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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s 517
||0||0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린다고 하셨고
쌍둥이가 태중에 있을때 이미 하나님은 택하시고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데
이러한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없고, 그릇은 토기장이에게 따지지 못한다고 비유를 했습니다.
물론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에게 어떻게 따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하겠지요.
그런데 전 이스마엘과 에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따지고 싶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에서는 태중에 이미 미움을 당하였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장자권을 판 것도 에서의 뜻이 아니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되는데
에서의 입장에서 보면 은혜가 아니라 저주로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말한 바울의 비유와 말이 이해가 안됩니다.
로마서 9장을 설교로 들을때
우리는 택함을 받았기에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아멘하고
선택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좋은 그릇으로 쓰임받기를 소망하는 식으로 말씀을 받게 됩니다.
또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러한 설교를 듣기 때문에 아무런 반항도 없습니다.
그런데 감히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제가
바울이 그토록 싸가지 없이 따지지 말라고 말씀을 해놓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점에 감히 따집니다.
왜 에서를 미워하셨는지..
정말 하나님께서 또는 바울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뭔가 로마서 9장 말씀이 제대로 설교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은 마음에 따지듯이 묻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가르침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린다고 하셨고
쌍둥이가 태중에 있을때 이미 하나님은 택하시고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데
이러한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없고, 그릇은 토기장이에게 따지지 못한다고 비유를 했습니다.
물론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에게 어떻게 따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하겠지요.
그런데 전 이스마엘과 에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따지고 싶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에서는 태중에 이미 미움을 당하였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장자권을 판 것도 에서의 뜻이 아니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되는데
에서의 입장에서 보면 은혜가 아니라 저주로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말한 바울의 비유와 말이 이해가 안됩니다.
로마서 9장을 설교로 들을때
우리는 택함을 받았기에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아멘하고
선택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좋은 그릇으로 쓰임받기를 소망하는 식으로 말씀을 받게 됩니다.
또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러한 설교를 듣기 때문에 아무런 반항도 없습니다.
그런데 감히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제가
바울이 그토록 싸가지 없이 따지지 말라고 말씀을 해놓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점에 감히 따집니다.
왜 에서를 미워하셨는지..
정말 하나님께서 또는 바울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뭔가 로마서 9장 말씀이 제대로 설교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은 마음에 따지듯이 묻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가르침 바랍니다.
2008.11.24 14:25:13
이삭의 씨, 야곱은 올바로 계승하는 남은 자이고
이스마엘과 에서는 그렇지 못한 자이군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태중에 이미 선택했다고 쓴 구약 성서는 이것을 좀 과장해서 자의적으로 표현한 것이구요. 바울은 이 전승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님의 글을 제가 맞게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풀려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스마엘과 에서는 그렇지 못한 자이군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태중에 이미 선택했다고 쓴 구약 성서는 이것을 좀 과장해서 자의적으로 표현한 것이구요. 바울은 이 전승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님의 글을 제가 맞게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풀려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11.24 17:18:00
원래의 신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집니다.
구약은 창세기 25장 23절의 신탁을 이스라엘이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선택과 배제로 해석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선민의식을 깨는 방식으로 또 다른 선택과 배제의 양식을 도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택과 배제가 아닌 뜻으로 신탁을 재해석하는 것은 어떨까요?
보편적 의미를 담아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너희 가운데서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어떨까요?
선택과 배제가 선택 받은 사람이 소수일 때는 그들에게 힘을 주지만 다수일 때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은 창세기 25장 23절의 신탁을 이스라엘이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선택과 배제로 해석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선민의식을 깨는 방식으로 또 다른 선택과 배제의 양식을 도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택과 배제가 아닌 뜻으로 신탁을 재해석하는 것은 어떨까요?
보편적 의미를 담아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너희 가운데서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어떨까요?
선택과 배제가 선택 받은 사람이 소수일 때는 그들에게 힘을 주지만 다수일 때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008.11.24 22:07:49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계시는
공중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그 분의 지필묵이어야한다고 생각해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calling으로부터 그분의 계시가 진행되고,
인간을 향한 그 분의 언어의 대상이 확보된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택하시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마엘과 에서가 선택되지않은 이유는 다른데요,
이스마엘은 어느 정도 그 원인을 납득할 수 있지만
에서의 경우는 미스테리합니다.
그러나 많은 자들 중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지목하신 원리와 다르지않다고 봅니다.
이런 일련의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점으로
확연히 달라보이는데요.
갑자기 수수빗자루가 생각이 나서
저는 '수수빗자루'를 가지고 예를 들겠습니다.
수수의 모든 줄기들이 꽁꽁 압축적으로 묶여서 '자루'가 됩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이루고
이를 통하여 세계를 부르시는 하나님 계시의 압축으로 보고,
'자루의 목'쯤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배치,
그리고 모든 줄기가 풍성하게 퍼지는 '비'가 되는데
만민구원의 형상입니다.
압축된 계시에서 선택되지않은 이스마엘과 에서는
선택받지않은 열방 중 하나로 존재하다가
종말에 그리스도 앞으로 오는 열방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눈사람님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은 아니지만
인류가운데 허다한 이스마엘과 에서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계시의 주류에서 벗어나지만 종국에는 주님의
완전한 부르심 가운데 있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공중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그 분의 지필묵이어야한다고 생각해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calling으로부터 그분의 계시가 진행되고,
인간을 향한 그 분의 언어의 대상이 확보된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택하시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마엘과 에서가 선택되지않은 이유는 다른데요,
이스마엘은 어느 정도 그 원인을 납득할 수 있지만
에서의 경우는 미스테리합니다.
그러나 많은 자들 중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지목하신 원리와 다르지않다고 봅니다.
이런 일련의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점으로
확연히 달라보이는데요.
갑자기 수수빗자루가 생각이 나서
저는 '수수빗자루'를 가지고 예를 들겠습니다.
수수의 모든 줄기들이 꽁꽁 압축적으로 묶여서 '자루'가 됩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이루고
이를 통하여 세계를 부르시는 하나님 계시의 압축으로 보고,
'자루의 목'쯤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배치,
그리고 모든 줄기가 풍성하게 퍼지는 '비'가 되는데
만민구원의 형상입니다.
압축된 계시에서 선택되지않은 이스마엘과 에서는
선택받지않은 열방 중 하나로 존재하다가
종말에 그리스도 앞으로 오는 열방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눈사람님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은 아니지만
인류가운데 허다한 이스마엘과 에서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계시의 주류에서 벗어나지만 종국에는 주님의
완전한 부르심 가운데 있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2008.11.24 22:41:08
정용섭을 꼭 짚어서 질문하셨는데요.
그런 본문을 분석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주석 책도 참고해야하구요.
제가 대답을 드릴 자신이 없군요.
그냥 자나가면서 한 마디만 한다면 이렇습니다.
성서텍스트는 당시의 문학적 방식으로
구원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학적 서술 방식이 아니라
구원의 현실성, 그 역사입니다.
예컨데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남녀노소를 집단살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집단살해에 초점을 맞추면 곤란하지요.
더구나 이방 민족에 대한 분노에 초점을 맞추면 곤란하지요.
하나님의 구원 현실이 핵심이랍니다.
바울은 롬 9장에서 하나님의 전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인 야곱과 에서 전승을 근거로 설명되고 있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신앙고백적인 진술이라는 겁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십시요.
좋은 밤.
그런 본문을 분석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주석 책도 참고해야하구요.
제가 대답을 드릴 자신이 없군요.
그냥 자나가면서 한 마디만 한다면 이렇습니다.
성서텍스트는 당시의 문학적 방식으로
구원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학적 서술 방식이 아니라
구원의 현실성, 그 역사입니다.
예컨데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남녀노소를 집단살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집단살해에 초점을 맞추면 곤란하지요.
더구나 이방 민족에 대한 분노에 초점을 맞추면 곤란하지요.
하나님의 구원 현실이 핵심이랍니다.
바울은 롬 9장에서 하나님의 전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인 야곱과 에서 전승을 근거로 설명되고 있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신앙고백적인 진술이라는 겁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십시요.
좋은 밤.
2008.11.25 21:55:11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토끼"들이 선생이라고 하는데...
(호랑이가 잠간 나타났었지만 (?)...)
또 하나의 토끼 끼어 들어 봅니다.
성서 해석은 하려면 할 수록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지요 ...어떤 참고 서적도 없이
자기 생각 또는 지식대로만 하려면 어려울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좀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면 상당히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주석" 이라는 작업이 필요 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주석이란것이 얼마나 많은지 어느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어려운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성서를 그래도 좀 더 진지하게 연구하려면 신학적인 배경도 공부해야 하고
주석도 최소한 3가지는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1. 보수적인 입장의 주석. 2 중간 입장의 주석. 3. 진보적 입장의 주석 등을 보고
본인의 이해와 믿음대로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좀 공정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것 하나만 고집한다면 잘못하면 편견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보통 이렇게 말 합니다
"내가 직업적(밥먹기 위해)으로 설교나 목회 하는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사실 직업적 설교자도 이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느님 말씀에
우리가 충실 하려면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은 성서의 위험한 해석은 소위 '영적해석" 이라는 의미로
마구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든다면 앞서 예로 든 성서구절에서 "에서"는 어느 부류를 의미하고, 이삭은 어느 부류이다"식이지요
역사적인 "삶의 상황"을 전연 무시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떠도는 부흥강사식 성서 해석에서
창세기의 인류가 퍼져나간 것을 일반 세계사로 의식해서
노아의 후손 중 누구는 축복을 받아 지금 백인종이 되어 잘 살고,
누구는 저주를 받아 흑인종이 되어 고통을 받고
누구는 황인종이 되었다는 식이며 한민족은 어디에 속한다는 식이지요
이런식의 해석이 아직도 한국 교회 현실에서는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집에는 최소한도
건전한 구약성서 개론 , 신약성서 개론 구약성서 신학, 신약성서 신학
그리고 66권을 다 주석해 놓은 주석 서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것은 피차 믿을만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것이 좋다고 합니다
한마리 토끼 끼어 들었습니다
(호랑이가 잠간 나타났었지만 (?)...)
또 하나의 토끼 끼어 들어 봅니다.
성서 해석은 하려면 할 수록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지요 ...어떤 참고 서적도 없이
자기 생각 또는 지식대로만 하려면 어려울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좀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면 상당히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주석" 이라는 작업이 필요 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주석이란것이 얼마나 많은지 어느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어려운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성서를 그래도 좀 더 진지하게 연구하려면 신학적인 배경도 공부해야 하고
주석도 최소한 3가지는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1. 보수적인 입장의 주석. 2 중간 입장의 주석. 3. 진보적 입장의 주석 등을 보고
본인의 이해와 믿음대로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좀 공정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것 하나만 고집한다면 잘못하면 편견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보통 이렇게 말 합니다
"내가 직업적(밥먹기 위해)으로 설교나 목회 하는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사실 직업적 설교자도 이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느님 말씀에
우리가 충실 하려면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은 성서의 위험한 해석은 소위 '영적해석" 이라는 의미로
마구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든다면 앞서 예로 든 성서구절에서 "에서"는 어느 부류를 의미하고, 이삭은 어느 부류이다"식이지요
역사적인 "삶의 상황"을 전연 무시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떠도는 부흥강사식 성서 해석에서
창세기의 인류가 퍼져나간 것을 일반 세계사로 의식해서
노아의 후손 중 누구는 축복을 받아 지금 백인종이 되어 잘 살고,
누구는 저주를 받아 흑인종이 되어 고통을 받고
누구는 황인종이 되었다는 식이며 한민족은 어디에 속한다는 식이지요
이런식의 해석이 아직도 한국 교회 현실에서는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집에는 최소한도
건전한 구약성서 개론 , 신약성서 개론 구약성서 신학, 신약성서 신학
그리고 66권을 다 주석해 놓은 주석 서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것은 피차 믿을만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것이 좋다고 합니다
한마리 토끼 끼어 들었습니다
2008.11.26 09:08:05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신다는 말씀이네요.
모두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누구하나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꾸 생각이 복잡해지네요.^^
좀 단순해져야 할텐데...
감사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누구하나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꾸 생각이 복잡해지네요.^^
좀 단순해져야 할텐데...
감사합니다.
2008.11.26 09:17:40
신학을 하지 않고 읽은 책마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무엇을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요?
그렇다고 그 많은 책들을 다 읽기도 힘들고 하여 목사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신앙고백적인 진술이라는 것에 기준을 두고 성경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엇을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요?
그렇다고 그 많은 책들을 다 읽기도 힘들고 하여 목사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신앙고백적인 진술이라는 것에 기준을 두고 성경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처한 구체적이고 특수한, 그것도 매우 긴박하고 역동적인 역사 현실속에서 쓰여진, 따라서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관용적 표현, 감정적 묘사, 과장, 주관적 해석...)도 적지 않게 담고 있을 개연성이 큰 서신들을
마치 문장, 단어, 토씨 하나까지도 모든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은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가이드북, 또는 논리적 오류나 빈틈이 없는 완벽한 신학 논문처럼 대하는 태도는 좀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이 쓴 편지가 상황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안에 분명한 보편 진리를 담고 있음을 믿지만,
우선적으로 바울이 그 글을 쓸 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큰 틀에서 바라보고, 바울이 처한 정황 등을 가능한 다양한 시각에서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선행적으로 시도된 후에야 비로소 올바른 보편 진리에의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 바울’을 먼저 보아야 그 뒤에 아련하게 겹쳐지는 ‘진리 전달자서의 바울’을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한국 교회의 현장에서 행해지는 설교들을 보면, 1차 작업은 생략하고 곧바로 부실한 2차 작업으로 돌입하시는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신 부분도 로마서 9장에서 문자적인 메시지만을 표면적으로 채취한 후 성도들의 신앙적 사고속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설교의 전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로마서 9장을 접하며 느껴지는 ‘인간 바울’의 모습을 생각이 가는대로 거칠게 묘사해보자면
“웬일이야?
바울 아저씨가 유대민족에 대한 자신의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네?
유대민족이야말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약속을 주신 민족임을 강조하며 말이야.
(그리스도가 유대의 혈통에서 났다는 걸 짚는 대목에서는 살짝 아부의 느낌까지도 나는군 ^^*)
흠, 유대 율법주의와 사생결단의 결기로 대립각을 세우던 평소의 모습과는 좀 다른걸?
그런데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유대민족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해석하려고 하시네?
아, 그렇구나. 성서(구약)을 통해 유대민족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같은 민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올바로 계승하는 남은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음을 말하려고 하는것 같군.
그리고 그걸 변증하기 위해서 구약의 여러 케이스들을 좀 과장된 논리로 끌어들이고 있는것도 같고....”
대충 이 정도까지만.... 어디까지나 제 느낌일뿐이고....
구체적으로 이 구절들이 어떤 특수성과 어떤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정목사님께서 명쾌하고도 친절하게 답변해 주시리라 믿으며 잠시 끼어든 깍두기는 물러가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