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을 이용하시기 전에 먼저 <검색>을 이용해 보세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검색>을 통해서도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면 이곳을 이용해 보세요.
Articles 517
||0||0'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여기서 말하는 '믿으라'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크게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 이 세상의 창조자는 하나님인 것을 믿으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믿으며 궁극에는 구원받을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등의 계명을 지키는 것
하지만 저에게 이것들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 삶에서 매일매일 저지르는 크고 작은 악행들에 수없이 절망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살 따름입니다.
그래도 저는 구원받을 수 있겠지요?
이신칭의......
결국 다시 묻습니다. ''信'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여기서 말하는 '믿으라'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크게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 이 세상의 창조자는 하나님인 것을 믿으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믿으며 궁극에는 구원받을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등의 계명을 지키는 것
하지만 저에게 이것들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 삶에서 매일매일 저지르는 크고 작은 악행들에 수없이 절망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살 따름입니다.
그래도 저는 구원받을 수 있겠지요?
이신칭의......
결국 다시 묻습니다. ''信'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2008.11.13 08:31:39
산다.
삶,
사는,
살아가는,
동행하는,
일치,
하나,
느껴지는,
생각하는,
알아가는,
길 위에서 걸어가는,
쉼터,
관념과 삶의 일치,
큰 사랑으로 나아가는,
나를 비우는,
자비의 마음,
예수님을 늘 따르는것,
하나님을 늘 바라보는 것.
예수님 생각하면 기분 좋은것,
하나님만 생각하면 설레는것,
예수님의 손을 놓지 않는것,
하나님을 생각하며 일상에서 열심히 사는것........
저도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믿음에 대해?
삶,
사는,
살아가는,
동행하는,
일치,
하나,
느껴지는,
생각하는,
알아가는,
길 위에서 걸어가는,
쉼터,
관념과 삶의 일치,
큰 사랑으로 나아가는,
나를 비우는,
자비의 마음,
예수님을 늘 따르는것,
하나님을 늘 바라보는 것.
예수님 생각하면 기분 좋은것,
하나님만 생각하면 설레는것,
예수님의 손을 놓지 않는것,
하나님을 생각하며 일상에서 열심히 사는것........
저도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믿음에 대해?
2008.11.13 09:21:38
두 분의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평민님,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잘 안 되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을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하면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인데,
그 '정도'와 '구원'은 어떤 관계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니
그 '정도'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사려는 노력'을 견지하기만 하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라는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나를 비워가는 '과정'이라는
말씀을 들은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도 과정의 진행 정도(완성의 정도)의 차이는 생기겠네요.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나를 비우는 것은,
(신자로서의 당연한 삶의 자세이기 때문에,)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로 가능한 것이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예수님 재림시에 나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까요?
하지만 평민님,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잘 안 되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을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하면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인데,
그 '정도'와 '구원'은 어떤 관계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니
그 '정도'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사려는 노력'을 견지하기만 하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라는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나를 비워가는 '과정'이라는
말씀을 들은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도 과정의 진행 정도(완성의 정도)의 차이는 생기겠네요.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나를 비우는 것은,
(신자로서의 당연한 삶의 자세이기 때문에,)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로 가능한 것이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예수님 재림시에 나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까요?
2008.11.13 10:07:09
주원아빠,
믿음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단답으로 주어질 수 없답니다.
믿음과 윤리(행위), 또는 믿음과 인식의 관계와 연관해서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거든요.
기독교 신앙은 삶과 분리된 추상과 관념이 아니면서
동시에 행동주의도 아니랍니다.
바울의 이신칭의와 루터의 "솔라 피데"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말하고 있어요.
아마 일상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자기에 대한 성찰에서 이런 질문을 하신 것 같군요.
우리가 억지로 주님의 뜻대로 살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해봐야 그건 위선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답니다.
일단 자신을 내버려두고,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해보세요.
그 은총과 사랑과 계획과 섭리와 약속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되면
그때 믿음과 삶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런 경험이 없이 자기의 삶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신경증에 사로잡히게 될 겁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진정한 친구였다고 한다면
그분이 곧 우리의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되지요.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친구라는 사실을 명실상부하게 인식하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내면에서부터
마치 봄에 계곡 얼음 밑에서부터 얼움이 녹아 물이 흐르듯이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될 겁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를 너무 닦달하지 마세요.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를 닦달하면 위에서 말했듯이
심리적 좌절이나 또는 반대로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답니다.
결론,
하나님의 은총에 더 의존해보시라.
사족: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의 1장 "나는 믿습니다."를 읽어보세요.
좋은 하루.
믿음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단답으로 주어질 수 없답니다.
믿음과 윤리(행위), 또는 믿음과 인식의 관계와 연관해서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거든요.
기독교 신앙은 삶과 분리된 추상과 관념이 아니면서
동시에 행동주의도 아니랍니다.
바울의 이신칭의와 루터의 "솔라 피데"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말하고 있어요.
아마 일상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자기에 대한 성찰에서 이런 질문을 하신 것 같군요.
우리가 억지로 주님의 뜻대로 살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해봐야 그건 위선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답니다.
일단 자신을 내버려두고,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해보세요.
그 은총과 사랑과 계획과 섭리와 약속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되면
그때 믿음과 삶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런 경험이 없이 자기의 삶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신경증에 사로잡히게 될 겁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진정한 친구였다고 한다면
그분이 곧 우리의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되지요.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친구라는 사실을 명실상부하게 인식하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내면에서부터
마치 봄에 계곡 얼음 밑에서부터 얼움이 녹아 물이 흐르듯이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될 겁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를 너무 닦달하지 마세요.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를 닦달하면 위에서 말했듯이
심리적 좌절이나 또는 반대로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답니다.
결론,
하나님의 은총에 더 의존해보시라.
사족: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의 1장 "나는 믿습니다."를 읽어보세요.
좋은 하루.
2008.11.13 13:16:28
목사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라는 사실의 명확한 인식과 함께 오는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는것.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사도신경 해설 1장을 읽기는 읽었는데.... ^^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라는 사실의 명확한 인식과 함께 오는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는것.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사도신경 해설 1장을 읽기는 읽었는데.... ^^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2008.11.15 21:48:21
<주원아빠>님의 질문에 대한 정용섭목사님의 답변에 제가 어떻게 가타부타 추가의견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도 신학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원아빠>님과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씨름한 적이 있었기에, 저의 생각들을 정리하여 편하게 대답해 보겠습니다. <편하게> 라는 말은 무식이 드러나도 좋고, 신학적인 오류가 있다고 하여도 별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저의 답변은 <주원아빠>님이 이미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뻔한 내용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또한 어떤 부분은 혹시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원아빠>님의 질문은 사도행전 16:31에 국한된, 그 상황에 맞는 부분적인 질문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본질, 즉 성경 전체를 통전적으로 요약하는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왜냐면 그 구절이 성경의 핵심 Key-words인 예수, 믿음, 구원을 포함하기 때문이지요. 이 질문은 시대와 지역을 총 망라하여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질문으로, 그에 대한 대답도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는 쉬운 답변이어야 할 것입니다. 즉 믿음을 아는데 있어서는 지식수준과 무관하고, 고도의 신학, 철학적 사고를 요하지 않으며, 역사비평학이나 해석학적 기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지요. 오히려 이러한 거품을 모두 제거한 상태에서, 교리가 아닌 실체적인 삶으로 연결되는 답변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우선 <주원아빠>님이 알고 싶어하시는 믿음이란 성경에 표현된 다양한 믿음들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처음 갖게 되는 믿음으로 예상합니다. 즉, 이 믿음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이세상 삶으로부터,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참여를 향하여 들어가는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 또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소유나 완성의 개념이 아니고, 다른 차원의 크리스천 삶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생명의 믿음을 의미하겠지요. 물론 이후에 믿음은 더욱 깊어지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믿음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핵심, 즉 성경에서 말하는 무엇을 믿는 믿음인 지는 역시 다 아는 내용이지요. 그것은 죄인인 사람이 죄로 인하여 생명의 원천인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상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요. (엄밀하게 신학적으로 칭의와 희생제사는 의미가 다름을 압니다만, 최초의 믿음에는 혼용하여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이 대답은 너무 쉬운 것으로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지요.
우선 매우 간단한 말씀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히 9:12의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라는 말씀과, 히 10:17의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 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씀만 읽어봅시다. 위 말씀에 의하면 영원한 속죄는 단번에 이루어 졌고, 하나님은 죄를 기억 지 않는다고 기록되었으므로 그대로 믿으면 되지요. 그런데 그 말씀은 안 믿고 계속 자기는 죄인이라고 우기는 우를 범하면서 겸손한 척 할 수 있지요. 물론 자기의 내면을 보면 죄인이 맞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었으니, 그러기에 더욱 감사할 뿐이지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필수 암기 성경구절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실체적으로 믿나요? 이 말씀을 이성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실제로는 이 말씀을 마음에는 믿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단 하나의 죄 때문에 영생을 못 얻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는 것은, 결국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라는 가장 큰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죄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지요. 얼핏 보면 저의 논리가, 죄 때문에 못 믿고, 믿지 못하니 죄가 있고, 마치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순환 논리처럼 보이지요. 이것은 우리 죄인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이지요.
저는 생명의 믿음이란 내편에서 억지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마치 온갖 생명이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편에서 신념을 강화하여 억지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믿음은 죄인인 자기 안에서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물 (엡 2:8)로 주어진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또한 이것은 단번에 주신 믿음 (유 1:3)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믿음이 온 후 (갈 3:25) 와 같이 완료형으로도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요. 결국 이 믿음은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설명으로는 알 수 없으며, 그것을 체험적으로 소유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 (딤3:9)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지요?
결론적으로 저도 정용섭 목사님 답변과 같습니다. 자신을 닦달하지 말고 내버려두고 하나님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복음의 말씀을 깨닫는 믿음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원아빠>님의 질문은 사도행전 16:31에 국한된, 그 상황에 맞는 부분적인 질문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본질, 즉 성경 전체를 통전적으로 요약하는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왜냐면 그 구절이 성경의 핵심 Key-words인 예수, 믿음, 구원을 포함하기 때문이지요. 이 질문은 시대와 지역을 총 망라하여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질문으로, 그에 대한 대답도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는 쉬운 답변이어야 할 것입니다. 즉 믿음을 아는데 있어서는 지식수준과 무관하고, 고도의 신학, 철학적 사고를 요하지 않으며, 역사비평학이나 해석학적 기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지요. 오히려 이러한 거품을 모두 제거한 상태에서, 교리가 아닌 실체적인 삶으로 연결되는 답변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우선 <주원아빠>님이 알고 싶어하시는 믿음이란 성경에 표현된 다양한 믿음들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처음 갖게 되는 믿음으로 예상합니다. 즉, 이 믿음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이세상 삶으로부터,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참여를 향하여 들어가는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 또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소유나 완성의 개념이 아니고, 다른 차원의 크리스천 삶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생명의 믿음을 의미하겠지요. 물론 이후에 믿음은 더욱 깊어지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믿음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핵심, 즉 성경에서 말하는 무엇을 믿는 믿음인 지는 역시 다 아는 내용이지요. 그것은 죄인인 사람이 죄로 인하여 생명의 원천인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상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요. (엄밀하게 신학적으로 칭의와 희생제사는 의미가 다름을 압니다만, 최초의 믿음에는 혼용하여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이 대답은 너무 쉬운 것으로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지요.
우선 매우 간단한 말씀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히 9:12의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라는 말씀과, 히 10:17의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 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씀만 읽어봅시다. 위 말씀에 의하면 영원한 속죄는 단번에 이루어 졌고, 하나님은 죄를 기억 지 않는다고 기록되었으므로 그대로 믿으면 되지요. 그런데 그 말씀은 안 믿고 계속 자기는 죄인이라고 우기는 우를 범하면서 겸손한 척 할 수 있지요. 물론 자기의 내면을 보면 죄인이 맞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었으니, 그러기에 더욱 감사할 뿐이지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필수 암기 성경구절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실체적으로 믿나요? 이 말씀을 이성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실제로는 이 말씀을 마음에는 믿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단 하나의 죄 때문에 영생을 못 얻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는 것은, 결국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라는 가장 큰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죄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지요. 얼핏 보면 저의 논리가, 죄 때문에 못 믿고, 믿지 못하니 죄가 있고, 마치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순환 논리처럼 보이지요. 이것은 우리 죄인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이지요.
저는 생명의 믿음이란 내편에서 억지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마치 온갖 생명이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편에서 신념을 강화하여 억지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믿음은 죄인인 자기 안에서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물 (엡 2:8)로 주어진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또한 이것은 단번에 주신 믿음 (유 1:3)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믿음이 온 후 (갈 3:25) 와 같이 완료형으로도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요. 결국 이 믿음은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설명으로는 알 수 없으며, 그것을 체험적으로 소유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 (딤3:9)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지요?
결론적으로 저도 정용섭 목사님 답변과 같습니다. 자신을 닦달하지 말고 내버려두고 하나님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복음의 말씀을 깨닫는 믿음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11.16 20:20:39
기독교에서 믿음은 성서안에 있는것이지요,
성서를 무시하거나 뛰어 넘는 것은 기독교 믿음(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이 믿음의 중심에는 "십자가" 가 있는것이지요
십자가는 어떤 고도의 신학적인 진술로도 만족 시킬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삶" 을(단순한 복종) 요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십자가 만큼 우리 눈에 불확실 한것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십자가의 삶이 자명하다면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우는 희브리서 11장 에서는
믿음의 "삶" 이 증거 되고 있지요
그러므로 지금 불확실 하지만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것이
기독교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를 무시하거나 뛰어 넘는 것은 기독교 믿음(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이 믿음의 중심에는 "십자가" 가 있는것이지요
십자가는 어떤 고도의 신학적인 진술로도 만족 시킬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삶" 을(단순한 복종) 요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십자가 만큼 우리 눈에 불확실 한것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십자가의 삶이 자명하다면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우는 희브리서 11장 에서는
믿음의 "삶" 이 증거 되고 있지요
그러므로 지금 불확실 하지만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것이
기독교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11.19 22:33:37
생명이 존재하면 삶이 따르듯이 생명의 믿음이 있으면 행위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겠지요.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부족하다 보니 믿음과 행위를 오히려 대립관계로 이해하기도 하지요. 그러다 보니 성실한 삶을 사는 분들은 믿음이 있노라 하는 사람들의 삶이 뒷받침하지 못함을 염려합니다. 그러한 염려는 자칫 믿음이 관념으로 흐를 수 있으므로 매우 타당합니다.
그러나 반대 경우로서, 삶 또는 행위를 강조하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지요. 일반적인 사람의 삶을 사회생활로서의 공적인 영역과 가정생활로서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여 살펴봅시다. 공적인 영역의 삶에서는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또는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등등의 대의명분으로 헌신하며 때로는 목숨까지 받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적인 영역에서도 인격수양을 통하여 신념과 삶을 일치시키므로 존경을 받고 인류의 삶에 공헌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분들이 기독교인이 되면 이제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는 한 차원 더 높은 훨씬 강력한 대의명분과 확신으로 매우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영향력이 막강하므로 주도권을 잡고 주류를 형성하면서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외양적인 삶과 업적이 자칫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의 동기에 기인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 결과로서 이러한 분들의 열성이 강화될수록 주변의 심성이 연약한 분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열을 초래하는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수가 있지요. 이때 우리는 죄 성을 가진 부족한 존재이다 보니 외적인 삶만 보고 내적 동기까지 분별할 능력이 없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럴 듯한 정당성과 자기 합리화로 자기 스스로조차도 속을 수 있지요. 하지만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지요.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자세란 삶 이전에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자기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서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으로서, 반드시 통상적인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이 아닐 수 있음) 그러노라면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며,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는 삶을 살 뿐이지요.
이 세상의 교회는 어차피 부족한 죄인인 크리스천들의 집합체이므로 결코 완전한 교회란 존재할 수 없기에 절망적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천들의 생생한 삶의 부딪힘과 그에 따른 <믿음>과 <행위>의 변증과정에서 생명의 말씀이 밝혀지는 생명이 있는 교회가 이어지도록 하셨지요.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기에, 크리스천은 절망가운데서도 생명이 있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지속된다는 역설적인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반대 경우로서, 삶 또는 행위를 강조하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지요. 일반적인 사람의 삶을 사회생활로서의 공적인 영역과 가정생활로서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여 살펴봅시다. 공적인 영역의 삶에서는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또는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등등의 대의명분으로 헌신하며 때로는 목숨까지 받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적인 영역에서도 인격수양을 통하여 신념과 삶을 일치시키므로 존경을 받고 인류의 삶에 공헌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분들이 기독교인이 되면 이제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는 한 차원 더 높은 훨씬 강력한 대의명분과 확신으로 매우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영향력이 막강하므로 주도권을 잡고 주류를 형성하면서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외양적인 삶과 업적이 자칫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의 동기에 기인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 결과로서 이러한 분들의 열성이 강화될수록 주변의 심성이 연약한 분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열을 초래하는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수가 있지요. 이때 우리는 죄 성을 가진 부족한 존재이다 보니 외적인 삶만 보고 내적 동기까지 분별할 능력이 없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럴 듯한 정당성과 자기 합리화로 자기 스스로조차도 속을 수 있지요. 하지만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지요.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자세란 삶 이전에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자기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서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으로서, 반드시 통상적인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이 아닐 수 있음) 그러노라면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며,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는 삶을 살 뿐이지요.
이 세상의 교회는 어차피 부족한 죄인인 크리스천들의 집합체이므로 결코 완전한 교회란 존재할 수 없기에 절망적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천들의 생생한 삶의 부딪힘과 그에 따른 <믿음>과 <행위>의 변증과정에서 생명의 말씀이 밝혀지는 생명이 있는 교회가 이어지도록 하셨지요.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기에, 크리스천은 절망가운데서도 생명이 있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지속된다는 역설적인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믿는다" 는 것은 "산다(삶) 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념적인 것을 그냥 수긍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는 말은 그에 대한 여러가지 진술들을 "수긍"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물론 "문자적인" 따름을 말 하는것은 아닙니다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삶"이 없는 관념적인 믿음은 "구라'(?)이다 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