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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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했다 실망하고 떠났다가 대안을 못찾고 돌아오긴 했는데 예전 처럼 열렬히 사랑할수도 그렇다고 다시 떠날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게 신선한 충격을 준 '시드니의 택시기사'님께서 쓰신 글인데 혹시 죽은 신을 위하여 란 책 읽어보신 분 계신가요.  다른 각도의 해석도 듣고 싶네요.

비정규기독교란?
생각하는 길 2008/10/25 12:53   http://blog.hani.co.kr/sydneytaxi/15050

**감히(?) 이 글을 읽으려는 분들께**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풀어 쓰려고 노력 했지만 재주가 부족해서 무지 어려운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짜증이 나시더라도 아무쪼록 인내심을 가지고 읽으시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한 번은 어떤 이가 자기는 어렸을 적에 전기, 수도, 전화는 본 적이 없고 자동차 또한 건드려 본 일도 없었던 가난했던 시절 이야기를 부끄러운듯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험은 현대인으로서는 아무나 해볼 수 없는 문명사적 경험이라고 해석을 했다. 돈 주고도 다시는 해볼 수가 없는 인류의 소중한 경험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해석을 해주었더니 그 사람도 비로소 자기의 경험을 자랑스럽지 못한 것이 아닌 귀중한 경험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는 비정규 기독교이다.

즉 시중에서 유통되는 기독교와의 전혀 다른 기독교이다.

이런 기독교를 비교적 가깝게 설명해준 책으로 주류 세계인 서구 유럽 배경이 아닌 주변부인 유고슬라비아 출신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맹렬한 학자가 쓴 <죽은 신을 위하여>라는 책이 있다.

그는 부제를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라고 붙였다.

 

지젝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기독교를 유물론적으로, 다시 말해서 신이 없는 종교, 신이 죽어버린 종교로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20세기 혁명가 레닌과 연결 지어 예수를 종교상의 레닌으로, 유물론적 혁명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내가 유물론자라거나,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방법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장은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제젝의 주장은 정통 기독교의 원리를 뿌리부터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신의 죽음 위에 성립된 종교다.

그는 그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하여 욥을 들고 나온다.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은 욥이라는 인물이다.

사람들은 흔히 욥을 가리켜 고통을 참아내는 인물, 신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시련을 견디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구라다.

나는 평생 욥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수많은 욥에 대한 설명을 보아왔지만 대부분이 쌩구라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왜냐하면 욥기는 기독교의 교리 안에서는 해석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통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욥기를 가지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말짱 헛소리일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욥은 국세청, 안기부, 검찰청이 모두 덤벼들어도 털어서 먼지 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시대의 의인에게 갑자기 까닭을 알 수 없는 온갖 불행이 숨 돌릴 틈도 융단 폭격을 가한다.

욥은 차례차례 닥쳐오는 온갖 재앙을 뒤집어쓴 채 저주스런 자기의 삶에 대해서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는가?’하는 처절한 질문을 하게 된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3 친구들이 찾아왔다가 처음에는 위로를 하다가 점점 왜 욥이 고통을 당해야 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게 된다.

“신은 정의롭다. 따라서 네가 고통 받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너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다.”

세 친구는 욥에게 죄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국한하지 않고 욥의 고통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쓴다.

반면에 욥은 자신의 고통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벌도 아니고 믿음에 대한 시험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고통에 이런저런 의미를 찍어다 붙이는 것에 완강하게 부정한다.

이렇듯 「욥기」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역사상 최초의 작품이다.

놀랍게도 신은 결말에서 욥의 손을 들어주며, 욥의 말이 전부 사실이고 세 신학자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이 직접 나선다. 그런데 신이 직접 나서는 방법이 황당하다.

욥기 38장 2~5절에 보면 신이 엄청난 파상공격을 해 오는데 욥은 침묵으로 대답한다.

 

그러면 친구들의 공격에 대하여 맹렬하게 반박하던 욥은 신의 공격에 왜 침묵을 택했을까?

욥의 침묵은 신의 압도적 현존 앞에서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가진 질문에 대하여 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마스크에 X 자 써놓고 데모를 하듯 침묵으로 저항하고 싶었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강하다고 믿었는데 그 아버지가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경악하고 있는 아이의 처지와도 비슷하다.

 

신은 정의롭지도 불의하지도 않다. 다만 무능할 뿐이다. 욥이 불현듯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신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뭔가 조종을 행사하거나 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의 언어나 관념과 의식으로 고정될 수도 없다. 마치 거대한 허공과 같은 존재이다.

신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악한 자를 벌하지도 않고 약자를 돌보지도 않고 아픔과 신음에 침묵하고 악인의 기쁨과 위선에도 침묵한다.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고 응답도 없는 신, 없음으로 존재하는 신이다.

그러나 그런 신이라도 없으면 미칠 것 같고 혼란스러운 사람에게,  만나주지 않아도, 존재하는 신이다.

그 분은 나를 알고 있고 나를 그가 부정하지 않은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이런 신의 개념을 칼 바르트는 ‘전적인 타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신과 모순되는 인간들의 영역에서 자신을 계신하신다고 한다.

변증법적 입장에서 ‘전적인 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몰트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하나님 의식은 고통을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인간들의 진정한 비극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만나는 장소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신을 도대체 어느 곳에다 써 먹을 것인가?

내 삶을 행복하게 하지도 현실을 바꿔주지도 못하는 신을?

그러나 일단 신이 무능하단 전제를 받아들일 경우 ‘왜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이렇게 수 많은 고통을 주는가?’ 하는 의문이 의외로 쉽게 풀린다.

신이 고통을 준 것이 아닌 것이다.

신은 다만 고통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무능한 신이 필요할까?

어쨌든 신의 무능함이라는 지젝의 폭로가 드러내는 것은 종교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이다.

현재의 고통에 신의 뜻이 있다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고통 받는 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고통 속에서 행복을 찾고 내일의 천국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인내하도록 만드는 종교의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에 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되면 세상 모든 교회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 교회에서 신앙이라고 믿는 것은 그 정도까지는 나가지 않고 그저 재미있게 종교놀음을 하는 것이다.

 

지젝의 요점은 기독교의 참된 핵심에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와 함께 죽은 것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은밀한 소망이다. 즉 나를 버린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이다.

왜 신이, 아니 기독교가 필요할까?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나를 구원해 줄 아버지가 없다는 충격적인 깨달음만이

신은 텅 비어 있을 뿐 아무런 권능도 없다.

현재의 고통은 미래에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구원은 없는 것일까?

무능한 신에게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바보스러울 뿐인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인간은 신의 도움에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조차 유린당하는 상황에서 "하느님, 지금 어디 계세요? 왜 제 편을 들어주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까? “하고 부르짖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럴 경우 도와 줄 수 있으면서도 안 도와주는 얄미운(?) 하느님보다는 오히려 도와 줄 수 없어서 가슴만 태우는 하느님을 이해해야만 한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했던 상황을 돌이켜 생각해보자.

히틀러에게는 비록 정당하지 못한 이유였지만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히틀러가 악한 길을 택할 때 유대인들도 각기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정체를 보다 더 일찍 파악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악한 세력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부족했고 투쟁하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도 안일하게 생각하고 결단력 있는 행동을 하지 못했다.

막판에 가서 대항을 했지만 너무 늦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이 택한 것이다.

 

그러나 에티 힐섬이라는 유대인 여성은 민족과 운명을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 집단 수용소에 들어갔는데 이런 일기를 남겼다고 한다.

"나에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 우리는 당신을 도우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돕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중에 우리를 불러 해명하라 하겠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본회퍼 같은 예언자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알려 주는 예언자이지 제사장인 아니다. 물론 언제나 절대 다수의 대중들, 즉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제사장적인 역할을 항상 필요하다. 이것이 시중에서 유통되는 종교의 역할이기도 하다.

지젝은 유대교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반해 기독교의 자세는 기다리던 메시아가 이미 강림했다는 자세, 즉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는 자세라고 한다.

메시아는 '사건'을 일으키고 물러나 무력한 관찰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 사건이 열어 놓은 공간에서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신의 몫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다.

지젝에 의하면 이것이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지젝은 마르틴 루터 킹의 연설문을 주석으로 실어놓고 있다.

“우리는 괴로운 경험을 겪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억압하는 자들이 자유를 순순히 내줄 리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억압당하는 이들이 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 번도 '시의적절한' 직접 행동에 참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인종차별의 병폐로 인한 부당한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의 일정표 상으로 '시의적절한' 직접 행동 말입니다.

몇 년 동안 나는 '기다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모든 흑인의 귓가에 사무칠 정도로 익숙하게 울립니다.

'기다려'라는 말은 거의 항상 '안 돼'를 의미했습니다. “

여기서 루터 킹의 연설은 차별 받는 흑인들에게 메시야적 결단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역사 속에서 메시야적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던 본회퍼가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는 결코 그런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고, 모순으로 가득 찬 삶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찾는 길을 선택 했다.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결과는 그의 죽음일 수밖에 없었지만 본회퍼는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서 피안적인 하나님을, 죽음에서 다시 시작되는 다른 삶을 증언 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너무도 유명한 인류를 깨운 한 마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였다.

그렇다면 본회퍼가 말한 삶은 한 주일 벌어서 한 주일 먹고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주변의 인간관계에서 성실과 애정으로 관계를 맺고

주변의 사물과 사건에 대하여 올바른 관찰과 판단으로 시작된다고 믿는다.

나는 이것이 메시야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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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처럼

2009.09.23 12:06:10
*.54.79.126

상당히 의미심장한 글이네요... 욥기에 대한 해석도 파격적이구요...

그런데 욥기의 42장의 "욥의 회개" 의 부분은 위에 글 쓰신 분이 말한 것처럼 욥이 신의 무능에 대해서 깨달아 알게 되다는 것과는 맥락이 좀 다르게 펼쳐지는 거 같거든요...

위의 관점을 "神無能의 신학" 이라고 이름 붙여본다면... 이게 무신론과 다른 점은 무엇일지 너무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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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별과 달

2009.09.23 21:36:02
*.121.11.80

만약에 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되면 세상 모든 교회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 교회에서 신앙이라고 믿는 것은 그 정도까지는 나가지 않고 그저 재미있게 종교놀음을 하는 것이다.

신이 무능한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분은 아직 신을 잘 모르는것 같고  
또한 신을 해명하는 촛점을 잘못된 엉뚱한 과녁에 맞춘게 아닌가 하는 생각 입니다.

Transzendental

2009.09.24 10:12:39
*.67.83.52

읽으신 분이라고 물으셔서, '저요~'하고 손을 들지만 이 책이 위와 같은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저는 지젝 책은 말그대로 그의 '지젝거림'을 즐기면서 재밌게 읽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의 말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해요. 위의 글쓰신 분과는 달리 저는 다른 맥락에서 '재밌게 '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위의 내용과는 별도로 저는 현대 철학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흥미롭습니다.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 아감벤의 로마서 강해라 할 수 있는 '남겨진 시간', 지젝의 이 책을 비롯해 마리옹과 같은 <프랑스 현상학의 신학적인 전회>라는 책의 제목과 어울리는 이 상황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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