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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먼저 간략히 목사님의 설교를 발췌 요약하겠습니다.(로마서 9장 19-29)
" 1. 마치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듯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공평이나 공의가 아니고 은혜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선택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에 대해 피조물인 사람은 감히 항의 할 수 없다.
2.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선택된 그릇을 진노의 그릇(악의 도구)과 긍휼의 그릇을 만드셨다.
바로는 진노의 그릇, 즉 악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 선택된 자이다.
사울도 그렇다.
가룟 유다도 그렇다.
이에 반해 다윗, 바울은 긍휼의 그릇으로 쓰임을 받았다.
3. 멸하기로 준비한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오래 참으시고 용서를 할 수 있으면 해주시려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진노의 그릇도 이럴진대 긍휼의 그릇으로 선택된 우리가 설령 잘못을 할지라도 얼마나 기다려주시며 관용해주시겠는가.
하나님께서 바로왕에게 10번의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바로는 결국 모든 부하를 홍해바다에 몰살시키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가룟유다도 예수님께서 이미 어떻게 쓰임 받을 것임을 이미 알고 그러기때문에 불렀는지도 모른다. 이런 유다에게 재정을 맡기고 믿어주셨다. 이것은 선용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그 후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예수님의 말을 들었을때라도 회개 했어야하는데
그러지 않고 화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결국 예수님을 팔았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입맞춤으로 회개할 수 있는 또한번의 기회를 주셨으나
결국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나중에 목매달아 죽고 말았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실수를 한 베드로는 세번 부인한후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주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울었다.
선택 되고 선택되지 않았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 죽기 전까지 회개한 사람은 선택된 사람이다.
성경은 선택한 자를 위해 씌여졌다.
즉 가인, 이스마엘, 에서 때문에 씌여진 것이 아니라 아벨, 이삭, 야곱 때문에 씌여졌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보다 훨씬 더 못한 인간이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야곱을 기다려주고
그를 만들어가셨다.
에서는 끝까지 하나님께 반항하지만 야곱은 울며 회개하였다. "
이와 관련하여 다비아에 써있는 여러 글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제자보다 비범했던 가룟 유다는 유다는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실현되기를 갈망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모든 질서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질서로 변화되는 나라였다. 유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런 조짐을 보았을 것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내어쫓는 예수에게서 어떤 혁명의 불길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광야에서 수천 명이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는 광경을 보면서 이만한 세력과 이만한 카리스마라면 로마의 식민통치를 당장에 끝장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런데 유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는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혼자 있기를 잘하며, 낮은 자리와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셨다.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 결국 유다는 마지막 수단으로 예수가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국면으로 몰고 갔다. 예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것이다. 죽음 앞이라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혁명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유다는 분명히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실패는 어떤 인격적이거나 지성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예수에게서 전혀 다른 희망을 품었다는 데에 있다. " 라는 정목사님의 글도 보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은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위의 설교 내용에 전혀 반감을 갖지 않고
아멘하며 감사하며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선택받은 자라 믿고 은혜에 감사하기만 했었습니다.
저의 의문은 이미 많이 논의 되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의문은
1. 하나님은 이미 선택할 자를 예정해 놓으셨는가 라는 선택예정론에 대한 견해는 많이 들었습니다.
온간 믿음의 선지자들의 선택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았기 때문에 그냥 흘려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가룟 유다 더 나아가 현대에 있어 가룟 유다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까지
적용되어지는 가라는 것에 대해서 잘모르겠습니다.
진노의 그릇으로 선택 받은 자 입장에서 생각해보건데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역을 감당할 사람을 이미 선택해 놓으셨느냐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을 상당히 신뢰하다 보니 잘 정리 되었던 것이 의문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2.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고 하셨는데
만약 이미 그렇게 선택되어졌다면 회개할 근본적인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회개 한다고 하여 이미 맡겨진 역할을 거둘 수도 없었을 것이고
회개하더라도 이미 진노의 그릇으로 선택되어진 자가 긍휼의 그릇으로 바뀔 수도 없을 터인데
회개하지 않은 바로나 에서나 유다에 대해 질책을 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3. 정말로 성경이 선택된 자만을 위하여 씌여졌는가 라는 궁극적인 의문도 생겼습니다.
물론 이것도 선택예정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갖을 수 있는 의문이겠습니다만...
전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 멸망할 자를 미리 결정해 놓으셨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제 근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그 분들에게 설명하고 더 나아가
설득할 지식이 필요합니다. 좋은 책 소개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검색 창에 온갖 단어를 다 넣어서 찾아 보았으나 찾는데에 한계를 느끼고 정리가 제대로 안되어
이곳을 어지럽히며 질문을 드리오니 고견 부탁 드립니다.
(사실 너무 기초적인 의문 같아 쑥쓰럽사옵니다.^^)
" 1. 마치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듯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공평이나 공의가 아니고 은혜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선택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에 대해 피조물인 사람은 감히 항의 할 수 없다.
2.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선택된 그릇을 진노의 그릇(악의 도구)과 긍휼의 그릇을 만드셨다.
바로는 진노의 그릇, 즉 악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 선택된 자이다.
사울도 그렇다.
가룟 유다도 그렇다.
이에 반해 다윗, 바울은 긍휼의 그릇으로 쓰임을 받았다.
3. 멸하기로 준비한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오래 참으시고 용서를 할 수 있으면 해주시려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진노의 그릇도 이럴진대 긍휼의 그릇으로 선택된 우리가 설령 잘못을 할지라도 얼마나 기다려주시며 관용해주시겠는가.
하나님께서 바로왕에게 10번의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바로는 결국 모든 부하를 홍해바다에 몰살시키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가룟유다도 예수님께서 이미 어떻게 쓰임 받을 것임을 이미 알고 그러기때문에 불렀는지도 모른다. 이런 유다에게 재정을 맡기고 믿어주셨다. 이것은 선용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그 후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예수님의 말을 들었을때라도 회개 했어야하는데
그러지 않고 화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결국 예수님을 팔았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입맞춤으로 회개할 수 있는 또한번의 기회를 주셨으나
결국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나중에 목매달아 죽고 말았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실수를 한 베드로는 세번 부인한후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주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울었다.
선택 되고 선택되지 않았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 죽기 전까지 회개한 사람은 선택된 사람이다.
성경은 선택한 자를 위해 씌여졌다.
즉 가인, 이스마엘, 에서 때문에 씌여진 것이 아니라 아벨, 이삭, 야곱 때문에 씌여졌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보다 훨씬 더 못한 인간이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야곱을 기다려주고
그를 만들어가셨다.
에서는 끝까지 하나님께 반항하지만 야곱은 울며 회개하였다. "
이와 관련하여 다비아에 써있는 여러 글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제자보다 비범했던 가룟 유다는 유다는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실현되기를 갈망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모든 질서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질서로 변화되는 나라였다. 유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런 조짐을 보았을 것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내어쫓는 예수에게서 어떤 혁명의 불길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광야에서 수천 명이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는 광경을 보면서 이만한 세력과 이만한 카리스마라면 로마의 식민통치를 당장에 끝장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런데 유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는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혼자 있기를 잘하며, 낮은 자리와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셨다.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 결국 유다는 마지막 수단으로 예수가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국면으로 몰고 갔다. 예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것이다. 죽음 앞이라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혁명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유다는 분명히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실패는 어떤 인격적이거나 지성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예수에게서 전혀 다른 희망을 품었다는 데에 있다. " 라는 정목사님의 글도 보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은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위의 설교 내용에 전혀 반감을 갖지 않고
아멘하며 감사하며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선택받은 자라 믿고 은혜에 감사하기만 했었습니다.
저의 의문은 이미 많이 논의 되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의문은
1. 하나님은 이미 선택할 자를 예정해 놓으셨는가 라는 선택예정론에 대한 견해는 많이 들었습니다.
온간 믿음의 선지자들의 선택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았기 때문에 그냥 흘려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가룟 유다 더 나아가 현대에 있어 가룟 유다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까지
적용되어지는 가라는 것에 대해서 잘모르겠습니다.
진노의 그릇으로 선택 받은 자 입장에서 생각해보건데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역을 감당할 사람을 이미 선택해 놓으셨느냐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을 상당히 신뢰하다 보니 잘 정리 되었던 것이 의문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2.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고 하셨는데
만약 이미 그렇게 선택되어졌다면 회개할 근본적인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회개 한다고 하여 이미 맡겨진 역할을 거둘 수도 없었을 것이고
회개하더라도 이미 진노의 그릇으로 선택되어진 자가 긍휼의 그릇으로 바뀔 수도 없을 터인데
회개하지 않은 바로나 에서나 유다에 대해 질책을 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3. 정말로 성경이 선택된 자만을 위하여 씌여졌는가 라는 궁극적인 의문도 생겼습니다.
물론 이것도 선택예정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갖을 수 있는 의문이겠습니다만...
전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 멸망할 자를 미리 결정해 놓으셨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제 근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그 분들에게 설명하고 더 나아가
설득할 지식이 필요합니다. 좋은 책 소개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검색 창에 온갖 단어를 다 넣어서 찾아 보았으나 찾는데에 한계를 느끼고 정리가 제대로 안되어
이곳을 어지럽히며 질문을 드리오니 고견 부탁 드립니다.
(사실 너무 기초적인 의문 같아 쑥쓰럽사옵니다.^^)
2008.11.26 14:42:37
제 부족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임)
(1) 바울이 9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8장에서부터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8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이방인들의 구원문제가 유대율법주의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요. 선민인 이스라엘을 놔두고 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느냐는 항의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9장에서 "누구를 구원할지 말지는 하나님의 소관이지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말을 하면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든 것으로 사료됩니다.
(2) 9장에서 파라오나 이스마엘이 언급된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때는 왕인 파라오나 장남인 이스마엘이 큰 권리를 가진 것 같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비천한 유대인들과 어린 이삭을 선택하셨다. 그러니 너희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뻐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너희가 아닌 이방인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것에 대해 너희가 무슨 왈가왈부 하겠느냐. 이방인의 구원문제를 두고 자꾸 딴지를 걸면 너희들이 바로 옛날의 파라오같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존재로 입증될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여기서, "천히 쓸 그릇" 과 "귀하게 쓸 그릇" 을 만들 권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로 생각해야지, 어떤 교리적 근거로 삼아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할때 바울은 "너희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귀한 그릇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하나님앞에서 너희는 천한 그릇밖에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스스로를 돌아보고 조심하라" 이런 주장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고 오래참으셨다는 말을 한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9장의 핵심내용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설명 및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구원에 유대인들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것 이 두가지로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이야기)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4)그러므로, 로마서 9장의 두가지 그릇의 비유를 두고 선택예정론이니 하는 거창한 교리를 도출하는 것은 달을 안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1) 바울이 9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8장에서부터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8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이방인들의 구원문제가 유대율법주의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요. 선민인 이스라엘을 놔두고 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느냐는 항의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9장에서 "누구를 구원할지 말지는 하나님의 소관이지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말을 하면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든 것으로 사료됩니다.
(2) 9장에서 파라오나 이스마엘이 언급된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때는 왕인 파라오나 장남인 이스마엘이 큰 권리를 가진 것 같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비천한 유대인들과 어린 이삭을 선택하셨다. 그러니 너희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뻐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너희가 아닌 이방인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것에 대해 너희가 무슨 왈가왈부 하겠느냐. 이방인의 구원문제를 두고 자꾸 딴지를 걸면 너희들이 바로 옛날의 파라오같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존재로 입증될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여기서, "천히 쓸 그릇" 과 "귀하게 쓸 그릇" 을 만들 권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로 생각해야지, 어떤 교리적 근거로 삼아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할때 바울은 "너희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귀한 그릇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하나님앞에서 너희는 천한 그릇밖에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스스로를 돌아보고 조심하라" 이런 주장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고 오래참으셨다는 말을 한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9장의 핵심내용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설명 및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구원에 유대인들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것 이 두가지로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이야기)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4)그러므로, 로마서 9장의 두가지 그릇의 비유를 두고 선택예정론이니 하는 거창한 교리를 도출하는 것은 달을 안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2008.11.26 14:51:33
성경은 하나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믿으라’ 라고 시종일관 강조합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의 신앙없음을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요?
동시에 성경은 신앙인을 향해 ‘그 무엇도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지 못함’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 어떤 성경 기자들이 믿는 이들의 이러한 충만함과 안도감을 빼앗아 가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서는 안될 두 가지 질문에 대해 하나의 답변을 하려다보니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한 인간이 선택을 받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나요? 누가 어떤 권위로 그 사실을 알려주며 그 권위는 또 어떤 식으로 정당성을 인정 받을까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는걸까요? 목사가?
만일 인간은 그 여부를 알 수 없다면 ‘선택예정론’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라면 저는 굳이 고민하고 싶지 않군요.
이 상황에서 그들의 신앙없음을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요?
동시에 성경은 신앙인을 향해 ‘그 무엇도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지 못함’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 어떤 성경 기자들이 믿는 이들의 이러한 충만함과 안도감을 빼앗아 가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서는 안될 두 가지 질문에 대해 하나의 답변을 하려다보니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한 인간이 선택을 받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나요? 누가 어떤 권위로 그 사실을 알려주며 그 권위는 또 어떤 식으로 정당성을 인정 받을까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는걸까요? 목사가?
만일 인간은 그 여부를 알 수 없다면 ‘선택예정론’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라면 저는 굳이 고민하고 싶지 않군요.
2008.11.26 15:16:35
님의 말씀을 들으니 뭔가 막힌 것이 뚫리는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네요.
2008.11.26 15:21:49
선택의 문제는 하나님의 전권이고 선택의 여부를 판단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목사님이 이에 대한 말을 하면 혼란에 빠지곤 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브리즈님 말씀대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에 대해
제가 의문을 갖고 고민했었네요.
역시 다비아는 좋은 곳입니다.
날 넘은 짓 못하게 막아주고,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고, 마음을 뻥 뚫어주니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자꾸 목사님이 이에 대한 말을 하면 혼란에 빠지곤 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브리즈님 말씀대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에 대해
제가 의문을 갖고 고민했었네요.
역시 다비아는 좋은 곳입니다.
날 넘은 짓 못하게 막아주고,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고, 마음을 뻥 뚫어주니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08.11.26 15:46:54
눈사람님의 좋은 질문으로 지나가다 읽게된 제게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다비아를 만난 것이 올해 가장 큰 수확인듯 합니다.
질문 해주신 눈사람님께 감사하고
닥터케이님 외 댓글 달아주신 모든 다비안들께 감사합니다.
다비아를 만난 것이 올해 가장 큰 수확인듯 합니다.
질문 해주신 눈사람님께 감사하고
닥터케이님 외 댓글 달아주신 모든 다비안들께 감사합니다.
2008.11.26 15:48:23
눈사람님의 글을 보니 저도 비슷한 질문을 속으로만 품고 있던 일이 생각납니다.(막상 이런 난처한(?) 질문들은 교회생활 하면서 누구에게도 꺼내놓기 참 힘들었습니다. 도움 받기도 어렵구요.^^;)
제가 도움 받은 곳은 C S 루이스의 '기적'<홍성사>중 성육신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는 '14장 장엄한 기적' 일부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어제부터 그 내용을 제가 요약 하려고 아무리 해봐도 마땅치 않아 몇 페이지인가를 그대로 옮겨봤습니다. 혹시 저작권 등에 문제가 있다면 관리자께서 속히 경고하시고 삭제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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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민족에 대한 언급은 현대인들이 기독교 이야기에서 반감을 느끼는 특징 중 하나에 주목하게 합니다. 솔직히 말하지면, 우리 현대인들은 '택함 받은 민족' 이라는 사상 자체를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태생적으로, 또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자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일에 대해서도 모든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수준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모든 종교는 모두 동등하게 옳다고도 생각합니다.
먼저, 기독교는 이런 관점을 전혀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간다는 말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 인간에 대해 어떤 일을 하셨다고 말할 뿐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 방식은 더할 나위 없이 선택적이고 비민주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 인류 가운데 상실되고 희미해지자, 한 사람이 뽑힙니다. 그는 자신의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이는 분명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낯선 나라로 보내지며, 온 세상에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해야 할 운명을 가진 한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 이 민족 내에서도 선택은 계속 일어납니다. 어떤 이들은 사막에서 죽는가 하면 , 어떤 이들은 바벨론에 남겨집니다. 선택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이 과정은 점점 좁혀 들다가, 마침내 창끝 같은 한 예리한 정점으로까지 좁아집니다. 바로, 무릅 꿓고 기도하고 있는 한 유대소녀가 그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인류 전체가 바로 이 정점으로 좁혀진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과정은 현대인들이 호감을 느낄만 한 것이 전혀 못 됩니다. 하지만 이는 자연이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는 일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보입니다. 선택을 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라 엄청난 낭비를 일으키는 것, 이는 자연이 일하는 방식입니다.
어마어마한 우주 공간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이 물질로 채워져 있습니다. 모든 별 중에서도, 아마 대단히 적은 수의 별만이, 어쩌면 오직 하나의 별만이 행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태양계의 행성 중에서도 아마 하나의 행성만이 유기체적 생명을 유지해 줍니다. 유기체적 생명이 전달되는 일에 있어서도, 수 없이 많은 씨와 정자가 방출되고 그 중 소수만이 선택되어 번식에 쓰임 받습니다. 그 종들 중에서도 오직 하나의 종만이 이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 종내에서도 오직 소수만이 아름다움이나 힘이나 지성에 있어서 탁월성에 도달합니다.
...
자연이 보여주는 이러한 선택적이고 비민주적인 특질은 적어도 그것이 인간 삶에 영향을 주는 정도에 있어서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자연적 상황을 영이 잘 활용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 선을 낳기도 하고 악을 낳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과 오만과 시기 등을 가능케 만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겸양(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인) 감탄을 가능케 해 줍니다.
...
기독교 이야기가 하는 일은 자연수준에서 이미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는 어떤 잔인성과 낭비성을 신적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이야기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행위 안에도 자연 안에서 작동하는 어떤 동일한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비록 자연 안에서는 때에 따라 좋거나 나쁘게 작동하지만,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는 언제나 전혀 잔인하거나 낭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처음으로 무의미 하게만 보였던 어떤 원리가 실은 어쩌면 좋고 공정한 어떤 원리에서 유래될 수도 있다는, 그 원리의 부패한 복제품, 그 원리가 이 망쳐진 자연 속에서 취하는 병적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자연세계를 조명해 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가만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우리가 염려하는 그런 '편애'가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 '선택받은' 민족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그들 자신의 영예나 쾌락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바로 선택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선택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말씀은 '그의 씨(즉 선택받은 민족)'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택받은 민족은 다름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그들은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깨달았듯이, 그들의고난은 다른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주는 고난입니다. 최종적 선택을 받은 여자, 마리아에게는 어머니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 임합니다. 그녀의 아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은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이사야53:3)' 입니다. 하나님이 아래로 임하여 오신 사람, 그래서 찬미의 대상이 되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그분은 누구보다도 고통을 많이 겪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아마 당신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어지는가? 비록 상황은 역적되었지만, 어쨌거나 이는 여전히 부정의한 일이 아닌가?" 처음엔 자신의 '선택받은' 백성을 부당하게 편애했다고 하나님을 비난했다가, 이제 그들을 부당하게 박대했다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싶어 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에 아주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한 원리를 만납니다. 바로 '대리'라고 이름붙일 만한 원리입니다. 죄 없으신 한 분이 죄 없으신 한 분이 죄지은 다른 이들을 위해 고난을 받습니다. 또 모든 선한 사람도 나름대로 다른 모든 악한 사람들을 위해 고난 받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리'는('죽음과 재생' 이나 '선택'이 그렇듯) 또한 자연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자족충성, 즉 자신의 힘으로만 산다는 것은 자연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이 원리는 사랑과 미움, 불행과 행복이 다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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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웨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ivp> '7장 선택의 논리' 에서도 이런 류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 앞서 질문의 배후에는 어떠한 전제를 깔고 있는가 하는 점부터 시작 하더군요...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제가 도움 받은 곳은 C S 루이스의 '기적'<홍성사>중 성육신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는 '14장 장엄한 기적' 일부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어제부터 그 내용을 제가 요약 하려고 아무리 해봐도 마땅치 않아 몇 페이지인가를 그대로 옮겨봤습니다. 혹시 저작권 등에 문제가 있다면 관리자께서 속히 경고하시고 삭제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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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민족에 대한 언급은 현대인들이 기독교 이야기에서 반감을 느끼는 특징 중 하나에 주목하게 합니다. 솔직히 말하지면, 우리 현대인들은 '택함 받은 민족' 이라는 사상 자체를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태생적으로, 또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자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일에 대해서도 모든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수준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모든 종교는 모두 동등하게 옳다고도 생각합니다.
먼저, 기독교는 이런 관점을 전혀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간다는 말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 인간에 대해 어떤 일을 하셨다고 말할 뿐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 방식은 더할 나위 없이 선택적이고 비민주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 인류 가운데 상실되고 희미해지자, 한 사람이 뽑힙니다. 그는 자신의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이는 분명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낯선 나라로 보내지며, 온 세상에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해야 할 운명을 가진 한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 이 민족 내에서도 선택은 계속 일어납니다. 어떤 이들은 사막에서 죽는가 하면 , 어떤 이들은 바벨론에 남겨집니다. 선택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이 과정은 점점 좁혀 들다가, 마침내 창끝 같은 한 예리한 정점으로까지 좁아집니다. 바로, 무릅 꿓고 기도하고 있는 한 유대소녀가 그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인류 전체가 바로 이 정점으로 좁혀진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과정은 현대인들이 호감을 느낄만 한 것이 전혀 못 됩니다. 하지만 이는 자연이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는 일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보입니다. 선택을 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라 엄청난 낭비를 일으키는 것, 이는 자연이 일하는 방식입니다.
어마어마한 우주 공간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이 물질로 채워져 있습니다. 모든 별 중에서도, 아마 대단히 적은 수의 별만이, 어쩌면 오직 하나의 별만이 행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태양계의 행성 중에서도 아마 하나의 행성만이 유기체적 생명을 유지해 줍니다. 유기체적 생명이 전달되는 일에 있어서도, 수 없이 많은 씨와 정자가 방출되고 그 중 소수만이 선택되어 번식에 쓰임 받습니다. 그 종들 중에서도 오직 하나의 종만이 이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 종내에서도 오직 소수만이 아름다움이나 힘이나 지성에 있어서 탁월성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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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보여주는 이러한 선택적이고 비민주적인 특질은 적어도 그것이 인간 삶에 영향을 주는 정도에 있어서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자연적 상황을 영이 잘 활용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 선을 낳기도 하고 악을 낳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과 오만과 시기 등을 가능케 만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겸양(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인) 감탄을 가능케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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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야기가 하는 일은 자연수준에서 이미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는 어떤 잔인성과 낭비성을 신적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이야기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행위 안에도 자연 안에서 작동하는 어떤 동일한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비록 자연 안에서는 때에 따라 좋거나 나쁘게 작동하지만,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는 언제나 전혀 잔인하거나 낭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처음으로 무의미 하게만 보였던 어떤 원리가 실은 어쩌면 좋고 공정한 어떤 원리에서 유래될 수도 있다는, 그 원리의 부패한 복제품, 그 원리가 이 망쳐진 자연 속에서 취하는 병적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자연세계를 조명해 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가만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우리가 염려하는 그런 '편애'가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 '선택받은' 민족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그들 자신의 영예나 쾌락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바로 선택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선택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말씀은 '그의 씨(즉 선택받은 민족)'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택받은 민족은 다름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그들은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깨달았듯이, 그들의고난은 다른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주는 고난입니다. 최종적 선택을 받은 여자, 마리아에게는 어머니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 임합니다. 그녀의 아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은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이사야53:3)' 입니다. 하나님이 아래로 임하여 오신 사람, 그래서 찬미의 대상이 되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그분은 누구보다도 고통을 많이 겪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아마 당신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어지는가? 비록 상황은 역적되었지만, 어쨌거나 이는 여전히 부정의한 일이 아닌가?" 처음엔 자신의 '선택받은' 백성을 부당하게 편애했다고 하나님을 비난했다가, 이제 그들을 부당하게 박대했다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싶어 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에 아주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한 원리를 만납니다. 바로 '대리'라고 이름붙일 만한 원리입니다. 죄 없으신 한 분이 죄 없으신 한 분이 죄지은 다른 이들을 위해 고난을 받습니다. 또 모든 선한 사람도 나름대로 다른 모든 악한 사람들을 위해 고난 받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리'는('죽음과 재생' 이나 '선택'이 그렇듯) 또한 자연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자족충성, 즉 자신의 힘으로만 산다는 것은 자연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이 원리는 사랑과 미움, 불행과 행복이 다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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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웨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ivp> '7장 선택의 논리' 에서도 이런 류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 앞서 질문의 배후에는 어떠한 전제를 깔고 있는가 하는 점부터 시작 하더군요...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2008.11.26 17:40:38
루이스의 글 말미의 '대리의 원리',
산수유님의 답글 중 '선택과 배제'..
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최성웅님, 좋은 글 알게 해주셔서 감사..^^
산수유님의 답글 중 '선택과 배제'..
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최성웅님, 좋은 글 알게 해주셔서 감사..^^
2008.11.26 20:35:17
끼어들기 해서 죄송 합니다
눈사람님이 다시는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계신지 모르는데요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하나 하나 비판 하기 시작하면 교회 생활 하시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곳은 공공 장소인데 정보도 공개된 마당에
다니는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라고 말 하는 것은 잘 못하면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겟지만 이곳은 누가 드나드는지도 모르 곳입니다.
만약 담임목사의 설교가 도저히 마음에 안든다면 한번 독대해서 물어 보는것도 좋겠습니다
통상 설교는 평신도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뢔냐하면 설교가 형식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 으로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잘 들리면 믿는것(아멘?)이고, 납득이 안되면 믿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개개인이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무어라고 하기 시작하면 "쪼가 거시기" 해 지는 상황이 되는것이지요
그러므로 만약 혹시 이런 곳에서 토론하고 싶다시면 지명을 하지말고(이름이나 지위를) 그냥 일반화 시켜서 토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 됩니다
위에 예를 드신것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은 보는 입장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알고 보면 내가 아는 만큼의 "합리화"겟지요
그러나 성서는 합리화로 왼벽한 만고불변의 진리를 설명 할 수는 없겟지요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로 여겨서 믿는것이
더 좋은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 루이스가 해석한것이 만인에게 진리가 되는것은 아니지요
다만 읽을 수 있고 이성적으로 수긍하고 해서 느끼는 지적 감수성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반대 되는 견해도 얼마던지 있을 수 있고 그런것을 주장 하는 분들도 많지요
그러므로 기회가 되신다면 "담임목사의 설교 " 라는 제목과 글은 일반적인 것으로 수정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거부감이 드시면 말씀해 주십시요 제글을 지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눈사람님이 다시는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계신지 모르는데요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하나 하나 비판 하기 시작하면 교회 생활 하시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곳은 공공 장소인데 정보도 공개된 마당에
다니는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라고 말 하는 것은 잘 못하면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겟지만 이곳은 누가 드나드는지도 모르 곳입니다.
만약 담임목사의 설교가 도저히 마음에 안든다면 한번 독대해서 물어 보는것도 좋겠습니다
통상 설교는 평신도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뢔냐하면 설교가 형식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 으로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잘 들리면 믿는것(아멘?)이고, 납득이 안되면 믿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개개인이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무어라고 하기 시작하면 "쪼가 거시기" 해 지는 상황이 되는것이지요
그러므로 만약 혹시 이런 곳에서 토론하고 싶다시면 지명을 하지말고(이름이나 지위를) 그냥 일반화 시켜서 토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 됩니다
위에 예를 드신것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은 보는 입장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알고 보면 내가 아는 만큼의 "합리화"겟지요
그러나 성서는 합리화로 왼벽한 만고불변의 진리를 설명 할 수는 없겟지요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로 여겨서 믿는것이
더 좋은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 루이스가 해석한것이 만인에게 진리가 되는것은 아니지요
다만 읽을 수 있고 이성적으로 수긍하고 해서 느끼는 지적 감수성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반대 되는 견해도 얼마던지 있을 수 있고 그런것을 주장 하는 분들도 많지요
그러므로 기회가 되신다면 "담임목사의 설교 " 라는 제목과 글은 일반적인 것으로 수정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거부감이 드시면 말씀해 주십시요 제글을 지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11.26 21:40:57
통상 설교는 평신도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그러면 평신도에게 설교를 하지 말아야하는 것 아닌가요?
어떻게 건강하게 들리지 않는 설교를 건강하게 들으면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요.
상대가 어찌하더라도 동요되지 않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배움의 노력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이런 갈등을 잘 조정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이런 비평의식의 없이 불가능하겠지요.
비평과 비판이 건강하게 적용될때까지 상당한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하니...
참으로 어려운 길을 가게 됩니다. 평신도들은 길을 잃어버리게되는 현실...
귀막고,눈감고,생각(판단)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가기?...
어렵네요.
그러면 평신도에게 설교를 하지 말아야하는 것 아닌가요?
어떻게 건강하게 들리지 않는 설교를 건강하게 들으면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요.
상대가 어찌하더라도 동요되지 않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배움의 노력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이런 갈등을 잘 조정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이런 비평의식의 없이 불가능하겠지요.
비평과 비판이 건강하게 적용될때까지 상당한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하니...
참으로 어려운 길을 가게 됩니다. 평신도들은 길을 잃어버리게되는 현실...
귀막고,눈감고,생각(판단)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가기?...
어렵네요.
2008.11.27 13:27:31
간단한 생각을 밝혀보면, 저는 하나님의 선택이란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누구는 선택했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았다는 관점으로 보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계적 관점이 지금의 한국 교회를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것 같구요...
위에서 닥터 케이 님께서 상세히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이란 점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한나님의 선택은 인간들의 선택과는 질 적으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천하고 귀하다는 가치 자체도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전복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고린도 전서 1장입니까... 거기 보면 어리석음과 지혜, 강함과 약함... 그런 것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기존 관념들이 뒤집어져 버리니까요...
그런 기계적 관점이 지금의 한국 교회를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것 같구요...
위에서 닥터 케이 님께서 상세히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이란 점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한나님의 선택은 인간들의 선택과는 질 적으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천하고 귀하다는 가치 자체도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전복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고린도 전서 1장입니까... 거기 보면 어리석음과 지혜, 강함과 약함... 그런 것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기존 관념들이 뒤집어져 버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