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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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나라 님의 말씀에 댓글로 쓰려다가 그냥 글로 올립니다...
조엘 오스틴, 릭 워렌 같은 분들 때문에 "긍정" 이런 것이 너무도 안좋은 그 무언가처럼 낙인이 찍혀버렸는데요... 그 반면에 위에서 설교하신 목사님의 경우는 "부정" 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거든요... 어두컴컴한 느낌 있죠...
조엘과 릭의 문제는 "자기 부정과 신의 긍정" 을 혼동하고 있다는 거죠... 자기 긍정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위에 설교하신 분의 경우는 "신의 부정" 을 이야기 하는 느낌이란 거죠... 그렇게 되면 그 어둡고 캄캄한 죄의 아우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은혜의 빛을 덮어버리는 그런 느낌으로 가버려요...
실제로 개혁주의에서 그렇게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존 오웬을 약간 접해보면서도 느낀 것은 죄의 문제에 너무 집요하게 집착한다는 느낌이에요... 죄 죽임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죄를 죽이지 않으면 은혜가 소멸된다는 식의 표현까지 존재하더군요... (결국 존 오웬은 죄는 자신이 죽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만...)
로마서 5장 20절의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끼여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라는 구절과 완전히 배치되는 견해죠...
개혁주의는 펠라기우스를 아주 싫어할 것입니다... 어거스틴이나 터툴리안 계열이라고 자부하겠죠...
하지만 내용을 보면 경악스러운 면이 있어요...
펠라기우스는 로마의 타락을 아주 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탓을 어거스틴의 신학 탓으로 돌렸습니다... 전적 은혜의 신학 말이죠...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도덕주의와 금욕주의의 길로 갑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은근히 보조적인 부분으로 전락해버립니다...
개혁주의도 비슷한 패착을 보이는 듯 합니다... 죄죽임에 너무 집중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우선성을 놓쳐버린다는 거죠... 제가 설교에서 느낀 것도 바로 그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기 부정과 신의 절대적 긍정의 모순적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신의 부정을 이야기 하거나, 자기 긍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복음에 본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요?
조엘 오스틴, 릭 워렌 같은 분들 때문에 "긍정" 이런 것이 너무도 안좋은 그 무언가처럼 낙인이 찍혀버렸는데요... 그 반면에 위에서 설교하신 목사님의 경우는 "부정" 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거든요... 어두컴컴한 느낌 있죠...
조엘과 릭의 문제는 "자기 부정과 신의 긍정" 을 혼동하고 있다는 거죠... 자기 긍정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위에 설교하신 분의 경우는 "신의 부정" 을 이야기 하는 느낌이란 거죠... 그렇게 되면 그 어둡고 캄캄한 죄의 아우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은혜의 빛을 덮어버리는 그런 느낌으로 가버려요...
실제로 개혁주의에서 그렇게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존 오웬을 약간 접해보면서도 느낀 것은 죄의 문제에 너무 집요하게 집착한다는 느낌이에요... 죄 죽임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죄를 죽이지 않으면 은혜가 소멸된다는 식의 표현까지 존재하더군요... (결국 존 오웬은 죄는 자신이 죽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만...)
로마서 5장 20절의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끼여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라는 구절과 완전히 배치되는 견해죠...
개혁주의는 펠라기우스를 아주 싫어할 것입니다... 어거스틴이나 터툴리안 계열이라고 자부하겠죠...
하지만 내용을 보면 경악스러운 면이 있어요...
펠라기우스는 로마의 타락을 아주 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탓을 어거스틴의 신학 탓으로 돌렸습니다... 전적 은혜의 신학 말이죠...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도덕주의와 금욕주의의 길로 갑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은근히 보조적인 부분으로 전락해버립니다...
개혁주의도 비슷한 패착을 보이는 듯 합니다... 죄죽임에 너무 집중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우선성을 놓쳐버린다는 거죠... 제가 설교에서 느낀 것도 바로 그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기 부정과 신의 절대적 긍정의 모순적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신의 부정을 이야기 하거나, 자기 긍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복음에 본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일방적인 자기 긍정과 기복주의 신앙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렇기에 (이미 설교 내용은 지워지고 없지만) 설교 시간에 죄에 대해서 다루는 것에 대해서 무척 좋게 생각합니다.
당연히 죄만을 다루고 은혜를 다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지만 1:1의 비율로 다룬다면 그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설교에서 죄를 이야기 했지 신의 부정을 이야기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그 후 댓글에서 만인제사장주의 위배 요소나 등등 안타까운 점을 피력하긴 했습니다.
인용하신 로마서 5장 20절에서도 그 은혜는 죄를 통해 대비되어서 은혜로 인식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전능자이고 절대 선이신 하나님의 눈에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차이나겠습니까? 저는 죄를 죄로 인식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할 수 있기에 죄에 대해 선포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보며 그것이 신의 부정을 나타낸다는 의견은 찬성하지 못하겠습니다.
뭐... 설교가 지워져서 이미 무의미한 토론이 되어버려서 아쉽기만 합니다. 며칠동안 신의부정이란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렇기에 (이미 설교 내용은 지워지고 없지만) 설교 시간에 죄에 대해서 다루는 것에 대해서 무척 좋게 생각합니다.
당연히 죄만을 다루고 은혜를 다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지만 1:1의 비율로 다룬다면 그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설교에서 죄를 이야기 했지 신의 부정을 이야기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그 후 댓글에서 만인제사장주의 위배 요소나 등등 안타까운 점을 피력하긴 했습니다.
인용하신 로마서 5장 20절에서도 그 은혜는 죄를 통해 대비되어서 은혜로 인식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전능자이고 절대 선이신 하나님의 눈에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차이나겠습니까? 저는 죄를 죄로 인식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할 수 있기에 죄에 대해 선포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보며 그것이 신의 부정을 나타낸다는 의견은 찬성하지 못하겠습니다.
뭐... 설교가 지워져서 이미 무의미한 토론이 되어버려서 아쉽기만 합니다. 며칠동안 신의부정이란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죄와 은혜를 1:1의 비율로 다루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좀 기계적으로 느껴집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로마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우선성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인식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신의 부정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어둠이 하나도 없는 절대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빛이 우리 위에 비칠 때, 우리는 그 빛에 의해서 생기는 우리의 그림자를 통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빛은 결국 우리의 그림자까지도 덮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신의 부정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어둠이 하나도 없는 절대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빛이 우리 위에 비칠 때, 우리는 그 빛에 의해서 생기는 우리의 그림자를 통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빛은 결국 우리의 그림자까지도 덮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결국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따라 같은 텍스트를 대하더라도 대하는 것이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낍니다.
결코 틀린 것이 아니며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기복신앙과 은혜만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죄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반면에
첫날처럼님은 죄에 대한 강조에 대한 반감으로 은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표현이 어떻든지 간에 신의 부정을 인정합니다. 그분이 절대적인 빛이시고 선이시기에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혐오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덮을 수 있는 분이시지만 죄에 대해서 혐오감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선악과라든지, 방주라든지...
그것은 절대 선이신 하나님이시기에 나타나는 죄에 대한 신의 부정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평시에는 공기가 소중한 것을 모르지만 잠수를 하고 있거나 화생방 훈련시 공기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는데 이것처럼 항상 은혜 가운데 살지만 죄를 인지함을 통해서 은혜를 인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통해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하심을 인지하는 것도 맞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즉 정확하게 표현 하자면
1.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우리가
2. 그 은혜로 인해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데
3. 그 방법은 죄를 죄로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약간은 다루는 차원(뭐가 높다가 아니라)이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결코 틀린 것이 아니며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기복신앙과 은혜만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죄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반면에
첫날처럼님은 죄에 대한 강조에 대한 반감으로 은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표현이 어떻든지 간에 신의 부정을 인정합니다. 그분이 절대적인 빛이시고 선이시기에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혐오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덮을 수 있는 분이시지만 죄에 대해서 혐오감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선악과라든지, 방주라든지...
그것은 절대 선이신 하나님이시기에 나타나는 죄에 대한 신의 부정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평시에는 공기가 소중한 것을 모르지만 잠수를 하고 있거나 화생방 훈련시 공기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는데 이것처럼 항상 은혜 가운데 살지만 죄를 인지함을 통해서 은혜를 인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통해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하심을 인지하는 것도 맞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즉 정확하게 표현 하자면
1.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우리가
2. 그 은혜로 인해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데
3. 그 방법은 죄를 죄로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약간은 다루는 차원(뭐가 높다가 아니라)이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