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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s 517
||0||0정목사님, 설교말씀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의 댓 글로 제가 질문한 해석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다고 답을 주셨습니다. 특히 모세가 내려친 반석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형적인 알레고리라고 답하셨습니다. 이러한 목사님 답변이 저에게는 충분히 납득이 되지 않아서 <알레고리 해석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라는 질문을 드립니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저의 질문에 대해 보충설명을 하겠습니다.
저는 구약과 신약, 또는 이스라엘과 교회역사를 특징적으로 규명하고 대비하는 여러 Key-words들 중 하나가 <율법>과 <은혜>이며 이를 대표하는 분은 모세와 예수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도식적으로 단순화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여기에서만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렇게 시도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율법>과 <은혜>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나는 곳 중 하나가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민 20:2-13). 여기서 모세의 행위는 율법의 특성을 잘 나타낸 것으로서 어느덧 모세는 자기의 의에 도취되어 감히 여호와에게, 그리고 여호와위치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를 낸 것이지요. 이때 모세는 일반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대표성을 갖는 인물로서 마치 선악과의 사례처럼 하나님과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지요. 이 부분에서 만약 하나님의 공의대로 심판하셨다면 바위에서는 불이 나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불살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당장의 죽음대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벌은 받았고, 바위에서는 은혜의 샘물이 솟아나왔지요. 이 장면에서 율법으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음과 함께, 그 대척 점에 있는 반석은 은혜의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할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지요. 이러한 알레고리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고, 고전 10:4의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는 바울의 해석에 근거한 것입니다.
저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구약과 신약의 지평들이 고유하게 살아 움직이면서 창조적인 구원 지평을 여는 해석이 옳다는 목사님 의견에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울러서 대부분의 알레고리 해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동방>을 한국으로 해석한 사이비 교주들 때문에 그렇게 많은 피해를 입었던 희극적인 비극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제 주변에서도 해박한 성경지식을 가진 분들의 사변적 해석에 따른 지적 유희와 영적 교만의 사례를 심심찮게 보아왔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구속사역에 있어서 <율법>과 <은혜>의 팽팽한 긴장과 상호변증관계를 개인뿐만 아니라 긴 역사적 맥락에서 깊게 통찰한 바울의 해석까지를 알레고리로 배제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을까요? 결론적으로 신약성서 기자들의 알레고리까지 금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풍성한 해석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저의 좁은 소견 때문에 질문을 드립니다.
저는 구약과 신약, 또는 이스라엘과 교회역사를 특징적으로 규명하고 대비하는 여러 Key-words들 중 하나가 <율법>과 <은혜>이며 이를 대표하는 분은 모세와 예수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도식적으로 단순화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여기에서만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렇게 시도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율법>과 <은혜>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나는 곳 중 하나가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민 20:2-13). 여기서 모세의 행위는 율법의 특성을 잘 나타낸 것으로서 어느덧 모세는 자기의 의에 도취되어 감히 여호와에게, 그리고 여호와위치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를 낸 것이지요. 이때 모세는 일반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대표성을 갖는 인물로서 마치 선악과의 사례처럼 하나님과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지요. 이 부분에서 만약 하나님의 공의대로 심판하셨다면 바위에서는 불이 나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불살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당장의 죽음대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벌은 받았고, 바위에서는 은혜의 샘물이 솟아나왔지요. 이 장면에서 율법으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음과 함께, 그 대척 점에 있는 반석은 은혜의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할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지요. 이러한 알레고리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고, 고전 10:4의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는 바울의 해석에 근거한 것입니다.
저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구약과 신약의 지평들이 고유하게 살아 움직이면서 창조적인 구원 지평을 여는 해석이 옳다는 목사님 의견에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울러서 대부분의 알레고리 해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동방>을 한국으로 해석한 사이비 교주들 때문에 그렇게 많은 피해를 입었던 희극적인 비극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제 주변에서도 해박한 성경지식을 가진 분들의 사변적 해석에 따른 지적 유희와 영적 교만의 사례를 심심찮게 보아왔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구속사역에 있어서 <율법>과 <은혜>의 팽팽한 긴장과 상호변증관계를 개인뿐만 아니라 긴 역사적 맥락에서 깊게 통찰한 바울의 해석까지를 알레고리로 배제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을까요? 결론적으로 신약성서 기자들의 알레고리까지 금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풍성한 해석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저의 좁은 소견 때문에 질문을 드립니다.
2008.10.28 19:31:51
와우~
꼭 수업 중에 학생과 교수님의 질문과 답변을 들으면서 감동하던 때랑 비슷하네요.
알레고리 해석에 대한 문제의식을 교회에서 종종 느꼈던 터라 살짝 공부한적이 있어요.
알레고리 해석 자체가 틀렸다기 보다는 지금 알레고리 해석 그대로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하는 것이 문제일텐데.. 그 문제의 알레고리 해석은 초대교부들 뿐 아니라 중세시대를 넘어서도 이어졌지요.
오히려 정통적인 교부들보다도 크리쓰소톰같은 아류??들이 알레고리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기도 했구요.
시간이 흐르도록 여전히 알레고리 해석은 일반적인 해석방법이었고
심지어 알레고리에 대해 문제를 삼던 루터조차도 알레고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구요.
근데 재밌는 것은 알레고리로부터 벗어나서 시도된 성서해석이 성서 문자해석이라는 사실이지요.
저희가 오늘날 문제의식을 두고 있는 문자해석이요..
루터도 알레고리에 문제의식을 느껴 문자해석으로 돌아섰지만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훗날 율리허에 의해 성서문자해석의 기초가 세워졌다고나 할까요??
이후에 예레미야스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문자 해석을 넘어 역사비평과 다양한 비평 장치를 통해서
성서해석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지요??
성서 해석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지 말아야한다는 주장이 늘 우리가 염두해야할 부분인데
해석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 혹은 해석학과 떼어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딜타이와 가다머등에 관해서 우리들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 신학생의 어깨를 무겁게 하네요...
두분의 좋은 질문과 좋은 답변에 공부의지가 확 생겼습니다..
두분께 감사~
꼭 수업 중에 학생과 교수님의 질문과 답변을 들으면서 감동하던 때랑 비슷하네요.
알레고리 해석에 대한 문제의식을 교회에서 종종 느꼈던 터라 살짝 공부한적이 있어요.
알레고리 해석 자체가 틀렸다기 보다는 지금 알레고리 해석 그대로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하는 것이 문제일텐데.. 그 문제의 알레고리 해석은 초대교부들 뿐 아니라 중세시대를 넘어서도 이어졌지요.
오히려 정통적인 교부들보다도 크리쓰소톰같은 아류??들이 알레고리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기도 했구요.
시간이 흐르도록 여전히 알레고리 해석은 일반적인 해석방법이었고
심지어 알레고리에 대해 문제를 삼던 루터조차도 알레고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구요.
근데 재밌는 것은 알레고리로부터 벗어나서 시도된 성서해석이 성서 문자해석이라는 사실이지요.
저희가 오늘날 문제의식을 두고 있는 문자해석이요..
루터도 알레고리에 문제의식을 느껴 문자해석으로 돌아섰지만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훗날 율리허에 의해 성서문자해석의 기초가 세워졌다고나 할까요??
이후에 예레미야스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문자 해석을 넘어 역사비평과 다양한 비평 장치를 통해서
성서해석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지요??
성서 해석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지 말아야한다는 주장이 늘 우리가 염두해야할 부분인데
해석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 혹은 해석학과 떼어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딜타이와 가다머등에 관해서 우리들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 신학생의 어깨를 무겁게 하네요...
두분의 좋은 질문과 좋은 답변에 공부의지가 확 생겼습니다..
두분께 감사~
2008.10.29 12:09:32
peace님 글 잘 읽었습니다. 님의 해석이 전형적인 알레고리라는 정용섭 목사님의 지적에 개인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님께서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한 것은 바울이 고전 10:4에서 반석을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것과는 그 의미와 적용 그리고 결과가 다소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즉 구약 교회의 육적인 역사를 신약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를 위하여 복음적으로 그 의미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즉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듯이 신약에서는 성도들이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의 말씀이신 예수가 없으면 살수가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 입니다.
사실 구약의 육적인 역사와 사건을 복음적인 시각으로 재해석이 본격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천국으로 믿었던 "가나안"에서 몇백년 살지 못하고 쫏겨나면서 부터 시작 되었으며 예수와 사도들에 의해서 완벽한 틀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에를들면 아모서의 아래와 같은 구절들 이지요
아모스는 기근의 의미를 육적인 것을 넘어선 영적인 말씀의 기갈의 시대를 예기하고 있는 것 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 8:11)"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님의 해석방식을 조금더 확대해 생각해 보면?.. 구약의 만나도한 예수를 예표한다고 해석 할 수 있으며 만나를 땅에 던져 버린다면 예수를 버려버린는 행위로 해석 되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해석은 사도들과 예수가 사용한 알레고리적인 해석방식과는 전혀다른 양식의 알래고리해석의 적용이 되어바리는 것 아닐까요?
구약 본문 민수기 20장 8절로 12절을 에서 8절또한 님께서 해석하시는 대로 해석한다면 모세가 지팡이로 돌을 내려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님의 말씀처럼 율법의 대표인 모세더러 은혜의 대표인 반석 즉 예수에게 "명령"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대표인 모세가 은혜의 대표인 예수님께 명령할 수 있을까요?
이번 본문에서 님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신앙의 큰 잘못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고는 볼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식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자의적으로 계속되어지고 전체적인 신학의 틀을 벗어나 오석 되어진다면 문제가 심각해 지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즉 구약 교회의 육적인 역사를 신약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를 위하여 복음적으로 그 의미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즉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듯이 신약에서는 성도들이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의 말씀이신 예수가 없으면 살수가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 입니다.
사실 구약의 육적인 역사와 사건을 복음적인 시각으로 재해석이 본격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천국으로 믿었던 "가나안"에서 몇백년 살지 못하고 쫏겨나면서 부터 시작 되었으며 예수와 사도들에 의해서 완벽한 틀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에를들면 아모서의 아래와 같은 구절들 이지요
아모스는 기근의 의미를 육적인 것을 넘어선 영적인 말씀의 기갈의 시대를 예기하고 있는 것 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 8:11)"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님의 해석방식을 조금더 확대해 생각해 보면?.. 구약의 만나도한 예수를 예표한다고 해석 할 수 있으며 만나를 땅에 던져 버린다면 예수를 버려버린는 행위로 해석 되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해석은 사도들과 예수가 사용한 알레고리적인 해석방식과는 전혀다른 양식의 알래고리해석의 적용이 되어바리는 것 아닐까요?
구약 본문 민수기 20장 8절로 12절을 에서 8절또한 님께서 해석하시는 대로 해석한다면 모세가 지팡이로 돌을 내려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님의 말씀처럼 율법의 대표인 모세더러 은혜의 대표인 반석 즉 예수에게 "명령"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대표인 모세가 은혜의 대표인 예수님께 명령할 수 있을까요?
이번 본문에서 님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신앙의 큰 잘못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고는 볼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식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자의적으로 계속되어지고 전체적인 신학의 틀을 벗어나 오석 되어진다면 문제가 심각해 지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2008.10.29 12:50:54
정목사님의 자세한 설명 잘 읽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공감합니다만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성령의 열매중 사랑을 빼면 그레꼬-로마의 일반적인 덕목을 인용한 것이라는 말씀은 공감하기가 쉽지 않군요. 바울은 자신이 배웠던 모든 학문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인하여 "배설물"로 버렸다고 했습니다. 배설물로 여긴다는 바울이 배설물속에서 덕목들을 인용하였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가지기에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바울의 모든 서신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보면 언어 하나, 토시 하나 까지 모세의 글들과 시편 지혜서 그리고 선지자의 글들 그리고 이 글들이 계시하는 바를 완전히 열어 보이신 예수의 말씀과 사상적으로 일관성을 완벽히 유지하기 위해 언어적으로 대단히 정교하고 주의깊게 사용된것을 알수 있다고 봅니다.
본문에 인용한 갈라디아서의 서령의 열매또한 마찬가지라 생각 합니다. 성령의 열매에 언급된 덕목들은 그레꼬-로마 사회에 있었던 일반 적인 덕목일 수 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구약의 시편의 기자들과 선지자들과 예수의 말씀에서 무수히 많이 요구되었던 덕목들 아닌가 생각 합니다.
이런한 시각으로 바울의 글들을 보아야 그 글의 의미가 명확해 지지 않은 까요?
예를들어 "화평"이라는 덕목을 하나만 보아도 같은 언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레꼬-로만이 말하는 화평의 의미와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화평의 근본은 죄사함을 통한 하나님과 성도의 화평에 화평의 본질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오래참음도한 오래참고 인내하면 좋은 날이 온다는 식의 오래참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다시오실 날 까지의 인내"를 이야기 하고 있어 글자만 같을뿐 그래꼬-로마인들이 말하는 인내와는 왑전히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수 있을 것 이며 이러한 본질은 당연히 바울 사상의 모든 근본을 이룬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인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신학자들은 바울의 글들을 읽으며 바울이 처한 역사적인 환경을 보기 보다는 바울의 정신세계와 사상의 뿌리가 되는 모세의 율법을 규정한 글들과 예언서 그리고 그 모세의 글들을 재 해석한 선지자와 예수의 글들을 살펴 봐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면 바울의 글들은 구약의 규례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므로서 구약의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기위한 신약의 교리로 실로 놀라울 정도로 절묘하게 재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 합니다.
바울의 모든 서신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보면 언어 하나, 토시 하나 까지 모세의 글들과 시편 지혜서 그리고 선지자의 글들 그리고 이 글들이 계시하는 바를 완전히 열어 보이신 예수의 말씀과 사상적으로 일관성을 완벽히 유지하기 위해 언어적으로 대단히 정교하고 주의깊게 사용된것을 알수 있다고 봅니다.
본문에 인용한 갈라디아서의 서령의 열매또한 마찬가지라 생각 합니다. 성령의 열매에 언급된 덕목들은 그레꼬-로마 사회에 있었던 일반 적인 덕목일 수 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구약의 시편의 기자들과 선지자들과 예수의 말씀에서 무수히 많이 요구되었던 덕목들 아닌가 생각 합니다.
이런한 시각으로 바울의 글들을 보아야 그 글의 의미가 명확해 지지 않은 까요?
예를들어 "화평"이라는 덕목을 하나만 보아도 같은 언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레꼬-로만이 말하는 화평의 의미와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화평의 근본은 죄사함을 통한 하나님과 성도의 화평에 화평의 본질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오래참음도한 오래참고 인내하면 좋은 날이 온다는 식의 오래참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다시오실 날 까지의 인내"를 이야기 하고 있어 글자만 같을뿐 그래꼬-로마인들이 말하는 인내와는 왑전히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수 있을 것 이며 이러한 본질은 당연히 바울 사상의 모든 근본을 이룬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인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신학자들은 바울의 글들을 읽으며 바울이 처한 역사적인 환경을 보기 보다는 바울의 정신세계와 사상의 뿌리가 되는 모세의 율법을 규정한 글들과 예언서 그리고 그 모세의 글들을 재 해석한 선지자와 예수의 글들을 살펴 봐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면 바울의 글들은 구약의 규례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므로서 구약의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기위한 신약의 교리로 실로 놀라울 정도로 절묘하게 재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 합니다.
2008.10.29 14:04:47
그레코- 로마의 일반적인 덕목이란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념(common notion)이 그레코 로마의 문화로 표현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코람데오 님은 복음에서 말하는 덕목과 그레코 로마의 일반적인 덕목은 질적으로 완전히 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코람데오 님의 말씀을 들으면 "종교와 일상의 괴리" 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코람데오 님의 말씀을 들으면 "종교와 일상의 괴리" 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2008.10.29 14:10:51
바울은 아테네에서 사람들과 진리 논쟁을 하면서 거기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씌어진 제단을 두고 하나님을 변증합니다... 저는 그런 맥락으로 이해를 합니다...
2008.10.29 14:53:10
와~ 오늘도 많이 배웠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저도 코람데오님처럼 일반적인 세상의 윤리,덕목과 복음적인 덕목(?)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라고 볼 수 있고, 이에대해서는 정목사님의 '율법과 사랑'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
> 여러분에게 이런 영적 세계가 보이시나요?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적으로 변화되었다는
> 사실을 실감하고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율법을 완성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 여러분을 통해서 이웃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저의 이해는 세상적인 덕목들은 비록 같은 단어라도 '율법적'이며 '육적'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코람데오님처럼 일반적인 세상의 윤리,덕목과 복음적인 덕목(?)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라고 볼 수 있고, 이에대해서는 정목사님의 '율법과 사랑'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
> 여러분에게 이런 영적 세계가 보이시나요?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적으로 변화되었다는
> 사실을 실감하고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율법을 완성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 여러분을 통해서 이웃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저의 이해는 세상적인 덕목들은 비록 같은 단어라도 '율법적'이며 '육적'이라는 것입니다.
2008.10.29 18:20:24
첫날처럼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복음이 말하는 덕목과 그레코 로마의 일반적인 덕목을 배타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같은 언어로 기술되었다 할찌라도 그 의미의 깊이와 넓이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
이러한 언어의 차이를 깨닳는 것이 저는 복음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가 아니나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행"하면 일반적인 도덕수준의 의미로 해석이 되게되면 인터넷에서 야한 동영상 보지않고 술취하여 음탕한 생활을 하지않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그리 음행죄를 짖지 않고 있다고 생각 할찌 모르지만 실지로 "복음"이 말하는 "음행"의 의미를 "하나님과 우상"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기는(사랑하는) 행위로 정확히 이해하게되면 성경에서 사용된 "음행"이라는 언어앞에 많은 성도들은 가슴을 찢고 회개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첫날처럼님 제 글을 읽으시면서 "종과와 일상의 괴리"를 느끼신다고 말씀 하시는 군요. 이해됩니다. 젝 사용하는 언어감각으로 표현하자면 "복음과 일상의 괴리"라 말해야 겠습니다. 예 첫날처럼님의 느낌이 옳다고 봅니다. 저는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의 엄청난 괴리를 느낌니다.
" 하늘이 땅보다 사야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이 괴리에 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명" 과 "사람의 계명"으로 이사야 29장 13절에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언어 복음의 언어를 "사람의 계명"수준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과거 구약교회가 그랬던것 처럼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행함은 없이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는 것 아닐까요
복음이 말하는 덕목과 그레코 로마의 일반적인 덕목을 배타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같은 언어로 기술되었다 할찌라도 그 의미의 깊이와 넓이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
이러한 언어의 차이를 깨닳는 것이 저는 복음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가 아니나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행"하면 일반적인 도덕수준의 의미로 해석이 되게되면 인터넷에서 야한 동영상 보지않고 술취하여 음탕한 생활을 하지않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그리 음행죄를 짖지 않고 있다고 생각 할찌 모르지만 실지로 "복음"이 말하는 "음행"의 의미를 "하나님과 우상"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기는(사랑하는) 행위로 정확히 이해하게되면 성경에서 사용된 "음행"이라는 언어앞에 많은 성도들은 가슴을 찢고 회개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첫날처럼님 제 글을 읽으시면서 "종과와 일상의 괴리"를 느끼신다고 말씀 하시는 군요. 이해됩니다. 젝 사용하는 언어감각으로 표현하자면 "복음과 일상의 괴리"라 말해야 겠습니다. 예 첫날처럼님의 느낌이 옳다고 봅니다. 저는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의 엄청난 괴리를 느낌니다.
" 하늘이 땅보다 사야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이 괴리에 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명" 과 "사람의 계명"으로 이사야 29장 13절에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언어 복음의 언어를 "사람의 계명"수준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과거 구약교회가 그랬던것 처럼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행함은 없이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는 것 아닐까요
2008.10.29 18:59:46
예를 들어서 사랑의 경우...
물론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 과 보통 저잣거리의 사랑은 질적으로 다를 수 있겠죠... 남녀 간에 콩깍지가 끼어 "사랑해" 하는 것이 자기 욕심이거나 기만인 경우도 수도 없이 보이니까요... 저도 제 마누라랑 짧은 기간 연애하는 동안에 눈돌아가서 "사랑한다" 고 고백한 말들이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도 많이 드니까요... 오히려 아기를 출산하고 회음부 찢어진 상처가 그렇게 아파서 울 때, 제 가슴이 아파서 그 자리를 제 손으로 연고 발라주고 소독할 때, 그 때 서로 간에 진정한 사랑이 느껴지더군요...
그러면서 느끼는 것이 별다른 사랑은 없다는 겁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어떠니 저떠니 막 나누는 버릇들이 있죠... 저는 그런게 싫습니다...
물론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 과 보통 저잣거리의 사랑은 질적으로 다를 수 있겠죠... 남녀 간에 콩깍지가 끼어 "사랑해" 하는 것이 자기 욕심이거나 기만인 경우도 수도 없이 보이니까요... 저도 제 마누라랑 짧은 기간 연애하는 동안에 눈돌아가서 "사랑한다" 고 고백한 말들이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도 많이 드니까요... 오히려 아기를 출산하고 회음부 찢어진 상처가 그렇게 아파서 울 때, 제 가슴이 아파서 그 자리를 제 손으로 연고 발라주고 소독할 때, 그 때 서로 간에 진정한 사랑이 느껴지더군요...
그러면서 느끼는 것이 별다른 사랑은 없다는 겁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어떠니 저떠니 막 나누는 버릇들이 있죠... 저는 그런게 싫습니다...
2008.10.29 19:35:20
이거 그냥 지나가면 안 될 중요한 거라서 짚어야겠군요.
사랑은 하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소? ㅎㅎ
아가페도 필로스도 에로스도 그것이 사랑이라면
하나님이 하나이듯이 사실은 하나요.
본인이 알고 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첫날처럼이 정말 중요한 걸 말했소이다.
수고.
사랑은 하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소? ㅎㅎ
아가페도 필로스도 에로스도 그것이 사랑이라면
하나님이 하나이듯이 사실은 하나요.
본인이 알고 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첫날처럼이 정말 중요한 걸 말했소이다.
수고.
2008.10.29 19:37:57
제 경험으로보면,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사랑은, 즉 아내, 자식, 부모, 친구.. 등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이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모르죠, 저만 그런지...)
제가 가게에서 매일, 하루종일 만나는 사람들은 물론 점잖고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꽤 건들거리는
친구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동네 양아치 쯤이라고 할까요?
괜히 시비를 걸거나, 장사를 방해하고, 욕설을 하루종일 입에 달고 살며, 사회에 하등 도움이 안되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 있죠. 인생의 무료함을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것으로 풀려고 하기도 하구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솟습니다. "저런 쓰레기들..."하는 마음이 자연히 들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노력해 봅니다.
안 됩니다. 얼마간은 어느정도 되지만, 나에게 못되게 굴면 바로 도로묵이 되어 버리고 마음으로
저주를 퍼 붓습니다.
그래서 저는 압니다. 적어도 제 안에는 진짜 사랑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은 내가
할 수 있는게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어쩌다가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될때가 있습니다. 성령충만이라고 해야할까요? 복음이 뼈속 깊이
사무칠 때에는, 그게 가능해집니다.
내가 하는게 아니라, 사랑이 내 속에 흘러 들어옵니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그냥 그사람들이 이뻐 보이고, 불쌍해 보입니다. 죽을 힘을 써서 노력해도 안되던게, 그냥 그냥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이 얘기하는 사랑이, 행위가 아니고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압니다.
사랑은 저에게 드어오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내거나, 내가 행위할 수 있는게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에게 붙어 있을 때에만,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저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모르죠, 저만 그런지...)
제가 가게에서 매일, 하루종일 만나는 사람들은 물론 점잖고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꽤 건들거리는
친구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동네 양아치 쯤이라고 할까요?
괜히 시비를 걸거나, 장사를 방해하고, 욕설을 하루종일 입에 달고 살며, 사회에 하등 도움이 안되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 있죠. 인생의 무료함을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것으로 풀려고 하기도 하구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솟습니다. "저런 쓰레기들..."하는 마음이 자연히 들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노력해 봅니다.
안 됩니다. 얼마간은 어느정도 되지만, 나에게 못되게 굴면 바로 도로묵이 되어 버리고 마음으로
저주를 퍼 붓습니다.
그래서 저는 압니다. 적어도 제 안에는 진짜 사랑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은 내가
할 수 있는게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어쩌다가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될때가 있습니다. 성령충만이라고 해야할까요? 복음이 뼈속 깊이
사무칠 때에는, 그게 가능해집니다.
내가 하는게 아니라, 사랑이 내 속에 흘러 들어옵니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그냥 그사람들이 이뻐 보이고, 불쌍해 보입니다. 죽을 힘을 써서 노력해도 안되던게, 그냥 그냥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이 얘기하는 사랑이, 행위가 아니고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압니다.
사랑은 저에게 드어오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내거나, 내가 행위할 수 있는게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에게 붙어 있을 때에만,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저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2008.10.29 20:13:18
저는 아직 성경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뭔지 잘 모릅니다. 어쩌면 내속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가진 모든 것으로 구재하고도 그속에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그곳에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그 사랑이 무었인지 잘 모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볼 뿐이라고 말합니다. 언젠가 ? 그분이 오시면 완전히 알게되겠지요.. 사랑이 뭔지?? 첫날처럼님 종목사님 시드니님의 좋은말씀들 감사합니다..
http://www.christianinside.co.kr/
바울은 우리가 아직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볼 뿐이라고 말합니다. 언젠가 ? 그분이 오시면 완전히 알게되겠지요.. 사랑이 뭔지?? 첫날처럼님 종목사님 시드니님의 좋은말씀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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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20:46:29
정목사님, 좋은 답변에 감사 드립니다.
저의 질문은 약점이 많은 우문이었는데도, 그렇게 긴 답변을 성의껏 작성해주셔서 재삼 감사 드립니다. 제가 비록 목사님을 귀찮게 해드렸지만, 덕분에 바른 알레고리 해석에 대하여 많이 배웠습니다.
이제는 무장해제하고 조금 편하게 글을 올립니다. 목사님 설교말씀 중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이유를 잘 모르시겠다고 하셨지요. 사실상 이번 저의 질문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저는 더 잘 모르지요. 그리고 실제로는 목사님께서 잘 모르시겠다고 하셨기에, 직접 만나 뵌 적도 없음에도 목사님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부가 아닙니다. ^_^) 왜냐면, 공자님 말씀에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하였지요. 이는 어정쩡한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음과 함께, 실제로는 정말 잘 알아는 분들만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내막을 잘 알면서도, 저는 전에 모세는 왜 가나안에 못 들어갔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고 저 나름대로는 이번에 질문에서 밝힌 엉성한 해답을 도출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님 설교말씀의 댓 글로 저의 해석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글로 작성하고 보니 논리도 부실하고, 부흥회 참석 소감 등 여러 소주제간의 관계도 엉성하여 약점이 많다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댓 글을 삭제하려 하였으나, 그래도 그냥 둔 이유는 어차피 공개적으로 무식을 드러내고 배우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도움말씀주신 모든 분 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특히 코람데오님 좋은 조언의 말씀 잘 듣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코람데오님이 이곳의 댓 글과 함께 목사님 설교말씀의 댓 글로 주신 말씀 중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새겨 듣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왕이면 코람데오님과는 누가 옳고 그른 지를 따지기 보다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으로 인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제 생각에는 코람데오님의 주요 관심은 외양적으로 드러나는 삶에 중점을 두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저는 본질적인 내면에 더 중점을 두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모세가 반석을 친 외양적 행위 보다는 그 상태까지 도달하게 된 내면세계에 더 관심을 두었지요. 또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의 바른 의미는 무엇일까에 더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비아의 손님에서 주인의식을 갖는 다비안으로 되는 과정이 모두 비슷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눈팅만 하다가, 어는 순간 손님입장에서 글을 한 번 올리고 또 올리고 하다가, 어느덧 팬이 되고 그러다가 드디어 다비안이 되지요. 저는 아직은 정식 다비안은 아니고, 그 과정으로 진입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목사님, 그리고 다비안 여러분에게 감사 드립니다.
저의 질문은 약점이 많은 우문이었는데도, 그렇게 긴 답변을 성의껏 작성해주셔서 재삼 감사 드립니다. 제가 비록 목사님을 귀찮게 해드렸지만, 덕분에 바른 알레고리 해석에 대하여 많이 배웠습니다.
이제는 무장해제하고 조금 편하게 글을 올립니다. 목사님 설교말씀 중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이유를 잘 모르시겠다고 하셨지요. 사실상 이번 저의 질문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저는 더 잘 모르지요. 그리고 실제로는 목사님께서 잘 모르시겠다고 하셨기에, 직접 만나 뵌 적도 없음에도 목사님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부가 아닙니다. ^_^) 왜냐면, 공자님 말씀에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하였지요. 이는 어정쩡한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음과 함께, 실제로는 정말 잘 알아는 분들만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내막을 잘 알면서도, 저는 전에 모세는 왜 가나안에 못 들어갔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고 저 나름대로는 이번에 질문에서 밝힌 엉성한 해답을 도출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님 설교말씀의 댓 글로 저의 해석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글로 작성하고 보니 논리도 부실하고, 부흥회 참석 소감 등 여러 소주제간의 관계도 엉성하여 약점이 많다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댓 글을 삭제하려 하였으나, 그래도 그냥 둔 이유는 어차피 공개적으로 무식을 드러내고 배우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도움말씀주신 모든 분 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특히 코람데오님 좋은 조언의 말씀 잘 듣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코람데오님이 이곳의 댓 글과 함께 목사님 설교말씀의 댓 글로 주신 말씀 중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새겨 듣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왕이면 코람데오님과는 누가 옳고 그른 지를 따지기 보다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으로 인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제 생각에는 코람데오님의 주요 관심은 외양적으로 드러나는 삶에 중점을 두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저는 본질적인 내면에 더 중점을 두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모세가 반석을 친 외양적 행위 보다는 그 상태까지 도달하게 된 내면세계에 더 관심을 두었지요. 또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의 바른 의미는 무엇일까에 더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비아의 손님에서 주인의식을 갖는 다비안으로 되는 과정이 모두 비슷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눈팅만 하다가, 어는 순간 손님입장에서 글을 한 번 올리고 또 올리고 하다가, 어느덧 팬이 되고 그러다가 드디어 다비안이 되지요. 저는 아직은 정식 다비안은 아니고, 그 과정으로 진입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목사님, 그리고 다비안 여러분에게 감사 드립니다.
2008.10.30 10:33:28
저도 주제넘지만 사랑은 아가페, 에로스, 필로 등 인간적인 관점의 구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근원적으로는 하나일 것이라는 깨달음?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같은 취지의 <첫날처럼> 님의 댓 글과 정목사님 화답 글이 반갑습니다.
저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되는 억압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하여 우스개 소리로 부러운 케이스가 이세상 자기 마음대로 다 살다가 죽기 전에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이지요.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같은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분들이 많지요.
저는 한 때 마광수교수의 저서들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일관된 논지는 모든 것의 중심이 에로스 사랑이며, 역사해석조차도 성의 해방의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설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의 우선 순위에는 종교, 정치권력, 위선 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그 분의 해박한 지식수준에야 조금도 못 미치지만, 적어도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보면 그분이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그분 역시 아가페 사랑과 에로스 사랑이 화합할 수 없는, 아니 아가페 사랑이 에로스 사랑을 구속하고 제약하므로 과감히 해방을 이루어야 하는 관점으로 이해한 것이지요. 물론 해방과 자유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제가 이해한 마 교수의 해방은 약간 방종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결국은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도그마 또는 구속으로 작용하는 듯이 보였습니다만…….
저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되는 억압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하여 우스개 소리로 부러운 케이스가 이세상 자기 마음대로 다 살다가 죽기 전에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이지요.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같은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분들이 많지요.
저는 한 때 마광수교수의 저서들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일관된 논지는 모든 것의 중심이 에로스 사랑이며, 역사해석조차도 성의 해방의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설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의 우선 순위에는 종교, 정치권력, 위선 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그 분의 해박한 지식수준에야 조금도 못 미치지만, 적어도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보면 그분이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그분 역시 아가페 사랑과 에로스 사랑이 화합할 수 없는, 아니 아가페 사랑이 에로스 사랑을 구속하고 제약하므로 과감히 해방을 이루어야 하는 관점으로 이해한 것이지요. 물론 해방과 자유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제가 이해한 마 교수의 해방은 약간 방종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결국은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도그마 또는 구속으로 작용하는 듯이 보였습니다만…….
2008.10.31 18:00:39
성서에 그런 구별이 있나요 ? (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스톨게(?))
혹시 단어는 다르게 썻을지라도 뜻은 한가지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 하는 것"이 중요 하겟지요....
신학은 복잡하고 어렵고 머리 아프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이렇다면 시골 할메 할베들은 어떻게 신앙을 할 수 있을가요 ? 결국 성경의 수 많은 이야기들이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알레고리" 가 아닐가요?
마치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풀어서 설명 하듯이 ...말 입니다
혹시 단어는 다르게 썻을지라도 뜻은 한가지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 하는 것"이 중요 하겟지요....
신학은 복잡하고 어렵고 머리 아프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이렇다면 시골 할메 할베들은 어떻게 신앙을 할 수 있을가요 ? 결국 성경의 수 많은 이야기들이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알레고리" 가 아닐가요?
마치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풀어서 설명 하듯이 ...말 입니다
2008.11.03 14:21:24
사랑은 하나라는 것은 또다른 언어적 유희인가? 아니면 사랑이라는 말에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인가? 저는 당연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는 구별이 있다고 봅니다.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다 다른말 아닌가요? 그저 그 의미를 정확히 묘사할 한국말이 없어 섞어서 사용하기 때문에 혼용되어 지는 것 뿐아닌지?.. 아가페와 에로스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란 이야기를 이미 다른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하면 다소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재생각이 짧은 건지 ?
2008.11.05 17:04:22
코람데오님, 만약 깨달음을 순간적이고 획기적인 인식 또는 이해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이 바람직하건 아니건 간에 이를 언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요. 대신에 저의 경우 그러한 계기가 되는 배경의 일부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은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 중에 에로스에만 초점을 맞추어도, 사실 구구 절절한 에로스 사랑이 없다면 종족보존의 어려움은 물론, 수많은 예술의 모티브가 사라짐으로 인하여 얼마나 삭막한 세상이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때로는 에로스 사랑에 목숨을 걸기도 하지만, 시간의 한계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덧없고 무상한 지 알기 때문에 더욱 애절하고 아름답지요.
저만의 오해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에로스 사랑은 어딘지 모르게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고,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가 있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되기도 하고,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가 구약에 포함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의 에로스 사랑도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께 속하는 참사랑의 그림자일 것이라는 상상은 별로 어렵지 않지요.
앞에서 예로든 마광수 교수는 그분의 소설 <사라의 연인>으로 인하여 옥고를 치르고 교수직에 해임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지요. 명분은 그 소설로 인하여 사회적 풍기를 문란하게 하여 해를 끼친다는 것이었지요. 그때 마 교수의 처벌에 가장 앞장선 분이 바로 기독교 사회에서 존경 받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그렇게까지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미천한 생각이며, 그러기에 마음이 아픕니다.
저만의 오해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에로스 사랑은 어딘지 모르게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고,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가 있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되기도 하고,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가 구약에 포함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의 에로스 사랑도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께 속하는 참사랑의 그림자일 것이라는 상상은 별로 어렵지 않지요.
앞에서 예로든 마광수 교수는 그분의 소설 <사라의 연인>으로 인하여 옥고를 치르고 교수직에 해임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지요. 명분은 그 소설로 인하여 사회적 풍기를 문란하게 하여 해를 끼친다는 것이었지요. 그때 마 교수의 처벌에 가장 앞장선 분이 바로 기독교 사회에서 존경 받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그렇게까지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미천한 생각이며, 그러기에 마음이 아픕니다.
2008.11.07 00:29:27
피스님 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언어적인 문제입니다. 아카페의 사랑이에로스의 사랑보다 우월하다거나 하나님의 사랑이 아카페의 사랑이라고 말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저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카페적인 사랑이라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그리스인들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어떤 하나의 단어를 적용하여 정의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정확한 의미는 통일된 사상 체계하에서 그 사랑을 기술한 성경 저자들의 전체글을 통하여 정의 할 수 있어야 겠지요. 그리고 그 결정체가 사도바울의 고린도 전서 13장의 정의 일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일반 언어 상식의 범위내에서는 정확히 정의 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라는 개념만 보아도 세상의 언어로 표현된 사랑의 개념으로는 계연성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과연 아카페와 에로스가 결국은 동일한 의미의 사랑이다라고 결론 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다른 언어이며 다른 의미로 보아야 한다 생각 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과연 아카페와 에로스가 결국은 동일한 의미의 사랑이다라고 결론 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다른 언어이며 다른 의미로 보아야 한다 생각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11.07 11:54:54
한 때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구약에 대한 신약에서의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 감탄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다보니 대부분 알레고리 해석이었더군요.
알레고리 해석의 맹점은 마치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알레고리 해석을 비판하는 저 역시도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언약궤의 세 가지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가 든 금항아리, 십계명 돌판을 각각 소망, 사랑, 믿음으로 연결시켜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으니 참 무식합니다.
요즘 빌 1:8의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는 문장 하나 가지고도 답이 안나와서 미칠 지경입니다.
얼마 전에는 시 8:5의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에서 메엘로힘을 왜 천사라고 번역했을까 하는 문제로 씨름 했었구요.
결론은 헬라어, 히브리어 소중하게 생각하고 공부하자입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다보니 대부분 알레고리 해석이었더군요.
알레고리 해석의 맹점은 마치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알레고리 해석을 비판하는 저 역시도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언약궤의 세 가지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가 든 금항아리, 십계명 돌판을 각각 소망, 사랑, 믿음으로 연결시켜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으니 참 무식합니다.
요즘 빌 1:8의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는 문장 하나 가지고도 답이 안나와서 미칠 지경입니다.
얼마 전에는 시 8:5의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에서 메엘로힘을 왜 천사라고 번역했을까 하는 문제로 씨름 했었구요.
결론은 헬라어, 히브리어 소중하게 생각하고 공부하자입니다~
2008.11.07 18:01:09
메엘로힘을 70인역의 앙겔로스에 의지해 천사로 번역한 것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야웨를 아도나이로 읽는 것처럼 감히 인간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냐며 천사로 번역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저희 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시는 류호준 교수님의 번역 시편과 질문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70인역이나 대부분의 영어성경에 상관없이 그냥 히브리 원문 대로 하나님으로 하기로요.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로 생각하려구요.
저희 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시는 류호준 교수님의 번역 시편과 질문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70인역이나 대부분의 영어성경에 상관없이 그냥 히브리 원문 대로 하나님으로 하기로요.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로 생각하려구요.
2008.11.07 21:43:33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 미숙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에서는 " 사랑"을 그렇게 분리해서 사용 했는지 모르지만
성서-특히- 신약성서에서는 다른 단어를 쓰더라도 "사랑"을 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문해서 아직-
그냥 "사랑"은 모두 이른바 "아가페" 적인 사랑속에 속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에서는 " 사랑"을 그렇게 분리해서 사용 했는지 모르지만
성서-특히- 신약성서에서는 다른 단어를 쓰더라도 "사랑"을 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문해서 아직-
그냥 "사랑"은 모두 이른바 "아가페" 적인 사랑속에 속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8.11.08 09:10:57
구약성서(희브리)의 "인간관" 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천사와 여러 신들이 공중에 떠돌던 시절(70인역 번역시절)의
상황에서는 "엘로힘 보다 조금 못함..." 과 "천사 보다 조금 못함..."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그 당시 현실의 삶에서는 대단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석에 따라서는 사람이 천사보다 더 높은 존재일 수 있으니요 )
그러나 오늘날 하늘에는 "인공위성만" 이 떠도는 세상에서 "천사"와 "엘로힘" 차이가 그렇게 심각할가요?
그야말로 인간에 대한 "구약성서'의 알레고리가 아닐가요 ? 섣부른 생각을 해봅니다
상황에서는 "엘로힘 보다 조금 못함..." 과 "천사 보다 조금 못함..."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그 당시 현실의 삶에서는 대단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석에 따라서는 사람이 천사보다 더 높은 존재일 수 있으니요 )
그러나 오늘날 하늘에는 "인공위성만" 이 떠도는 세상에서 "천사"와 "엘로힘" 차이가 그렇게 심각할가요?
그야말로 인간에 대한 "구약성서'의 알레고리가 아닐가요 ? 섣부른 생각을 해봅니다
2008.11.10 16:14:42
아가페 라고 하는 것도 절대적인 건 아니네요...
디모데 후서 4장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요한복음 12장 43절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
여기에서 사랑하다, 좋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가 "아가파오", 즉 아가페의 동사 형태네요...
전가의 보도 같은 "아가페"라는 단어도 결국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실제로 "아가페"라는 뜻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을 나타내는 뜻이 주가 되고, 때론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면서, 에로스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고 하네요...
신약성서의 어법이 그러하듯이, 결국 아가페란 것도 차용해서 쓰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구약성서 헬라어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의 하나님, 어버이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가페와 발음이 비슷해서 그렇게 빌려 쓰였다고도 하고, 아가페라는 단어의 뜻이 모호하고 광범위해서 규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적격이라 그렇게 썼다는 이야기도 있구요...
부모가 자식에 대해 가지는 사랑 - 때론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 의 본질이 무조건적이고 자기희생적이라는 면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통하기에 아가페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가페든 에로스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각기 다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그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표현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겠죠...
디모데 후서 4장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요한복음 12장 43절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
여기에서 사랑하다, 좋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가 "아가파오", 즉 아가페의 동사 형태네요...
전가의 보도 같은 "아가페"라는 단어도 결국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실제로 "아가페"라는 뜻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을 나타내는 뜻이 주가 되고, 때론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면서, 에로스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고 하네요...
신약성서의 어법이 그러하듯이, 결국 아가페란 것도 차용해서 쓰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구약성서 헬라어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의 하나님, 어버이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가페와 발음이 비슷해서 그렇게 빌려 쓰였다고도 하고, 아가페라는 단어의 뜻이 모호하고 광범위해서 규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적격이라 그렇게 썼다는 이야기도 있구요...
부모가 자식에 대해 가지는 사랑 - 때론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 의 본질이 무조건적이고 자기희생적이라는 면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통하기에 아가페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가페든 에로스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각기 다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그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표현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겠죠...
좋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비로 짧은 글이지만 그 구성이 얼마나 탄탄한지
마치 전문적인 신약 성서학자의 글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질문의 핵심은 제 설교 <모세가 ....>의 역사적 배경인 반석을 중심으로
알레고리 해석의 정체와 한계에 대한 것이군요.
피스 님은 우선 민수기 20:2-13절을 주석하면서
모세가 율법을 대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단 그 주석이 본문에서 조금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한 구절만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행위는 율법의 특성을 잘 나타낸 것으로서
어느덧 모세는 자기의 의에 도취되어 감히 여호와에게,
그리고 여호와위치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를 낸 것이지요.>
민수기 본문에는 모세가 화를 냈다거나
자기 의에 도취되었다거나
여호와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말이 없습니다.
민수기는 모세와 아론이 믿음이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사실만 지적합니다.
저는 설교에서,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그 잘못이 무언지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대신 우리가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르는 게 정답입니다.
제가 왜 모른다고 말했는지 아마 아실 테니
그것에 대한 설명은 그만 두겠습니다.
모세가 화를 냈다거나 자기 의에 도취되었다는 설명이
혹시 신약성서 어딘가에는 있을까요?
제 기억에는 없는데요.
제가 이렇게 성구에 대해서는 ‘맹’ 하답니다.
이제 조직신학자들이 성서신학자들에게 욕을 먹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ㅎㅎ
위의 해석 건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피스 님이 말하려는 핵심은
모세가 화를 내면서 친 반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입니다.
그걸 제가 알레고리라고 지적했구요.
피스 님은 고전 10:4절을 인용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분명히 신령한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피스 님의 주장에 대한 저의 비판은
바로 바울에 대한 비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것이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
신약성서 기자들의 주장이라면 정당한 게 아니냐 하는 거였습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대목을 피스 님이 짚은 겁니다.
저는 그냥 반석과 그리스도의 일치라는 건
구약의 고유한 영적 차원이 너무 단순하게 기독론적으로 해석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만 했거든요.
그래서 피스 님이 인용한 고전 10:4절의 문맥을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책도 참고도 했구요.
바로 이런 대목에서 성서 텍스트의 해석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하는 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피스 님은 아주 실증적인 성구를 제시하셨고,
저는 이미 바울의 이런 진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런 건 알레고리이고,
따라서 잘못된 거라고 말해버렸거든요.
마치 미로를 통해서 보물을 발견해야 하듯이
지금 우리는 그런 길로 들어선 겁니다.
다른 독자들을 위해서 저는
두 가지로 단순화 시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반석이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진술은
그것 하나만으로 해석되면 안 되고
문맥 전체를 통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거기서 말하려는 중심은 우상숭배와 음행에 관한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지금 고린도 공동체에서 똑같이 발생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우상숭배와 음행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0: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렇게 영적으로 잘난 척 했거든요.
고린도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성만찬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광야의 여러 사건들,
즉 홍해 건넘,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을 상징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반석과 그리스도의 일치라는 바울의 진술은
더 중요한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한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바울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것은 바로 사실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건 성서해석에서 늘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성서 텍스트의 중심은 하나의 사실만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설명으로 보충될 것 같습니다.
2. 신약성서 기자들은 자신들의 복음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종종 유대인들의 알레고리 해석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약성서 기자들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 교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알레고리는 신약성서 시대에 아주 흔하던 문학적 수사였습니다.
신약성서 기자들도 전문적인 문필가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학적 장르를 빌려오는 건 당연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들은 헬라와 로마의 여러 경구를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갈 5:22,23절에 거론된 그 유명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만 기독교적인 가르침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레꼬-로마의 덕들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 당시 지성인들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법한
그런 덕과 가치들을 제시하면서 복음의 진수를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가 거기에 들어있는 겁니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이런 아홉 가지 열매를 각각 독립적으로
설교의 주제로 삼는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복음은 당시의 교양을 전하는 게 아니니까요.
마찬가지로 고전 10:4절의 알레고리적 표현을
율법과 복음의 대립을 전하기 위한 근거로 삼는 것은
성서 텍스트의 본질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바울의 알레고리적 표현은 옳습니다.
3.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참고가 될 것 같아서 한 마디 덧붙입니다.
‘신령한 음료’라거나 ‘신령한 반석’에서
‘신령한’은 헬라어 ‘프뉴마티코스’의 번역인데,
바울이 사용한 이 헬라어를 잘못 이해하면 알레고리 해석으로 떨어집니다.
여기서 음료와 반석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그의 활동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참고한 C.K. 바레트의 <고린도전서 주석>이 지적한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구약을 인용하거나 해석한 신약성서를 읽을 때
그것이 기록된 공동체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바울이 왜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말했는지,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역사 비평적으로 이해해야지요.
피스 님,
고맙습니다.
평신도 신학자이신 피스 님 덕분에 저도 많이 공부했습니다.
주의 은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