에 대한 글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2008.10.02 10:04:47
둘로스님, 질문에 죄송하지만 저는 정확히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한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정진호 교수의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고 하는 것은 증거가 아니고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결과일 따름이지요. 굳이 첨언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너무 쉽게 거론하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역사적 무게 (창세기의 하나님이 아담에게 지어주신 가죽옷, 아벨이 드린 양의 제사에서부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양과 소가 죽었을까요?)와 함께 하나님 자신이신 독생자 예수님이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은 것이지요. 우리 인류를 위해서 아니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이지요. 그럼에도 그러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안의 확실한 증거만 찾고 있다면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바라보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네요.
저는 다른 분들의 구원에 대하여 판단할 자격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면 정용섭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구원 (즉 예수님 부활생명과 재림 이후의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 은 크리스천들이 더불어서 함께 이루어가지만, 처음 시작의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개인간의 관계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다른 분들의 구원에 대하여 판단할 자격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면 정용섭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구원 (즉 예수님 부활생명과 재림 이후의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 은 크리스천들이 더불어서 함께 이루어가지만, 처음 시작의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개인간의 관계이기 때문이지요.
2008.10.02 10:12:12
추가 답변으로 저의 경험을 말씀 드리면 제가 방언을 하였을 때 하나님을 향하는 저의 지극 정성과 진정성은 있었습니다만, 저의 죄에 대한 인식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없었습니다. 이 부분도 저는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교회를 오게 된 동기가 세상일도 잘 안 풀리고 하여 하나님을 믿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헌금도 잘하고 새벽기도도 잘하고 하나님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죄인 용서해달라고 기도도 하고, 기도의 응답으로 사업과 가정도 잘되고 교회 직분도 받고 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에 대한 인식도 예수님 십자가 없이도 말이지요.
또한 제가 복음단체로부터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하였지만, 당시 저는 피상적으로 죄인이라고 알았을 뿐 당시에는 저의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부분은 단정짓지 않고 열려놓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눈사람님의 신유은사 질문에서도 정용섭목사님 답변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제가 모르는 하나님이 주신 참 신유의 사례도 있을 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또한 제가 복음단체로부터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하였지만, 당시 저는 피상적으로 죄인이라고 알았을 뿐 당시에는 저의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부분은 단정짓지 않고 열려놓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눈사람님의 신유은사 질문에서도 정용섭목사님 답변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제가 모르는 하나님이 주신 참 신유의 사례도 있을 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2008.10.02 11:24:34
박영선목사님 저서 중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이라는 제목을 좋아합니다.
구원을 시간의 성격으로 표현하셨는데요.
창조주로부터 단절된 인간이
그 단절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 아닐까요?
하나님으로부터 관계의 시작이 있을 때부터
종국에까지 이르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관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주께서 버리셨다는 고백을 생각할 때,
그는 항상 그분과 함께 계셨는데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완벽한 단절에 처하셨습니다.
완전한 죄의 인간이 되신거죠.
그를 누가 구하겠습니까?
스스로 구하셨으니 그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구하였다, 구원'의 형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 가운데 일어난
죄인으로의 의무적 타락과 부활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시작과 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이라는 제목을 좋아합니다.
구원을 시간의 성격으로 표현하셨는데요.
창조주로부터 단절된 인간이
그 단절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 아닐까요?
하나님으로부터 관계의 시작이 있을 때부터
종국에까지 이르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관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주께서 버리셨다는 고백을 생각할 때,
그는 항상 그분과 함께 계셨는데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완벽한 단절에 처하셨습니다.
완전한 죄의 인간이 되신거죠.
그를 누가 구하겠습니까?
스스로 구하셨으니 그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구하였다, 구원'의 형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 가운데 일어난
죄인으로의 의무적 타락과 부활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시작과 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2008.10.02 11:56:01
피스님의 깊은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좀 다른 견해가 느껴져서 답글을 답니다.
우리가 근본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나
구원의 점진성 앞에서 항상 같은 테마를 반복해야 하는 것인지요.
물론 죄의 발을 매일 씻어야 하고 그 은혜가 감사하지만
이 테마에 항상 천착을 한다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기쁨보다는 항상 울어야할 수도 있어요.
방언을 예로 드셨는데 이 또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지극 정성과 진정성이 있어서 방언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젠틀하신 성령님의 판단과 사역의 결과입니다.
받은 우리가 여러 이유와 태도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죄의 인식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구원의 시작이자 구심인 것이지
한없는 원심으로의 종착은 아니지않을까요?
그러나 저와 좀 다른 견해가 느껴져서 답글을 답니다.
우리가 근본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나
구원의 점진성 앞에서 항상 같은 테마를 반복해야 하는 것인지요.
물론 죄의 발을 매일 씻어야 하고 그 은혜가 감사하지만
이 테마에 항상 천착을 한다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기쁨보다는 항상 울어야할 수도 있어요.
방언을 예로 드셨는데 이 또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지극 정성과 진정성이 있어서 방언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젠틀하신 성령님의 판단과 사역의 결과입니다.
받은 우리가 여러 이유와 태도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죄의 인식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구원의 시작이자 구심인 것이지
한없는 원심으로의 종착은 아니지않을까요?
2008.10.02 13:35:22
제 마음에 있는 것을 풀어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천국(구원,생명)은 장소나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존재의 개념 (너희 안에 있느니라)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제가 더 구체적으로 궁금한 것은 예수 생명이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는가?입니다. 저는 이것을 성령의 교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성령의 교통이 이해의 통일이나 관점, 사상의 일치가 아닌 보다 더 본질적이고 실질적인 통일이 아닌가 생각해서요..즉 기독신앙은 관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물론, 이해의 영역에선 깊이나 넓이가 끝이 없어서 관념에 머물 수 있겠지만....형이상학적 구원개념과 형이하학적인 구원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두가지 다 포함하는 것이겠지요. 좋은 하루되세요.
제가 더 구체적으로 궁금한 것은 예수 생명이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는가?입니다. 저는 이것을 성령의 교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성령의 교통이 이해의 통일이나 관점, 사상의 일치가 아닌 보다 더 본질적이고 실질적인 통일이 아닌가 생각해서요..즉 기독신앙은 관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물론, 이해의 영역에선 깊이나 넓이가 끝이 없어서 관념에 머물 수 있겠지만....형이상학적 구원개념과 형이하학적인 구원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두가지 다 포함하는 것이겠지요. 좋은 하루되세요.
2008.10.02 13:46:57
박영선목사님 책 다시 읽어보아야겠네요. 죄인으로서의 의무적 타락과 부활의 개념이 좀 생소하군요..
'즉각성과 점진성'을 '이미와 아직'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지요.
한편,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고 더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을까요?
'즉각성과 점진성'을 '이미와 아직'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지요.
한편,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고 더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을까요?
2008.10.02 13:51:10
그렇게 새롭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대학생 시절부터 십자가에 대한 "제의(祭儀)종교적 해석"과 "형법적 해석" 대해서 회의를 품어왔습니다. 보통 "화목제" 개념으로도 설명하고, "보속"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무언가 크게 와닿지는 않습니다...
저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예수의 완전한 자기 비움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느낍니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친 분입니다... 죄인이라고 불리우던 자들과 전혀 거리낌없이 어울리면서 잔치를 벌이고, 삭개오의 집에서 구원을 선포하며,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마음을 하늘나라로 향해 열어주었고,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는 그런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이었습니다.
예수는 그 당시에 자신의 명망으로는 세력을 형성하여, 이왕 이래나 저래나 죽을 거 한 번 뒤집어 엎을 만도 했는데, 그는 그 것의 부질없음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참으로 이상한 길, 바로 십자가를 택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주체는 로마와 유대 종교 세력들이지만, 예수 스스로 그 것을 택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그는 철저한 자기 비움과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역리를 택하지 않고 순리를 택했습니다... 인간적 강함보다는 신적인 약함을, 순간 보다는 영원을 택했다고 할까요?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부활시키신 것이구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예수가 처한 그 비참한 십자가에 달릴 일도 없겠지만, 그 십자가를 생각하고 깊이 느낄 때, 예수의 철저한 자기비움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고, 또한 그렇게 구원을 맛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예수의 완전한 자기 비움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느낍니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친 분입니다... 죄인이라고 불리우던 자들과 전혀 거리낌없이 어울리면서 잔치를 벌이고, 삭개오의 집에서 구원을 선포하며,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마음을 하늘나라로 향해 열어주었고,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는 그런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이었습니다.
예수는 그 당시에 자신의 명망으로는 세력을 형성하여, 이왕 이래나 저래나 죽을 거 한 번 뒤집어 엎을 만도 했는데, 그는 그 것의 부질없음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참으로 이상한 길, 바로 십자가를 택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주체는 로마와 유대 종교 세력들이지만, 예수 스스로 그 것을 택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그는 철저한 자기 비움과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역리를 택하지 않고 순리를 택했습니다... 인간적 강함보다는 신적인 약함을, 순간 보다는 영원을 택했다고 할까요?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부활시키신 것이구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예수가 처한 그 비참한 십자가에 달릴 일도 없겠지만, 그 십자가를 생각하고 깊이 느낄 때, 예수의 철저한 자기비움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고, 또한 그렇게 구원을 맛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2008.10.02 14:33:20
사실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의 내용은 생각이 나지않는데
그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이라기 보다는
'시작과 지속'이겠지요.
'예수님 가운데 일어난 죄인으로의 의무적 타락과 부활'은
저의 표현이 좀 이상할 수도 있는데요.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은
예수님의 타락된 죄의 행위는 없었으나
타락의 위치에 계셨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타락된 위치로의 쉬프트가
그 분의 사역으로 향하는 의무였다는 겁니다.
뭐, 제 생각이라서 생소하셨을 수도...^^;
그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이라기 보다는
'시작과 지속'이겠지요.
'예수님 가운데 일어난 죄인으로의 의무적 타락과 부활'은
저의 표현이 좀 이상할 수도 있는데요.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은
예수님의 타락된 죄의 행위는 없었으나
타락의 위치에 계셨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타락된 위치로의 쉬프트가
그 분의 사역으로 향하는 의무였다는 겁니다.
뭐, 제 생각이라서 생소하셨을 수도...^^;
2008.10.02 15:30:28
유니스님 저는 유니스님과 똑같은 생각으로 처음 시작으로서의 구원 (반드시 구원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조차 없지요), 즉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처음시작을 말하였을 뿐이었는데 완성된 구원 종착역으로 오해를 하셨네요. 이제 처음 시작이지요. 그때부터 성장하고 나아가야 하지요. 더욱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야지요.
복음주의자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지요. 처음 시작 = 영의 구원 = Justification, 그 이후의 삶 = 혼의 구원 = Santification, 예수님 재림 이후 = 육의 구원을 포함한 완전한 구원 = Glorificaion. 저는 이 도식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연속적인 시간의 과정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과거의 구원에만 매달리는 것은 그것 자체를 깨 부셔야할 또 다른 고착화일 뿐이지요. 이제 시작하여 점진적인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갈때 (인간편에서) 또는 예수님 재림 이후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하나님 나라 참여 (하나님 주권)할 때 생명체로서 영적인 아픔과 또한 더욱 깊~은 기쁨이 왜 없겠습니까? 지난번 저의 137번 질문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용섭목사님의 설교말씀과 판넨베르크 설교집을 알게되어 너무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설교말씀은 한번에 다 듣는 것이 아까워서 매일 출퇴근 때만 듣다보니 요즘 하시는 최신 설교말씀은 다음에 맛볼 기대감이 큽니다.
복음주의자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지요. 처음 시작 = 영의 구원 = Justification, 그 이후의 삶 = 혼의 구원 = Santification, 예수님 재림 이후 = 육의 구원을 포함한 완전한 구원 = Glorificaion. 저는 이 도식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연속적인 시간의 과정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과거의 구원에만 매달리는 것은 그것 자체를 깨 부셔야할 또 다른 고착화일 뿐이지요. 이제 시작하여 점진적인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갈때 (인간편에서) 또는 예수님 재림 이후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하나님 나라 참여 (하나님 주권)할 때 생명체로서 영적인 아픔과 또한 더욱 깊~은 기쁨이 왜 없겠습니까? 지난번 저의 137번 질문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용섭목사님의 설교말씀과 판넨베르크 설교집을 알게되어 너무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설교말씀은 한번에 다 듣는 것이 아까워서 매일 출퇴근 때만 듣다보니 요즘 하시는 최신 설교말씀은 다음에 맛볼 기대감이 큽니다.
2008.10.02 17:53:10
구원, '악과 모든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이라...
구원은 모든 세대에서 모든 사람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더 많이 가짐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비움으로써 구원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을 통한 해탈이 구원에 이르는 논리적인 방법으로 보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가난한자에게 천국을 약속했고 부자가 천국에서 멀다고 말씀하셨죠.
정말 자기 만족에의 욕심이 적거나(바보), 적어진(어려운삶) 사람들에게 행복과 구원이 가까워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비움(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정말 가능한 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기까지 비움으로써
오히려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인간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과 함께 고통당함으로 낮아지시며 결국에는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심으로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과 구원의 소망을 보여주신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베푸신 구원의 소망과 은혜를 종종 망각하고
아직 자기 사랑(집중)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여전히 고통가운데 있지만
마지막 때에 우리를 온전케하여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구원을 짧은 글로 담아봐야 그 한 모습을 비추는 데 지나지 않겠지만
구원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간단히 적어보았는데 쓰고보니 사도신경의 고백이 되어 버렸네요.
정목사님의 판넨베르크 사도신경 강의 열심히 들어야 겠습니다 ^^;
구원은 모든 세대에서 모든 사람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더 많이 가짐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비움으로써 구원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을 통한 해탈이 구원에 이르는 논리적인 방법으로 보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가난한자에게 천국을 약속했고 부자가 천국에서 멀다고 말씀하셨죠.
정말 자기 만족에의 욕심이 적거나(바보), 적어진(어려운삶) 사람들에게 행복과 구원이 가까워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비움(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정말 가능한 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기까지 비움으로써
오히려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인간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과 함께 고통당함으로 낮아지시며 결국에는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심으로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과 구원의 소망을 보여주신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베푸신 구원의 소망과 은혜를 종종 망각하고
아직 자기 사랑(집중)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여전히 고통가운데 있지만
마지막 때에 우리를 온전케하여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구원을 짧은 글로 담아봐야 그 한 모습을 비추는 데 지나지 않겠지만
구원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간단히 적어보았는데 쓰고보니 사도신경의 고백이 되어 버렸네요.
정목사님의 판넨베르크 사도신경 강의 열심히 들어야 겠습니다 ^^;
2008.10.02 18:49:04
둘로스님 제가 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이제야 봤네요.
추천해주신 '하나님의 최대 은사' 꼭 구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면 무엇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 라는 질문을 주셨는데..
저는 보여달라는 분에게 그런 증거를 요구하지 말아달라고 하겠습니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그 자체가 증거이지 무엇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극단적으로 대신 죽어줄 수 있다든지 아님 무엇인가를 해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증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고, 그 외의 어떤 방법으로 증명하더라도 그 증명이 그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보여주기 위한 것 밖에 되지 않을 수 있기에(제 편협한 소견일 수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면 그것으로 전 족합니다.
시원한 답을 못드려 죄송합니다.
추천해주신 '하나님의 최대 은사' 꼭 구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면 무엇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 라는 질문을 주셨는데..
저는 보여달라는 분에게 그런 증거를 요구하지 말아달라고 하겠습니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그 자체가 증거이지 무엇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극단적으로 대신 죽어줄 수 있다든지 아님 무엇인가를 해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증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고, 그 외의 어떤 방법으로 증명하더라도 그 증명이 그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보여주기 위한 것 밖에 되지 않을 수 있기에(제 편협한 소견일 수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면 그것으로 전 족합니다.
시원한 답을 못드려 죄송합니다.
2008.10.03 12:21:13
십자가가 철저한 자기비움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라는 의미가 크게 와닿습니다. 한편, 대속, 화목제물로서의 십자가가 핵심적인 의미가 아니라면 어떤 의미로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되며 구원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요?
2008.10.03 12:24:07
그렇군요. 비움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
제가 궁금한 것이 이 부분과 관련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어느정도 비워지고 있는지..
순간순간 삶 속에서 무너지는 자신을 보면 도대체 내가 구원받은 상태인지 헷갈립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내 안에 죄가 더 많다는 사실만 드러날 뿐..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강의가 책으로 나왔나요?
제가 궁금한 것이 이 부분과 관련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어느정도 비워지고 있는지..
순간순간 삶 속에서 무너지는 자신을 보면 도대체 내가 구원받은 상태인지 헷갈립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내 안에 죄가 더 많다는 사실만 드러날 뿐..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강의가 책으로 나왔나요?
2008.10.03 12:46:32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이지요..
시원한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비안들께서는 어떻게 자신을 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구원의 관점에서 궁금하답니다^^
즉,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이지요..
시원한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비안들께서는 어떻게 자신을 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구원의 관점에서 궁금하답니다^^
2008.10.03 13:19:17
구원이나 비움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고 (위의 글은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의 어떤 속성(능력? 구원?)이 아니라 그분 자체를 느껴보세요.
우리의 욕심 때문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일상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를 느껴보세요.
내 의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지는 만큼 내 것이 자연스레 비워지는 것이겠죠.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책을 정목사님이 번역하셨고 동영상 강의 게시판에 강의가 올라오고 있어요
그런데 유료회원에게만 제공되는 것이랍니다)
그냥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의 어떤 속성(능력? 구원?)이 아니라 그분 자체를 느껴보세요.
우리의 욕심 때문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일상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를 느껴보세요.
내 의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지는 만큼 내 것이 자연스레 비워지는 것이겠죠.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책을 정목사님이 번역하셨고 동영상 강의 게시판에 강의가 올라오고 있어요
그런데 유료회원에게만 제공되는 것이랍니다)
2008.10.03 14:25:17
구원에 대한 언어는 같아도 심층적 의미는 상호간에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이란 기독신앙의 입문이나 기초가 아니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의 꿈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그것도 포함하는..저는 다만 구원의 심층적 의미를 다비안들께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요. 사실상 스스로의 수행에 의한 자기비움은 불가능하지요. 마음이 청결함이란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한다는 의미이지 스스로 깨끗해진다는 의미는 아니기에...
2008.10.03 14:54:42
구원이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갈 때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이 드러나시겠지요.
심층적 의미에서의 차이라기 보다는 개인영성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둘로스님의 구원(하나님)에 대한 깊은 관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갈 때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이 드러나시겠지요.
심층적 의미에서의 차이라기 보다는 개인영성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둘로스님의 구원(하나님)에 대한 깊은 관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2008.10.03 22:48:20
그런 말씀이셨군요.
제가 상당히 말귀가 어두운가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려면 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느냐를 자문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임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나 순종하고 있을까요.. 채점을 한 번 해봐야겠습니다.
덕분에 채점할 시간을 갖네요.^^
제가 상당히 말귀가 어두운가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려면 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느냐를 자문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임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나 순종하고 있을까요.. 채점을 한 번 해봐야겠습니다.
덕분에 채점할 시간을 갖네요.^^
2008.10.04 00:47:27
제 글쓰기가 서툰 것일까요, 아님 불교의 해탈을 언급해서 저별과달님의 눈이 가리운 걸까요?
글을 잘 읽어보세요. 저는 인간의 노력을 통한 구원을 얘기한게 아닙니다. 그 반대를 얘기한거죠.
구원을 얻기위한 비움이라는 방향은 논리적으로 맞아 보이지만 그게 노력으로 가능할까 의문을 던진 겁니다.
저별과달님 말씀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안에 들어가야한다는 게 제 말이예요.
그리고 구속사적(타락/속량)영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법리적 이해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느끼는 창조중심 영성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을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글을 잘 읽어보세요. 저는 인간의 노력을 통한 구원을 얘기한게 아닙니다. 그 반대를 얘기한거죠.
구원을 얻기위한 비움이라는 방향은 논리적으로 맞아 보이지만 그게 노력으로 가능할까 의문을 던진 겁니다.
저별과달님 말씀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안에 들어가야한다는 게 제 말이예요.
그리고 구속사적(타락/속량)영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법리적 이해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느끼는 창조중심 영성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을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2008.10.04 09:47:59
유니스님, 제가 무엇을 용서하고 말게 있겠습니까?
저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유니스님의 약간의 오해에 제가 너무 과민한 반응을 하였네요. 따지고 보면 오해랄 것도 없고, 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원인을 제공한 저에게 책임이 있지요. 유니스님, 오히려 제가 사과 드립니다.
아울러서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과격한 표현은 (즉 과거구원에만 매달리는 것은 그것 자체를 깨 부셔야 할 또 다른 고착화) 너무 오버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순화된 표현으로 정정하고, 조금만 더 부연설명을 드립니다.
저는 크리스천 시작점으로서의 구원을 건물에 비유하면 기초(Foundation)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Foundation을 깨 부스면 건물을 못 세우죠. 따라서 ‘건물은 안 짓고 기초만 있으면 안될 것임’으로 정정합니다.
다른 비유로서 저는 처음으로 생명의 믿음의 씨앗이 떨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서 제가 예로든 정진호 교수의 고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믿음의 점프 (무에서 유)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제가 정진호 교수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으면 물어보고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제 예상이 정확할 것입니다. 정진호 교수가 복음을 이성적으로만 이해할 때 (또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와 로마서 1장 16절을 깨닫기 이후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이전에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억지로 믿습니다 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믿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아울러서, 그 이후에는 기독교 신앙의 초석인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창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부활 등은 이제는 의심과 혼돈의 대상이 아니라 너무 자연스럽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_-) 믿어졌노라고. 그리고 그 변화가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고 사람에 의한 최면이나 세뇌라고 다른 사람이 주장하여도 그것은 너무 바람직한 세뇌이지요.
(앗, 정진호 교수님은 제가 잘 아는 분으로서 저보다 연배가 낮아서 자동적으로 아랫사람에게 하는 표현이 되었네요. 이해해주셔요.)
저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유니스님의 약간의 오해에 제가 너무 과민한 반응을 하였네요. 따지고 보면 오해랄 것도 없고, 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원인을 제공한 저에게 책임이 있지요. 유니스님, 오히려 제가 사과 드립니다.
아울러서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과격한 표현은 (즉 과거구원에만 매달리는 것은 그것 자체를 깨 부셔야 할 또 다른 고착화) 너무 오버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순화된 표현으로 정정하고, 조금만 더 부연설명을 드립니다.
저는 크리스천 시작점으로서의 구원을 건물에 비유하면 기초(Foundation)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Foundation을 깨 부스면 건물을 못 세우죠. 따라서 ‘건물은 안 짓고 기초만 있으면 안될 것임’으로 정정합니다.
다른 비유로서 저는 처음으로 생명의 믿음의 씨앗이 떨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서 제가 예로든 정진호 교수의 고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믿음의 점프 (무에서 유)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제가 정진호 교수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으면 물어보고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제 예상이 정확할 것입니다. 정진호 교수가 복음을 이성적으로만 이해할 때 (또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와 로마서 1장 16절을 깨닫기 이후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이전에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억지로 믿습니다 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믿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아울러서, 그 이후에는 기독교 신앙의 초석인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창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부활 등은 이제는 의심과 혼돈의 대상이 아니라 너무 자연스럽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_-) 믿어졌노라고. 그리고 그 변화가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고 사람에 의한 최면이나 세뇌라고 다른 사람이 주장하여도 그것은 너무 바람직한 세뇌이지요.
(앗, 정진호 교수님은 제가 잘 아는 분으로서 저보다 연배가 낮아서 자동적으로 아랫사람에게 하는 표현이 되었네요. 이해해주셔요.)
2008.10.04 11:40:02
제가 어제 좀 피곤했나 봅니다.글을 급하게 읽느라
자유의 꿈님이 행위와, 노력의 구원을 언급하신 후에,
비움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정말 가능한 지는 의문입니다 라는이 대목을
읽지 못하고 답글을 달은것 같네요... 자유의 꿈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가 인용한 로마서 1장 16~17 절 말씀도 위에서 피스님이 먼저 인용 하셨군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적어 놨으니...
어제 너무 피곤해서 여기에 달린 댓글들을 다 읽지 못하고 둘로그 님의 원 질문과 자유의 꿈님과 둘로스 님의
댓글을 중심으로 제가 글을 썼거든요.. 그래서
제가 적은 댓글을 약간 수정해서 이 꼭지글의 원 질문자이신 둘로스 님에게
저의 의견을 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어떤 영성에 앞서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으로 십자가의 의를 믿게하는 믿음이 아닐런지요..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는 에베소서 말씀을 보면 구원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를 믿게끔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나 자신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그 분을 믿고 죄짐에서 벗어 날수 있게끔
하시는 구속의 은총,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先 은총을 배제하고 구원을 논한다면 알맹이가 빠져 버린것 같기도 하네요.
내가 하나님을 찾기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 왔다는 것, 여기에 구원의 단초가 있는것은 아닌지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신 은총..믿음을 주시는 은총..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바울의 고백이 생각 나는군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라고 보기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너무 복잡하게 파고 들어가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는
멀어 질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다시 둘로스 님의 질문,
예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구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 믿음으로의 의로움을
믿게 하시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이 아닐런지요..
이것을 붙잡을때 둘로스 님이 말씀하신 삶속에서 순간 순간 갈등과, 삶속에서의 죄짐에서 해방 될수 있는것은 아릴런지요..
이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인] 구원을 경험 하는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 입니다
자유의 꿈님이 행위와, 노력의 구원을 언급하신 후에,
비움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정말 가능한 지는 의문입니다 라는이 대목을
읽지 못하고 답글을 달은것 같네요... 자유의 꿈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가 인용한 로마서 1장 16~17 절 말씀도 위에서 피스님이 먼저 인용 하셨군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적어 놨으니...
어제 너무 피곤해서 여기에 달린 댓글들을 다 읽지 못하고 둘로그 님의 원 질문과 자유의 꿈님과 둘로스 님의
댓글을 중심으로 제가 글을 썼거든요.. 그래서
제가 적은 댓글을 약간 수정해서 이 꼭지글의 원 질문자이신 둘로스 님에게
저의 의견을 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어떤 영성에 앞서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으로 십자가의 의를 믿게하는 믿음이 아닐런지요..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는 에베소서 말씀을 보면 구원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를 믿게끔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나 자신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그 분을 믿고 죄짐에서 벗어 날수 있게끔
하시는 구속의 은총,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先 은총을 배제하고 구원을 논한다면 알맹이가 빠져 버린것 같기도 하네요.
내가 하나님을 찾기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 왔다는 것, 여기에 구원의 단초가 있는것은 아닌지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신 은총..믿음을 주시는 은총..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바울의 고백이 생각 나는군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라고 보기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너무 복잡하게 파고 들어가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는
멀어 질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다시 둘로스 님의 질문,
예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구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 믿음으로의 의로움을
믿게 하시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이 아닐런지요..
이것을 붙잡을때 둘로스 님이 말씀하신 삶속에서 순간 순간 갈등과, 삶속에서의 죄짐에서 해방 될수 있는것은 아릴런지요..
이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인] 구원을 경험 하는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 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그 느낌을 나누어볼까요...
어느날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들과 오랜만에 멋진 놀이동산에 놀러갔다.
그런데 한참 재미나게 놀고 행복해 했는데 갑자기 아버지에게 무슨 큰일이 생겼나봅니다.
그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남겨두고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할 만한 무슨 급한일이 있었나봐요.
뭐 그 급한 일이 무언지는 잘 모르겠지만...아버지 역시 말로 설명가능하지 않은 그 무슨일이...
그래서 사랑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아들아!...아빠가 정말 급한일이 생겼어...그러니 지금 똑바롤 들었으면 좋겠다. 아빠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처리해놓고서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올거야...우리 아까 이야기 했던 곳 알지...그곳에서 기다리면 아빠는 그곳으로 너를 찾아갈거야 불안해 하지말로 약속한대로 묵묵히, 견디어주렴...할 수 있겠니.."
아들은..."네, 아버지 충분히 해 낼수 있어요. 동생도 잘 보살피고서 아버지 말씀하신대로 기다릴께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다녀오세요"
아버지와 이야기 한 그대로 그 현장에서 맡겨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
"나는 아버지가 언제라고는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그 눈에서 이야기 하는 진실을 나는
믿어...그래서 하루하루를 기해하며 충실히 삶을 살아내지요."....그런 시간이 흘러 흘러...
어느날 아버지가 오셨다.
아들아!...네!...웃으며 그 아버지의 품을 향해 점프한다...그 이후에 알게될 것...구원^^
그저 솔나무는 그 길을 걸으며 내 솔방울들에게도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파요.
내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