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20일
빌라도의 재판(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15:1)
마가복음 기자는 이미 앞에서 예수님을 심문한 당국자가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산헤드린 공의회라는 사실을 지적했는데,(막 14:53,55)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산헤드린 공의회의 책임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생각이었겠지요.
산헤드린은 예수의 심문을 ‘새벽’에 끝냈습니다. 끝장토론처럼 밤새도록 의견을 나누었다는 뜻일까요? 여기에 연루된 사태가 좀 복잡해 보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앞 단락에서 두 가지 사건을 보도했습니다. 하나는 산헤드린의 심문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의 부인입니다.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난 것이겠지요. 공의회장 안에서는 심문이 진행되고, 밖에서는 부인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면 이 두 사건 모두 간단해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산헤드린은 무슨 이유로 새벽에야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일까요?
다음과 같은 가능성은 없을까요? 산헤드린의 심문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의원 중에 예수에게 유죄를 내리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상식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산헤드린은 오늘의 대법원처럼 유대의 최고 법정입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과 양심을 갖고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이 예수에 연관된 문제를 조직 폭력배처럼 얼렁뚱땅 다룰 수는 없었겠지요.
어쨌든지 그들은 새벽에 이르러서야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죄 평결입니다. 바둑에 “장고(長考)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밤을 새워 논란을 벌였지만 결국 희대의 오판을 내린 것입니다. 지성과 양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진리를 꿰뚫어 볼 수 는 없었다는 말이겠지요.
혹시 예수님께서 인도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사역을 하셨다면 어떻게 되셨을까요?
아니 유대사회만 아니었다고 한다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처벌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척이나 분노한 것 같습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그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지금 시대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정치권력적 해석도 있지만 당시 그들의 순수성을 조금 이라도
인정하면서, 저는 이렇게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제 믿음에 그렇게 까지 확고하지 못해서....ㅠㅠ;
정목사님, 산헤드린은 법적인 효력이 있는 곳인가요?
예루살렘이 로마의 통치는 받았다고 하지만, 통치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산헤드린의 법정을 인정해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내려진 일반적인 판결이라고 하면 굳이 빌라도에 넘겨 주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을 처형하기 하기 위한 합법적인 수순을 밞는 것인가요?
종교적 유죄에서 정치적 유죄까지 확실하게 보여 줌으로써 그 당시 민중에게 예수님의 허구성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는지 의심을 품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